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무에타이의 기원
아시아의 많은 민족이 자신들만의 독특한 격투술을 계승, 발전시켰듯이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도 유서 깊은 민족 격투기가 존재한다. 타격 격투기로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져 있는 태국의 무에타이(Muay Thai)1)를 비롯하여 미얀마의 띠네(Thine), 인도네시아의 펜챠크실랏 (Phenchyaksillat), 싱가폴의 파삭(Pasak), 베트남의 보비남 (Bobinam)과 같은 격투문화가 있다.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무에타이 혹은 타이복싱(Thai boxing)이라고 불리는 태국의 전통 격투술은 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또한 태국인의 무에타이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해서 태국에서는 모든 남자가 일생에 한 번 무에타이를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무에타이의 역사를 살펴보면 태국이 불교국가인 점을 들어 인도나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특히 중국 기원설은 태국의 선조는 대부분이 현 중국의 운남성 서북부에 있었던 태족이었고 명나라 시대에 중국 무술이 문화적 체계로 자리 잡으면서 전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무에타이의 일반적인 기원설은 태국의 오래된 <유트사트(Yuttsart)>라는 책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여기서 창, 칼이나 도끼 등과 같은 무기를 이용한 전투기술과 응용 기술로 사람의 신체를 무기화 하는 전투기술이 무에타이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태국의 역사에는 왕자들을 대표하는 투사들이 싸워서 이긴 쪽의 왕자가 왕위에 오른다는 14세기의 왕위 계승권에 관한 전설을 포함하여 국가적인 중요한 행사에서 논쟁을 가라앉히는 방법으로서 무에타이를 사용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무에타이의 기원은 확실한 연대나 기록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아주 적은 양의 문서만으이 전해 내려오고 있고 대부분의 사료들은 구전에 구전을 거듭하여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일부 구전은 부풀려진 부분이 있으며 무아이(Muay)란 단어도 그 단어를 정확히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를 알 수 없다고 한다.
'무아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지금의 인도 지역에 사용되는 힌두어의 기원)로 몽콘, 프락치앗으로 영혼을 묶는다는 뜻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는 태국을 비롯한 베트남,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등 여러 국가가 지금도 국경을 나누며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수천 년 간 고대 국가 간의 잦은 전쟁과 침입, 도적 등의 피해를 서로 겪어가며 이들 국가는 다양한 군사 기술이 발달하게 되었다.
앞서 무에타이가 군사 무술로 출발하였다고 언급했듯이 전투를 위한 무술로서 다양한 기술이 발전되게 된 것이다. 무에타이는 태국에서만이 탄생하고 발전되고 보급된 무술이 아니라 주변국과의 잦은 전쟁과 싸움을 통하여 발전된 무술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을 제외한 이 모든 국가는 국력과 크기가 비슷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태국의 정치 전략 역시 중국과의 경쟁은 피하였지만 태국의 주변국 즉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등과 치열한 경쟁 구도 내에서 전쟁을 치르게 된다. 특히 미얀마와는 많은 전쟁을 치루며 서로 이기기도 하고 지기를 반복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자연스레 각개전투 기술이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사실은 왜 태국에서만 무에타이가 계속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냐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오랜 시간을 거쳐 인도차이나 반도 중에서 태국이 가장 부강한 나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무에타이 경연대회 같은 형식의 축제가 열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크게는 무에라오(Muay Laos)라는 대회와 무에버마(Lethwei)라는 대회가 열렸다.
무에라오는 라오스와 인접한 농카이에서 열린 대회였으며 이 지역은 이산 지역과 가까운 곳이다. 현재에도 가장 많은 무에타이 선수를 배출하는 곳이 바로 태국 북동부인 이산 지역이다.
무에버마는(Lethwei) 메솟(Mesot)과 딱(Tak) 주변에서 열리는 대회가 있는데 이들 대회 모두 송끄란 축제(Song kran Festival)2) 때 열렸다.
무에타이의 시작은 불교와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무에타이 초기 때부터 불교와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태국의 불교는 소승불교로서 인도에서 전파되었고, 우리나라의 불교와는 다른 독특한 태국만의 불교양식을 갖고 있다. 힌두교와 불교의 융합으로 태국의 불교는 태국만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꽃피웠으며 다양한 사원과 더불어 현재까지 관광자원, 나아가 태국인 자신들만의 신앙으로 깊게 자리잡혀있다.
따라서 인도에서 유입이 된 불교는 당시 태국 백성들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흡수가 되었다. 당시 강대국 인도의 간다라 예술과 종교의 유입이 태국 내에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태국은 많은 전쟁을 겪어나가면서 생겨난 퇴역 군인들과 그 중에 고위 장교급, 왕족과 우수한 교육을 받은 많은 엘리트층 사람들이 승려가 되는 일들이 종종 있었으며 이러한 현상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태국의 불교는 국가 내에 더욱 더 강하게 자리 잡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승려가 된다는 것은 태국 내에서는 현재까지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한민국 남자가 군대를 대부분 가듯이 태국 남성은 살면서 몇 년 혹은 몇 주라도 반드시 승려 수업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까지 왕위에 있는 태국의 푸미폰 국왕 역시 일정 기간 승려 수업을 받고 승려로서 살았다.
이렇게 태국 내에 불교가 국교가 되는 것과 동시에 상류층, 왕족 심지어 퇴역 고위 장교 대다수가 불교신자였던 것을 고려해 볼 때 온 나라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불교 신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찬란한 불교 유산을 꽃피워나가는 동안 종교 행사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각종 문화 행사와 축제가 열리게 되었고, 앞서 언급한 퇴역장교, 군인 출신 승려들이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무기를 들지 않고 가까이에서 방어 및 공격할 수 있는 호신술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무에타이의 보급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게 되었다.
한편 무에타이의 시합 전 선수는 '와이크루(Wai Khruu)3)' 의식을 한다. 와이크루는 전통적인 '사마라(Samarha)' 음악이 링에 울리면 신과 왕 그리고 스승에 대한 존경과 경의의 표현으로 행하여지는데, 모든 선수들의 마음속에서 감사의 느낌을 반영하는 일종의 댄스와 같은 의식이다. '와이(Wai)'는 기원, '크루(Khruu)'는 스승을 뜻하며 즉 스승에게 보내는 기원을 뜻한다. 하지만 스승뿐 아니라 신과 자신의 부모님과 친척들과 친구 등에도 자신의 승리와 안전을 기원하며 이를 지켜보는 관중들에게는 화려한 동작으로 감탄을 자아낸다. 동시에 와이크루는 몸의 근육과 팔, 다리, 무릎, 팔꿈치를 풀어주는 일종의 몸 풀기 운동인 셈이다.
하지만 단순한 몸 풀기 운동에서만 지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선수들은 시합 전에 무엇인가를 기원한다. 그 기원은 사마라 음악이 경기장에 울리면 조용하고 엄숙한 동작이나 때에 따라서는 화려한 동작과 함께 이루어지는데 이것을 '와이크루'라고 한다.
와이크루 중에는 세 번 반복 하는 동작이 자주 나오게 된다. 절을 해도 세 번을 하며 날갯짓도 세 번을 한다.
태국 사람도 한국 사람과 마찬가지로 산 사람에게는 절을 한 번 하고 죽은 사람에게는 절을 두 번 한다. 차이점은 신에게는 절을 세 번 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믿는 신의 보호를 받으며 자신의 스승에게 감사와 승리의 기원을 보내는 의식인 것이다. 현대의 와이크루는 예능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더욱 즐겁게 하기도 한다. 무에타이 경기 외에 와이크루 대회만 따로 태국에서 열리는데 와이크루를 멋지게 하여 수상하는 선수에게는 많은 상금이 지급되기도 한다.
와이크루가 완성되면 선수는 '몽콘(Mong kon)'을 벗는다.
몽콘은 머리를 보호하는 주술적 소품이며 손가락 두께의 약 90cm 되는 끈을 머리 둘레에 감아 그 끝을 머리 사이즈에 맞게 묶어 고정시키는 형태로, 바느질한 섬유로 묶든가 보호용 끈으로 동여맨다. 몽콘은 전사들의 상징이라고 한다. 고대 태국의 군인들은 전쟁터에 나가기 전 자신의 고향 스님들로 부터 몽콘과 '쁘랏치앗(Prajiat)'을 받아 몽콘을 머리에 쓰고 쁘락치앗을 팔에 감고 전쟁터에 나갔다고 한다.
쁘랏치앗은 마법적인 띠로 불러지며, 시합 동안에 복서의 한 팔 또는 양 팔에 묶게 되는데 '파 사루(Pha- salu)'라고도 하며 쁘랏치앗은 시합 중에도 착용한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 중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 탐마촉이라는 승려가 있었다고 한다. 그 승려가 주는 몽콘은 도끼나 칼로부터 머리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고 프랏치앗은 칼에 의하여 팔이 잘리는 것을 막아준다고 믿었다.
즉, 이 두 가지는 목숨을 지켜주는 하나의 부적인 셈이다. 태국인들은 몽콘과 프랏치앗을 매운 소중하게 다루고 여자가 몽콘을 만지거나 떨어뜨리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는다. 자신의 머리보다 높은 곳에 신이 있다고 믿는 그들이기 때문에 몽콘은 항상 높은 곳에 보관을 한다. 즉 몽콘은 신이 주는 신체 보호의 선물인 셈이다.
무에타이의 기술로는 주먹(Toi), 발차기(Dhe), 팔꿈치(Sok), 무릎(Kow)과 같은 전신을 이용한 타격 방법이 있다. 현재 무에타이를 수련하는 도장은 태국 내에 6천개가 넘으며 선수도 약 6만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또한 군사 무술에서 전신을 무기로 이용한 무에보란4)이 발전한 것이 무에타이라면
검(Krabii), 봉(Plong), 창(Ngao)등 무기를 이용한 무술 '끄라비끄라봉'이 있다.5)
끄라비끄라봉은 고대의 군사 기술로 외검과 쌍검 및 창과 방패 등의 13종의 무기를 이용하여 한손에는 붕대를 감싸고 다른 한 손에는 무기를 들고 병행해서 상대를 제압하는 람무에와 함께 고대로 내려오는 무에타이의 전통적 무기술이다. 무기와 맨손 격투술(람무에)을 적절히 혼합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근거리는 물론 먼 거리의 상대까지도 제압하는데 용이하다.
여기서 람무에(Ram muay)6)는 무에타이의 한 종류로 무기나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신이 인간에게 준 신체를 이용한 무술로서 팔꿈치, 무릎, 발, 주먹 등을 이용한 맨손 격투술이다. 인간의 신체를 최대한 이용하여 무기화시킨 과학적인 무술로서, 천 년의 역사를 가진 태국 전통 무술이며 현대의 경기 무에타이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3) 무에타이의 중흥기
라마 5세는 태국의 근대화에 가장 크게 공헌한 영주로서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줄라롱컨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데, 부왕 라마 4세의 뒤를 이어 1868년에 즉위하였다. 그는 유럽의 문물제도를 도입하여, 행정조직, 사법제도, 철도, 우편 등 여러 부문에 걸쳐 개혁과 정비를 하였다. 대내적으로는 1905년에 노예제를 폐지하고, 대외적으로는 외국의 치외법권의 철폐 등 불평등조약의 개정에 노력하여 국권회복과 보존에 힘썼다. 또 왕족의 유럽, 미국 등지에의 유학을 장려하며 근대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였다. 따라서 라마 5세는 태국 근대사의 기점이 된 왕이라 할 수 있다.
줄라롱컨 국왕은 해박한 견해와 호기심 많은 성격으로 궁금한 부분을 계속 연구하고 탐구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왕 스스로가 전제 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는 개혁을 강행하였으며 개인의 욕심을 내려놓고 태국 근대화에 앞장섰다.
외교적으로도 훌륭하게 정치를 한 왕으로 알려져 있는데 열강들의 침략과 식민 통치의 위기 앞에서도 지혜롭게 외교적으로 잘 해결한 왕으로 알려져 있고 현재의 국왕인 푸미폰 국왕과 함께 태국 국민의 마음속에 크게 사랑받고 있는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무에타이는 라마 5세 때에 국왕이 선호하는 예술로 더욱 진보되었다. 나라는 평화로웠으며 무에타이는 신체운동, 자기 호신술, 레크리에이션 그리고 자기 개발 요소로 발전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4명의 무에타이 선수가 라마 5세 때 총애를 받고 명예를 안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무에타이의 붐을 타고 기초를 닦았으며 미래의 경기화, 스포츠화 되는 데 기반이 되었다.
4) 국내 무에타이의 도입
국내 무에타이 도입 이전에는 사회단체인 '국제 격투기 연맹'이 무에타이의 전신이었다. 1991년 초에 이 단체가 첫 경기를 열게 되며 같은 해 12월 21일 제1회 국제 격투기 연맹 지도자 교육이 시작이 되었다.
무에타이 이전의 기술은 태권도의 발차기, 복싱의 주먹 기술을 바탕으로 훈련이 이루어졌고 자연스럽게 경기의 형태도 이 두 가지가 병행이 된 경기의 형태를 이루게 된다. 차후 이 두 가지 무술이 위주가 된 초기 격투기 경기의 모습에 극진 공수도의 기술이 합쳐지게 되었다. 국제 격투기 연맹 자체가 극진 공수도의 시합도 함께 하면서 이 연맹을 창설한 것이었기 때문에 극진 공수도 또한 자연스럽게 일부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후 1992년 3월 22일 서울시 광진구 구의동에 위치한 명성여고에서 국제 격투기 연맹 최초의 신인왕 선수권 대회가 열렸으며 지역별로 많은 협회 또한 발족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많은 경기가 자주 열리게 되었고 초기 격투기 대회가 왕성하게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이듬해 1993년 8월 15일부터 15일 동안 격투기 체육관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태국에 '사시파파짐(Sasiprapa gym)'에서 무에타이를 연수하였다. 사시파파짐 관장인 탁쿤(Thakoon Pongsupha)과 함께 훈련을 하였으며 당시에는 무에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보다 타이복싱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태국 내에서도 더 많았었다.
연수 이후 국내 격투기 체육관에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되며 태국에서 볼 수 있었던 무에타이 기술을 국내 훈련에서도 볼 수 있었다. 격투기 연맹이란 이름으로 훈련과 경기가 이루어지긴 하였으나, 경기의 모습은 전통 무에타이의 모습을 서서히 갖추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1994년 3월 6일 MBC 문화 체육관에서 열린 전국 신인 격투기 대회에서는 비로소 무에타이의 모습을 띄게 되었다.
대한민국이 세계 무에타이 협회에 정식으로 등록하게 된 것은 1994년 10월 28일 방콕에 위치한 팔레스 호텔에서 세계 아마추어 무에타이 연맹 회원국으로 정회원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이 날은 태국과 한국, 양국에 매우 기념비적인 날로서 태국 방송사에서도 한국이 세계 무에타이 협회에 회원국으로 가입하게 된 것을 취재하였다.
또한 이 날 태국 무에타이 회장의 연설에서 세계 많은 나라와 또한 태국 내에서도 ‘무에타이’라는 정식 명칭보다 ‘타이복싱’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앞으로 무에타이라는 통일된 정식 명칭을 사용해 달라는 당부 연설도 있었다. 그 이후 현재까지 '타이복싱'에서 '무에타이'라는 정식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회원국 가입 이후 '격투기 연맹'에서 '대한 무에타이 협회'로 명칭 변경을 하게 된다. 태권도, 복싱, 극진 공수도의 훈련 방식을 통해 무에타이 이전에 킥복싱이 국내에 먼저 도입이 된 이후 서울시 서초구 잠원동에 위치한 영동 삼산 체육관을 시작으로 킥복싱 체육관이 무에타이 체육관으로 편입되는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