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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양산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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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스크랩 백범 김구 선생
바르샤빠 추천 0 조회 74 11.06.24 11:24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의 총격 암살당하였다.


오는 6월26일이 백범 김구선생께서 이승만과 미국의 사주를 받은 안두희란 넘에게 암살 당하신 날이고 62주기랍니다.

그래서 백범 선생 어록과 자손들(증손자)이야기를 인터넷에서 찾아 올립니다.


매년 6.25에 묻혀 잘 모르는것 같아 너무 안타깝습니다.




아래는 자손들 이야기입니다. 인터넷 뉴스 기사 전재합니다.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된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은 일본으로부터 나라의 독립을 찾아오는 데 일생을 바쳤다. 하지만 남북한 통일의 꿈은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둘째 아들 김신 前공참총장 지내 

그의 둘째 아들 김신(88) 전 공군참모총장은 우리 군의 공군 조종사로 6·25전쟁에 참전해 자유를 지켜냈다. 그는 1960년 8월 38살의 젊은 나이로 제6대 공군참모총장에 올라 우리 공군의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김구 선생의 손자이자 김신 장군의 아들인 김양 국가보훈처장은 6·25전쟁이 끝날 무렵 태어났다. 그는 1979년 9월 공군 중위로 전역했다. 

이후 방위산업에 몰두했다가 2005년 상하이 총영사를 시작으로 다시 국가에 봉사하는 삶을 시작했다. 

2008년 국가보훈처장에 임명돼 우리 나라 독립역사를 쓴 분들과 6·25전쟁에서 자유를 지켜낸 영웅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위한 보훈정책의 최고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다. 

그리고 김구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61년이 지나 그의 증손자도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길에 오른다. 

김 처장의 아들 용만(24)씨가 그 주인공. 용만씨는 29일 공군 장교후보생 125기 임관식에서 소위로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용만씨는 올해 5월 미국 조지워싱턴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귀국해 9월 공군 장교후보생으로 입대했다. 공군 교육사령부에서 3개월간의 교육을 끝내고 29일부터 3년간 정보장교로 근무하게 된다. 

용만씨가 공군 장교로 임관하게 됨에 따라 할아버지 김신 장군과 아버지 김처장의 뒤를 이어 3대째 공군 장교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증조 할아버지 김구 선생과 함께 4대가 모두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셈이다. 

진정한 위국헌신(爲國獻身) 명문가의 탄생이다. 

●손자 김양 국가보훈처장 역임 

방배중학교 2학년 시절 미국으로 유학길에 오른 용만씨는 2005년 미국 하와이 주 미드퍼시픽 중고교(Mid-Pacific Institute)를 졸업하며 거의 모든 과목에서 A학점을 받았다. 빈민층 지역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에도 적극 참여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최우수 학생 표창장(Outstanding Academic Excellence Awards)을 받기도 했다. 

용만 씨는 당시 "대학을 졸업한 뒤 공군 참모총장을 지낸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군장교로 복무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 증조부께서 염원하셨던 민족 통일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19세 청년이 자신이 증조부에게 다짐한 약속을 모두 지킨 셈이다. 

보훈처 관계자는 "대한민국의 큰 어른 김구 선생의 증손자이지만 나라를 위한 봉사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가족들의 생각에 홍보계획조차 잡지 않았다."고 전했다. 29일 임관식에는 김신 전 공군참모총장과 김 처장 등 가족들이 모두 참석할 예정이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서울신문 M & M]세상에 태어나서 '절대'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 중 하나가 가족이다. 내가 절대로 선택할 수 없는 아버지, 할아버지. 

얼마 전 '김구 선생 증손자 공군 장교로 입대' 라는 기사를 봤다.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족'에 대해 물어볼 사람으로 이보다 더 좋은 대상이 있을까? 

꼭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 들어보고 싶었다. 그와 그의 가족 이야기를. 그래서 그가 임관한 다음 날, 백범 김구 기념관으로 그를 만나러 갔다. 



Q: 늦었지만 임관을 축하하며, 이제 3대째 공군장교로 군에 복무하게 된다. 1960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공군참모총장이 된 할아버지, 그리고 79년 공군중위로 전역한 아버지, 그리고 김 소위까지. 공군에 입대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A: "입대한 특별한 이유보다는 못 가게 되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을 했다. 입대할 때가 되면 당연히 공군장교로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Q: 증조할아버지는 故 김구 선생, 할아버지는 김신 前 공군참모총장, 아버지는 김양 국가보훈처장, 부담감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 같다. 


A: "어렸을 적에는 피하고 싶을 정도였다.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 때나 다른 친구들과 사고를 쳐도 반성문을 한 장이라도 더 썼고, 한 번이라도 더 혼났다. 철없는 마음에 괜히 나만 미워서 그런 것 같다고 오해하기도 했다" 

Q: 선생님 입장에서도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수업시간에 교과서만 펴면 나오지 않는가. 


A: "교과서에 증조부님 이야기가 나오면 순간 암담했다. '네 증조할아버지가 이런 분이니까 너는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너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을 듣기가 쉽지는 않았다. '증조부님의 이야기인데도 왜 난 아직 모르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김구선생의 조각상 앞에서 나란히 선 삼대. 

좌측부터 김용만 소위, 김신 전 공군참모총장, 김양 국가보훈처장 

Q: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지금은 다른 것 같다. 


A: "대학을 가고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가 하신 일들, 그리고 하시는 일들을 알게 되니까 조금은 철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Q: 주요 일간지나 포털 사이트에서 봤겠지만 많은 사람이 주목하고 있다.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앞으로의 행보에도 관심이 많을 것이고. 


A: "일단 공군장교로서 군복무를 성실히 마치고 싶다. 그 후엔 공부를 더 하고 싶고, 멀리 본다면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다." 

Q: '나라를 위해 일한다'라, 쉽게 듣기 어려운 말이다. 


A: "나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도 있지만,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 가장 귀한 일 것 같다. 우연히 TV를 틀었는데 아버지가 인터뷰 코너에 출연하셨었다. 그때 진행자가 '만약 안중근 의사가 살아계시다면 요즘 상황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라는 질문을 했다. 

아버지가 정말 불같으신 성격인데 울먹이면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세대나 다음 세대가 애국심이 훨씬 부족하다.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말씀이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가슴이 먹먹했다. 언젠가 준비가 되면 나라를 위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놀기 좋아하고, 친구들 만나는 것 좋아하고, 실수도 많이 하는 아직은 앳된 청년. 그의 어깨에 지워진 짐들의 무게가 가볍지 않겠지만, 잘해낼 것이라 믿고 또 그렇게 되길 바란다. 

작성자 : 대위(진) 고낙일 

기사 원문 

: [공굴레차] 공군장교로 임관한 김구 선생 증손자를 만나보니... http://afplay.tistory.com/366 

기사 제공 

: 공군 블로그 '공감 season II' http://afplay.tistory.com
 


*백범 김구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는 2001년 미국 육군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미국의 정보요원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안두희는 1949년 김구선생을 암살한후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3달만에 15년으로 감형, 6.25발발후 특별석방,

1951년 국군대위로 예편되어 완전히 사면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 붕괴후 김구선생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도피, 은닉 생활을 하게됩니다.

한때는 미국으로 이민 탈출도 시도했으나 불발. 

1996년 10.23일 인천 버스기사 박기서씨의 '정의봉'이라고 쓰여진 몽둥이를 맞고 80세에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아래는 위키백과 안두희 일부입니다.

1996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 경 인천 중구 신흥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부천 소신여객 소속 버스 운전 기사 박기서에게 린치당해 몽둥이로 구타당하여 사망했다. 몽둥이에는 '정의봉(正義棒)'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박기서는 범행동기가 정상참작되어 징역3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98년3.1절 특사로 풀려났으며,개인택시운전 기사로 일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정식 요원이었으며, 우익청년 단체였던 백의사 특공대원으로 활동한 사실이라는 점을 미 국립공문서 보존기록관리청 문서를 통해 밝혔다. 하지만, 백의사의 단원들은 안두희가 백의사 단원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또한, 당시 백의사는 단원들 대부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상태로 활동할 상황이 아니었으며 총사령인 염동진은 김구의 암살소식을 듣고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김구의 비서 선우진은 백의사와는 연관이 없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백의사는 김구, 신익희 계열의 비밀결사단체이다

안두희에 대한 의혹인 이승만정권과의 결탁 의혹과 자세한 배후 등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 단지, 안두희에 대한 감형, 예편 후의 군수업자 근무, 이승만과 김구와의 대립, 미국의 배후 개입 등으로 인해 권력과 결탁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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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6.25 00:45

    첫댓글 아픈 역사속에 아쉬움 .만약에 김구 선생이 살았다면,,,,,, 만약에,,, 시간은 흘러갔다

  • 작성자 11.06.27 08:14

    역사에 만약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ㅋㅋ 아니 안좋을 수도 있을걸 ㅎㅎㅎ 니말대로 시간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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