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삼강(三綱)을 위해 순절했던 사람 중 물이나
불 속에 뛰어들던지 자신의 목을 매거나 베었던 사람들은 많았지만, 음식을 먹지 않고 죽은 사람은 적었습니다. 이는 대개 일이 순간적으로 절박하게
터졌을 때 이것저것 상관하지 않고 과감하게 결단하기는 쉽지만, 슬픈 마음이 저만치 가라앉았을 때 이런저런 고뇌를 안고 괴로움을 참아 내는 것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 신국(文信國)은 열흘을 굶었는데도 죽지 않자 다시 음식을 먹고 살아나 연경(燕京 북경)에 있는 감옥에서 지루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문 신국의 기필코 죽고자 했던 마음은
내내 변치 않았지만, 여러 날 죽지 않고 시간이 지나다 보니 살아서 절개를 지키는 것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이 무심결에 저절로 싹텄습니다. 이야말로
옛사람이 죽고 사는 일 또한 중대하다고
말했던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사리를 캐 먹으며 봄 한철이나마 버티다 기운이 다하여 죽은 사람은 우뚝한 저 서산(西山)의
백이(伯夷)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천년이 흐른 뒤 이제 장씨(張氏) 집안의 열부 오씨(吳氏)가 있어 열 달 동안 먹지 않다가 자신의 남편을
따라 죽었습니다. 그것이 어려운 일인지 쉬운 일인지는 결코 많은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오씨는 강진현(康津縣)의 시(詩)와
예(禮)를 아는 사대부 집안의 딸입니다. 어릴 때부터 어질고 순하며 반듯하고 조용하여 이미 보통 사람과 달랐습니다. 기유년(1789, 정조13)
12월, 같은 현(縣)에 사는 선비 장지한(張之翰)과 혼사를 허락했습니다. 장지한은 오랫동안 알 수 없는 질병을 앓다가 혼인하던 날 저녁 병이
심하게 도졌는데, 집으로 돌아가서 병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경술년(1790) 3월에 장지한이 결국 죽었습니다. 열부 오씨는 상(喪)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왔는데, 동네 입구를 바라보다 시댁으로 들어가서는 별다른 통곡 없이 시신 옆에 가서 누운 뒤 기절하고는 곧 죽은
듯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집안사람들이 황급히 구원하여 다음 날 새벽에야 겨우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때부터 여느 상례(喪禮)처럼 곡읍(哭泣)을
했으나, 다만 마실 것은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염습(殮襲)이 끝나자 시부모가 타이르기를 “우리는 다른 자식이 없는데 이런 변고를 만나니
두 노인이 궁색하고 외롭구나. 너에게 의지해서 목숨을 부지하려고 하니 너는 부디 억지로라도 음식을 먹고 너의 목숨을 보존하도록 해라.” 하니,
열부는 미음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먹은 것이 세끼를 모두 계산해도 채 한 줌이 되지 않았습니다.
열흘이 지나자마자 친정으로
돌아가겠다고 말씀드리자, 시부모는 오씨가 딱해서 허락했습니다. 돌아온 뒤 친정 부모에게 아뢰기를 “본래 관 옆에서 죽고 싶었으나 시부모께서
슬퍼하시고, 제가 이미 그분들의 며느리이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딱 끊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차마 남편의 관을 떠나 부모님 곁에서 뜻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부모님께는 이미 아들딸이 있으니, 딸자식 하나가 죽어야 할 때 죽는 게 어찌 슬프겠습니까.” 하고는, 끝내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몇 달이 지나 숨이 간당간당하자 부모도 음식을 먹지 않는 방법까지 써 가며 딸에게 먹기를 권했습니다. 그러자 마지못해 죽을 몇
숟가락 뜨고는 부모에게도 음식을 드시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3월부터 6월에 이르러서는 기운이 다 빠져 목숨이 끊어질 정도였습니다. 부모가
가슴을 치고 눈물을 삼키며 타이르기를 “네가 죽겠다면 죽는 것이지만, 극심한 더위에 시신이 썩어 문드러져 형체가 변하고 악취를 풍기는 게 어찌
네가 평소 원하던 일이겠느냐?” 하니, 곧 이 말을 듣고 미음을 먹었습니다.
7월에 날씨가 서늘해지자 오씨는 다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또 타이르기를 “이왕 죽지 않고 여기까지 왔으니, 네 남편이 무덤에 들어갈 때 네가 통곡하면서 보내 주는 편이 원통하게 죽은 남편을
위로하는 길이 아니겠느냐.” 하니, 또 마지못해 몇 숟가락을 먹었습니다. 가매장한 곳을 열고 장례를 치를 때가 되어 시댁으로 서둘러 가던 도중
겨우 십여 리를 가서는 기운이 딸려 장차 목숨이 끊어지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다시 말하기를 “길 가던 중에 죽는 짓은 남자도 안 될 일인데,
하물며 부인이겠느냐.” 하니, 즉시 곶감 한쪽을 달라고 하여 삼키다시피 먹었습니다.
장례 날짜가 되자 곡을 하며 전(奠)을 올리고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우제(虞祭)와 부제(祔祭)를 지낸 뒤, 시부모가 위로하며 타이르기를 “시부모의 죄가 커서 너의 운명을 박복하게 만들었다만,
세상에는 또 너 같은 사람이 많단다. 우리는 다른 자식도 없고 오직 너 하나뿐이란다. 옛날에도 바르고 효성스런 며느리가 종신토록 시부모를
봉양하며 죽은 남편의 뜻을 이룬 경우가 있었다. 이것이 참으로 아내 된 도리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열부가 말하기를 “죽지 않고 지금까지
온 것도 이 역시 하늘의 뜻입니다. 시부모님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몇 숟가락씩 먹고, ‘아버님’,
‘어머님’ 하고 부르며 간혹 웃기도 했으므로, 시부모는 위로를 받고 기뻐하면서 자식 잃은 슬픔을 잊었습니다.
수십 일이 지나자 또 돌아가
친정 부모를 뵙겠다고 청했습니다. 친정으로 돌아온 뒤 부모에게 아뢰기를 “시부모님의 사정이 참으로 딱합니다. 제가 죽지 않겠다는 뜻을 바로 보여
드렸더니 열흘 동안 계속 기뻐하시며 며느리인 저에게 재미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굳이 죽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하고는
또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부모가 이웃에 시집온 오씨의 시누이를 불러다 음식을 권했더니, 바로 말하기를 “시누이가 말씀하시는데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고는 마지못해 미음을 먹었습니다. 하루가 지나 시누이가 돌아가자 또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부모 자신이
단식을 하면서까지 먹으라고 권하니, 억지로 두세 숟가락을 받아먹었습니다.
내내 그렇게 견디다 겨울 10월이 되자 핏기가 다하고 피부는
푸석했으며, 머리카락이 삭아 빠져서 남은 것이 없었고, 다만 실낱같은 숨만 끊어지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12월 이후로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끝내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으며, 연말이 되어서는 두 눈동자가 화난 듯 부릅뜬 모습이었다가 점점 밖으로 튀어나왔습니다.
신해년(1791,
정조15) 1월 1일, 보통 때처럼 눈을 감고 있다가 가끔 가늘게 뜨고 영결하는 글을 지었고, 그날 밤 홀연히 일어나 앉아 크게 목 놓아
울었습니다. 남편의 상을 당한 뒤 이런 통곡은 처음이라 부모가 놀라서 물어보니, 곧 대답하기를 “불효 때문입니다, 불효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으며, 2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 편안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 이런 열부가 있습니까. 저 오씨의 마음가짐과 처사는 어릴 때부터 천성적으로 타고난 효성과 순종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혼인하던 날 저녁 남편이 위독한 병이 도졌을 때도, 자신의 인생이 필경 홀로 되리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고도 부모에게는 말이나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남편의 흉한 죽음을 당하자, 마음이 끊어지면 기운도 끊어질 것이니 함께 저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다행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는 슬픔조차 굳이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가 남편 시신 곁에서 죽었을 때는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저승사자가 원수가 되어 불행하게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한번 죽어서 남편을 따르겠다는 마음은 금석과
같았지만, 어질고 효성스런 본분은 차마 아주 내던질 수 없었습니다.
염한 뒤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써 시부모에게 지조를 지켜 자결하겠다는
뜻을 보인 것은
“사흘 만에 부엌에 들어갔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관 옆에서 죽지 못하고 친정으로 돌아와 죽으려고
했으니,
맹자가 말한 인(仁)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남편을 매장한 뒤 시부모를 편안히 위로하고 친정으로
돌아왔지만 부모가 음식을 끊자 시키는 대로 말을 듣고 죽을 먹었으니, 《예기》 〈내칙(內則)〉에
“유순하게 말하고 순종하며 따른다.”라고 한 말의 의미입니다.
시누이가 음식을 먹으라고 말을 하자
내키지는 않지만 곧 따른 것은 바로 《시경》에
“그 시집 사람들과
화목하네.”라고 한 말의 의미입니다. 6월에 죽으면 시신이 썩어 문드러져 형체가 변하리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이것이 바로
증자(曾子)가
“온전하게 돌아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장례를 지내러 오던 도중 마지못해 곶감을 삼킨 것은 바로
중유(仲由 자로(子路))가 죽을 때조차 갓끈을 고쳐 맸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기필코 죽겠다는 뜻이 열 달 동안 한결같았지만, 몇 숟가락의 미음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따름으로써 효도하고 순종하는 마음을 온전히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굶주림에 지치고
고뇌하는 와중에도 살아 무방하겠다는 의식이 애당초 싹트지 않았고 마침내 머리카락이 삭아서 빠지도록 전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저승사자를 원수처럼 보아 부릅뜬 눈이 돌출됐으니 은연중 하늘과 다투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목숨이 다할 때에 이르자 통곡하면서 자신의
효심을 털어놓고는 눈을 감고 편안하게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그러니 단연코
“인을 추구하다 인을 얻었으니 또 무엇을 원망하겠는가.”라는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아,
위대합니다! 저 오씨는 한 번 죽어서 이 여러 가지 선행을 아울렀습니다. 이것을 두고 만고에 한 번 있을 죽음이라고 평가한다고 해도 참으로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장부든 여자든 진실로 죽을 자리에 죽는 경우는 예부터 모두 드러내어 기리는 은전을 입었습니다. 그러니 이번 오씨가 죽은
날도 거룩한 조정에서 의열(義烈)을 고무하고 장려했던 교화에서 흥기된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결코 그 이유를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법칙
때문이라고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열부를 정표(旌表)하는 조치는 밝은 시대를 맞아 두 번째 일로 미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이런 까닭에 감히 이렇게 그 사안의 만분의 일이나마 거론하여 아룁니다. 숭청(崇聽)을 우러러 번거롭게 하니, 삼가 청하건대 특별히 굽어보고
채택해 주십시오. 청원서를 감영에 보고하여 예조를 거쳐 주상께 아뢰도록 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