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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40. [역경의 열매] 김해영 (1-20) '쓸데없이 태어난 가시나' 134㎝ 작은거인이 되다
작은 거인. 134㎝인 내 키를 두고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 이 별칭이 마음에 든다. 이 키로도 훨씬 키 큰 사람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고 강점으로 만들어 살기 때문이다. 초졸 장애인에 월급 3만원 식모였던 내가 국제장애인기능대회 금메달, 보츠와나 봉사 14년, 컬럼비아대학원 석사를 거쳐 현재 국제사회복지사로 아프리카를 주 활동무대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의 기쁨과 감동은 항상 고통과 고독이라는 역경을 견디고 난 후에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찾아왔다.
"이 놈의 가시나, 쓸데없이 태어나서 내가 이 고생이야."
"누가 낳아달라고 했어. 내가 태어난 게 아니라 엄마가 낳았잖아."
"이 가시나가 어데 말대꾸고. 저리 안 나가나. 저 빙신 같은 것이…."
엄마는 빗자루를 들고 달려든다. 나는 약이 올랐다. 안 맞으려고 집을 뛰쳐나와 문밖에서 엄마에게 또 대들었다.
"병신된 게 내 잘못이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 말은 엄마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았다.
"이 가시나가…."
이 때쯤이면 엄마는 앞뒤가 안 보인다. 멀리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다. 나는 집을 나와 동네를 빙빙 돈다. 밤이 깊었지만 돌아갈 수 없다. 아버지라도 들어와야 식구들이 잠든 틈에 몰래 들어가 잠을 잘 수 있다.
경북 상주 산골에서 살다 1970년 초 서울로 온 우리 가족은 지독한 가난해 시달렸다. 생계가 곤란할 정도였다. 고된 시집살이로 우울증을 앓던 엄마는 매일 지겹도록 아버지와 싸웠다. 한바탕 싸움이 끝나고 아버지가 외출하면 2남3녀의 맏이인 내게 엄마의 화살이 집중됐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조절 못한 탓에 이유 없이 날 때렸고 온 몸은 멍투성이가 됐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나는 동생 네 명의 치다꺼리나 아버지의 술심부름 등을 하면서 집안일을 시작했다. 형편이 이렇다보니 학교도 겨우 다녔다. 결석도 잦았다. 준비물을 마련하지 못하거나 육성회비를 내는 날은 아예 학교에 갈 수 없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매질은 계속됐다. 키가 작고 등이 좀 굽은 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어린 내 마음에는 억울한 질문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었다. 내가 장애를 가진 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인가.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단 말이야!"
스스로에게 아무리 말해도 가족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해 오는 듯했다.
"얘, 키가 작고 몸이 불편한 것은 네 잘못이야, 더 생각할 것도 없어!"
그러던 어느 날, 키가 작게 된 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희 아버지 미워하지 마라. 네가 태어나고 며칠 후에 친척들이 미역을 사갔는데, 엄마를 미워하던 너희 할아버지가 '딸인데 쓸데없이 돈을 쓴다'고 해서 모두 혼났다. 그때 네 아버지가 술을 먹고 왔는데, 홧김에 밀쳐낸다고 한 것이 너를 던진 꼴이 됐다. 이 때문에 네가 몸이 그리 되었지만, 그래도 네 아버지다."
초등학교 5학년 때서야 고모로부터 장애의 원인을 알게 됐다. 고모의 걱정과는 달리 난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이 세상에 여자로 태어난 것과 장애인이 된 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는 데 안심했다. 그리고 엄마가 무수히 던진 그 저주의 말들이 오히려 잘못된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됐다.
* [역경의 열매] 김해영 (1) '쓸데없이 태어난 가시나' 134㎝ 작은거인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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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65년 경북 상주 출생 △79년 입주 식모 시작 △80년 서울 한남직업전문학교 졸업 △83∼84년 전국장애인기능대회 기계편물 금메달 △85년 세계장애인기능대회 기계편물 금메달·철탑산업훈장 수상 △90년 보츠와나 선교사로 파송 △2008년 미국 나약대학교 졸업 △2010년 미국 컬럼비아대 사회복지대학원 석사 △현 밀알복지재단 희망사업본부장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역경의 열매] 김해영 (2) "해영,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 삼지 않을래요?"
영결식이 끝났다. 아직 쌀쌀한 3월 중순, 빗줄기 너머로 큰아버지가 제사상의 음식을 건넸다.
"해영아, 이리 와서 너거 아부지가 마지막으로 주는 거 같이 묵자."
빗물이 내 얼굴을 때렸다. 아무도 몰랐지만 난 울고 있었다. 울음을 삼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절대 안 울 거야. 내가 왜 울어. 이것은 슬픈 일이 아니야. 이것은 잘못된 거야.'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한 달 만에 아버지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엄마와 5남매를 서울에 덩그러니 남겨둔 채 스스로 생을 마쳤다. 유서 한 장 없는 아버지의 삶은 유산 7만2000원이 전부였다. 그간 엄마는 우울증이 도질 때마다 아버지와 싸웠고 집안은 엉망이 됐다. 하루가 멀다 하고 5년 이상 반복된 우리 집의 일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부모님은 영원히 다시 싸우지 않아도 되는 길을 선택했다.
"이 눔의 가시나, 아주 나가 죽어라. 니가 너거 아부지 잡아묵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내 잘못이 하나 더 추가됐다. 여자로 태어나 장애인이 돼 엄마의 정신병을 악화시켰다는 죄(?) 외에 아버지를 죽게 한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매질과 학대를 당하면서도 삭혔던 내 불만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출로 이어졌다. 장례식이 끝나고 6개월여가 지난 어느 날, 칼을 들고 죽이겠다고 달려오는 엄마를 피해 집을 나왔다. 엄마 얼굴을 보지 않아야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만 14세. 초졸, 장애인 여자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힘들게 찾은 것이 월급 3만원 식모, 내 첫 직업이었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조건으로 시작했다. 40대 이하는 잘 모르겠지만 1960∼70년대만 해도 10대 소녀들이 집 여주인의 육아와 가사를 돕는 식모살이를 많이 했다. 요즘의 '입주 가사도우미'인 셈이다. 그렇지만 그 일은 내게 너무 힘들었다. 무엇보다 희망이 없다는 데 좌절했다. 특히 중학교에 가지 못하는 처지가 너무 아팠다.
'무료 직업훈련생 모집, 양재, 편물, 자수, 미용. 6개월 과정….' 식모를 하면서 우연히 본 반상회보에 눈이 번쩍 뜨였다. 당시 한남동 서울중부기술교육원은 영세한 서울시민들에게 무료 기술교육을 실시했다. 조심스럽게 내 처지를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교육원에 보냈다. 나는 처음으로 스스로를 도왔다.
6개월의 짧은 과정이었지만 그곳에서 나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먼저 기계편물 3급 자격증을 땄다. 이는 편물기계와 털실로 스웨터 한 벌을 만들 수 있는 기초기술을 갖췄다는 뜻이다. 또 편물기술을 가르쳐주며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스승으로서 힘이 돼주시는 멘토를 이곳에서 만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나를 있게 한 운명적인 말을 최영숙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다. 이 말은 그 이전까지의 나와 그때 이후의 나를 갈라놓았다.
"해영이가 이 세상을 살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로 삼아야 할 텐데. 교회를 안 간다고 하니 내 마음이 아프다."
기숙사 사감이던 최 선생님은 일요일마다 원생들과 함께 교회에 갔다. 하지만 몸도 아프고, 무엇보다 강요하는 듯한 태도가 싫었던 나는 오히려 번번이 따져 물었다. 이 같은 내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나를 염려해 주는 말, 그것도 살아갈 날을 걱정해 주는 말을 나는 이때 처음 들었다. 볼품없고 초라한 내게 최 선생님은 예수를 알게 한 것이다. 입학 당시 종교란에 '자신교'라고 적었을 만큼 나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완악한 내 마음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최 선생님의 예수 친구가 필요하다는 말에 녹아버렸다.
'아, 저분의 마음은 진실하다. 나를 장애인으로 대하지 않고 친구가 필요한 사람으로 생각해 주는구나.' 감동이 밀려왔다. 그분이 믿어보라고 하는 예수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믿어볼 만하단 생각이 들었다. '내 친구가 되어 준다는 예수가 나를 무시하는 세상 사람들보다는 믿을 만하지 않겠는가.' 어느새 나는 기독교인이 되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해영 (3) 주님께 온 마음 드리니 가슴속 원망·증오가 싹
기술교육원에서 알선한 직장에 취직이 됐다. 식모에서 여공이 된 것이다.
경기도 용인시의 편물 하도급공장 일은 도급제로 자기가 일한 만큼 돈을 받았다. 종일 하는 강도 높은 노동은 척추장애인인 내게 죽을 맛이었다. 단순편물사여서 같은 모양의 옷을 계속 만드는데, 숙달될수록 속도가 나 편물기계로 짜는 옷의 매수가 늘어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허리가 안 좋은 나는 노동을 아무리 해도 남들처럼 매수가 늘어나지 않았다.
일을 할수록 늘어나는 것은 허리통증의 무게였고 내 눈물의 양이었다. 하루 노동이 끝나면 늘 '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 정말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네'라며 절망하고 아파했다. 왜 이 세상은 이렇게 힘들고 아픈 것인가. 몸과 마음이 아팠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그 무렵 나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친구가 돼 준다는 예수님을 만나려면 교회에 가야 한다고 했다. 힘들 때마다 아무도 없는 예배당의 십자가 앞에서 혼자 앉아서 울며 날을 세곤 했다. 허리통증이 계속됐지만 새벽기도, 금요철야에 빠지지 않았다.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떠보면 주위에는 집사님이나 권사님들이 앉아 있곤 했다.
그들은 "아이고, 조그만 애가 기도도 잘하네"라며 기특해했다. 기도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저 울고 있을 뿐이었다. 몇 개월이 지나 손에 일이 익으면서 눈물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로 바뀌었다.
'하나님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시는구나. 내가 아픈 것을 알아주시는구나.' 기도를 하면 적어도 내 마음을 쏟아놓을 수 있어 혼자 괴로워하던 심적 고통이 줄어들었다. 만약 눈물이 인간을 치료한다는 말이 있다면 이 말은 맞는 말이다. 나는 많이 울었다. 그리고 눈물 끝에서 내 자신을 보았다. 거기 아주 불쌍하고 몸이 아픈 한 인간이 있었다. 해영이란 아이는 내가 봐도 가여웠다. 이 아이를 친구 삼아주신 예수님이 고마웠다.
예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나도 뭔가 드릴 게 있는지 돌아봤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가진 돈이나 힘이 없었고 배운 것도 전무했다. 예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래도 가진 것이 하나 있었다.
"예수님, 제가 드릴 것이라고는 마음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마음을 드리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스스로 두 가지 약속을 했다. '마음 아픈 일 안 하기'와 '죽을 만큼 열심히 사는 일'이다. 몸 아픈 사람이 마음까지 원망, 증오, 절망과 슬픔으로 가득 차 산다면 이것은 내게 매우 부당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죽고 싶은 마음도 뒤집었다.
어차피 하루를 살아야 한다면 죽을 만큼 살자. 그렇게 살다 죽으면 최소한 열심히 살았다는 말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몸이 아프다고 변명하지 말자. 나 혼자 살아야 한다고 불평하지 말자. 내가 여자로 태어나고 장애인이 된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후의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은 내게 있다.
이러한 생각은 주어진 하루에 최선을 다하고 매사 불평하는 태도나 부정적인 생각을 고쳐 나가게 했다. 그리고 항상 '참 고맙다' '이만하길 정말 다행이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도를 하며 마음가짐을 새롭게 했다. 그렇다고 갑자기 살아가는 환경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공장의 또래 친구들은 대부분 돈을 함부로 썼다. 또 출근도 잘 하지 않고 꾀를 부리며 불성실한 경우가 많았다. 나는 몸이 아픈 데다 잘 어울리지 않다 보니 여공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됐다. 그러나 왕따가 됐다고 마음 아파하는 대신 책읽기와 공부에 집중했다. 공장의 편물기계에 영어단어를 붙여놓았고 월급을 받으면 서점으로 달려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책을 읽고 있는 조그만 애를 주위 사람들은 특별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김해영 (4) 세계 최고 옷을 만드는 하나님 일꾼이 되라고?
"오늘이 해영씨 생일이라 미역국을 끓였어요. 맛있게 먹고 일하러 가요."
어느 날 아침, 출석하던 한국기독교장로회 용인교회 인미자 사모님께서 나를 교회 사택으로 초대했다. 사택에 가보니 아주 푸짐한 밥상이 놓여 있었다. 내게도 생일을 챙겨줄 사람이 있다니! 생전 처음 생일이라고 미역국을 먹었다. 이 교회 목사님과 사모님은 당시 중고등부, 청년부나 어른들 모임에 끼지 못하고 겉도는 나를 직접 맡아 주셨다. 특히 사모님은 지난 몇 개월간 연고도 없고 어린 나를 진실하게 보살펴 주었다. 교회 사택에서 실비로 살도록 주선해 줬고, 방에 쌀과 반찬을 갖다 놔 주셨다. 그러나 이 두 분의 사랑과 관심은 내게 의문을 갖게 했다.
'아니, 이 두 사람은 내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단 말인가. 왜 내게 잘해 주는 거지. 나를 걱정하고 신경 쓸 정도로 시간이 많은가.' 이런 의문은 두 분의 각별한 사랑을 받을 때마다 이어졌다.
어느 날 사모님은 월부로 책을 판매하는 여동생을 소개해 줬다. 카탈로그를 보고 동료들은 서양요리전집을 골랐지만 나는 사서오경전집을 골랐다. 같은 날 교회 목사님도 나와 동일한 책을 주문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주문한 책이 배달됐다. 사서오경전집은 논어, 맹자, 효경, 중용, 대학, 춘추좌전, 주역, 시경 등 12권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 책들은 단숨에 내 마음을 끌었다. 예전에 식모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천자문을 거의 다 떼었기 때문에 책을 읽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어린시절 불합리한 많은 일을 겪으며 가졌던 의문에 대한 답이 거기에 적혀 있었다. '인의예지신'을 근간으로 하는 가르침은 기독교인으로서 초기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내게 중요한 삶의 바탕이 됐다. 비록 초졸 여공이었지만 틈날 때마다 읽은 그 책들은 인간생활과 환경을 이해하는 힘을 갖게 해줬다.
"해영씨, 이곳을 떠나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거예요. 이별 선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물할 테니 이것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도록 해요."
일년이 좀 안 돼 용인에서의 생활을 접어야 했다. 공장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다른 곳으로 취직이 돼 송별인사를 하러 갔더니 사모님이 나를 예배당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사모님은 내게 여호수아 1장 5∼9절을 송별 선물로 주셨다. 그리고 내 손을 맞잡고 기도를 해 주셨다.
"주님, 이 딸이 이제 이곳을 떠납니다. 어디를 가든지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두 손으로 만든 옷이 세계 최고의 옷이 되게 해 주시고, 이 기술로 다른 사람들을 돕게 해주옵소서. 또한 해영이가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시길 기도합니다."
사모님의 기도를 들으며 나는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딴 생각을 했다.
'내가 만든 옷이 세계 최고의 옷이 된다고. 웃기는 말이군. 겨우 반제품을 만드는데 말이야. 또 이 편물기술로 다른 사람들을 도우라고. 사모님, 제 한 몸도 힘들단 말입니다. 이런 제가 누구를 도울 수 있다고!'
마지막 기도는 더 기가 막히고 우스웠다.
'아니, 내가 무슨 하나님의 일꾼이 된다고. 교회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저러시는 걸까.'
당시 생각하기에는 매우 우스운 기도였지만 그동안 지극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 사모님의 기도이니 나는 그 기도 끝에 '아멘'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에 올린 기도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진리다. 내가 피식 웃으며 '아멘'했던 그 기도를 하늘 아버지는 '이런 발칙한 것' 하며 소득 없이 이 땅에 돌려보내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나를 탓하는 대신 믿음으로 드리는 사모님의 기도를 받아주셨다. 사모님이 기도한 지 9년 만에 나는 보츠와나 선교사가 되면서 결국 사모님의 기도가 모두 이루어진 셈이 됐다. 그날 사모님의 기도는 이제 내 삶이자 기도가 됐다.
***[역경의 열매] 김해영 (5) 기도대로 4년간 국내외 기능대회 금메달 싹쓸이
'마음을 담대하게 가져라' '어디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의 여호수아 말씀은 내게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래도 사랑해 주시던 분이 주신 선물이니 어디를 가든 성경책을 펴서 읽고 외웠다. 내가 초등학교 졸업 후 유일하게 받은 교육은 6개월간의 직업교육뿐이었다. 그 후로는 한국에서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다. 어려운 가정형편과 장애로 학교를 다니기 힘들었기에 나는 공장에서 노동을 하는 편물기능사로 10대를 보냈다.
사람마다 인생의 기회가 온다더니 내 불우한 인생에 첫 기회가 찾아왔다. 내가 17살 때 당시 기술교육원의 편물과 윤은숙 선생님께서 교육원의 대표로 전국장애인기능대회에 나가보라는 제안을 하셨다.
"네가 훈련생이었을 때 너를 눈여겨보았는데 기능대회에 출전한다면 잘할 수 있을 것 같더구나. 아직 어린 나이니 몇 년 동안 착실하게 준비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게야."
나는 기능대회에 입상하거나 금메달을 따면 어떤 일들이 생길지 계산한 뒤 노력할 만큼 영리하지 못했다. 다만 매번 무엇을 하든지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다는 마음가짐은 갖추고 있었다. 때문에 난 무슨 기회이든지 열과 성을 다해 기술을 배웠다.
1982년 처음으로 전국장애인기능대회에 출전해 장려상을 받았고, 이듬해 같은 대회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자신감을 얻은 나는 일반 청소년들이 출전해 실력을 겨루는 대회에 나갈 목표를 세웠다. 각고의 노력 끝에 지방대회 선발전을 거쳐 84년 인천에서 열린 19회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기계편물 부문 금메달을 차지했다. 대회가 끝난 뒤 입상 선수단은 청와대를 방문했다.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영빈관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얼떨떨하게 서 있는 내게 노신사 한 분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하며 악수를 청해왔다.
"얘, 너도 왔구나. 나는 정한주 노동부 장관이란다. 지난번 시상식에서 내가 너에게 금메달을 걸어줬지. 그때 일등 단상에 서기 위해 네 작은 키로 얼마나 노력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많이 감동했단다. 더욱 열심히 노력하거라."
장관님의 격려는 그날 대통령을 만나고 맛있는 음식을 먹던 그 어떤 일보다 더 내 마음에 남았다. '아, 사람들은 내가 노력하는 것을 알아주는구나. 그렇게 애쓰고 눈물 흘리고 고통을 참으며 사는 것을 알아주는구나.' 생각할수록 정말 고마운 말이었다.
85년 9월엔 콜롬비아에서 열린 2회 세계장애인기능대회에 한국 대표로 출전해 남미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27명의 선수단이 일본, 미국, 멕시코, 파나마를 거쳐 콜롬비아에 도착했을 때는 추석이었다. 한국에서 단편기로 연습했던 것과 달리 대회에서 처음 사용하는 양편기로 경기를 치렀지만 결과는 매우 좋았다. 대회에서 한국은 종합 1위를 했고, 나는 금메달을 땄다. 이 일로 나는 그해 12월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한국에 돌아오니 내가 한 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줬다. 4년간 기능대회를 치르며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힘을 주고 격려해 주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내가 최선의 노력을 다해 됐구나. 역시 노력하면 뭐든 된다'는 인간적인 믿음도 생겼다. 하지만 나는 어린시절부터 인생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으며 세상살이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 성공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지?' 20대 초반에 윤 선생님의 추천으로 산업연수생이 되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연구소에서 있으면서 갑자기 용인의 교회 사모님이 내 작은 주먹손을 쥐고 간절하게 드린 기도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 손으로 만든 옷이 세계 최고의 것이 되게 해 주시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이루어지게 하신 하나님의 존재가 감사를 넘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갸우뚱거리던 의문에 답이 보였다. "아, 그랬구나, 그런데, 그 다음 기도가 뭐였지."
***[역경의 열매] 김해영 (6) 끝없는 소녀가장 생활 "하나님 이건 너무해요"
"하나님, 이건 너무 해요. 정말 억울하단 말입니다. 왜 내가 이 일을 해야 하지요?"
며칠 전 받은 월급도 가족 부양하는 데 쓰고 나니 내 수중엔 회사를 다닐 차비조차 부족했다. 나는 교회로 달려가 억울한 마음에 펑펑 울었다. 왜 내가 번 돈을 다 털어 동생들을 가르치고 정작 난 한 푼도 없는 신세가 돼야 하는지 설움이 북받쳐왔다.
나는 어느새 몸이 불편하다고 타박을 일삼는 엄마와 어린 네 명의 동생을 부양하는 소녀가장이 돼 있었다. 기능대회에서 받은 상금으로 전세금을 충당하고, 회사 월급은 가족들 생활비와 동생들 학비로 지출됐다. 사람들은 엄마와 동생들이 원망스럽지 않느냐고 물었다. 어떤 사람들은 "얘, 네 인생만 잘살아도 돼"라며 충고하기도 했다. 이 말 속에는 '장애인인 네가 무슨 가족을 돕겠느냐'는 비아냥거림도 섞여 있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우연히 배운 기술로 인생의 기반을 마련했다, 내 한 몸도 힘들다고 울며 보낸 십대 시절, 나는 죽을 만큼 노력하고 공부하면서 도움을 받는 위치에서 주는 위치로 운명을 바꿨다.
이제 내 인생을 살면 된다. 하지만 혼자 살아가는 인생이 진정 행복한 것인가. 고생은 자처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나는 스무 살 이후 '돈 주고도 못할 고생'을 스스로 감내했다. 그중 하나가 가장으로서 집안일을 책임진 것이다. 하지만 가족을 위한 희생이나 헌신을 할 수 있는 마음은 있었지만 스스로를 다독일 명분을 찾아야 했다.
첫째는 사서오경에서 가르쳐 주는 '충·효·예'의 덕목을 실행하기 위함이었다. 둘째는 나를 위해서였다. 예수님을 믿고 사회적 성공을 이뤄나가면서 깨달은 사실은 한 사람의 인생 기반은 역시 가족이라는 것이었다. 가족의 평화도 못 이루는데 어떻게 내 성공이 이뤄지겠는가. 설혹 성공해도 가족들이 무너지면 그 성공은 온전치 못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즉 자신의 성공을 위해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지극한 이기심이 내겐 명분이 되었다.
내 가족은 잘못된 곳이 너무 많았다. 누군가 힘을 보태지 않으면 어린 동생들과 어머니의 삶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해 악다구니를 치며 살아야 할 판이었다. 가난은 비참함을 짝으로 한다. 가난에서 탈출하려면 잘못된 것을 통해 배움으로써 열심히 노력하는 방법밖에 없다.
사모님께서 드린 두 번째 기도는 내 뜻과 상관없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 기술로 다른 사람을 돕고…' 그 말이 살아 내 앞에 있었다. 다른 사람을 돕기 전에 내 가족부터 돕는 것이 순서였다. 내가 만 3년의 가출을 끝내고 집에 돌아갔을 때, 엄마와 동생들은 모두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집 앞 맞은편 교회 청년들의 전도로 가족 모두를 교회로 인도하셨다. 집에 가니 날 창피하다고 피해 다니던 남동생이 성경책을 손에 들고 반갑게 맞아줬다. 변한 동생들의 모습은 가족을 도우려는 내게 또 하나의 분명한 동기가 됐다. 이 무렵부터 가족들도 예전처럼 그렇게 나를 학대하지 않고 가족의 구성원으로 받아주기 시작했다.
그래도 가끔 억울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 한참을 울고 나서는 '주님, 감사합니다. 가족은 저를 돌보아 주지 않았지만, 제게 가족을 책임질 수 있는 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고 서운한 마음을 떨쳐버렸다.
이는 순전히 사모님의 기도에 덕분이라고 믿는다. 가족을 부양하는 일은 사람인 내 힘과 의지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동생을 돌보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그다지 내 인생에 소득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을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까지 6년간 했다.
인생에 공짜는 없다고 했던가. 이후 동생들은 모두 건강하게 잘 성장했다. 이들 중 두 명의 남동생은 '누나를 돕기 위해' 보츠와나에서 10년 이상 선교 사역을 함께했다. 동생들은 모두 결혼을 했고 조카들만 6명이다. 이들은 아직 미혼인 내게 든든한 울타리가 돼 주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해영 (7) 좁고 높은 大入문턱… 두번째 도전도 실패
'이렇게 아파서 누워 있으려고 그동안 죽을 만큼 노력했는가.'
'이렇게 살다가 죽을 거라면 왜 아파하고 슬퍼하며 살아야 하나.'
1989년 12월, 나는 지원한 대학의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는 것을 보고 쓰러졌다. 2번째 대입 실패였다. 성탄이 지나고 새해가 왔지만 몸을 전혀 쓰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검사도 해 보았으나 원인을 알 수가 없단다. 한의원에서 침도 맞았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원인을 모른 채 누워 있으면서 인생에 대해 생각했다. 성공을 향해 달려가던 인생이 하루아침에 쓰러져 방바닥에 누워 있다. 생각해보니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열심히 산 죄밖에 없는데 왜 쓰러져서 벌을 받고 있단 말인가. 이십대 중반으로 접어들었다. 기능대회를 준비하던 십대 후반에 야간학원에 다니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의 검정고시를 모두 합격했다. 이십대 초반엔 대학에 가기 위해 회사 다니는 틈틈이 공부했다. 니트 디자이너의 꿈을 꾸며 섬유학과와 의상학과를 준비했다.
하지만 대학 문턱은 높았다. 1년간 밤에 학원을 다니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쳤기 때문에 기초실력이 많이 부족했다. 6년 동안 꼬박 공부한 학생들과 경쟁하다니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면 된다", "노력하면 할 수 있다"고 외치는 것도 지나치면 만용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입시공부를 하며 2년간 노력했지만 내 능력의 한계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나의 믿음이란 보통의 기독교인의 수준에 불과했다. 그래도 10여년 가까이 예배당을 들락거린 것은 무서운 일이다. 누워 있으면서 곰곰이 생각하니 인생의 답은 성경에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인간적인 노력들을 그만두고 시편 1편부터 읽어나갔다. 하나님께 답을 구했다. 움직이면 통증이 심하니까 가만히 누워 있는 상태에서 밤낮으로 성경을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성경책 옆에 있던 '빛과 소금'이라는 잡지를 읽게 됐다.
무심하게 기사를 읽어가던 중 거창고등학교의 모든 학생들이 배운다는 '직업선택의 10계명'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내 마음에 들어왔다.
고민 중에 보게 된 이 기사는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열 가지의 주옥같은 교훈은 내 영안을 뜨게 했다. 알고 보니 이는 설교시간에 내내 들었던 말씀이 아니던가! 때마침 그날 새벽 읽은 성경말씀은 시편 119편 9절 말씀이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시편 말씀은 내게 한줄기의 빛처럼 다가왔다. 하나님은 그날 기도 가운데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얘, 너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면 어떻겠니. 네가 필요로 하는 일은 남들도 다 하는 일이란다. 내가 시키는 것을 하면 어떠니.'
아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나는 공연히 억울한 마음이 솟아올랐다.
'아이고, 주님, 무슨 말씀이세요. 저 이제 좀 살만해요. 그냥 제 인생 살게 좀 도와주세요. 대학도 가고, 돈도 벌고… 성공이 바로 눈앞에까지 왔다고요.'
'얘, 성공! 성공! 이 세상 사람들이 가는 그 길을 너까지 갈 것 없다. 너는 마음을 지킬 일이다.'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것이 많았다. '하나님, 그러지 마세요. 건강하고 대학도 졸업하고…, 멀쩡한 사람 많잖아요. 그 사람들 데려다 쓰세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래요. 제가 어떻게 이룬 성공인데 그러세요.'
***[역경의 열매] 김해영 (8) "일본 간다" 어머니 안심시키고 아프리카로…
'얘, 너는 내게 마음을 바치겠다고 하지 않았니. 네 마음을 내가 가져가겠다는데 무슨 말이냐.'
하나님은 내가 드린 기도를 기억하고 계셨다. 십대 중반에 바친 마음, 가진 게 없어 마음을 드리겠다던 그 기도 내용대로 내 마음을 가져가겠다고 하신다. 이는 세상의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내 마음을 돌이키라는 의미였다. 그러던 중 기억 저편에서 아주 짧은 광고가 뚜렷하게 다가왔다.
'아프리카 보츠와나에서 일할 양재, 편물 자원봉사자 모집. 1월 10일까지 연락 바람.'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과로로 쓰러진 뒤 생각해 보니 과연 대학 진학만이 내가 가야 할 길인지 의문이었다. 세상살이는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며 경쟁해야만 한다는 것을 나는 기능대회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경쟁을 계속하며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피곤했다. 결국 경쟁사회에서 나는 '원 오브 뎀(one of them)'일 뿐이다. 수많은 인생 중 하나인 셈이다.
'그래, 이 문이 안 열리면 저쪽 문을 열면 되겠지. 아프리카 보츠와나, 거기가 어딘데요?'
일종의 서원기도까지 한 나는 더 이상 발뺌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성공을 좇다 허망하게 죽을 인생이라면 차라리 하나님께서 시키는 일을 하다가 죽는 게 기독인으로서 명분 서는 일이다.
하지만 그 일은 월급이 없다. 황무지이며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곳이다. 가장자리이며 단두대가 될 수도 있다. 장래가 전혀 보장이 안 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곳이다. 그런 자리이기에 무엇보다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나는 즉시 움직였다. 그 기사를 본 날이 1월 15일인데 그 다음날 광고를 낸 선교부에 찾아갔다. 그곳의 이름은 그루터기선교부로 평신도를 훈련시켜 해외로 파송하는 곳이었다. 마감은 10일이었지만 때마침 편물교사로 지원하는 사람이 없어 자리가 비어 있는 상태였다. 내 이력과 경력을 듣고 난 선교부 담당자는 한마디로 인터뷰를 끝냈다.
"당신은 이 일을 위해 준비된 사람 같군요. 따로 훈련 받을 필요도 없네요. 학교가 2월 20일 개학하니 지금 준비해서 가십시오. 문제 있습니까?"
1990년 2월 17일. 동생들에게는 "여기까지만 돕겠다. 나머지는 알아서 해라"라고 말하고 사정을 이해하지 못할 엄마께는 "일본에 다녀온다"고 설명한 뒤 아프리카행 비행기에 올랐다. 무보수 자원봉사자가 돼 생전 처음 들어본 나라인 보츠와나에서 편물기술교사가 되기 위해 떠난 것이다. 김포를 출발해서 홍콩-태국-모리셔스-요하네스버그-가보로니까지 다섯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긴 여정이었다.
위기의 다른 말은 기회다. 성공을 향해 달려가다 쓰러져서 인생의 위기를 맞았을 때, 나는 인생의 방향을 180도 틀어 기회로 만들었다.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고 오직 내 의지와 신념, 믿음에 근거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주님을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마 16장 25절)는 성경말씀은 살아있다. 나는 살기 위해 아프리카에 가지 않았다. 해충과 독사에 물려 죽거나 아사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떠난 길이다. 경쟁사회에서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는 대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살면 인생에 보람은 있을 것이란 생각에 떠났다.
서울에서 잘 나가는 기술자 생활을 접고 보츠와나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원 오브 뎀'에서 '온리 원(Only One)', 수많은 인생 중 한 명에서 '유일한 인생'이 되었다. 적어도 그 무렵 나는 보츠와나에서 최고의 기술자였다. 내 손을 잡고 기도한 인미자 사모님의 세 번째 기도가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기능인 선교사로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이다. 내 일터는 생면부지의 드넓은 황무지 칼라하리 사막 땅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부시맨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해영 (9) 언어 등 현지 적응도 전에 학교건물 짓느라 삽질
"자, 이 땅은 식당건물 자리입니다. 모두 같이 식당을 지읍시다. 먼저 바닥을 파 주세요. 가로 50㎝와 세로 80㎝입니다."
조성수 선임선교사님이 교사들에게 지을 건물에 대해 설명한다. 주변을 둘러보니 물기하나 없는 땅위에 줄이 그어져 있다. 온통 모래로 둘러진 벌판엔 여기저기에 가시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다. 나무 그늘 아래로 소떼와 양, 염소, 망아지들이 더위를 피하고 더러는 풀을 뜯고 있다. 보츠와나 4월의 모습이다. 이곳 햇살은 뜨거운 모래바닥을 불같이 달군다. 이 기온에도 아랑곳없이 한국인 선교사들은 삽이며 곡괭이를 들고 학생들과 공사에 나섰다.
나는 아프리카 남쪽 끝에 있는 보츠와나의 굿호프(Good Hope) 마을에 안착했다. 현지에 와 보니 언어연수와 현지적응은 사치스러운 말임을 알게 됐다. 대부분 한국인 선교사들은 도착하면 바로 현장에 투입됐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다. 뭐든지 생소했고 가만히 앉아서 쉬는 일조차 힘들었으며 항상 배고팠다. 오전에는 학생들과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함께 학교건물을 지었다. 그러고 나서 밤에는 다음 날 수업준비를 했다. 선교사들은 모두 공동체 생활을 했고 식사는 학생들과 똑같이 현지음식으로 먹었다. 보츠와나의 주식은 밀리밀(옥수수가루), 쇼감(수수), 캄푸(콩과 옥수수를 발효한 것) 등이다. 보통 이 음식을 약간의 감자와 양파, 소고기를 조각내 넣어 만든 걸쭉한 국물에 찍어 먹곤 했다.
먹고사는 일은 현지인들과 의사소통하는 일에 비하면 나은 편이었다. 영어, 한국말, 보츠와나 현지어인 츠와나어에 손짓발짓까지 써가면서 이들과 소통하는 일은 매 순간이 시트콤이었다. 생활환경도 변변찮아 '행복' '만족'이란 단어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황무지의 삶이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가슴을 뜨겁게 하는 일들이 서서히 생기기 시작했다.
'적재적소'.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매 순간 느끼는 단어다. 아이들이 시시때때로 다가와 내게 말을 걸 때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은 내가 예쁘다고 했다. 처음에 이 말을 들을 땐 반신반의했다.
'뭐! 내가 예쁘다고.'
그러나 이 믿을 수 없는 말들은 진심이었다. 동병상련이다. 홀아비심정은 과부가 안다고 했다. 보츠와나 사람들은 내 앞에서 흑인이라는 열등감과 자격지심이 사라졌다. 내 작은 키는 그들의 까만 피부와 곱슬머리와 상쇄된 듯했다. 내 앞에서 그들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당당하고 자유로웠다. 학생들은 내게 다가와 친밀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내 손을 잡았다. 이는 장애인이라고 차별적인 대접을 받던 한국사회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이었다.
"You are so beautiful!(당신은 아름다워요)"이란 말은 내 신체의 생김새보다 마음이 그들이 보기에 예뻤다는 말이었을 게다. 이들은 흑인이라는 열등감을 이해하고 편견 없이 사람으로 대접해 주는 내 태도에서 아름다움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이들을 무지한 데다 까맣고 못생겼다고 무시할 수 있겠는가. 난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도와주러 갔다고 으스댈 수 없었다.
선한 곳에선 선한 열매가 열린다. 그들이 한 아름다운 말은 내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은 아픔들을 치료해 줬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며 '여성'이라는 본연의 정체성에 자긍심을 갖게 해 주었다.
뜨거운 태양열에도 적응했고 힘에 겨워 죽고 싶던 노동일도 제법 손에 익었다. 낯선 환경에서 서투름이 많았음에도 일은 진행이 돼 학교도 제법 모양새가 잡혀갔다. 굿호프 학교는 보츠와나 청소년을 모아 양재, 목공, 편물 과목 기술을 2년 동안 가르쳤다. 또 정부에서 시행하는 기능자격시험 자격증 취득을 도와 졸업 이후 취업할 수 있을 길을 열어줬다. 첫해 졸업생 가운데는 두 명을 뽑아 한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어느덧 나는 네 번째의 신입생을 맞았다. 일은 잘 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역경의 열매] 김해영 (10) 나홀로 기술학교… 그러나 주님은 또 다섯 학생을
'나도 가야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하필 내가 끝까지 남아있단 말인가. 자, 이제 나도 한국에서 하다가 만 성공, 그 일을 하러 가야겠다. 더 이상 이곳에서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학생도 없는 학교에서 내가 무엇을 한단 말인가.
모두가 떠난 자리다. 학교 책임자도 교사도, 심지어 학생도 모두 떠났다. '나도 가야지' 하는 결론을 내린 뒤 홀로 남은 학교에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나는 선교사가 되겠다거나 하나님께서 아프리카로 부르셨다는 소명 없이 갑작스럽게 합류했기에 일이 이렇게 되자 미련 없이 한국으로 돌아갈 이유가 생긴 셈이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너무 아프고 슬펐다. 한국과 미국에서 보내준 귀중한 헌금으로 설립된 학교는 텅 비었고 기계 위에는 먼지가 쌓여갔다. 이역만리에서 온 선교사들의 헌신도 보람 없이 스러져갔다.
기술학교는 네 번째의 신입생을 받은 뒤 한 학기를 마치고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다. 보츠와나 그루터기선교부는 1986년 조성수 선교사가 개척하면서 시작됐다. 한국본부에서 파송돼 온 선교사들은 주님의 은혜에 감동해 자원하여 온 평신도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각자의 재능에 따라 사업부와 선교부로 나눠 일했다. 이는 자비량선교를 지향하는 그루터기선교부의 전략이었다. 하지만 신학도 하지 않는 평신도가 '기능인선교사'란 이름으로 현지에서 사업을 하고 유치원, 직업학교 등을 하는 것은 선교활동이 아니라며 배척하는 사람도 있었다.
선교부는 늘 어려움에 직면했다. 처음에는 거주권 확보가 문제였다. 이를 위해 재단법인을 설립했다. 영주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사람이 부족했다. 인원을 확충하고 일이 확장되면서 돈 문제가 대두됐다. 사업이 자리 잡으면서 어느 정도 현지에서 재원조달이 가능해지자 초기의 개척선교사들이 건강악화로 지쳐갔다. 여러 이유로 사역자들은 다른 사역지로 떠나거나 한국으로 돌아갔고 어떤 이는 아예 하늘나라로 떠났다. 기술학교에서 일하던 교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계속되는 어려움에 지친 기술학교의 선임은 1994년 4월에 교사와 재학생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본인도 떠났다. 그리고 나 혼자 남게 됐다. 학교는 완전히 문을 닫았고 언제 열릴 것이라는 기약도 없었다.
선교사들은 이곳에 올 때 유서를 쓰고 올 정도로 심지가 굳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선교지의 어려움은 이들도 두 손 들게 만들었다. 유서는 쓰지 않았지만 나는 항상 10년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내 기술을 배우는 데도 10년이 걸렸는데 이곳에서도 결실을 보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판단에서였다. 아침에는 짐을 싸고 저녁에는 마음이 아파 기도하며 두어 달을 홀로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돌려보낸 여학생 5명이 학교로 찾아왔다. 그리고는 나더러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 달라며 4달 뒤 있을 기능시험 준비를 함께 해 달라고 간청했다.
"나밖에 없는데, 어떻게 너희들을 도울 수 있니."
"선생님이 계시니까 괜찮아요."
아이들이 내게 선생이 돼 달라고 한다. 먹을 것도 별로 없는 이곳에서 음식은 자기들이 알아서 해결할 테니 기술만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 캄캄한 밤하늘, 전기 불빛 하나 없는 사막의 밤은 적막하고 쓸쓸하다. 기숙사에서 촛불 빛이 새어나온다. 선생도 다 떠난 학교에 학생들이 찾아와 공부하는 것이다. 마음이 아팠지만 한편으론 아이들의 노력이 기특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나는 모래 바닥에 앉아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아무도 없어요. 모두 다 떠나고 혼자 남았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공부하겠다고 와 있어요."
기도는 침묵이 되고 마침내 눈물이 됐다. 한참을 울고 있는데 마음 밑바닥에서 세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얘야, 가난하고 병으로 고생하며 나를 모르는 이 마을 사람들에게 내가 와 있는데 너는 어디로 가려 하니. 너는 여기서 나와 같이 살자. 네가 그것 이외에 무엇을 더 바라니?'
***[역경의 열매] 김해영 (11) 칼라하리 사막의 눈물 기도에 "여기서 같이 살자"
'여기서 나와 같이 살자. 네가 그것 이외에 무엇을 더 바라니.'
기도 가운데 들려온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위해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더 묵상했다.아프리카의 사막까지 간 내가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까. 그간 나는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찬송하지 않았던가.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으로 충분하지 않느냐는 의미였다.
'이곳에서 네가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교회를 세워 복음을 잘 전한다고 해도 그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내 앞에서 마음을 지킬 일이다.'
그랬다. 하나님께서는 '얘야, 교회를 크게 짓고 학교를 운영해 보자. 사람들을 잘 가르쳐 보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같이 살자고 하셨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서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 그 일은 '내 일'이다. 내 일을 하려고 하니 힘들고 지쳐 끝내는 그만두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과 참 기쁨과 감사로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 어떤 일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게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칼라하리사막 한 구석에서 혼자 눈물로 기도할 때 주님은 날 만나 불러주셨다.
'여기서 나와 같이 살자.'
그러고 보니 내 선교사적 소명은 아주 명쾌했다.
'그래! 무슨 위대한 일이나 힘든 일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같이 살자 하시는데.'
이런 생각에 미치자 안타까움으로 흐르던 눈물이 멈췄다. 주님께서 함께 살자고 한다. 이것이 얼마나 강력하고 아름다운 요청인가. 혼자 남았다는 생각을 밤하늘 멀리 걷어차 버렸다. 주님 계신 여기서부터 시작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후 두 달간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접고 오직 어떻게 학교를 정상화할지 고민하고 기도했다. 새 학기를 얼마 앞둔 어느 날, 사업팀에서 학교에 관해 의논할 일이 있다는 연락이 왔다. 나 역시 바라던 일이었다. 나는 학교운영계획서를 만들었다. 운영위원회를 만들고 이사장을 선출해 사역을 나눴다. 이사회는 내게 학교를 맡긴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남의 나라 사람들의 인생을 책임지는 사람이 됐다.
"여기에 있던 분들 모두 다른 일을 하러 떠났지만 제가 여기 남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절 선생으로 여겨주셔서 용기를 갖고 이 학교를 책임지게 됐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힘이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저와 함께 있어 주시기 바랍니다."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던 기술학교가 1994년 9월 재개했다. 나는 재학생과 교직원들을 불러 하나님께서 내게 해오신 부탁처럼 같이 있자고 했다. 학교를 맡으면서 세 가지의 원칙을 정했다. '현지인 스스로 하도록 지도하기' '일보다 사람에 우선하기' '매사에 감사하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원칙을 정하니 그 어떤 일들도 넉넉히 감당해 갈 수 있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여기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주님과 함께 살다는 사실에 나는 감동하고 감격했다. 내가 바라보는 벌판은 변함이 없었지만 나 자신이 달라져 있었다. 굿호프 학교는 더 이상 사막이 아닌 삶의 터전이자 인생을 만들어 가는 발판이 됐다. 학교는 점차 절망을 걷어내고 정상운영에 들어갔다. 사람이 알아주면 하늘도 알아준다고 한다. 학생들과 교사들과 마을 사람들은 내 마음을 알아줬고 하나님 또한 알아주셨다.
그러던 가운데 10년 세월은 살같이 흘렀다. 굿호프 학교는 재학생, 교사 및 직원들이 80명이나 되는 큰 학교로 성장했다. 졸업생이 400명을 넘어섰고 단기교육을 받은 아주머니 학생도 240명이나 됐다. 어느덧 나는 마을의 지도자급 인사가 돼 보츠와나 어디를 가든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제 학교는 저절로 잘 굴러가고 있었다. 또 생면부지의 나라에 와서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됐다. 학교를 운영하며 바친 시간과 노력에 비하면 너무나 큰 보람을 얻은 셈이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가 생겼다.
***[역경의 열매] 김해영 (12) 토플시험도 안보고 미국 유학을 오시다니요?
문제는 바로 모든 일이 잘 돼 간다는 데 있었다.
학교는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하는 하나의 조직체가 되고 난 이후 저절로 굴러갔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런데 이는 내 영혼에 위기를 가져왔다. 학교일은 내게 더 이상 도전과 열정을 주지 못했다. 처음 학교의 책임자가 됐을 때 주님의 은혜를 바라는 뜨거운 열정과 간절함이 안일한 일상에 묻혀버렸다. 그러자 '앗 뜨거워라! 여길 떠나야겠구나'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 위기감은 10여 년간 학교를 운영한 경험을 토대로 전문교육을 받고 싶다는 갈망으로 바뀌었다. 학교사역 3년 이후 후임에게 인계하고 2003년 12월 마지막 학기를 끝으로 보츠와나를 떠났다.
내가 한국에서 보츠와나로 갈 때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그곳에 가지 않으면 허망하게 죽을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고, 주님에게 사랑의 빚을 갚는다는 의미가 있었다. 물론 그 길은 불확실한 길이었다. 그 곳에서 나는 직업학교 교장이 되는 기회를 가졌다. 하지만 보츠와나에서 미국으로 옮길 때는 전적인 내 결정이었다. 안일한 일상을 거부하고 도전해 보다 나은 인생을 만들기 위해 미국으로 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기회 앞에는 위기가 먼저 와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인생의 전환점에 서게 됐지만 내 앞은 이전의 아프리카보다 더 불투명했다.
낼 모레면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내 미래를 보고 투자해 주세요'라고 주변에 청하거나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처럼 보였다.
"김 선교사님, 공부하러 왔다고 하시는데, 무슨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미주그루터기선교부의 김진홍 목사님이 물었다.
"뭐 별다른 대책은 없습니다,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세요?"
보츠와나를 떠나 미국 뉴욕의 대표적인 한인타운 후러싱에 도착했다. 내 목적은 미국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해 전문가가 되는 것이었다. 미국은 시카고 한인선교대회 참석과 선교보고를 위해 이미 여러 번 선교사로서 방문했던 나라다. 하지만 교회에 '미국에 공부하러 왔으니 도와주세요'라고 말하긴 쉽지 않았다. 일단 시기가 맞지 않았다. 이젠 선교사가 아닌 유학생이니 입장이 달라진 것이다. 김 목사님을 비롯해 만나는 사람마다 무슨 대책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모두 도움을 줄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물어봐 주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었다.
별다른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김 목사님의 추천으로 나약대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어쩌면 나는 매우 무모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미국 대학교에 입학하려는 사람이 그동안 토플시험도 안 봤다니. 보츠와나에서 영어를 쓰면서 생활했지만 정식으로 영어과정을 단 한 번도 밟아 본 적 없다. 이는 영어뿐이 아니다. 중·고등학교 과정을 모두 검정고시로 끝냈으니 당연히 기초학문에 대한 실력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이 미국의 대학교에 공부하겠다고 하는 건, 정말 말도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내 계획을 듣고 주변에서 '그렇게 대책도 없이 옵니까' '공부할 형편이 안 되는군요'라고 나무라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사람들에게 일체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눈앞에 닥친 현실은 생각보다 냉혹했다. 먹고 자고 공부하는 데 아무런 대책이 없이 자본주의 미국사회에서 살겠다는 발상은 무모함을 너머 만용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욱 아프리카 오지에서 살다 온 내가 한순간에 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에 섰다. 좋게 말하면 도전이지만 실상은 어리석고 한심해 보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어리석은 일일까. 인생사는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의 일은 더 알 수가 없는 법인 듯하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가능하게 변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역경의 열매] 김해영 (13) 내 영어실력이 미국대학서 공부할 만큼 되다니…
"해영씨, 어디서 영어공부 했나요."
"보츠와나에서 14년을 살았는데 그곳에서 배웠어요."
"그렇군요. 성적이 잘 나왔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곧 서류와 학비를 마련해서 등록하세요."
나약대학교 맨해튼 캠퍼스의 유학생 담당자 그레이스씨가 축하인사를 해 왔다. 입학을 위한 영어시험 결과가 합격이라고 했다. 별다른 과정 없이 바로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내 영어 실력이 미국 대학에서 공부할 만큼 된단 말이지!' 2004년 1월, 나약대학교에서 영어시험을 치른 뒤 축하의 말을 듣고 학교 건물 밖으로 나오니 한겨울 바람이 씽씽 불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시험에 합격하고도 기뻐하지 못한 채 걱정거리로 안고 수많은 인종이 오가는 뉴욕 거리를 혼자 터벅터벅 걸었다. 몸보다 더 추운 것은 마음이었다. 길을 건너려다 빌딩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매우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작은 키에 구부정한 상체에다 어깨는 한쪽으로 기울었다. 청바지 위로 변변한 코트도 없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내 모습에 나도 놀랐다.
"참 거지 같은 사람이군. 야, 너 누구야."
빌딩 유리에 비친 사람이 대답했다.
"나, 김해영이야. 아프리카에서 생존하기 위해 환경과 치열하게 싸워 이기고 온 사람이야. 남들 보기에는 거지 같을 수 있지만 나는 내 모습에 대해 불평하지 않아. 나는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고 어려운 가운데 동생들도 돌봤고 가진 기술로 아프리카 청소년을 가르친 사람이야."
깜짝 놀랐다. 유리에 비친 사람이 현실 앞에 실재한 나보다 더 당당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고독, 고통, 고생을 싫어한다. 어느 사람이 홀로 있기를 바라고, 영과 육이 아프고 병들기를 바라며 매일의 삶에서 지겨울 정도의 고생을 사서 하려고 하겠는가. 그런데 거울 속에 비친 김해영은 달랐다. 고통과 고생, 고독으로 뭉쳐져 단단하게 단련된 인간이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그러한 경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고 마음을 지켜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돌아봤다. 나는 나만의 인생을 만들어냈다. 선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들어갔던 땅에서 나에게 만큼은 선교를 제대로 했다. 형식적인 종교인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하고 성장했다. 게다가 아프리카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도 살아 미국 땅에 와 있다. 내 인생의 최고 성취를 꼽는다면 무엇보다 내 마음에 품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아프리카에서 빌립보서 2장 6∼8절 말씀을 체득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아버지의 아들 된 특권을 내려놓고 인간의 모양으로 오셔서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것. 나는 국내 기술자로서의 명예와 삶을 내려놓고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아이들을 끝까지 책임지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다. 이처럼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나는 점차 그리스도인이 돼 갔다.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니 거기엔 볼품없는 내가 아니라 아주 당당하고 멋있는 인간이 보였다. 고생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을 만났고 고통을 다스리면서 선교사가 됐다. 고독한 사막생활을 견디면서 하나님의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웠다. 나는 빌딩 유리에 비친 보잘것없는 나와 소위 '맞짱'을 떴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사막에서도 한 인생을 구원하고 운명과 같은 인생의 고통과 고생을 불평하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풍요로운 이 뉴욕 땅에서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나는 그동안 하나님의 지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앞으로의 일 역시 다 잘될 것이란 자신감과 믿음이 갑자기 솟아올랐다. 나의 유학생활은 이 자신감과 믿음으로부터 시작됐다.
***[역경의 열매] 김해영 (14) 학비·용돈에 게스트룸까지… 도움 손길 물밀듯
대학은 가을학기부터 입학하기로 결정됐다. 문제는 학비였다. 나는 입학 전인 2004년 7월에 열린 시카고 한인선교대회본부에서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워싱턴에서 이영호 이영숙 집사님 부부가 뉴욕으로 날 찾아오셨다. 이 두 분은 굿호프 기술학교를 위해 기도하던 소규모 그룹 리더였다. 주일예배를 함께 드리던 중 이영숙 집사님께서 내게 조용히 다가와 속삭였다.
"선교사님, 학비걱정은 마세요."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일주일 후에 알게 됐다. 한 학기 학비에 해당하는 5000달러와 편지가 집사님이 계신 워싱턴에서 날아왔다. 편지에는 한국에서 물려받은 재산을 처분해 학비로 보내니 열심히 공부하라는 당부의 말이 적혀 있었다. 집사님이 출석하는 워싱턴의 한 교회에서 간증했을 때 유학 온 이야기를 듣고 내게 학비를 보내준 것이었다. 그 편지를 읽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보내주신 학비를 들고 나는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했다. 이는 앞으로 일하지 않고 공부만 할 수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공부만 할 수 있는 기회가 오다니. 내가 요청한 적도 없고, 날 처음 본 분들이 은혜를 베풀어 준 것에 대해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게 순전한 하나님 아버지의 돌보심과 그분들이 베푸는 은혜 덕택이다.
첫 학기 등록을 무사히 마치고 4년간의 유학 비자를 받았다. 2004년 8월말 나는 드디어 대학생이 됐다. 시카고 선교대회 이후 후러싱 지구촌선교교회의 고석희 목사님은 "해영 선교사,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가지 말고 교회에 가세요"라며 살 곳을 마련해줬다. 마침 교회 안에는 게스트룸이 있어 그곳이 내 거처가 됐다.
가을학기를 시작하고 얼마 후, 도움의 손길이 또 한번 찾아왔다. 텍사스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의 이수관 목사님이 연락을 했다. 이 교회에는 보츠와나 선교를 오랫동안 후원한 그루터기 목장이라는 소그룹이 있었다.
"선교사님, 보내는 금액이 일정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공부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 매월 오백달러씩 보내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루터기 목장은 미국에 갓 이민 온 청년들로 구성돼 있다. 이 청년들이 꼬박꼬박 모아 보내준 귀중한 헌금이 내 생활비가 됐다. 이번에도 내가 요청하기 전에 교회는 내 형편을 이해하고 해결해 줬다. 이들의 지원 덕분에 2학년부터는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고 여러 장학금을 신청해서 받아 학비를 보충해 나갔다.
공부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대학생으로서 학문하는 즐거움과 기쁨을 마음껏 누렸다. 매일이 기적이고, 행복이었다.
'내가 대학생이 되다니!'
학교나 지하철 안, 교회에서 나는 매 순간 감격하고 감동했다. 공부가 선교라고 믿고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 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이런 일들이 단순히 노력한다고 이뤄질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왜 하나님은 내게 이런 큰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일까.
은혜도 분에 넘치면 의심이 생기는가 보다. 이런 생각을 하던 어느 날, 아프리카 역사에 대해 공부하다가 내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터졌다. 내가 가르친 보츠와나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공부를 잘 마치고 꼭 돌아와요'라고 했던 부탁의 소리도 들렸다. 그때 내가 하는 공부는 바로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미국에 살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나를 맡기신 것이다. 내 형편을 헤아려 주머니와 가방에 돈을 넣어준 하나님의 사람들 도움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다. 수많은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유학생활에 필요한 경비를 보내주셨다. 계산해 보니 모두 2억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은혜가 너무나 크면 갚을 수 없다.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의 은혜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베풀 날을 기대하며 공부에 임했다.
***[역경의 열매] 김해영 (15)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학문보다 뛰어나다!
"나이가 들어 공부하니 힘들어요. 듣고 돌아서면 까먹네요. 해영씨도 공부하기 힘들지 않아요?"
같이 공부하던 50대 초반의 김 집사님이 물었다. 나약대학교에는 만학도(return student)전형이 있어 다양한 연령대가 함께 모여 공부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사회생활을 했거나 가정을 꾸리다 공부하러 온 사람들은 수업을 따라가느라 매일 고군분투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쉬엄쉬엄해도 됐다. 하지만 공부가 쉽다고 얕잡아 보며 대강대강 할 수 없었다. 몸에 밴 습관이란 무서운 법이다. 진부한 얘기지만 성공의 바탕은 역시 그 일을 한 사람에게 달렸다. 얼마나 성실하게 노력했는지가 중요하다. 전혀 대책 없이 도착한 미국에서 성공적인 유학생활이 가능했던 것 역시 체화된 성실함과 노력 덕이 컸다. 이는 한국, 일본, 보츠와나를 거쳐 미국까지 갈 수 있게 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십대 시절 나는 이미 국내외 기능올림픽에서 3개의 금메달을 딴 경험이 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든 최선의 정점이 어느 정도인지 느낌으로 안다. 나는 금메달을 따려고 노력하기보단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공부도 그렇게 했다. 공부에도 매번의 과제에서 요구하는 최선의 정도가 있다. 나는 무엇보다 배우는 과정에서 진지하고 깊이 있게 학문을 연구하는 것을 목표로 공부했다. 예를 하나 들면 이렇다.
"미국의 순수예술과 관련된 박물관을 방문하고 소감문 두 장을 써서 제출하시오."
교양수업에 나온 과제물이다. 뉴욕에는 박물관이 널렸다. 이 주제에 맞는 곳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메트로폴리탄박물관만 가도 이 과제는 거의 해결된다. 하지만 그곳보다 더 주제에 맞는 곳이 있지 않을까 싶어 다른 곳을 간다. 갔더니 소감문을 쓸 만한 소재가 없다. 그렇다면 다른 곳을 한 번 더 간다. 세 번째 박물관을 둘러보면 나만의 생각으로 소감문을 작성할 수 있는 재료가 생긴다. 이렇게 해서 써 낸 두 장에 교수님은 만족해했다. 이런 식으로 하면 교수님이 만족하기 전에 내가 먼저 과제에 만족할 수 있다. 물론 항상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할 순 없다.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다른 누구보다도 내 마음에 들기까지 최선을 다했다. 특별히 나약대학교에서 공부하게 된 것은 주님의 선하신 계획이자 인도하심이 있었다.
나약대학교는 'Christian and Mission Alliance(C&MA)' 산하의 교육기관으로 A.B. 심슨박사가 선교사를 배출하기 위해 1882년 뉴욕 맨해튼에 세웠다. 교육과정에는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성경 관련 과목이 포함돼 있다. 내 전공은 사회복지학이었지만 교육과정 덕택에 기독교와 신학과 관련된 과목을 자연스럽게 수강했다. 수업을 들으며 보츠와나에서 독학으로 익히고 배운 신학지식과 경험을 이론화할 수 있었다. 이는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나와 그 땅에서 함께 일하신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배울수록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14년 동안의 경험이 마치 퍼즐을 맞추듯 하나의 완성된 그림으로 만들어져 갔다. 만약 내 경험에서 신학적으로 모순된 점을 발견했으면 매우 절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이 과정으로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학문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과 공부할 기회도 많았다. 대부분 이십대 청년이었는데 공부에 대한 목적이 구체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세상이 학교며 나와 같이 사는 사람들이 선생'이라는 믿음 아래 삶에서 배움을 터득해 왔다. 그래서인지 나는 유학생들이 공부에 대한 철학이 거의 없다는 게 매우 안타까웠다.
억지로 하는 공부와 좋아서 하는 공부는 결과에 있어 엄청나게 다르다. 내 경우는 스스로 좋아서 한 공부였다. 더 나아가 즐기는 정도였다. 얼마나 공부하기를 원하였던가! 이 때문에 나는 공부를 열심히, 즐겁게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해영 (16) 불치의 허리통증, 안수기도에 기적처럼 사라져
'몸이 아프지 않은 사람은 어떤 심정으로 살아갈까.'
이는 평소 내가 가장 궁금하게 생각했던 질문이다. 내 인생의 가장 심각한 고민은 지속적인 허리 통증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고통을 덜 수 있을까 늘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장에서 일을 할 때는 평소보다 허리통증이 더 심해져 정말 하루하루가 힘에 겨웠다.
내가 늘 울며 날을 세우니까 하나님도 아파하셨는지 한 가지 지혜를 주셨다. 1미터가 넘는 큰 수건을 두 번 접어 허리에 감은 다음, 벨트로 꽉 조이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이렇게 하면 허리가 곧고 반듯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실제로도 앉아 있을 때 통증이 줄어들었다. 며칠만 하려고 했던 이 복대를 이후에도 풀지 못하고 살고 있다.
보츠와나에서 직업학교 교장이 돼 학교일로 바쁜 와중에도 마음 한편에는 '아! 복대만 안 해도 살겠다' '허리만 안 아파도 더 많이 일을 할 텐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무슨 수로 이 고통을 없앤단 말인가. 하나님께 고쳐 달라 청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만하길 정말 다행으로 알고 살았다. 1996년 선교대회에 참석차 미국에 방문했다 잠시 한국에 들렀다.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니 10년 만에 만난 지인도 있었는데 그가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머나! 해영씨, 미국 다녀왔다더니 척추 수술하고 왔어요?"
6년 만에 만난 엄마는 옷을 갈아입는 나를 보더니 등과 허리를 잡은 채 몇 번이고 쓸어내리며 신기해하셨다.
"미국 사람들이 너를 엎어놓고 밟았느냐. 허리가 반듯해졌다."
오랜만에 만난 보츠와나 사람들도 "몸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 올 정도였다. 사실은 이렇다. 복대를 한 지 13년, 보츠와나의 청소년들을 가르친 지 6년쯤 됐을 때, 나는 더 이상 복대를 두르지 않아도 아프지 않게 됐다. 치료를 위해 기도를 받은 것도, 특별한 체험을 한 것도 아니다. 그저 꼭 입어보고 싶은 청바지가 생겨 복대를 하지 않은 채 청바지를 입고 며칠을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바지도 복대도 필요 없게 된 것이다. 등과 허리가 완전히 1자형으로 고쳐진 건 아니지만 앉은 동안엔 허리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나는 더 이상 물에 젖은 허리수건을 찾으러 다니는 악몽을 꾸지 않는다.
한편 나는 오른쪽 다리가 왼쪽다리에 비해 2.5cm쯤 짧았다. 이 때문에 걸을 때마다 허리 통증을 느껴야만 했다. 물론 전보다는 훨씬 형편이 나아졌지만 이는 내 활동반경을 제한했다. 미국 유학을 고민할 때도 몸이 아플 것을 생각하니 선뜻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순전히 이 때문에 3년간 주저하며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그래, 미국 생활로 허리가 더 아파져도 할 수 없다'는 결단을 내린 뒤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유학길에 올랐다. 보츠와나에서는 내 형편에 맞춰 생활할 수 있었지만 도시생활이란 것이 어디 그런가. 나는 이를 악물고 허리 통증을 참아내야 할 미국생활을 자원해서 선택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고 말씀하신다. 미국에서 공부한 것도 크나큰 주님의 은혜인데, 더 깊은 사랑을 체험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주님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돌아다니지 않고 교회와 학교공부에만 파묻혀 살던 내게 큰 선물을 주셨다. 유학한 지 3년쯤 됐을 때 우연한 기회에 한 목사님으로부터 안수기도를 받게 됐다. 그러자 짧았던 오른쪽 다리가 길어지면서 두 다리 길이가 맞게 되는 놀라운 일이 생겼다. 이로써 나를 괴롭히던 허리 통증은 완전히 사라졌다. 고통과 통증 없이 공부하고 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말 그대로 펄펄 날아다니는 몸이 돼 하고자 하는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 내가 앞으로 사는 동안 주님께 무엇을 더 구할 수 있을까! 그저 오직 감사와 영광만 돌려드릴 뿐이다.
***[역경의 열매] 김해영 (17) 내 컬럼비아 대학원 졸업장에 담긴 주님 뜻은?
과연 기적이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던 통증이 사라지고 짧았던 다리가 길어지는 일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오직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일이다.
사람들은 내가 믿음이 좋고, 기도를 많이 하며 착한 일을 해서 기적이 일어났다고 했다. 정말 그래서일까. 그러면 통증을 매일 느끼며 살았을 때는 주님이 나를 덜 사랑하셨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럼, 지금 고통이 없는 것은 내가 열심히 산 것에 대한 보상으로 주신 선물인가. 만일 보상으로 받은 거라면 기도든 선행이든 그 일이 무엇이든 오로지 그 일만 하고 노력하면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나는 왜 내게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고자 매순간 노력했다.
허리통증이 완전히 없어지면서 활동반경은 나날이 늘어갔다. 전공과목을 공부하는 3학년부터 학과 공부와 인턴 활동을 병행해야만 했다. 그야말로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살아야 하는 일정이었지만 건강해진 몸으로 착오 없이 잘 해냈다. 더 이상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살지 않아도 된다. 일상생활에서 어떤 문제를 만나도 그 일은 내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된 감동을 잊기도 전에 몸이 건강해지는 기적이 내게 왔다. 이 치유 체험은 항상 이성을 우선시하던 내 신앙생활에 감성과 영성을 더하는 계기가 됐고, 이는 균형 있는 신앙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을 줬다.
2008년 5월, 나약대학교를 졸업하고 뉴욕에 남아 1년간 잠시 숨을 고르면서 대학원 입학을 준비했다. 내가 가고 싶은 학교는 아이비리그이자 사회복지 분야에서 세계 최고인 컬럼비아 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이었다. 나는 1년 만에 석사과정을 마치는 향상반(Advanced Standing Course)에 지원했다. 이곳은 '하늘의 별따기'란 말대로 입학이 어려운 학교다.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물론 나 자신도 입학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기적을 체험했다. 어렵기로 소문난 이 학교에 입학 허가를 받고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감격했는지 며칠 동안 잠을 못 잘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이 기쁨을 누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엄청난 학비에 대한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 공부를 끝낼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2009년 8월 첫 수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는 기본 경비와 환경은 만들어졌다. 등록금에 긴요한 최소 비용이 주변에서 지원되거나 일을 하면서 마련됐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명문 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와 함께 위기도 같이 주셨다. 하지만 나는 이 위기 앞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초졸 학력을 가진 내가 컬럼비아 대학원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성공인데 뭐가 더 걱정일까. 학비에 대한 위기감은 '학교에서 오지 말라고 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 하나라도 더 배우자'는 비장한 결심을 갖게 했다. 무엇보다 난 공부에 대한 명분이 분명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아프리카에 보낼 선물'로서 교육의 기회를 내게 주신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서 주님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란 말씀을 내 인생에 실현케 하셨다.
"해영, 참 잘했어. 그동안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잘 달려왔어!"
2010년 5월 18일, 컬럼비아 대학원 256회 졸업생들 사이에 앉았다. 내게 칭찬을 했다. 나 스스로가 참 대견하고 마음에 들었다. 공부를 위해 뛰어넘은 수많은 장애물과 위기를 이 작은 키로 용케도 잘 넘었다. 나는 이날 다시 한번 '믿음이란 보이지 않을 때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임을 되새겼다. 내 졸업장에는 수많은 사람의 도움과 격려, 그리고 아프리카 청소년들의 꿈이 담겨 있다. 이제 그동안의 목표였던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자,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역경의 열매] 김해영 (18) "더 낮은 곳 섬기자" 기도하다 히말라야 부탄으로
나는 먼저 하나님께 무엇을 해야 할지 여쭤보았다.
'주님, 종은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해야지요. 그러면 제게 해결해야 할 가장 골치 아픈 일거리를 주시되 그 일이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이면 좋겠습니다. 물론 보츠와나보다 더 어려운 곳이라도 좋습니다.'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몇 개월간 새벽기도를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의 설교가 은혜로 다가왔다. 참된 종은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고도 무익한 종이라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란 말씀이었다. 이 말씀으로 내 고민은 한순간에 날아갔다. 이전까지의 기도는 '보츠와나로 돌아가서 일하겠습니다' '남은 학비를 해결해야 하니 취업을 해야 하나요'와 같이 내 계획을 아뢰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뭔가 개운치가 않았다. 미국에 남아 부와 명예를 쌓고 나만의 인생을 산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처음 마음을 변치 않고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미국에 온 목적은 하나님의 일을 더 전문적으로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일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한 가지 더 분명한 것은, 좋은 교육을 받았다면 반드시 더 낮은 자리로 가서 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졸업한 뒤 3개월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길을 열어주시길 기다렸다.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셔도 좋을 일이었다. 그러던 중 달라스 선교대회에 참석했다. 대회가 열리기 전 뉴송교회 박인화 목사님이 전화를 주셨다. 이 교회 단기선교팀이 부탄을 방문했는데 섬유관련 전문가가 그 나라에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현지에 김 선교사님을 소개했습니다. 부탄은 불교국가입니다. 사실 선교사가 들어가기 어려운 나라인데, 김 선교사께서 섬유관련 전문가로 들어가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한번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네, 그런데 부탄은 무슨 언어권입니까?"
"영어권입니다."
이런 경우에 딱 맞는 말이 있다. "빙고! 하나님 아버지 땡큐! 무한감사!!" 무엇을 더 생각하고 기도할 것인가. 그 전화는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2010년 9월, 나는 20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내 다음 일터는 부탄으로 정해졌다. 그해 10월 히말라야 산맥이 있는 부탄을 방문한 이후, 이 나라의 지역개발사업을 하나씩 찾아 해 나가고 있다. 첫 프로젝트로 2011년 4월 서울 명동 초전박물관에서 '부탄섬유전시회'를 열었다. 부탄에서 보내 온 질 좋은 직조 수공예품 50여점을 한국에 소개하는 자리였다. 나는 작품을 소개하고 모은 기금 900만원을 부탄 섬유협회에 보냈다. 부탄 입국비자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나는 제천 로뎀청소년학교에서 청소년들에게 고등학교 검정고시 과정을 가르쳤다. 이어 보츠와나와 남아공을 방문하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돌아보았다.
한국에서는 3가지를 목표로 일하고 있다. 첫째는 월급 안 받고 일하기, 둘째는 집필, 그리고 셋째는 유명해지기다. 사람들은 나를 두고 '개천에서 용 났다'고 말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 내 인생역전은 일부 사람들에겐 충격적으로까지 들렸다고 한다. 한마디로 믿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시지 않았다면 누가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믿고 구주로 모시는데 내 키를 왜 이렇게 만드셨냐고 어찌 불평할 수 있을까.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나는 선교사이자 사회복지사이다. 사회적 약자에게 갖는 사회적 책임이 있다. 그래서 내 삶을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역할모델로 보여주고 싶다. 다사다난했던 내 삶이 거둔 성공은 이제 사회로 돌려줘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변했다.
***[역경의 열매] 김해영 (19) 어머니, 질곡의 삶 딛고 5남매 중 셋을 선교사로
"선교사님, 4월 중에 저희 교회에 한번 꼭 모시고 싶습니다."
2012년 3월, 한 일간지에 2개면에 걸쳐 내 인터뷰 기사가 나갔다. 기사의 헤드라인은 극적인 내 삶의 여정을 단숨에 압축했다. 기사를 보고 명성교회에서 제일 먼저 연락이 왔다. 김삼환 목사님은 내 기사를 보고 '이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같은 시기에 출판한 자서전 '청춘아 가슴 뛰는 일을 찾아라'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은 월급을 받지 않고 일했던 내게 정당하고 좋은 자금원이 됐다. 책을 낸 이후 꼬리를 물듯 인터뷰와 일이 들어왔다. 아예 하나님께서 나를 사람들 앞에 드러내 놓기를 작정하신 듯 했다.
일정은 바빠졌다. 미국과 캐나다, 한국을 오가며 바쁘게 일하던 어느 날, 행정안전부에서 연락이 왔다. 2012년 국민추천 시민대상 국민훈장목련장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내용이었다. 14년간 보츠와나에서 무보수로 자원 봉사한 공적이 인정됐다고 한다.
내게 전화한 사무관은 행사 일정과 함께 배우자 한 분을 동행해 참석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줬다.
"저는 배우자가 없는데...어머니를 모시고 가도 될까요?"
"예, 괜찮습니다. 꼭 모시고 오기 바랍니다. 국민들에게 희망을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상식 때 뵙겠습니다."
이 사무관의 감사는 도리어 내가 모든 분들에게 드려야 할 감사였다.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혼자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솟았다. 많은 일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내가 한 일을 대한민국 국민이 인정하고 알아준다고 한다. 희생과 헌신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들 450명이 후보로 추천됐고, 그 중에서 수상자로 결정된 24명 가운데 내가 포함된 것이다. 이러한 일을 가능케 한 국민들과 지난 세월을 잘 살아준 내 자신에게 감사했다. 무엇보다 아프리카에 홀로 남았을 때, '얘야, 나와 같이 살자' 하시던 하나님께 형언할 수 없는 감사가 나왔다.
인생은 연극무대와 같다고 한다. 수상식 날은 우리 엄마 인생에 있어 최고의 무대였다. 내가 주연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엄마를 주연으로 삼았다. 그날은 아침부터 긴장되고 바빴지만 행복했다. 엄마는 나보다 더 하셨다. 엄마와 함께 한 자리에 서는데 47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것도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함께 선 자리였다.
'무학→우울증→맏딸 장애인→남편자살→청과물 시장 일용 노동자→자녀 다섯 중 세명 선교사→맏딸 국민훈장 수상.'
엄마의 삶을 요약하면 이렇게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돌아보니 나보다 더 불행하고 힘든 인생을 살아오셨다. 엄마가 포기하지 않고 살아주신 것만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내게 있어 엄마는 낳아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한 존재다. "누가 낳아달라고 그랬어!"라며 엄마에게 대들던 어린 시절은 이제 세월 너머로 사라졌다.
수상식이 진행되는 동안 내 마음은 감동과 감사로 넘쳤다. 겉으로는 아니었지만 마음으론 울고 있었고, 감탄했다. 그래서 인생이란 장구하다고 하는구나, 하루 이틀만 살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구나! 누구보다도 힘들었을 엄마의 삶이 보람 있는 삶으로 연결돼 감사했다. 사람에게 희망이란 바로 살아있는 것이란 것임을 또 다시 절실하게 깨달았다. 살아있어야 고난도 있다. 골짜기가 깊으면 산이 높다. 내 인생에 찾아 온 영광은 그간의 고난과 역경에 비례했다. 한 가지 더 분명한 것은 이 세상 영광은 지나간다는 것이다. 어찌 하늘 영광에 비교할 수 있을까!
***[역경의 열매] 김해영 (20·끝) '아프리카 선교의 꿈' 밀알복지재단서 새록새록
"김 선교사님, 밀알복지재단의 정형석 목사님을 꼭 만나보십시오. 아프리카에 학교를 짓는 사업을 추진하려고 하는데 책임자를 찾고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그 일에 적격이라 봅니다."
그루터기선교회 조성수 선교사님의 전언이다. 아! 내가 생각하던 바로 그 일이구나. 바로 정 목사님께 전화했다.
"목사님, 내일 당장 만날 수 있을까요. 밀알복지재단이 준비하는 일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내가 오히려 재촉했다. 선교에 대한 이해, 복지전문가, 그리고 아프리카 문화와 생활에 대한 이해를 가진 사람. 재단이 찾고 있는 사람이란다. 바로 나였다. 지난해 말 한 방송국에서 추진하는 희망TV사업 공고를 보고 '이 일이라면 내가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부탄에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소원을 놓치지 않고 일이 이뤄지도록 인도하셨다.
"선교사님, 이 일을 맡아주십시오. 이 일은 선교사님이 꼭 하셔야 합니다."
"목사님, '불감청 고소원'이죠. 제가 정말 원하던 일입니다."
미국에서 부탄을 위해 일하고 있는 동역자들에겐 전화를 걸어 내가 맡게 될 희망사업에 대해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
"좋습니다. 부탄 사역은 어차피 장기전이니 천천히 진행하도록 하지요. 우선 아프리카 일부터 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 일도 하나님의 일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올해 8월 밀알복지재단의 희망사업본부장으로 부임했다. 희망TV사업은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를 위해 학교를 지어주는 사업이다. 복지적 접근으로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에 관심을 갖게 하는 한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 이 사업의 목적이다. 밀알복지재단은 지난 20년간 한국 장애인의 복지와 계몽, 선교를 목적으로 사회복지사업을 해 왔다. 현재 재단은 산하에 40여개의 복지기관을 두고 전문적인 사회복지를 구현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해외사업에도 눈을 돌려 현재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 12개국의 지부를 두고 의료지원, 긴급구호, 아동 교육 및 결연, 학교사업 등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나는 10월쯤 케냐로 출국해 재단 현지법인 설립과 사무실 개설, 현지 사역 개발을 진행할 계획이다.
청명한 하늘과 시원한 바람, 까만 얼굴에 맑은 눈동자, 커다랗고 천진한 웃음을 가진 아프리카 아이들.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모습으로 '당신은 어디서 왔나요. 당신은 몇 살인가요'라고 물었던 지난날이 떠오른다.
질병과 가난, 전쟁과 기아와 무지라는 인생의 장애물을 아이들이 뛰어넘을 때마다 누군가 옆에 있다면 힘이 덜 들 것이다. 눈물을 덜 흘릴 것이다. 약간의 도움만 있어도 생존과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약간의 도움은 때론 손을 잡아주는 일이기도 하고 먹고 입을 것을 건네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장 값진 도움은 옆에 같이 있는 것이다. 주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많이 사랑하신다. 세상에 와 잠시 살아가는 나를 사랑하심이 얼마나 큰지! 내가 연약할수록 그분의 사랑은 더 크다. 이제 그 큰 사랑을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다.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로 세공하듯 역경은 위대한 인물을 만든다. 앞으로 아프리카에서 찾아올 많은 일들은 나를 고생시키겠지만 바로 이 고난이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이 말씀이 내 인생 가운데 온전히 이뤄지길 기도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 2장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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