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임진왜란 때 호남 한쪽의 깨끗한 지역만은 다행히
참혹한 전란 통에도 온전하게 보존되어 명(明)나라 군사를 뒷바라지하고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할 방도를 세웠으니,
완연히 한 고조(漢高祖)의 관중(關中)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하는 자들이 매번 호남을 중흥의
근본으로 삼는 것은 참으로 옳은 견해입니다. 호남이 중흥의 근본이 된 것은 웅치(熊峙)ㆍ이현(梨峴)ㆍ진양(晉陽
진주)의 세 전투에서 왜군의 예봉을 꺾은 일입니다.
세 전투에서 적장을 죽여 수급(首級)을 거두고
충렬(忠烈)을 세워 떨침으로써 호남 50고을이 마치
큰 자라 기둥으로 하늘을 떠받치고 여와씨(女媧氏)가 오색 돌을 다듬어 하늘의 구멍 난 부분을 때웠던 것처럼 수많은 백성들이 평안히 지내며
베개를 편히 베고, 임금의 수레가 환궁하기에 이르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이 다시 평안하게 되었으니, 증(贈) 좌찬성(左贊成)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이 장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무민공이 없었다면 세 전투에서 적을 몰살시키고 승리하는 공훈과 해와 별같이 밝게 빛나는 절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세 전투의 승리가 없었다면 호남의 제비는 모두 숲의 나무에 보금자리를 지었을 것이고, 호남의 백성들은 모두 죽음을
당해 간장(肝臟)과 뇌수(腦髓)가 땅에 널렸을 것입니다.
무슨 힘으로 하늘이 재앙을 내린 뜻을 생각하여 우리나라의 억만년 끝없는 아름다움을 전할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호남은 중흥의 근본이고, 세 전투의 승리는 호남의 근본이며, 무민공은 세 전투 승리의 근본입니다. 이를 궁극에까지
미루어 보면, 마침내 무민공의 큰 공훈과 장한 절개가 중흥의 근본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경인년(1590, 선조23)에 통신사(通信使)
일행으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무민공은 왜구(倭寇)가 반드시 침략해 올 것이라고 홀로 말했으며, 개인적으로 분개하여 상소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동복 현감(同福縣監)에 임명되자 준마(駿馬)를 미리 길렀고, 날마다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달렸으며,
일본에서 사 가지고 온 왜의 보도(寶刀) 2자루를 시험 삼아 사용했고, 사람과 말이 서로 친숙해지도록 준비했습니다. 과연 전란이 일어나게 되자
무민공이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은 모두 이 말들의 덕택이었으니, 그의 선견지명과 적을 헤아리는 지략은 이미 평범한 사람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웅치(熊峙) 전투에 이르러서는 적군이 호남으로 쳐들어가려고 금산(錦山)을 조금씩 갉아먹었지만
진안(鎭安)의 여러 장수가 모두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유독 무민공은 맞받아 크게 쳐부수어 한 진(陣)을 모두 섬멸시키고 마침내 적의 장수를 베니
적의 기세는 꺾였습니다. 그리하여 적들은 감히 남원(南原)으로 곧장 향하지 못했으니, 그들의 의도가 만족해서 그만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적이 영남에 있던 군사를 불러 모아 또 금산에서부터 방화와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면서 전주(全州)로 곧장 향하려고 했지만,
무민공이 여러 장수를 권면하여 거느려
이현(梨峴)에서 왜적을 막았습니다. 모두 세 번이나 탄환을 맞았지만 기세를 더욱 떨치고 용기를 더욱
북돋워, 쏘는 화살마다 반드시 적을 명중시켰습니다. 그의 동지인 편장(褊將) 공시억(孔時億)ㆍ위대기(魏大器) 등이 분발하여 크게 쳐부수니
왜적들은 마침내 물러갔습니다. 황진이 들것에 실려 동복(同福)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주를 지나는데, 전주의 남녀들이 마실 것을 준비해서 위로하기를
“공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미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또 한강 남쪽에서 왜적을 크게 이긴 공으로 승진하여 충청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습니다. 진주 전투에서는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다시 침범하자 여러 장수가 모두 피했지만, 유독 무민공은 창의사(倡義使) 등과 함께 진주성으로 들어가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성을 사수(死守)하기로 계책을 세웠습니다. 10일 동안 여러 번 싸워 거듭 이겼는데, 수비하는 전략은 모두 무민공이
용맹을 떨치며 선봉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적장을 죽여 왜적의 기세가 크게 위축되자, 무민공이
성에 올라가 큰소리로 외치기를 “오늘 전투는 크게 이겼다고 할 만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왜적이 몰래 쏜 탄환에 맞아 무민공이 죽게 되자, 성안의 기세가 꺾여 다음 날로 성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무민공이 살았을 때는 성이 보존되다가 무민공이 죽자 성이 함락되고 말았으니, 진주성 전투에서 무민공을 제일 크고 높은
공적을 세운 사람으로 삼아도 괜찮을 것입니다. 왜적의 예봉이 이미 꺾여 호남이 마침내 온전하게 되었으니, 앞서 말한 대로 무민공의 세 전투의
승리가 호남을 온전하게 한 근본이 되었다고 해도 과연 빈말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 두드러진 공로를 기록하여 표창하는 은전(恩典)을
시행했으니,
벼슬의 추증은 찬성(贊成)에 이르렀고 위패를 모시는
사당에 사액(賜額)하기에 이르렀으며, 휼전(恤典)으로는 시호(諡號)를 내리기에 이르렀습니다. 거룩한 조정에서 공로를 드러내 보답하고 의로움을
장려하는 은혜는 한 시대의 극진한 존숭이라고 할 수 있으니, 저승에서도 서운한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숭록대부(崇祿大夫)의 품계는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으레 추증되는 예(例)이고, 배향(配享)하는 의식은 원래 뛰어난 충렬을
장려하는 통상적인 규정입니다. 호남을 온전하게 하여 중흥의 토대를 마련한 제일 큰 공로를 세운 사람으로 논하자면, 오히려 특별한 은전이나 한
사람에 대한 특례가 아닙니다.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직분을 다하고 일 등급의 사람도 어렵게 여길 만큼 뛰어난 충의(忠義)를 세웠으니, 벼슬의
추증은 오히려 정1품도 부족한데, 원종공신의 예를 적용했습니다.
죽은 사람이야 결초보은했으니 비록 이 때문에 서운한 마음은 없겠지만,
후대의 사람이 장렬함을 칭송하며 성상(聖上)의 은혜를 바라는 마음에 어찌 그침이 있겠습니까. 다만 그 후손들이 빈한하고 쇠락하여, 조정의 반열에
참여하여 성상께 하소연할 만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마침내 위대한 공훈과 뛰어난 행적이 그을음을 뒤집어쓰고 좀이 쓴 책 상자 속에
매몰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역사에 누락된 채로 노인들이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면서 다만 황 찬성(黃贊成)이라고 일컬을 뿐이니, 장보(章甫
유생이 쓰는 관)를 쓰고 천성을 똑같이 지닌 자로서 어찌 평생 백 년 동안 억울한 점이 없겠습니까.
공의(公議)가 오래되면서 더욱 쌓였지만, 성대한 은전을 기다려서야 펼칠 수 있습니다.
마침내 삼가 생각하건대 성명(聖明)께서 온갖 정사를
돌보는 여가에
사방의 총명이 두루 도달하여 깊고 은미한 것까지 드러내 펴게 하여 이르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 무민공
한 사람의 일로써 진실로 우러러 아뢴다면 응당 즐거이 들어주실 것으로 여겨, 이에 감히 천리 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올라와 일제히 호소하여 위로
성상의 귀를 어지럽히게 되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더 큰 벼슬로 추증하여 호남의 남녀들이 임진전쟁 때 홀로 살아남게 해 준 공로를
이야기하면서 “이 목숨은 황 의정(黃議政)이 준 것입니다.”라고 말하게 하고, 황씨의 후손이 무민공의 음덕을 백대에 걸쳐 받게 하여 “이는 모두
무민공이 직분을 다한 공적 덕분입니다.”라고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기 위해 백 년 뒤에도 무민공을 되살려 내는 방도이자,
나약한 사람마저 만세토록 분발시키는 풍속을 진작하는 방도가 마땅히 다시 어떠해야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