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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경제연구원 이사장, 박찬종 변호사, 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윤재선입니다> 인터뷰
[주요 발언]
"김영삼 전 대통령, 정책 실패 있지만 민주주의 큰 틀 이뤄"
"김영삼 전 대통령, 절대 물러서지 않는 승부사적 기질 갖춰"
"민주주의 큰 틀은 김영삼 전 대통령 성격과 기본 자세에서 비롯된 것"
"김영삼 전 대통령, 과정 비난받을 수 있지만 결과는 문민 틀 공고히 해"
"여당과 야당, 온실에 앉아 챙겨먹기만 해"
"김무성 대표, 아들이라면 아버지 뜻 이어 받아야"
[발언 전문]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로 고인의 파란만장한 인생, 정치 역정이 재조명 되고 있습니다.
박찬종 아시아경제연구원 이사장 연결해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들, 그리고 김 전 대통령이 생전에 정치권에 남긴 메시지들, 한번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찬종 변호사님, 나와계십니까?
▶예, 안녕하십니까?
▷지난 22일 조문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빈소 찾으시고 어떤 생각들 좀 해 보셨습니까?
▶그날 아침 4시, 5시경에 언론사에서 전화가 많이 걸려와서 비로소 알게 됐는데 그 4~5일전에 김현철 교수하고 전화할 일이 있어서 가끔 전화를 하니까.. `아버님 어떠시냐`라고 하니까 `그만그만 하시다`고 그러더라고요.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제가 그날 오전 내내 혼자 여러가지 생각했는데 이렇게 돌아가시는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정치적 자유, 이 틀은 87년 6.29에서 직선제 헌법이 채택이 되고 그래서 비로소 민주적 외형적 틀이 갖춰졌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제도권에서는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희생과 헌신, 김영삼 대통령의 목숨을 건 단식과 유신 5공 정권으로의 투쟁, 김대중 대통령의 투옥과 사형 선고 그리고 미국의 추방. 이 두 분의 이러한 희생의 도덕적 기반 위에서 쌓아온 결과가 87년 6.29로 헌법 체제가 쟁취됐지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일 두 분이 아니었다면 88년, 89년 상당히 늦게 6.29가 왔을 것이다.. 그만큼 두 분의 공은 절대적이다..
그리고 김 대통령은 3당 합당이라고 하는 상당히 비난 받은 저희들도 반대했던 사람 중 하나인데 비난 받을 그러한 결단에 의해서 했지만 결국 92년 대통령이 돼서 그리고 그 일련의 대통령으로서의 일련의 정책, 하나회를 폐지했다든지 금융실명제를 했다라든지 재산 공개를 했다든지 지방자치를 강화했다든지 이런 정책을 통해서 문민틀을 공고히 한 이 공로는 배종찬 씨가 앞에서 얘기 들었는데 정책 실패도 있어요. 대통령으로서..
가장 큰 게 IMF고 측근 비리를 막지 못한 그러한 일련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대통령,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이룬 민주화의 틀 그리고 구조적으로 문민 틀을 강화해서 군의 정치적인 개입을 거의 영원히 차단했다는 이 공로는 높이 평가되어야한다..
▷박찬종 변호사께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언제 개인적으로, 정치적으로 만나셨습니까?
▶김영삼 대통령께서는 경남중학교를 졸업하셨고 저는 중고등학교 분리됐을 때 경남중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범 중고등학교 동창회 대 선배이시죠. 그리고 대학다닐 때 세미나에서 만나기 시작했고..
▷정치적으로는 언제 만나시게 된 건가요?
▶법조인이 된 후에 상도동에서 뵌 일이 있고.. 그 뒤에는 선거구가 같은 선거구였기 때문에 국회의원에서..
▷그게 8대 국회의원 선거때 부산 서구에서 맞대결 펼치신 것이죠?
▶그게 민망한 일인데 맞대결이라고 하는데 서구가 그 선거 때 33만명이 넘어서 분구가 되어야해요. 분구.. 근데 분구를 안했어요. 여당이.. 왜 그렇냐하면 분구하면 또 야당하나 늘어준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저는 분구를 예상하고 선거 나갈려고 마음먹었다고.. 분구가 안됐죠.. 같은 선거.. 제가 어떻게 김영삼 후보를 꺾을 수 있습니까?
▷그래도 9대, 10대때는 나란히 국회 입성하기도 했죠.
▶제가 그랬어요. 선배님 1등 당선시키고 저는 뒤따라 갈테니까 그렇게 찍어달라고.. 상당히 화제가 됐었죠.
▷박찬종 변호사께서는.. 글쎄요 저도 기자로서 출입을 했습니다만 보니까 상도동계 비주류 중의 비주류라고 표현을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비주류죠. 처음부터 했던 것은 아니니까..
▷김 전 대통령에 대해 흔히 ‘타고난 승부사’라는 평가들 많이 하는데요. 혹시 김 전 대통령의 승부사적 기질, 직접 실감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를 들면 5공때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하는데 84년에.. 83년 5.18 3주년을 기해서 23일의 죽음을 각오한 단식을 하셨죠. 보통 10일 넘어가고, 15일 넘어가면 아무리 강한 사람도 체력 한계를 넘어갑니다.
그런데 이 양반은 불퇴전 이런 아주 강한 성격이 있어요. 시간이 없어서 길게 말씀 못드리겠는데 성장배경도, 탄생 성장배경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한번 마음먹고 행동하겠다고 하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성격..
그래서 김영삼 대통령의 성격을 잘 아는 이가 이런 얘기를 한적 있습니다. 이 양반한테 누구든지 덤벼들면 반드시 지게 되어있다.. 지거나 실패하거나 넘어지게 되어있다.
예를 들면 박정희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을 어찌 하지 못했거든요. 79년 10월 4일 국회의원으로서 김영삼 의원을 무리하게 변칙적으로 제명해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22일 뒤 12.6 사태가 났어요. 역사적 과정을 하기에는 그렇습니다만 김영삼 의원을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 의원 의원직 박탈을 안했다고 한다면 저는 12.6이 안 나왔다고 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진 것이죠.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이 야당을 압살하고 했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대통령되고 역사 바로 세우기에 감옥에 가지 않았습니까? 그 다음에 이회창 후보가 당선 안된 것은 김영삼 대통령을 거슬렀기 때문에요. 김영삼 대통령을 득표 전략으로 IMF의 이를테면 공적으로 몰아버렸거든. 자기도 총리한 일이 있는데.. 안된 거에요.
▷이회창 전 총재 또 이 말씀 들으시면..
▶아니 제가 공개적으로 늘 하는 얘기니까 본인이 굉장히 후회하고 있죠. 버스 지나가고 후회하면 뭐 합니까? 그만큼 아주 성격이 강해요. 그렇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과 쌍벽을 이뤄서 오늘 민주주의에 임하는 틀을 완성을 했다.. 전적으로 성격과 기본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만 김영삼 전 대통령의 3당 합당에 대해선 역사적 평가가 엇갈립니다. 군부독재 종식을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느냐 아니면 쿠데타 세력과의 야합으로 아쉬운 선택이었느냐,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보세요?
▶지난 일입니다만 3당 합당 가지고 격렬하게 반대해서 이른바 꼬마 민주당이 탄생했죠.
이기택, 이철, 김광일, 노무현, 김정길, 박찬종 다섯 명이 꼬마 민주당 만들어서 전국 다니면서 어떻게 한지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야합이다, 지구를 떠나라라고 했어요.
김영삼 총재, 지구를 떠나라라고 그런 식으로 연설을 하고 우리 다 반대하고 했지만 정치 도의상 전혀 5공때 목숨을 걸고 희생자가 나와서 싸우던 그 세력하고 합해서 야합이라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어떻게 됐느냐..
과정은 분명히 비난받아야하는데 그걸 디딤돌로 대통령이 돼서 바로 칼을 거꾸로 들이댔죠. 5공 세력에 대해서.. 하나회 척결하고 이렇다보니까 과정에 있어서 분명히 비난받아야했지만 결과는 어찌됐든 문민틀을 공고히했다.. 그게 김영삼다운 결단이었다, 이런 평가를 할 수 있겠죠.
▷그 부분도 승부사적 기질이 발휘된 것이다..
▶물론이죠. 그렇게 봐야죠.
▷87년 대선 때던가요? 김수환 추기경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김대중 당시 두 야당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두 전직 대통령 모두 이 일을 평생 후회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어떻게 좀 회상하십니까?
▶ 5공때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신민당을 돕는다는 뜻이 아니고 예를 들면 86년에 전두환 정권이 학원 안정법을 만들라고 했거든요.
그게 뭐냐면 학원 안에 경찰에 의해 주둔해서 공개적으로 정부 반대하는 것을 막겠다고 했으니까 추기경께서 공개적으로 이런 일을 하면 안된다고 하셨죠.
그 직후에 말씀하신 후에 제가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이민우 총재를 모시고 추기경님께 가서 사전에 양해를 구해서 약속날짜에 가서 두 분이 의논을 하고 대외적으로 언론에 두 분이 이러한 합의를 했다고 발표한 것이 저였습니다.
그때 제가 인권위원장이었는데 이처럼 그런 고비고비마다 추기경님께서 예를 들면 우리 야당의 입장에서 응원을 받은 것이죠.
87년에 개헌이 완성됐지 않습니까? 그런데 분열 기미가 있으니까 불려갔어요. 어찌되느냐 그러길래 13명의 저를 비롯한 13명이 후보 단일화를 위한 정풍 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점차 이게 분열적으로 갈 수 밖에 없는데 제 기억으로 87년 11월 5일이 요한 바오로 2세 즉위 10주년 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청와대 옆에 있는 교황청 대사관에 기념 만찬이 있었는데 국회의원 가운데 신자 소수가 초청을 받았어요.
제가 갔더니 추기경께서 조금 있다가 들어오시더라고요. 저를 보더니 손짓을 해서 구석으로 가서 어떻게 되느냐라고 하는 뜻은 저하고 자주 만났으니까 후보 단일화가.. 언론에 자꾸 분열적으로 가니까 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참 어렵게 되어가는데 이렇다고 하니까 이 양반이 이러시더라고요.
내가 기록으로 남긴 일인데 너희들 뭐 하는 사람이냐.. 저는 나이도 어리고 추기경님하고 쭉 오랜 교류도 있고 하니까 만만하니까 그랬겠죠. 제가 찔끔 가만히 있으니까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이러시더라고.. 가슴을 치면서..
뭐 그래가지고 저는 어디 쫓기듯이 도망 나오듯이 구석에 앉아서 저녁 먹고 나왔는데 제가 그 다음날 삭발했어요.
▷저도 생각이 나는게 삭발을 꽤 오래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삭발하게 된 직접적 동기는 추기경님 꾸중을 듣고.. 그 꾸중은 YS DJ를 향한 것인데 그날 전화를 늦게 비서신부가 전화를 하셨더라고요. 추기경님께서 뉴스에 삭발하는 모습을 봤는데 내일 좀 뵙자고 하신다고..
그 다음날 저녁에 거실에 갔어요. 제가 저녁 7시쯤.. 명동 주교관에 추기경 거실에.. 저는 저녁을 안먹고 갔는데 저녁 어떻게 했냐고 여쭤보시더라고.. 먹었다고 했죠. 과일 갖고오라고 해서 3시간 얘기를 했는데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되겠냐고..
▷시간상 지금 그 말씀 하시면 인터뷰가 너무..
▶그래갖고 두 분을 부르라고 했죠. 두 분이 거기에 응하지 않았어요. 김수환 추기경이 참담한 심정이었을 겁니다. 김영삼, 김대중 두 분의 가장 실책은 후보 단일화를 안한겁니다.
그것이 결국은 영호남 지역갈등이 홈을 파게 되고 그 유산이 부정적으로 남은 부분이 그 부분이에요.
▷김 전 대통령의 유언이 ‘통합과 화합’이었던 것으로 전해지면서 여야 정치권 내부의 계파갈등, 공천싸움에 대한 비판이 드셉니다. 여당은 친박, 비박으로, 야당은 친노, 비노로 각각 대립하고 있는 현 정치권 상황, 어떻게 지켜보고 계십니까? 무슨 말을 정치권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습니까?
▶예를 들면 김영삼 대통령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이것만 알려져 있는데 그 당시 연설하실 때마다 민주주의는 피의 강을 건너 죽음의 산을 넘어 쟁취된다.. 그 연설 듣고 있으면 몸이 으스스해져요.
저 양반만이 군부정권의 저 얘기를 할 수 있다.. 이래가지고 목숨을 걸었고 김대중 대통령도 모든 희생을 각오해서 민주화 틀을 만들어놨잖아요. 지금은 닭 모가지 비틀 일도, 피의 강을 건널 일도 없는데 후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온실에 앉아서 챙겨먹고 있어..
두 정당은 국가로부터 엄청난 국가보조금을 정당이 받고 개인 후원회 만들고 제가 국회의원할 때는 보좌진이 5명밖에 안됐는데 지금은 12명이나 되고 모두 다 잘먹고 잘살고 그런데 앉아서 말씀하신 것처럼 친노, 비노, 친박, 비박 이래가지고 공천 싸움.. 이게 할 짓입니까?
그래서 저는 김영삼 대통령이 그저께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6년 전에 김대중 대통령이 돌아가셨거든요.
나이 차이 만큼 차이가 있는데 7년 전쯤 두 의원이 건강하실 때 앉아서 우리가 이렇게 했고 우리가 실패한 것은 이것이다, 너희들은 이렇게 이렇게 하라.. 하고 회초리를 들고 이걸 정리를 하고 떠났어야지 지금 말릴 사람이 없어. 김 추기경도 돌아가셨고 PBC 방송국 밖에 없을 것 같애.
PBC 방송국 에서 매일 같이 이들을.. 놈자 쓸뻔 했는데 아니 두 분 입장에서 놈들이지, 이 놈들하고.. 김무성 대표는 김영상 대통령의 아들이라고, 정치적 아들이라고.. 서청원 최고의원은 제자라고 그러더라고.. 아들과 제자가 어른과 스승의 뜻을 이런 정도로밖에 못 이어받습니까? 말이 되느냐 이거야..
▷김무성 대표는 정치적 아들이라고 표현했는데 정치적 아들답게 정치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아들이라면 아버지 뜻이 어떻다는 것을 제대로 이어받아야죠. 어떻게 이렇게 싸우고 합니까? 본인이 희생할 각오를 해야죠.
▷박 변호사님 이른 아침에 나와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예, 감사합니다.
▷다음 기회가 있으면 한번 더 모시겠습니다.
▶예, PBC 방송 제가 여러가지 부탁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채찍질 많이 하십시오.
▷아시아경제연구원의 박찬종 이사장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