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宗廟)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의 역대 임금의 신위를 모신 조선왕실의 사당이다.
종묘의 위치는 경복궁이 들어선 백악산의 그 한줄기가 도심까지 뻗어 들어오는 끝자락이다.
백두대간의 정기가 삼각산 백악산으로 내닫다가 다시 백악산에서 동쪽으로 꺾여 달린다.
동쪽으로 이어온 생기는 응봉에서 창덕궁 창경궁 동궐을 지나 조선왕실의 사당 종묘에까지 닿는다.
생기(生氣)가 발랄하게 종묘로 힘차게 치닫고 있다.
꿈틀거리며 내닫는 백두산의 정기가 마지막 혈처 종묘로 가고있다.
그 혈처로 치닫는 용맥의 힘이 대단한게 보통이 아니다.
조선 후기때의 지도를 보면 백악산 앞에 경복궁이 있고 양편에 종묘와 사직이 있다.
성리학의 이념을 바탕으로 건국되었던 조선은 중국 주나라의 제도를 엄격하게 지켰다.
가운데 궁궐이 있으면 좌측에 묘를 건설하고 우측에 사직을 건설한다는 유교적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당시의 종묘와 사직이란 국가자체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국가의 흥망은 종사의 흥망과도 같은 말이었다.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외삼문)이다. 종묘의 남쪽에 있으며 3개의 문이 있다.
궁궐의 정문과는 달리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좌우로 종묘 담장과 연결되어 있다.
정문은 원래 전면 중앙에 난 계단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었다.
일제시대에 도로를 조성하면서 도로 면이 높아지게 되어 땅에 묻히고 지금은 단벌의 장대석 기단만 있다.
종묘 정문은 외대문(外大門) 또는 창엽문(蒼葉門)이라고도 한다.
우선 종묘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길(路)이다.
사람들이 이동하는데 편리하게 하는 것이 길(路)이다.
종묘의 길은 편리함보다는 정중함과 겸손함을 강조한다.
그 길은 신로(神路)이다.
정전과 영녕전으로 이어지는 이 신로는 혼(魂)이 다니는 '가운데 길',
왕과 세자가 걷는 '오른쪽, 왼쪽 길'로 나뉘어져 있다.
정전 동쪽 문으로 가는 길이다.
정말 신이나 왕과 세자가 다니는 길인가?
이 길위에 돌들이 무척 거칠고 삐딱한 게 불편하기 그지 없다.
이는 제사 지내러 가는 발걸음을 무겁게 하기 위함이었다.
거친 길을 걸으면서 마음을 다잡고 겸손히 한다는 의미가 담겨져있다.
종묘(宗廟).
서울의 한복판 종로에 면해서 5만6000여평의 면적 위에 오늘날까지 그 기능을 잃지 않고
조선왕조의 신위들을 모시고 있는 이곳 종묘는 일그러진 서울의 중심성을 회복하게 해주는 경건한 장소이며
우리의 전통적 공간개념인 비움의 미학을 극대화하고 있는 건축이다.
종묘에서 근본이 되는 전각은 정전(正殿)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목조건물인 정전은 조선을 상징하고 정통성을 대변하는 공간이다.
광해군이 중건한 뒤에 두 차례 증축됐으며, 일제강점기에도 훼손되지 않아 4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정전은 배경지식 없이 방문해도 탄성을 자아낼 만큼 경건하다.
하얀 화선지에 먹을 묻힌 붓으로 굵은 선 하나를 그어놓은 듯한 모양새다.
가로 세로 109m×69m의 월대(月臺)라고 불리는 이 공간은 비움 자체이며 절대적 공간이다.
1m 남짓한 이 지대는 그 사방이 주변 지면에서 올려진 까닭에 이미 세속을 떠났으며
담장 너머 주변은 울창한 수목으로 뒤덮여 있어 대조적으로 이 지역을 완벽히 비워진 곳으로 인식하게 한다.
마치 진공의 상태에 있는 듯하다.
폭이 109m인 월대 위에 길이가 101m인 건물이 서 있다.
신주가 있는 신실(神室)보다 지붕의 높이가 더 높다.
하늘을 향해 높게 짓는 방식이 일반화된 현대에서 한없이 기다란 정전은 신선하고 독특하다.
지붕의 잡상과 문틀 아래의 삼태극 무늬를 제외하면 꾸밈새가 없어 단조롭지만, 그래서 오히려 기품과 힘이 느껴진다.
처마로 인해 생기는 그림자는 진한 인상을 풍기며, 무한히 연속될 것만 같은 건물은 무한함을 떠올리게 한다.
정전은 남쪽을 향하고 있고 '서상제도'에 의하여 윗자리인 서쪽에 태조의 감실이 있다.
무엇보다 종묘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좌우대칭이라는 점이다.
중국의 건축물들은 대개가 엄격한 좌우대칭이지만 우리의 건축물은 그렇지 않다.
아마도 우리의 정서와 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무한반복으로 길게 늘어선 열주(列柱)의 장관이다.
지붕 밑의 깊고 짙은 그림자와 붉은 색의 열주는 이곳이 무한의 세계라는 듯 방문객을 빨아들인다.
일순 방문객은 그 위엄에 가득 찬 모습에 침묵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된다.
한국의 미를 선적인 요소에서 찾는다면 단순하고 간결하며 엄숙미가 있는 것은 직선이다.
종묘에서는 곡선 보다는 직선이 보인다. 직선이야말로 죽은 자를 위한 엄숙한 공간에 잘 어울린다.
길 벽 지붕 기둥 열에서 직선이 보인다.
종묘에는 얇고 넓은 돌인 박석이 여러 곳에 깔려있다.
신로도 모두 박석으로 돼 있고 정전과 영녕전 앞마당 모두 박석이다.
박석은 예전부터 민간에서 사용하여온 아주 친숙한 건축 재료다.
그렇다면 왜 종묘정전이나 영녕전 마당에 박석을 깔았을까.
우선 선조들은 박석을 물 빠짐이 좋고 흙이 씻겨나가 터를 훼손되는 것을 막아주는 아주 좋은 건축 재료로 여겼기 때문이다.
과학적이면서 다분히 미학적 해석으로, 화강암을 반듯하게 깎아 마당을 덮으면 빛을 흡수하지 못하고 반사해 눈이 부시게 된다.
박석은 표면이 거칠어 빛이 들어도 반사하지 않고 흡수하여 눈부심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표면이 거칠기 때문에
걸을 때 조심해야 하므로 몸가짐을 바로 하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해석도 있다.
정전 건물 양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온 동·서월랑(東西月廊)을 건설한다.
종묘 정전의 동월랑과 그 월대이다.
왕이 세자와 신료들과 정전에 들어설 때 이용한 동쪽 문이다.
그 문을 통해 정전으로 들어서면 동월랑을 맞는다.
동월랑 상월대 소맷돌이다. 그 소맷돌은 구름 모양을 하고 있다.
소맷돌 위에 앉아 있는 정전이다. 그 정전은 구름 위에 자리한 공간이다.
그 정전은 신선이 노니는 신성한 공간이면서 돌아가신 조상이 계시는 곳임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