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자유는 불복종의 씨인가 아니면 은혜인가
<어쌔신 크리드>(저스틴 커젤, 액션/SF/판타지, 15세, 2017)
<어쌔신 크리드>는 동명의 게임을 원작으로 제작되었다. 평론가들의 글을 읽어보면 게임이 주는 느낌과 관련해서 호오가 분명하게 갈리는 것 같은데, 실제 게임을 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와 게임을 비교할 입장이 못 되니, 게이머들 사이에서 나뉘는 찬반 논쟁을 언급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사건 전개가 매끄럽지 못하고, 캐릭터 설정이 편향적이며, 그리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사건들과 대사들을 남발했다는 느낌을 받는 건 분명 아쉬운 점이다. 게다가 자유의지를 두고 전개되는 철학적이고 또 종교적인 논쟁이 지극히 피상적으로 언급되어 이야기의 설득력을 상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영화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인류의 역사에서 자유의지가 갖는 상반된 의미를 화두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야기 전개에 사용된 소재가 매우 특이하다. 무엇보다 기억을 다루는 방식이 새로웠다. 기억을 의식의 차원이나 혹은 정신분석학적인 대화를 통해 무의식에서 길어내는 방식이 아니며 또한 <인셉션>에서 볼 수 있듯이 꿈에 침투하여 무의식에 숨겨진 기억을 찾는 것이 아니라 DNA 유전자 정보를 이용하여 찾아내고 있다. DNA에 들어 있는 기억을 재생하는 애니머스라는 가상의 기계를 설정한 것은 인간의 기억이 DNA에 축적된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며 디지털 생명과학 및 공학적인 가능성을 어느 정도 예상한 상태에서 사용된 방법이라 생각한다.
사실 DNA는 유전정보이며, 대가 끊어지지 않는 한, DNA는 후손들에게 전달되고 결코 죽지 않는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정보 형태로 축적된다. 바로 이런 사실에 천착하여 인간의 DNA정보를 해독함으로써 1400년도에 일어난 사건을 재구성하고 또 이 시대의 정보를 캐내어 그것을 현대적으로 이용한다는 이야기다. 유전자 정보가 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삶의 기억까지도 포함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런 상상을 했다는 것이 매우 참신하다.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데 사용된 애니머스는 DNA정보를 해독하여 그것을 매개로 기억의 세계로 들어가게 만든다. 이로써 영화는 현실과 기억의 관계를 우리에게 익숙한 실재와 가상현실의 관계로 전환한다.
현재에서 과거로 가기 때문에 일종의 시간여행을 다루고 있지만, 시간여행을 다룬 다른 영화와 구별되는 점은 의미 있는 현재를 위해 과거를 수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오직 과거에 은폐된 정보를 얻기 위한 목적을 갖고 이뤄진다는 사실이다. 과거를 수정하는 것은 그것이 가져올 나비효과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데, 정보를 빼내는 건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매우 현실적이라 볼 수 있다. 그 정보라는 것은 바로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가 있는 소재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인간에게 있는 불복종의 DNA이다.
인간은 에덴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함께 있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뱀의 유혹을 받은 후에 따 먹었다. 하나님이 따 먹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것이고, 그 후로 이 열매는 불순종을 상징하였다. 영화는 이 열매를 일종의 인간의 유전자로 취급하고 있고, 이 나무의 열매인 ‘사과’를 대하는 두개의 상반된 태도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두 개의 중심축이다. 암살단은 저항하고 반대하고 자유롭게 생각할 권리를 인류의 보고로 생각하여 사과를 지키려 하고, 그 반대편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제하여 인류 사회에 저항과 불복종의 현실이 사라지게 하려는 템플기사단이 있다. 이들은 사과를 “불복종의 씨”라고 부른다. 두 세력이 애플을 사이에 두고 전개하는 액션씬은 영화의 백미다.
영화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자유의지는 인류에게 무엇일까? 인류의 보고일까, 아니면 불복종의 씨로서 인류의 선한 미래를 위해 반드시 제거해야 할 독소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깊이가 있는 질문을 영화는 지극히 단순하게 처리하는 아쉬움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이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미국을 자유를 상징하는 국가로 설정하고, 혹은 암살단을 자유의지를 수호하는 존재로 부각하고, 이에 비해 교회를 자유를 통제하는 세력의 대명사로 설정한 것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는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개념이며, 기독교가 매우 중시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비록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강조한다 해도 결코 인간의 자유를 사악하게 여기지 않는다.
영화는 과거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사이에서 전개된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펠라기우스가 제기한 입장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고 여겨질 정도다. 왜냐하면 펠라기우스에 따르면, 인간은 도덕적으로 중립된 상태로 창조되었으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에 따라 죄를 짓게 되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의지는 죄를 선택할 수도 있고, 선을 택할 수도 있다. 구원과 멸망은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의 결과이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나 은혜는 아니라고 한다. 이에 비해 어거스틴은 인간 본성의 타락을 말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영화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기본 프레임으로 삼고 이야기를 전개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유의지의 가치에 대해 성찰하였다.
한편, 인간에게 있는 불복종의 씨라는 것이 존재할까?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복종하지 않게 만드는 원인은 인간에게 존재할까? 그리고 그것은 펠라기우스나 영화가 말하고 있듯이 자유의지일까? 자유의지만 제거하면 인간은 불복종의 가능성은 사라지게 될까? 그렇지 않다. 만일 불복종의 씨앗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원죄이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마음,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 하나님의 은혜로 살기보다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선악을 판단하며 살려는 마음, 하나님을 나타내기보다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마음, 바로 이런 마음이 원죄의 모습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의 원인을 결코 인간의 자유에 두지 않는다. 자유가 있기 때문에 원죄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성경이 강조하는 건 자유의 남용이다. 자유가 남용된다고 해서 자유 자체를 악하다고 보는 건 옳지 않다.
남용은 보기에 따라서 자유의지와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자유에 초점을 두지 않고, 원죄의 제거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인간의 구속을 말하면서, 원죄를 힘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서 타락 후 인간은 죄의 권세에 사로잡혀 노예의 상태에 있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자유롭게 된다고 말한다. 원죄로 인해 자유를 상실한 것이지, 자유 때문에 원죄가 발생했다고 보지 않는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다. 그렇게 창조되었고,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 자체는 결코 사악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자유로운 인간을 자유롭지 않도록 구속하는 죄의 권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불복종의 씨는 자유가 아니라 바로 불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