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앞의 풀을 베지 않는 경지는,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 정도의 학문을 갖췄다면 괜찮지만, 염계 같은 학문이 없으면 그저 집만 황폐해질 뿐이다.
“어찌 집안 청소하는 것을 일로 삼겠는가.〔安事一室掃除〕”라는 경우는, 진번(陳蕃) 정도의 재목이면
괜찮지만 진번 같은 재목이 아니라면 그저 사람만 나태해질 뿐이다. 방과 마루, 뜰에 물 뿌리고 쓸었던
위 무공(衛武公) 정도는 되어야 유하혜(柳下惠)를 잘 배웠다고 할 것이다.연실이 가늘고
질기며 서로 이어진 것은 마치 집안사람, 부자, 형제의 정과 같다. 연 줄기는 마디마디 꺾어도 끊어지지 않는 것은 속에 실이 있기 때문이다.
부자와 형제 사이는 인륜으로 보아 한 몸의 정이다. 은근히 절친하고 도타워서 숨 쉬고 가렵고 아픈 것이 말하지 않는 가운데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훗날 세상일 때문에 관계가 틀어질 수는 있더라도, 아주 단절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기를 쓰고 살려는 풀이 있으니,
마디마다 뿌리가 생겨 끝도 없이 퍼져 가는데 사람들이 밟으면 더욱 퍼진다. 그 열매가 작고 많이 열리며, 열매가 맺을 때도 일정한 마디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김을 매서 없애도 이내 되살아난다. 그런 풀이 스스로 생명을 이어 나가는 계책은 참으로 교묘하다. 오곡이나 난초, 지초에 비하면
그 삶이 어찌 구차하지 않은가. 군자는 구차한 삶을 살지 않는다.
처음에 나는 피의 싹은 연하고 부드러우며 통통하고 희다. 잎은
반지르르한 짙은 녹색이고, 자라나면 걸출하여 언제나 탐스러워 보이지만, 다 자라면 열매나 줄기 어느 한 군데도 쓸모가 없으므로, 농부가 없애려고
하지만 식별하기가 어렵다. 또한 벼에 뿌리를 박고 있어서 뽑으면 벼도 함께 시들기 때문에 제거하기가 극히 어렵다. 또한 그것이 곧 벼의 세력을
빼앗고 위에서 덮어 버려, 반드시 벼 마디를 굽게 하고 옆의 벼를 병들게 하며 벼의 떨기를 밀쳐 낸다. 이를 통해 사람을 관찰해 보면 소인을
분별할 수 있다. 음사(陰邪)가 모인 바가 마디마디 절묘하게 부합하니, 조화의 뜻을 참으로 밝히기 어렵다. 조나 보리 중 가짜는 모두
그러하다.
초목의 열매로 늦게 익고 맛이 단 종류는 처음에는 대부분 쓰고 떫다. 처음부터 먹을 만한 종류는 다 자란 뒤에도 역시
단지 그러하여, 끝내 맛이 고만고만하다. 대기만성(大器晩成)에도 이런 이치가 있을 것이다.
동백(冬栢) 열매는 한 개당 세 방이
있고, 한 방에 세 알이 있다. 원기가 부족한 나무는 방마다 세 알을 갖추지 못하니, 쭉정이 하나에 성한 것이 둘이든지, 혹은 쭉정이 둘에 성한
것 하나인 경우가 있다. 더러 세 방 모두 합하여 쭉정이가 여덟이고 성한 것은 하나인 것이 방을 채워 알이 된 것도 있다. 혹시 구차하게 아홉
개를 채웠더라도 쭉정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알도 아니니, 쓸데가 없다. 재주가 짧으면서 구차하게 두루 잘하려고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왕골 중에 가짜가 있는데 방동사니〔方同三〕라고 부른다. 처음 났을 때는 비슷해서 극히 식별하기가 어렵다. 단, 진짜는
선명하며 말랐고 각이 지고 굳센 반면, 가짜는 거무스름하고 통통하며 둥글고 부드럽다. 진짜는 냄새가 없으며 가짜는 누린내가 난다. 이런 방법으로
사람을 구별할 수 있다.
초목의 꽃 중 홑잎이면서 소박한 것은 반드시 열매가 있고, 꽃잎이 많으면서 화려한 것은 열매가 없다. 더러
많은 잎을 자랑하려고 하지만 어디에 쓰겠는가.
오동나무와 버드나무에 꽃이 없는데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생김새에 덕(德)이 있기
때문이다. 소나무와 대나무에 꽃이 없는데도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맑고 곧아서 재목감이 되기 때문이다.
나무에 가시가
없더라도 마른 가지가 가시가 되고 겨울에 잎눈이 뾰족한데, 오동나무만 그렇지 않으니 나무 중에 덕이 있는 나무이다. 그러므로 봉황이 깃든다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태어나 현명하다고 해도 벗이 와서 머물지 않으면 또한 누구를 탓하겠는가.
소나무와 잣나무, 북나무는
처음에 나올 때는 작고 굽은 것도 있지만 크게 자랄수록 점점 곧게 된다. 잡목들은 처음 나올 때 무성하고 곧지만 마디가 생길 때쯤이면 반드시
굽고, 가지가 생길 때면 반드시 옆으로 가지를 친다. 크게 자랄수록 점점 옹이가 생기니, 기품이란 두려워할 만하도다.
나무 중에
딱딱하고 강한 것은 빨리 썩고, 부드러운 것은 오래간다. 딱딱하고 강한 것은 단단하게 막혀 있어서 습기가 남아 있고, 부드러운 것은 성글게 통할
수 있어서 양(陽)을 받아들이는 것 때문이 어찌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군자는 마음을 비워 다른 사람을 받아들인다.
초목 중에 귀하게 여길
만한 진짜는 반드시 가짜나 비슷한 것이 어지럽히니, 조물주의 재주가 괴이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도 원래 거짓된 사람이 참된 사람을 흐리는 것은
당연한 법이다.
오이씨는 사람이나 가축의 뱃속에 들어가 소화되었다가 부패되어 나와도 살아난다. 인분(人糞)으로 인해 더욱 무성해지니
오이씨는 교묘한 삶의 계책을 얻었다고 하겠다. 오곡이라면 그러하겠는가. 사람으로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사는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공자는 “그런 삶은 바르지 않다.〔其生也罔〕”라고 했다.봄여름의 재목은 쉽게 좀먹고,
가을겨울의 재목은 잘 썩지 않는다. 봄여름에는 꽃다운 기운이 피어나 밖으로 나가고, 가을겨울에는 참된 정기가 안으로 저장되기 때문이다. 사람도
쉽게 좀먹는 자는 가까이해서는 안 되니, 가까이하면 좀이 옮는다.
초목의 이치에 통달하지 못한 자가 큰 줄기의 기운만 온전히 하고자
하여 가지와 잎을 제거한다면 뿌리와 줄기도 수척해진다. 스스로 일가친척을 인정머리 없이 대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치는
사람이다.
꽃이나 과일 중 본래 품질이 보잘것없는 것도 접붙이기를 하면 좋은 품종이 되어 원래 품종과 다를 바가 없다. 사람이
스승을 따라 배우고 묻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풀이 모두 지초나 난초라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마는, 지초나 난초는 희귀하고 잡초는
많으니, 조물주의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정말 모든 풀이 지초나 난초라면 가축들의 먹이를 장만하지 못할 것이고, 잡초가 적다면 무엇으로 소나
말의 똥에 깔아 주겠는가. 잡초는 북돋우지 않아도 저절로 무성해지고, 오곡은 사람의 손이 가야만 자란다. 비루한 사람은 언제나 부귀를 누리지만,
이윤(伊尹)과 부열(傅說)은 반드시 초빙과 그림을 기다렸다.가시가 있는 초목만이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듯하지만, 가시가 없는 것도 그 생명을 다할 수 있으니, 왜 굳이 사납게 굴어 사물을 거부한단 말인가. 가시가 있는 것은 모두
재목으로 쓸 수가 없다. 이미 자기는 재목이 되지 못하는데 사납게 굴어서 스스로 보위하는 것이 제대로 된 계책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가시가
있으면 반드시 남을 얽게 만들기 마련이고, 그 마음이 오로지 사물을 해치는 데 쏠리게 되니, 스스로를 방어한들 무엇에
쓰겠는가.
엄나무는 처음 자랄 때는 사나운 가시가 온몸에 달려 있어 사람들이 가까이 갈 수 없다. 해가 가고 나무가 클수록 가시는
차츰 빠지고 마침내 훌륭한 재목이 된다. 이 어찌 나이가 들어가면서 덕을 이루는 격이 아니겠는가.
사람이 씨앗을 뿌리지 않았는데도
퍼지는 초목이 있다. 기실 그런 초목의 씨앗은 날리기도, 튀기도, 쏘기도, 붙기도 하면서 모두 스스로 퍼지는 계책이 있다. 하늘이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로 이런 법이 있다. 그러나 스스로 퍼지는 경우에는 모두 진귀하지 않다.
잡초의 열매는 저절로 떨어져 겨울을 나는데
물에 떠다니거나 진흙에 묻혀 있어도 그것이 사는 데는 해가 되지 않는다. 오곡이 저절로 떨어져 겨울을 나는 경우에는 모두 변하여 쭉정이가 된다.
그래서 군자는 스스로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국화의 품종으로는 금문황(錦紋黃)과 황학령(黃鶴鈴)이 가장 귀하다. 그렇다면 이 두
종은 잘 번식하지도 못하고, 또 쉽게 부러져 키우기 어려우니, 아마 귀한 사물은 하늘이 아끼는가 보다. 그러니 아무데서나 가장 잘 번식하는
소주황(蘇州黃) 같은 품종은 아마 하늘이 버린 사물인가 보다. 어찌 하늘의 인(仁)이 만물을 덮는데도 버리는 사물이 많은
것인가.
꽃잎이 활짝 피는 것은 천지가 나를 키워 준 영광에 보답하는 것이요, 오이가 씨를 머금고 있는 것은 천지가 나를 낳아 준
마음을 계승하는 것이다.
불은 공간이 있어야 불꽃이 피어나고, 마음은 비어야 밝음이 생긴다. 불꽃은 타올랐다가 쉽게 꺼지니, 사람이
밖으로 자랑하면 쉽게 패한다. 재 속에 간직하면 꺼지지 않으니, 성실이 마음속에 있으면 유구해지는 법이다.
쇠가 돌에 부딪히면 불이
생긴다. 어려움을 겪어야 지혜가 밝아지고, 사물이 부딪혀야 화복(禍福)이 이루어진다.
초목의 정기(精氣)가 맺혀 열매가 된다. 그
때문에 정기가 극도에 달하면 빛을 이루어 불타게 된다. 꽃이 무성한 초목의 열매는 윤기가 없으니 정기가 이미 샌
것이다.
심성(心星)의 이름은 대화(大火)인데 인방(寅方
동쪽)에 있다. 만물은 인(寅
동쪽)에서 발생하니 이것이 천심(天心)이다. 사람은 인에서 생기는데, 하늘에 참여하는 것은 마음이며
마음은 화장(火藏)이니 그 이치가 신묘하다.
중하(仲夏 5월)에 대화가 오(午)에 더해지면 건(乾)의 정위(正位)를 얻게
되니, 천하가 문명(文明)이 되고 만물을 모두 비추어 마침내 자라게 한다. 밝음은 언제나 반짝일 수 없으므로 7월에 서쪽으로
흘러가서 고요하고 곧은 데로 돌아가 감추어져 있다가 복원되어 다시 인(寅)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순환이 그치지 않으니, 인심(人心)도 이와
같다.
불은 공간이 없으면 밝음이 드러나지 못하고 연기로 어둡게 된다. 마음이 비어 있지 않으면 사사로운 의도가 치성하여 밝음을
가린다. 사사로움은 마음의 연기이다. 밝음이 이치를 비추지 못하여 속이 답답하고 더부룩하며 열이 나고 뱃속이 근심으로 검게 되니, 어찌 연기가
아니겠는가.
불이 지나치게 피어오르면 만물이 타들어 가서 그 재앙이 커지기 때문에 반드시 물로 제어해야 한다. 마음이 지나치게
치성하면 만사가 마르고 타서 몸도 따라서 망하게 되기 때문에 반드시 심지(心志)를 가지고 제어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정상을 회복할 수 있다.
《의경(醫經)》에
“신(腎)은
지(志)를 감추고 있다.〔腎藏志〕”라고 했는데, 지가 물의 곧음〔貞〕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물은 위로 가고 불은 아래로 내려와 기제(旣濟)가 되는 것이니, 내 한 몸이 다스려지고 만물도
다스려진다.
숯은 불의 바탕이다. 지나치게 타서 재가 되면 다시는 타오를 수 없다. 인심도 지나치게 밖으로 자랑하다가 바탕이
사라지면 다시 생겨날 수 없다.
숯은 검으니, 물의 색이다. 자신을 극복하는 것으로 바탕을 삼기 때문에 오래가도 없어지지 않는다.
“온화하여 공손한 사람은 덕의 기반이어라.〔溫溫恭人
維德之基〕”라는 말은 바로 이와 같은 뜻이다.
전(傳)에 또 “마음은 작게 가져라.〔心欲小〕”라고 했는데, 작게 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숯이다.
불은 밖을 밝히지만 안은 어두우니, 마음이 밖으로 자랑하는 데 힘쓰게 되면 반드시 속이 어두워진다.
불은 밖이
밝고 안은 어둡다. 어둠은 밝음의 뿌리이다.
안씨(顔氏)가 있어도 없는 듯, 찼어도 빈 듯했던 것이 아마 이에 가까울 것이다.불의
성질은 따스하다. 따스한 것이 성해지면 따뜻해지고, 따뜻한 것이 극도에 달하면 뜨거워진다. 뜨거운 것이 극도에 달하면 찬 것이 이른다. 사람이
따스한 데서 그칠 수 있으면 따뜻한 데서도 잘못이 없다. ‘난(煖)’이라는 글자는 ‘화(火)’ 자에 ‘완(緩)’ 자가 들어 있고,
‘온(溫)’이라는 글자는 ‘수(水)’ 자에 ‘온(縕)’ 자가 들어 있다. 불은 기를 수 있고, 느슨함은 마르지 않는다. 물은 윤택하게 하고
온(縕)은 덕을 축적하는 존재이다. 열(熱)은 불을 잡는 것이니,
그 누가 뜨거운 것을 잡고도 물에 가서 씻지 않으리오.잡귀(雜鬼)나 죽은 고기, 썩은
나무, 썩은 풀은 모두 불을 가지고 있다. 음(陰)이 극도에 이르면 양(陽)이 된다. 《주역》에
“음이 스스로 양과 맞설 만하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陰疑於陽必戰〕”라고 했는데, 전쟁을
하면 피를 흘리게 되니, 피는 불의 색이다. 여성 군주가 나라를 맡거나 소인(小人)이 권력을 제멋대로 하는 것은 모두 이런
상황이다.
불은 천(天)ㆍ지(地)ㆍ인(人)의 주된 기운이다. 하늘은 불이 아니면 밝지도 낳지도 못한다. 땅은 불이 아니면 따뜻하지도
기르지도 못한다. 사람은 불이 아니면 알 수도 운동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불이 지나치면 말라서 없어진다. 그러므로 하늘은 비ㆍ이슬ㆍ구름ㆍ안개를
통해서 제어하고, 땅은 태음(太陰)이나 연못, 하천을 통해 제어하며, 사람은 정혈(精血)과 침 등을 통해서 제어한다.
불은 반드시
쇠를 만나야 쓰임을 이룬다. 그러므로 심장과 폐는 횡경막 위에 함께 있는데 폐가 심장 위를 덮고 있으니, 쇠가 위에 있고 불이 아래에 있는
격이다. 심장은 뾰족하게 앞으로 나와 타오르는 성질이 있는데, 너무 지나치면 쇠를 병들게 한다. 심장이 움직이고 말이 폐에서 나오니 불을 때면
솥이 끓는 것과 같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인심(人心)의 움직임은 말을 통해서 내보이게 된다.”라고 했다. 장하(長夏
음력 6월)의 불은 쇠를 기다려서 사물을 이루는데, 역시 이런 이치이다. 그러므로 가을이 되면 만물은 모두
소리가 난다.
불은 형체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에 전달되는 과정에서 막히지 않고 그 변화를 만들어 낸다.
불의 성질은
가장 맹렬하여, 불을 만나면 타지 않는 사물이 없다. 장기(臟器) 중에는 심장이 불에 해당하는데, 심기(心氣)가 치성하여 그치지 않으면 스스로
불타는 상태에 이른다. 그래서 욕화(慾火)ㆍ기화(飢火)ㆍ색화(色火)ㆍ노화(怒火)ㆍ수화(愁火) 같은 명칭이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세간(世間)을
불구덩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사로운 의도의 발동은 모두 불이다. 군자는 마음을 맑게 하며 고요함을 주로 하고 뜻〔志〕으로 기를
통솔하면 촉촉한 기운은 위로 올라가고, 뜨겁고 맹렬한 기운은 아래로 가라앉는다. 그런 뒤에야 심화(心火)가 그저 텅 비고 밝게 되며 불이
치성하여 스스로 타 버리는 피해가 없다. 우리 유학(儒學)에서 덕을 기르는 일, 도가(道家)의 연단(鍊丹)이나 섭생, 의가(醫家)가 병을
치료하는 것은 모두 동일한 이치이다.
차고 서늘함은 죽이는 기운이지만, 따뜻함은 살리는 기운이다. 그러므로 땅의 덕은 불을 가지고
만물을 살린다. 《의경(醫經)》에 보면 배우고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 수 있다. 불이 일행(一行)을 주관하고 있지만, 나머지 사행(四行
토ㆍ금ㆍ수ㆍ목)도 모두 불이 없으면 이룰 수 없다. 그 때문에
상화(相火)가 유행하여 사람에게 작용하면 명문(命門)을 주관하고 소양(少陽)에 짝하여 생성과 변화를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군화(君火)는 마음의 주인이지만 그것이 너무 지나칠까 걱정하여 소음(少陰)과 짝을 지워 조급하고 치열해지는 것을
제어한다. 그래서 요순(堯舜) 이하의 여러 성인들은 모두 온화하고 공손함을 덕으로 삼았고, ‘온공(溫恭)’이라는 두 글자는 모두 ‘수(水)’
자를 따르니, 이는 소음의 상이다.
불의 덕은 밝고 따뜻하지만, 위로 지나치게 타오르는 것을 가장 꺼린다. 산악(山岳)은 불의
상(象)이므로 날로 앙상해진다.
황색은 흙의 정색(正色)이다. 그러나 진짜 황토에는 초목이 무성하지 않으며, 반드시 검은 흙으로
덮은 뒤에야 비옥해진다. 이는 태음(太陰)의 습한 흙을 얻은 뒤에야 비로소 만물을 낳을 수 있음을 말한다. 검은색은 태음의 색이다. 흙이 습하면
썩어서 비옥해진다. 그렇다고는 하나 황토가 바탕인 상태에서 검은 흙이 있어야 좋지, 순전히 검은 흙만 성글게 깔려 있으면 초목이 자랄 수
없으니, 그 이치를 알 수 있다.
산이 높으면 차츰 깎이고, 연못이 깊으면 차츰 진흙으로 메워진다. 구덩이를 파고 제방을 증축한들
땅에 보태지거나 덜어지는 바가 없는 것은 땅이 매우 광대하고 두텁기 때문이다. 산이 깎인다 해도 그 깎인 부분을 얻어 가는 것은 연못일 뿐이니,
이른바
“사람이 잃었고, 사람이 주웠다.”라고 했던 경우로, 땅에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주역》에
“땅의 형세는 곤(坤)이니, 군자가 이를 보고
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키운다.〔地勢坤 君子以 厚德載物〕”라고 했다.
육기(六氣
풍(風)ㆍ한(寒)ㆍ서(暑)ㆍ습(濕)ㆍ조(燥)ㆍ화(火)) 중에서 태음(太陰)이 습한 흙을 짝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흙은 생장과 양육을 주관하는데, 만일 그 성질이 마른 상태가 되면 사물이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주역》 〈곤괘(坤卦)〉 처음에
“공경하므로 안이 바르게 된다.〔敬以直內〕”라고 했는데, 공경은 고요함을 주로 하는 공부이고, 고요함은 음(陰)이다. 공경하면 온화하고
공손하며, 온화하고 공손하면 촉촉한 기운이 있다는 의미이니, 이것이 습(濕)이다.
〈홍범(洪範)〉에 “용모를 공손히 한다.〔貌恭〕”라는 말을 물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도 그런
것이다. 온화하고 공손함은 덕을 실천하는 기반이 되니, 역시 곤(坤)이 두텁다는 뜻이다.
땅이 흙을 낳을 때도 점진적으로 자라고
불어난다. 다만 급속하지 않고 안으로 불어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불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지만, 만고토록 땅이 무너지지 않는다. 어떤 사물이든
빨리 불어나고 밖으로 내보이는 존재는 오래가지 못하고 반드시 쓰러지니, 그 이치를 알 수 있다.
흙은 초목이 없다면 덕을 이룰 수가
없다. 나무가 흙을 이기지만 자기를 이기는 존재를 통하여 자신의 덕을 이루는 것이니, 이치가 또한 오묘하다. 오행(五行)이 모두 그러하고,
만물이 모두 그러하다. 만일 나를 이기는 존재가 없다면 아무리 금옥(金玉) 같은 자질이라도 쓸 데가 없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늘 자기를
이기는 자를 시기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끝내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묵은 흙은 기름지니, 정기(精氣)를 축적했다가 내놓기
때문이다.
대전(代田)에 곡식이
무성한 것은 쉬는 동안 지력이 발현되기 때문이다. 축적하지 않고 쉬지 않으면 취할 것이 없다.
측간(厠間)의 흙은 사물이 죽어서
부패 과정을 거치며 정기를 빼앗긴다. 푸석푸석하게 산성화된 흙은 물이 빠지고 기운이 떠서 흙의 성질이 손상된다. 부패는 사물을 자라게 하는
방법이지만 지나치면 죽는다. 기(氣)는 물을 비축하는 방법이지만 기운이 뜨면 새어 나간다. 정기를 빼앗기고 성질이 손상되는 것이 이처럼 두려운
것이다.
딱딱한 흙은 깎으면 빛이 난다. 안이 꽉 차 있으면서 겉으로는 곱다. 찰흙은 찰지지만 잘 갈라진다. 급하게 사귀면 쉽게
갈라진다.
불에 타면 흙은 기름지니, 불이라는 어머니의 기운을 받아서 흙 스스로에게 보태는 것이다. 물이 흐르면 흙은 뜨니, 자기를
이기는 흙을 따르다가 물 스스로를 잃는 경우이다.
“사랑한다면 힘들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말은 친한 이를 친애하는 보탬이다.
“네가 어찌 나를 대적하겠는가.”라는 말은 아랫사람을 능멸함으로써 생기는 손실이다.
흙은
부드러움을 덕으로 삼는다. 하지만 순수한 부드러움으로는 사물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땅바닥은 모두 돌이고, 물가도 모두 돌인 것이다.
순수한 부드러움은 육극(六極) 중에서 약(弱)에 해당한다.사행(四行
목ㆍ화ㆍ금ㆍ수)은 각기 한 계절을 전담하는데, 흙은 각 계절의 마지막 달에 붙어 있다. 그렇지만 사행끼리는
서로 통할 수 없는데, 흙이 사행을 포괄한다. 스스로 전담하는 자는 작지만, 물러나 겸손한 자는 큰 것이다.
다 같은 흙이지만 흙에
흙을 부으면 기름지게 된다. 이것이 벗이 보탬이 되는 이유이다.
서양토(鼠壤土)가 변화하여 염초(焰焇
화약 연료)가 되니, 음(陰)이 극에 이르면 양(陽)이 생기는 이치이다. 사물은 극에 이르면 변화하니, 유사한
사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썩은 풀은 변화하여 반딧불이 되니, 역시 천한 것이 극에 이르러 밝음이 생겨난 것이다.
오행(五行)
중에 유독 쇠만 소리가 나니, 바탕이 내실 있고 성질이 온전하기 때문이다.
- 내실 있고 온전한 것이
성(誠)의 본체이다. - 그러나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만일 두드리지 않았는데 저절로 소리가 난다면 이는 요사스러운
것이다. 두드리지 않았을 때 어디서 소리가 나는지 생각해 보라. 군자의 공부는 고요함을 주로 하여 움직임을 제어하는 것이니
“고요하게 움직이지 않다가 사물에 감응하여 마침내
통달한다.〔寂然不動 感而遂通〕”라는 말이 이것이다.
쇠에 소리가 없는 것은 마른 나무나 꺼진 재가 아니며, 두드렸을 때
소리가 나는 것은 재앙을 부르는 요사스러운 음향이 아니다. 막 소리가 없을 적에 소리를 낼 수 있는 근거가 이면에 있는 것이니, 그 이치는
온전하여 이지러진 데가 없으며, 한결같고 둘이 아니다. 경(敬)을 주로 하는 공부가 성숙하여,
도(道)가 잠시도 떠나지 않는 경지에 이른 연후에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쇠는 무겁지만
가운데가 비면 뜬다. 배는 뜨지만 가운데가 차면 가라앉는다. 그래서 오직 허(虛)만이 사물에 감응하고 허만이 위험을 건널 수 있다.
장주(莊周)는
“마음에 공허(空虛)가 없으면 육착(六鑿 이목구비(耳目口鼻)와
심(心)ㆍ지(知))이 서로 밀쳐 내고, 집 안에 공간이 없으면 며느리와 시어미가 말다툼한다.”라고 했는데, 이는
예부터 내려오는 신령한 성인의 말이다.
광산에서 금(金)을 캘 때 쇠망치로 캐고 체로 일어서 돌과 모래를 제거하는 데, 그 수고를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불 속에 넣어 두드리고 녹이기를 백 번 이상 단련해야 만들어지니, 그 공력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금의 아름다운 바탕은
생길 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지만, 이런 수고와 공력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참다운 보배가 된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 아는 성인은 배우지
않고도 잘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어찌 이치를 아는 자이겠는가. 그래서 중니(仲尼)는 스스로
“일흔 살이 되어서야 법도를 넘지 않았다.”라고 했으니, 배움에 뜻을 두는 15세 전에는 아직 반드시
성인이라고 할 수 없다.
가장 어리석은 자질을 가진 사람의 경우, 당초 모래나 돌과 비교해도 차이가 거의 없다. 또한 쇠망치로 캐거나 체로
이는 일과 두드리고 단련하는 노력마저 꺼리니, 결국 어리석음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물며 스스로 금이라고 착각하며 진짜 금을
어지럽히려고 하는 자는 요사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쇠는 굳세지만 단련하기에 따라 그릇이 되기도 한다. 그 쓰임에 따라서 변하고,
변하면서 또 그 쓰임에 따르기 때문에 참다운 보배가 된다. 치우치고 막혀 국량이 작으면서 굳세기만 하고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덕을
성취할 리가 없다.
황금과 은은 백 번을 단련해도 근량(斤兩)이 줄지 않고 빛깔이 더욱 번쩍거리니, 참으로 진기한
보배로다.
강금(鋼金)은 단련할수록 더욱 잘 깨지고, 유금(鍒金)은 담금질할수록 더욱 잘 문드러지는데, 쓸모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지나치든 못 미치든 모두 알맞은 것은 아니다.
생동(生銅)에 유석(鍮錫)을 넣으면 아름다운 그릇이 된다. 수철(水鐵
무쇠)에 유석을 넣으면 질기고 굳세게 된다. 선(善)을 받아들이는 보탬이다.
다 같은 쇠이지만,
대장간에서 얼마나 오래 정교하게 가공하느냐에 따라 진철(眞鐵)ㆍ수철(水鐵)ㆍ이철(利鐵)ㆍ둔철(鈍鐵)로 변화시킬 수 있다. 스승의 가르침이 사람의
기질(氣質)을 변화시키는 것 역시 이와 같다.
다 같이 불로 단련하고 물로 불리지만,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만들면 날카롭기가
막야검(莫邪劍)같이 되고, 솜씨 없는 대장장이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이를 통해 더 큰 일도 비유할 수 있다.
백 번을 단련하여
정밀해지면 신검(神劍)이 되고 변화할 수 있다.
한쪽으로 지극해서〔致曲〕부터 지극히 성실한 분이어야 변화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또한 같은
이치이다.
황금(黃金)과 백금(白金)이 아무리 귀하더라도 칼이나 낫을 만들면 무디고 항아리나 동이를 만들면 갈라진다. 납이 아무리
유약해도 탄환을 만드는 데는 적합하고, 강철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구멍을 메울 수는 없다. 각각 그 장점을 취하면 천하에 버릴 물건이 없다. 또
하나도 취할 데가 없는 사물도 있으니, 시기하고 집착하는 사람들은 변방에 보내 도깨비를 막는 데만 쓸 뿐이다.
- 곤(鯀)의 재능에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명령을 어기고 족류(族類)를 해쳤기 때문에 치적을 망쳤다. 천하의
큰 재앙은 시기나 집착보다 심한 것은 없다. 또한 덕이 요(堯)와 같았기에 오히려 곤을 시험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순(舜)이나 우(禹) 이하로는
한순간도 곤 같은 자를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나라에 있으면 나라를 망치고, 집안에 있으면 집안을 망치며, 향리(鄕里)에 있으면 향리를
어지럽히고, 마을에 있으면 마을을 망친다. 공자가 말하기를 “아무리 주공(周公)의 재능이
있더라도 교만하고 인색하면 볼 것이 없다.”라고 했으니, 교만과 인색은 시기와 집착의 뿌리이다.
-편금(片金)도 쨍그랑 소리가 나지만, 가운데가 빈 종고 소리만 못하다. 가운데가 비면 기(氣)가 차기 때문에 기가
진동하여 소리가 나는 것이다. 그러나 손으로 잡으면 소리가 나지 않고 사물이 붙어 있으면 울리지 않는데, 기운이 막혀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치우쳐 집착하는 것이 있으면 마음을 비울 수 없는 것도 이와 같다.
백금(白金)은 적동(赤銅)과 서로 합쳐지기
때문에, 은(銀)을 속이려는 자는 반드시 동(銅)을 가운데 넣어서 비싼 가격을 받아 낸다. 그래서 다른 부류와 서로 어울리면 필경 함께 사람을
속이기에 이르게 된다. 이 은도 죄가 있다.
천하의 사물 중에 형체가 없는 것보다 큰 것은 없다. 물이 형체가 없는 부류이기
때문에, 크게는 천지를 실을 수 있고, 그 덕은 만물을 낳을 수 있으며 그 노여움은 산을 뒤엎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에게 있는 것으로는 형체가
없는 선(善)보다 큰 것이 없고 형체가 없는 악(惡)보다 큰 것이 없다. 요ㆍ순ㆍ공자는 정해진 이름이 없었으니 바로 형체가 없는 것이다.
왕연(王衍)ㆍ노기(盧杞
당 덕종(唐德宗) 때의 간신)ㆍ조보(趙普
송나라 개국 공신)ㆍ하송(夏竦
송 인종(宋仁宗) 때의 간신)의
간사함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것도 형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은 세류(細流)를 모았기 때문에 위력이 크고, 부드럽게 모였기 때문에
세력이 강하다. 세류를 모으면 허위가 없기 때문에 위력이 저절로 커진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데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공력을 쌓아
호연지기가 천지에 가득 차고, 공손을 돈독히 함에 천하가 평안해지는 경지에 이르니 이는 세류를 쌓았던 힘이다. 부드러움이 모이면 거스르는 것이
없기 때문에 세력이 저절로 강해진다.
진실된 공손, 온화한 공손, 아름답고 부드러움, 온화하고 어짊을 모아서
백성들이 여기에서 화목하였고 만고토록 소왕(素王)의 대우를 받음에 이르니, 이는 부드러움을 모은
형세이다.
물은 구덩이를 만나면 채우고 막히면 그친다. 여울을 만나면 그곳으로 흐르고 통로를 만나면 쏟아 낸다. 사물이 막아도 자신이
손상되지 않으며 바람이 세차도 스스로 힘을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달하고 깊어지며 멀리 가고 오래갈 수 있으며, 미세하여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없고, 커서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성인(聖人)은 오래 있을 만하면 오래 있고 빨리 떠나야 하면 떠났으며 갈 만하면 가고 머물 만하면 머물렀으니,
집대성(集大成)한 존재라는 말이 이것이다.
물맛은 짜다. 그러나 짠맛을 주로 하지 않으면서 달고 쓰고 시고 매운
맛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진귀하게 쓰인다. 물의 색은 검다. 그러나 검은색을 주로 하지 않으면서 청색, 적색, 황색, 백색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널리 쓰인다. 그래서 스스로 주인입네 하면서 남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작은 데서 끝나고 만다.
짠맛은 천일(天一)의 맛이다. 만물을 견고하게 하고 썩지 않게 만드는 것이 소금이다. 소금은 생명의
맛이기 때문에 촉촉이 윤기가 난다. 촉촉한 윤기는 덕의 기반이다. 그래서 큰 바다의 온갖 자원은 거기에서 나온다.
검은색은
천일(天一)의 색깔이다. 사색(四色)은 검은색에서 끊어지고, 끊어지면 생긴다. 그러므로 검은색은 생명의 뿌리가 된다. 동지(冬至)는 흑(黑)의
극한이지만 양(陽)이 생기고, 지극한 고요는 흑의 극한이지만 도(道)가 생긴다. 옥루(屋漏
방 안의 북서쪽
귀퉁이)는 흑의 극한이지만 성(誠)이 생기며, 자시(子時)는 흑의 극한이지만 양이 이른다. 이윤(伊尹)이 농사를 짓고 여상(呂尙
강태공(姜太公))이 낚시를 하던 것은 흑의 상태를 지켰던 행동이다. 공자와 맹자가 벼슬에 나가지
않은 것은 흑을 체험한 것이다. 검은색이 된 뒤에야 오래되어도 변하지 않으므로 문자에는 검은색을 쓴다. 검은색이 된 뒤에야 정절을 지켜 한결같을
수 있으므로 혼례는 저녁에 한다. 이는
두병(斗柄)이 중동(仲冬 11월)에 자방(子方)을 가리키는
이치이다. 사람의 말은 화(火)에 속하는데, 화가 치성하면 재(災)가 된다. 그러므로 묵(嘿) 자는 구(口) 자에 흑(黑) 자가 결합되어
있으니, 묵 자의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여울이나 파도는 물의 노기(怒氣)이다. 단지 노(怒)의 이치만 가지고 있지, 여울과 파도는
그 원인이 물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돌에 부딪히면 여울이 용솟음치고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인다. 돌에서 멀어지고 바람이 가라앉으면
잔물결만 찰랑거리니 물이 언제 노한 적이 있는가. 군자의 노여움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쇠와 나무는 형질이 있어서 오염되면 고칠 수
있다. 물은 형질이 없으므로 한번 오염되면 변하지 않는다. 사람의 본성도 형태가 없기 때문에 습관이 나빠져서 본성이 돼 버렸으면 도저히 어쩔
수가 없다.
처마의 낙숫물이 돌을 뚫는 것은 힘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을 할 때는 집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물은 적시며 아래로 흐르고 불은 타면서 위로 올라간다. 그렇지만 불은 불대로 위에 있고 물은 물대로 아래에 있으면
음양(陰陽)이 교섭하지 않고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늘은 검으니 물의 색이고, 땅은 붉으니 불의 색이다. 하늘이 물의 색을 가지고
나무를 자라게 하니, 덕이 아래로 베풀어지는 것이다. 땅은 불의 덕을 가지고 흙이 생기게 하니 황(黃)이 위를 받드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비가 내리며, 물이 위에 있고 불이 아래에 있어서 수화기제(水火旣濟)가 된다.
조석(潮汐
밀물과 썰물)은 천지의 호흡이 만들기 때문에 그 이치가 아주 명백하다. 옛사람들은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찾았고 심지어
해추(海鰌)가 드나드는 징후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야기는 매우 고루한 말인데도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을
보면 옛날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말을 버리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생물은 호흡을 한다. 한번 수렴하고 한번 펴면서 차고 비는 것은
서로 올라타게 마련이니, 세상에서 늘 채우려고만 하는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고 망녕된가. 조석은 또한 상현(上弦)과 하현(下弦) 두 차례 불어나니
더욱 그 오묘함을 알 수 있다.
연적에 담긴 물은 바다의 조수(潮水)와 상응하여 차고 빈다. 천지 사이는 모두 하나의 기(氣)라는
것을 우물에서 징험할 수 있다. 초목과 사람의 몸도 함께 당연히 상응하지만 단지 사람들이 스스로 관찰하지 못할 뿐이다.
- 더러 조수가 솟는 샘이 있는데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 그렇다면 성인의 마음은 본래 천지와
하나의 기, 하나의 이(理)이므로 그 마음이 천지에 참여하여 덕을 합치는 것은 또한 당연하지 않겠는가.
제수(濟水)는 굳세고
양자강(揚子江)은 사나우며, 경수(涇水)는 흐리고 위수(渭水)는 맑다. 탕(湯)은 뜨겁고 초(椒)는 차갑다.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은 사람의
본성과 마찬가지이니, 이것 또한 기(氣)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되는 이(理)가 있기 때문에 기도 이러한 것이다. 사람의 본성에
악(惡)이 있는데, 역시 기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지만, 이가 그렇지 않으면 기는 그렇게 작용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은 모두 선하다는
말이 어찌 물의 본성은 늘 맑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물의 근본을 논의하자면 단지 모두 맑다고 해야지, 맑을 때도 있고 흐릴 때도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는 맹자의 견해인데, 정론이라고 하겠다. 흐린 물은 그대로 쓸 수 없으니 반드시 맑게 거른 뒤에 사용할 수 있는 물이 된다.
그렇지만 흐린 경수를 아무리 맑게 한다 해도 끝내 제수나 위수같이 될 수 없다. 이는 이(理)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공자가
“본성은 서로 가깝다.”라고 말했던 가르침이
결국 가장 적확하다. 지금 이 때문에 물은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한다거나, 또 물에는 삼품(三品)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를 알고 난
후에야 성선(性善)에 대해 의혹이 없을 것이다.
물의 성질은 옆으로 잘 새고 틈으로 쏟아진다. 새는 것은 작은 데서 시작하여 필경
커지고, 쏟아지는 것은 사방으로 거슬러 치솟아 넘쳐 흐른다. 사람 마음이 제멋대로 방탕해지는 것도 이와 같다. 집 안 깊숙이 남이 보지 않는
데서 하는 부끄러운 행동은 제방의 개미 구멍 격이고, 눈ㆍ코ㆍ귀ㆍ입 일곱 구멍의 욕심은 강둑이 넘쳐 나는 격이다.
여름에 가물면
논에 물을 대는데, 모두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남을 생각하지 않아서 의리를 완전히 손상하고도 도리에 벗어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늘 아무렇지 않게 “농사를 지으려면 물 욕심은 그럴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면서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는 세간에서 “과거 욕심, 산소 욕심,
혼인 욕심은 인간인 이상 있을 수밖에 없는 욕심이기 때문에, 욕심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더라도 마냥 잘못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욕심에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오직 나만 이익을 보려고 하고 의(義)를 돌아보지 않으면, 금(金) 한 냥 때문이든 천 대의
수레 때문이든 차이가 없는 것이다. 네 가지 욕심은 모두 나에게 이해가 절실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니
예(羿)와 한착(寒浞), 왕망(王莽)과 조조(曹操) 같은 자들이 가진 욕심과 행동이 어찌 과거,
묘자리, 혼인, 물 욕심에 그치겠는가. 이 네 가지 욕심이 세상에 끼치는 재앙은 홍수보다 심하니, 슬플
뿐이다.
《황제내경(皇帝內經)》 〈소문(素問)〉의 운기법(運氣法)에는 육기(六氣)를 그해의 간지(干支)에 배속했는데 홍수나 가뭄의
운(運)은 모두 일정한 운수가 있으니, 그 이치는 속일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요순(堯舜) 어느 해 갑자운(甲子運)이 한(漢)나라나 당(唐)나라
시대 갑자운과 같아서 홍수가 날 해가 되면 홍수가 나고 가뭄이 들 해가 되면 가뭄이 든다면, 그 누가 천도(天道)를 알기 어렵다고 하겠으며,
어찌 다시 재해를 두려워하겠는가. 일식(日食)에 일정한 법도가 있지만 일식이 일어나야 하는 데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있고, 6월에는 덥고
12월에는 춥게 마련이지만 12월에도 덥지 않고 1월에도 춥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렇듯 하늘과 사람이 상응하는 이치는 본디 획일적으로 논할 수
없다.
사람의 화복(禍福) 역시 처음 생명을 품부 받았을 적에는 정해진 명이 있지만 때에 따라 변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몸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대해 운명에 맡겨 버리고 행동을 마음대로 해서는 절대 안 된다. 하물며 운명은 길(吉)한데 행동을 삼가지 않았기
때문에 도리어 흉(凶)해졌거나, 운명은 흉한데 덕을 닦았기 때문에 도리어 길해진 경우에 대해서는 왕왕 명백한 증거가 있지 않은가. 반고(班固)의
부(賦)에
“신명(神明)한 도는 마음에 앞서 운명을 정하지만, 운명은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 사라지기도 하고 자라기도
한다.〔神先心而定命 命隨行而消息〕”라고 했으니, 진실로 통달한 학자의 말이다. 맹자가
“운명을 아는 자는 무너질 듯한 담장 아래 서 있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군자라면 본받아야 할
것이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은 바꿀 수 없는 성질이지만, 기교(機巧)를 부려 끌어올려서 막으면 산에 있게 할 수도 있다. 기교는
이처럼 두렵고, 위협은 이처럼 경계해야 할 일이다. 사람들이 기교 부리는 소인을 멀리하여 남에게 협박당하지 않는다면 도(道)에 가까울
것이다.
마른 먼지에 물을 부으면 먼지가 물을 흡수하지 못하고 물을 감싸서 방울이 된다. 먼지가 물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급하게
부으면 받아들이지 못한다.
가의(賈誼)가 문제(文帝)를 위해 통곡했던 것도 이와 같다.
공자가 증자에게 “하나로 관통한다.〔一貫〕”라고 일러준 일도, 처음 증자가 배우러 왔을 때 그런 말을
했다면 ‘하나로 관통한다.’는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먼지 위의 물방울 격이 되지 않았겠는가.
물이 습한 데로 흐르고 불이 마른 데로
번지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모두 상식적인 일이라고만 생각하지, 자신에게 절실한 비유로 삼을 줄은 모른다. 물과 불이 습하고 마른 데로 가는 것은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서로 찾는 것과 같아서 그렇게 되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된다. 막으려고 해도 금할 수 없고 늦추려고 해도 금할 수
없다. 군자와 소인이 끼리끼리 상종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스스로 수신(修身)하려고 하면서도 사사로움에 가리는 이유는 자신의
현명과 불초(不肖)를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마음에 기뻐하며 찾아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나에게 즐겨 찾아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아야
한다. 만일 내가 찾아가는 사람이 소인이라면 어찌 두렵지 않겠으며,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소인이라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이미
기(氣)가 맞아 서로 어울리게 되면 사사로움에 가려지고, 또 그 사람이 현명한지 아닌지를 깨닫지 못하니 더욱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소인
수준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선입견이 가슴속에 들어와 가로막지 않도록 해야 하고, 또 여러 사람의 공론(公論)이 어떠한지 보아야
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구구절절 깨우쳐 줄 수는 없고, 단지 자기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지극하면 말해 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된다. 기꺼이 금수가 되려는 자는 아무리 귀를 잡아당겨 간곡하게 깨우쳐 주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법이다.
비워 있어 물을
받아들이는 법이니, 연적의 가운데는 비어 있고 병도 가운데가 비어 있다. 물에 가라앉히면 당연히 물이 들어가지만, 연적의 두 구멍을 막으면 물이
들어가지 않고, 병 입구를 수면에 바싹 붙이고 가라앉혀도 물이 들어가지 않으니,
- 모든 그릇은 거꾸로
가라앉히면 병과 마찬가지로 물이 들어가지 않는다. - 기(氣)가 속에 차 있기 때문이다. 기는 형체가 없지만 물이 들어가지 못하는
현상을 통해서 기의 존재 양태를 알 수 있다. 맹자가 “호연지기는 지극히 크고 굳세며,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운다.”라고 말했는데도, 모든 사람이
의심하면서 호연지기가 굳세고 큰 것을 어떻게 증명하며, 호연지기가 하늘과 땅에 가득 차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묻는다.
군자가
도리와 짝하는 기운을 배양하면 정신과 심사는 그 본체가 우주를 포함하여 흠난 데가 없다. 천지는 하나의 거대한 연적이며, 육합(六合)은 하나의
거대한 병이다. 외물(外物)의 사악한 기운이 어떻게 들어오겠는가. 혹 하나의 일이 도리에 어긋나면 사악함이 바로 들어오니, 이는 연적의 두
구멍을 열면 기(氣)가 한 거품 새어 나가서 거기로 물이 한 방울 들어오고, 병의 입구를 반쯤 벌리면 기가 한쪽이 비게 되어 그쪽으로 물이
들어오는 것과 같다. 또한 이것이 이른바 하늘과 땅이 위에서 푸르고 아래에서 부드럽기만 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내 가슴속이 곧 천지이다.
호연지기가 가슴속을 채우면 외물이 들어올 수 없다.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라는 가르침을 지키지 못하면 눈이 비게 된다. 예가 아닌데 듣고,
예가 아닌데 말하며, 예가 아닌데 움직이면 칠규(七竅)와 사지(四肢)가 모두 비게 된다. 연적의 두 구멍을 모두 열고 병 주둥이가 모두 깨지면,
들어오는 물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연적에 물이 들어가지 않는 이치로 미루어 보면, 속에 나만 옳다는 마음이 들어 있으면 좋은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건곤은
물에 떠 있고 물은 공중에 떠 있네.〔乾坤浮水水浮空〕”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이 말을 의심했다. 지금 죽통에 물을 담아
거꾸로 매달아 보면 물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기가 잡고 있기 때문이다. 공기가 가득 차서 빨아들이는 듯한 상태이니, 물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물은 안이 밝고 불은 밖이 밝다. 안이 밝다는 것은 삶의 뿌리이고, 밖이 밝다는 것은 죽음의 조짐이다. 그래서 병든 사람
중에도 가슴 아래 온기가 있는 자는 살고, 진기(眞氣
생명의 원동력)가 밖으로 새어 나오는 자는
죽는다. 배우는 사람 중에서도 안을 지키는 사람은 몸과 집안을 보전하겠지만, 밖으로 자랑하려는 사람은 재앙이 한꺼번에 들이닥칠
것이다.
물은 만물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하늘에서 물은 위에 있으면서 비를 통해 은택을 베풀고, 땅에서 물은 위로 올라와서 초목을
키우며, 사람에게 물은 위로 올라와 정신과 기운을 배양한다. 임금의 덕은 물을 숭상하니 은택이 된다. 불꽃은 위로 끝까지 타오르면서 아래를
태운다. 하늘에서는 가뭄이 들고 땅에서는 마르며, 사람에게는 죽거나 병이 되고, 임금의 덕에는 스스로 불을 내는 양상이다.
노(勞)ㆍ수(愁)ㆍ초(焦
그을림)ㆍ진(疢
열병)ㆍ번(煩
번뇌)ㆍ전(煎
애태움) 같은 글자는 모두 화(火) 자를
부수로 삼았다.
물은 저절로 아래로 흐르기 때문에 점점 커지고, 산은 저절로 높기 때문에 차츰 깎인다. 그래서 겸손한 덕은 낮지만
넘을 수 없고, 항거하는 자는 망한다.
물은 강(剛)을 본체로 삼지 않기 때문에 사물이 가로막아도 손상되지 않는다. 크다고 해서
자만하지 않으므로 하해(河海)가 마르지 않는다.
물은 하나의 형태만 주로 하지 않고 사물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기 때문에 사람의
오장(五臟) 중에서
신장이 기교(伎巧)를 담당한다.물의 덕은
“군자는 그릇처럼 국한되지 않는다.〔君子之不器〕”라는 말의 의미와도 통한다.
물의 성질은
그 이치상 요행을 바라지 않아서 힘이 미치지 못하는 데로 넘어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수평을 이루면서 도달할 수 있다. 소인의 경우는
이와 반대이기 때문에 항상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낭패로 끝을 마친다.
물건을 물에 던지면 파문이 가까운 데부터 점차 멀어지고,
얼마 있다가 저쪽 언덕에 도달하는 것은 기가 흩어지면서 간격이 생긴다. 얼음이 얼어서 단단해지면, 이쪽 편에서 발을 구르기만 해도 갈라지는
소리가 금방 저쪽 언덕에 반응한다. 그 간격이 눈 깜짝할 새도 되지 않는 것은 기가 전일하여 간격이 없기 때문에 반응이 신속한 것이다. 성인의
마음은 하늘과 간격이 없기 때문에 그 반응도 이 경우와 같다. 보통의 필부필부(匹夫匹婦)라도 한마음으로 전념하면 하늘과도 간격이 없게 된다.
송 경공(宋景公)이 세 번 말했더니 별이 옮겨 갔고 기량(杞粱)의 아내가 통곡했더니 성이 무너진 것을 보아도 증험할 수 있다.
물은 공중에
매달려 끊어지지 않는 존재가 아니지만 비가 방울방울 쉬지 않고 내리면 작은 것이 쌓여 크게 되며, 처마 낙숫물이 계속 곧장 떨어지면 그 힘은
충분히 돌을 뚫을 수 있다. 쉬지 않음으로써 크게 되는 것은 모두 이런 부류이고,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이 되는 것은 모두 이런 이치이다.
경(敬)하면서 쉬지 않으면 하늘이고, 모든 선(善)을 모으면 성인이니, 처마 물이 나의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