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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 공부의 필요성과 방법
몽천미래교육
이동원
1. 조상 공부의 필요성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가운데 한 가지는 부모, 조상에 대한 관계 개념과 인식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인간과 동물은 똑 같이 어린 새끼를 희생과 헌신으로 양육하고 보살피며 새끼 또한 어미를 지극히 따르고 의지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TV의 '동물의 세계'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동물이 제 새끼를 돌보는 모습은 인간보다 훨씬 더 절절하고 희생적이다. 사람의 어미 중에는 제 자식을 학대하기도 하고 심지어 버리기도 하지만 제 새끼를 버리는 동물은 보지 못한다. 그러나 성장한 이후에는 이러한 관계는 극과 극으로 달라진다. 즉 동물의 경우 인간과 달리 부모-자식의 관계가 사라지고 만다. 짐승에게는 키워준 어미는 있어도 부모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짐승에게는 조상이란 있을 수 없으며 시쳇말로 웃기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흔히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해서는 안 되는 짓거리를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금수(禽獸)와 같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경우에도 민족이나 지역에 따라 부모(조상)-자식 관계에서 차이가 조금씩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서구사회의 문명의 뿌리는 유목생활이었고 정글문명이었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농경생활과 촌락문명을 뿌리로 하는 동양인에 비해 자연히 조상, 씨족 개념이 약하였으며 생존과 의식주에 도움이 되는 것만이 가치의 중심이 되는 사회를 형성하였다. 그에 비해 동양인들은 정신세계와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 삶의 가치로 자리 잡는 사회가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서구인들에 비해 동양사회에서 조상, 집안, 문중, 씨족 개념이 더 뿌리내리게 되었고 이러한 조상 숭모 사상은 오늘날 현대과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류가 겪어야 하는 여러 가지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한 이념으로 재해석되고 있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도 나는 나이가 들어 환갑이라는 인생의 변곡점을 지나게 되면서 내면의 의식세계에서 조상에 대한 지식과 이해의 갈증이 나타남을 감출 수가 없다. 젊을 때는 각박하고 힘든 세상살이에 매몰되어 지내면서 별로 의식하지 못하고 또한 잘 알지 못하였던 내 육체와 정신의 뿌리에 대해 이제 이순에 접어들면서 비록 만시지탄이지만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일어난다. 세월의 달력을 수없이 넘기면서도 그동안 텅 비워두었던 소중한 정신적 지주 한 켠을 이제라도 차곡차곡 채우고 싶은 마음이 깊어지고 그 방법으로 조상 공부를 조금이라도 해보고 싶어진다. 그래서 조상 공부하는 방법을 이리 저리 생각해본 것을 여기에 소개해보고자 한다.
2. 조상 공부하는 방법
조상 공부는 불필요하거나 시간 낭비가 아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자신의 정신세계를 건강하고 풍족하게 채워주는 가치 있는 투자이기 때문이다. 서양 세계가 부와 물질 추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의 삶의 측면을 간과한 나머지 지금처럼 과학의 발달과 경제적 부는 쌓았을지 모르지만 정신적, 도덕적 자산이 뒷받침되지 않으니 사상누각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음을 지금 세계가 모두 알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와서 서양인들이 인류의 위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동양의 사상 체계와 정신적 가치에 눈을 돌리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중국 공산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공자(孔子)를 그토록 폄하하다가 이제 공자의 사상 세계와 그 문화적 가치를 다시금 조명하고 나선 것은 결코 우연한 행위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보면 조상 공부를 후손들에게 제대로 가르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조상 공부는 한 집안의 내력이나 정신적 연원을 분석하는 것 말고도 과학 기술의 발달 못지않게 문화적 콘텐츠 개발 역시 국가 경제나 경쟁력의 핵심이 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기회에 대학이나 학교 등 교육기관에서 후세들에게 자신과 우리 민족의 조상을 공부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조상학(祖上學)이라는 과목을 개설하고 가르치기를 제안하고자 한다. 짐승들의 세계를 알아보는 동물학, 생물학이 있음은 물론이고 심지어 곰팡이나 진드기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생물을 연구하는 미생물학까지도 있으면서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내력을 연구하는 학문이 왜 필요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조상 개념이 우리 보다 못할 것 같은 미국 같은 나라에서조차 일부 대학에서 계보 작성법을 정식 학과목으로 개설하여 가르치고 있지 않는가.
조상 공부는 모두가 할 일이다. 노인이나 집안의 가장, 맏이, 종손만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자신의 조상에 대한 이해와 지식은 다소라도 갖추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자면 조상을 공부하는 방법부터 알아야 될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조상을 공부하는 방법을 아래와 같이 간략히 기술해보고자 한다.
가. 조상의 향사나 제사 참석
가장 쉽고, 필요하며, 재미있는 방법으로 조상의 제사, 향사 등에 참여하는 방법이 있다. 요즈음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교실에서 지식을 가르칠 때 책으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현장에 찾아가서 참여하고, 실행하면서 공부하도록 하는 현장체험학습과 같은 학습 방법을 사용하는데 조상의 향사나 제사에 참석하는 것이 바로 조상 공부의 현장체험학습인 것이다. 각 가정이나 집안, 문중마다 봄과 가을에 지내는 향사, 설이나 추석 때의 차례, 돌아가신 기일에 지내는 기제사 등에 참석하는 것이 조상 공부의 첫 걸음이요 실질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제사를 모시는 행위는 조상을 생각하며 내 자신을 가다듬는 일이지만 핵심은 조상과의 대화라고 생각한다. 이 날 묘소나 혹은 집안의 신위 앞에서 간소한 음식을 준비하여 올리면서 조상의 음덕에 대한 감사, 가정사의 변화나 새 소식 고하기. 자신의 반성과 새로운 각오, 그리고 후손을 보살펴 주시기를 청하는 등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또한 일가 지족들과 함께 조상 제사에 참여하면서 조상 산소를 직접 보게 되고, 참배객과 조상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제사의 중요한 기능이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 형제, 가족 간의 이해, 우애, 결속이 깊어지고 조상을 중심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제사를 모실 때에는 차리는 음식이나 제물의 화려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핵심은 정성과 조상에 대한 숭모 정신에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퇴계 선생께서도 제사를 모시는 일은 그 정신과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시었다.
나. 족보 공부
두 번째 방법은 족보 공부이다. 제사나 향사 참석이 실천적 방법이라면 족보 공부는 이론적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족보는 비록 조상 한분 한분에 대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분량으로는 몇 줄, 몇 십자밖에 되지 않지만 나를 있게 한 뿌리나 계보를 밝혀주는 가장 정확한 자료로써 조상의 출생(出)과 사망(卒)년도와 날짜, 벼슬과 직위, 증직과 시호, 돌아가신 후 산소 위치, 배우자의 본관과 배우자 부의 관직, 배우자 사망 후 산소 위치 등에 대해 간략하지만 소중한 자료들이 담겨 있다.
1) 족보의 이해
사람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다시 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시고, 어머니도 역시 어머니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신다. 이렇게 출생의 사다리를 타고 위로 계속 찾아 올라가면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나의 핏줄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보다보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힘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의 인연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출생의 사다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존재의 연원을 밝히고 기록한 것이 족보(族譜)이다. 맹자(孟子)는 ‘대를 잇지 못한 것이 불효다. 자손은 부모로부터 몸을 받았으니 자신의 후손이 그 몸을 계승하여야 한다. 후손은 그 몸을 통하여 조상과 부모를 기억하고 추모하며 생명을 연속시킨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상과 정신이 가문과 문중을 형성하는 기틀이 되었고 그 소중함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조상을 기리고, 숭모하며, 씨족과 문중 개념이 우리나라보다 더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나라나 민족이 없을 정도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최근 몇 년 사이 사회 변화의 분위기에 편승한 호주제 폐지 등 일련의 움직임으로 족보에 대한 인식마저 흐려지는 것이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집에 기르는 애완견도 족보가 따라다나고, 경마장의 말들도 족보가 없으면 알아주지 않는데. 하물며 사람의 일인데 이 족보 문화가 폄하되는 것은 우리 인간을 금수만도 못한 존재로 가벼이 여기는 풍조와 다름없다.
'족보를 서구에선 Family Tree, 중국에서 종보(宗譜), 일본에서 가보(家譜)라 일컬어 중시하며 한국 족보는 외국에서 연구대상으로 삼을 만큼 우수한 문화 유산'(연합뉴스, 2003. 8. 22일자)이다. 이 족보는 동양은 물론 서양에서도 아주 오랜 옛날부터 내려온 문화 형태이다. 성경가운데 마태복음은 예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즉 마태복음 17절에는 ‘아브라함 - 다윗’까지가 14대, ‘다윗-바벨론 유수’까지 14대, ‘바벨론 유수-예수’까지가 14대이다.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의 세대를 모두 ‘14+14+14 = 42’세대로 요약하고 있다. 이슬람교에서도 마호메트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고, 고대 중국 역시 족보가 있는가 하면 세계 어느 나라 민족이든지 형태는 다르나 가첩 같은 가계나 가족사를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일본에는 일본가계도학회(日本家系圖學會)가 있어 전국적으로 지부가 설치되어 있으며 매월 정기적으로 '성씨와 가문(家紋)'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 역사가 짧고 조상에 대한 관념이 희박해보일 것 같은 미국에서도 인터넷에 족보 전문사이트인 앤세스트리 닷컴(http://www. ancestry.com/)이 개설되어 있는데 이 족보 만들기 사이트는 수 많은 유료 회원을 확보하고 있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조에 왕실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과 같은 형태의 족보는 조선 성종시대에 이르러서이다. 오늘날에 와서도 족보는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형태는 다르지만 각기 다른 방식으로 관심을 갖고 있으며, 학문적으로도 족보학(族譜學, genealogy)이 연구되고 있고 세계 각국의 학자들이 해마다 모여 족보학회를 개최하고 있을 정도이다.
2) 우리나라 족보와 진성이씨 족보
우리나라의 족보는 최초로 서기 1423년 조선 세종5년 계묘(癸卯)년에 발간된 문화유씨(文化柳氏) 영락보(榮樂譜)이나 현재 서문(序文)만 전하고 실물은 없다. 실물이 전해지고 있는 최초의 족보는 조선 성종7년(1476년)에 창간된 안동권씨 족보인 성화보(成化譜)이다. 진성이씨 족보는 우리나라 족보 가운데 세 번째로 발간된 것으로 퇴계 선생이 돌아가신 후 약 30년 후인 1600년에 도산서원에서 퇴계 선생께서 생존해 계실 때 정리해두신 자료 등을 중심으로 후손과 문하생들이 발간한 진성이씨경자보(眞城李氏庚子譜)이다. 이 족보는 3책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른 족보에 비해 족보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평가되고 있는 것은 다른 족보들은 시조 후 자손들을 단선으로 기록한데 비해 경자보는 형제들을 모두 기록하고 있으며 퇴계 문집에 이러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어서 족보의 사실성이 높은 점이 학계 등에서 인정되고 있다.
다. 묘비문 연구
조상 공부의 세 번째 방법은 조상의 산소 앞에 세워져 있는 묘비문(비문)를 읽고 연구하는 것이다. 비문을 보면 조상의 내력을 자세히 이해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비석에 새겨진 문장의 문학적 가치, 서체의 발달 등에 대해서도 세세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이 묘비문은 금석문학의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
라. 조상의 문집 읽기
네 번째 방법은 조상이 남기신 문집을 읽어보는 공부이다. 문집은 보통 조상님이 남기신 일기, 시. 행적, 평론, 기타 글들을 후손이나 제자들이 모아서 편집, 제작한다. 그러므로 조상이 남기신 문집을 통해 조상의 생각, 사상, 인품, 학문, 가정사 등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가 하면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대한 지식과 이해도 얻을 수 있다. 진성이씨 문집은 각 파별로 여러 가지를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퇴계문집을 들 수 있다. 어느 집안이든 후손으로서는 자기 조상이 남긴 문집 한권 정도는 구비하여 두는 것이 조상 공부는 물론 세계화 시대에 자신의 정체성을 굳건히 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마. 학술논문이나 저서 읽기
조상 공부를 학문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은 학술논문이나 관련 있는 저서를 구입하여 탐독해보는 것이다. 대학원 인문학 분야의 석사, 박사학위 논문 혹은 기타 논문(예 ; '「진성이씨족보」의 편찬 과정과 그 성격' ; 김문택, 서울역사박물관 유물관리과, 2001)을 검색해 보면 퇴계 선생과 같은 위인을 주제로 한 논문은 물론이고 의외로 내 조상이나 우리 파의 내력이나 근원 등과 같은 내용을 다룬 논문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자료들을 보면 내 조상에 대해 자신도 잘 모르던 내용들이 풍부하게 다루고 있어 조상 공부를 위해서는 더할 수 없이 소중하고도 좋은 방법이 아닐 수 없다.
또 한 가지는 대종회나 화수회에서 발간하는 문집이나 회보를 구하여 읽어보는 것이다. 진성이씨 대종회에서 발간하는 열화지(悅話誌)는 물론이고 대구화수회에서 발간하고 있는 ‘진성이씨대구화수회보’ 같은 신문은 조상 공부에 더할 수 없이 좋은 자료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후손으로서는 구입하여 가정에 비치해두고 자녀들이나 가족들이 틈나는 대로 읽어보게 한다면 좋은 공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바. 대종회나 화수회 활동
조상 공부를 해볼 수 있는 또 한 가지 방법은 진성이씨 대종회를 비롯하여 각 지역별로 조직되어 있는 화수회에 참가하여 활동하는 것이다. 화수회는 어느 문중이든지 조직되어 있지 않은 문중이 없을 정도로 같은 씨족들의 친목 단체이다. 여기에는 각 파별로 다양한 일가지족들이 참여하고 있어서 파가 다른 일가들과 친밀한 교류를 할 수 있어서 가장 좋은 사회활동의 한 가지가 될 수 있으며, 항렬별로도 다양한 일가들이 모이기 때문에 전통 예절이나 예법에 관해 실천적이고도 경험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연령별, 항렬별, 파별, 지역별, 직업별로 다양한 일가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조상 공부는 물론 예절공부, 사회생활 공부도 할 수 있으므로 후손들로서는 누구나 참가하여 활동해보는 것이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사. 진성이씨 카페 참여
요즈음은 사이버 시대에 걸맞게 모든 분야의 지식은 인터넷을 통해서 손쉽게 습득할 수 있는 시대이다. 조상 공부 역시 문중의 카페를 이용하면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진성이씨 대종회 홈페이지나 진성이씨 카페인 '진성이씨후손들이여'(cafe.daum.net/jinsunglee) 등을 검색해보면 조상 공부에 도움이 되는 좋은 자료들을 얻을 수 있다.
3. 진성이씨 족보에서 조상 공부(1-4세)
조상 공부를 위해 족보를 보게 되었다. 족보에서 1세에서 4세 할아버지까지만 족보에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옮기고 그것을 해석한 후 조금씩 주석을 달아보았다. 여기에서 인용한 족보는 계해년에 작성된 '진성이씨망천파보'(眞城李氏輞川派譜) 상권(pp. 1-2)을 참조하였다.
가. 1世 始祖諱碩(시조 휘 석)
起眞寶縣吏中生員試以子子脩貴贈奉翊大夫密直使忌三月三日墓縣南岐谷癸坐有碣配 贈貞夫人松生金氏父戶長玄忌二月九日繼失性氏墓竝同原.
'시조께서는 고려 말 진보현에서 일어나셨다. 진보 고을의 관리로 재직하시며 생원시에 합격하셨다. 아들 자수(子修)가 귀하게 되어 봉익대부(고려말-1362년경 종2품 벼슬 명칭)밀직사(고려때 왕명의 출납, 궁중의 숙직이나 당직 업무, 군기(軍機) 등을 맡아 보던 관청) 벼슬이 추증(追贈; 고려, 조선시대에 아들의 벼슬이 2품 이상이면 3대까지 추증하여 관직을 내렸음) 되시었다. 기일은 3월 3일이시고, 산소는 진보현 남쪽 기곡 계좌에 계시며 묘비문이 있다. 정부인 송생김씨의 부는 호장(戶長; 고려, 조선시대에 향리의 최고위직) 현(玄)이시고 기일은 2월 9일이며 계비의 성씨는 알지 못하고 묘는 같은 언덕에 나란히 있다.'
족보에 기록된 시조할아버지에 관련된 내용 전문이다. 시조께서는 지방 관청의 관리로 재직하시던 중 생원시에 합격하시는 광영을 얻으셨다. 출생 및 사망(卒) 년도가 기록되지 않은 것은 당시에는 족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국가적으로도 호적제도가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못한 탓으로 보인다. 진성이씨 최초 족보는 시조 이후 약 200년 지나서 1600년에 발간된 경자년(庚子年) 족보(庚子譜)이다.
나. 2世 子修(2세 휘 송안군)
高麗忠肅朝至順元年庚午明書業及第恭愍王朝至正二十四年甲辰見任奉常大夫知春秋事追論至正二十二年平定紅賊功賜安社功臣號封松安君洪武十五年壬戌爲通憲大夫判典儀寺事載家藏紅牌政案始移居安東豊山縣磨羅村忌三月三日墓府西十五里許兜率院馬鳴洞子坐有碣 英祖甲申奉安鵲山祠配貞夫人黃氏忌十月三日墓同原
'송안군께서는 고려 충숙왕 때인 지순 원년(1330년) 경오년에 명서업(高麗의 科擧中 五經字樣 眞書 行書 篆書 印文 等을 가지고 書法 시험을 함) 급제를 하시었다. 공민왕 때 공은 당시 봉상대부(고려시대 정4품 문관 벼슬 지춘주사였는데 지정 22(1364년)년 홍건적을 토벌한 공로로 지정 24년(1366년) 갑진에 추론하여 안사공신을 하사하고 송안군에 봉하였다. 홍무 15년(1382년) 임술년에 통헌대부(고려시대 종이품 문관 벼슬)판전의사사(전의사는 고려조 제사와 시호를 내리는 일을 맡아 본 관청이며, 판전의시사는 해당 관청의 담당관으로 정3품에 해당한다)가 되시었으며 집에 보관되어 있는 홍패(문과의 會試에 급제한 사람에게 주던 증서)와 정안(政案:고려 및 조선 때 문무관의 생년월일 재임중의 공과를 표시하고 그 직책의 합당 여부를 상세히 기록한 인사 관계 문서. 지금의 인사기록카드의 일종)에 실려 있다. 안동 풍산 마라촌으로 이거 하시었다. 기일은 3월 3일이시고 묘소는 안동부 서쪽 십오리쯤의 두솔원 마명동에 자좌(정남향)로 계시며 묘비문이 있다. 영조 갑신년에 작산사에 봉안되시었으며 배위 정부인 황씨는 기일이 10월 3일이고 묘소는 같은 언덕에 있다.'
위 족보를 보면 2세 송안군께서는 출생 및 사망하신 년도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1330년부터 1382년까지 50년 이상이나 중앙관직에 몸담고 계셨으며 판전의시사 같은 높은 직책에도 올랐음을 알 수 있다. 송안군 할아버지께서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시어 오랫동안 재직하시고 높은 지위까지 오르시면서 진성이씨 가문을 일으켜 세우신 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려 말에 홍건적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우시었고 진보에서 안동 풍산 마애동으로 이주하시었음을 설명하고 있다(다른 자료에 의하면 자수 할아버지께서는 왜란을 피하여 1383년 마라촌으로 이주하셨다). 풍산읍 마애동에 가보면 마을 입구에 송안군 할아버지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으며, 송안군께서 집 앞에 심으셨던 뽕나무는 수백년 내려오다가 고사하고 지금은 다시 심은 작은 뽕나무와 표시석이 있다. 2세조께서 진성이씨 가문을 명문거족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기틀을 세우시었음을 족보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다. 3세
1) 子 云具(휘 운구)
通政大夫工曹參議墓周村望芝山艮坐配淑夫人安東權氏墓祔有碣
‘통정대부 공조참의공의 묘소는 주촌 망지산 간좌에 계시고 배위 숙부인 안동권씨도 합장했으며 갈명이 있다’
'後山(진성이씨 17세손 不遷位 處士公 諱 宗洙 號 後山)께서 찬하신 참의공의 墓識에 의하면 『송안군께서 왜구를 피해 안동부 풍산현 마애리에 이주하셨고 先妣 黃氏께서 부군을 낳으셔서 벼슬은 공조참의이시니 문순공 퇴계선생의 伯高祖父이시다. ∼(중략)∼ 부군은 망지산에 장사지내셨는데 숙부인도 합장했다. 세대가 너무 아득하여 事行을 고증할 길이 없어 世系와 曾玄子孫만을 비석에 삼가 기록하여...... 』를 살펴볼 때 부군의 관련 문적을 잃어 부군의 事行을 상고할 수 없음은 진실로 아타까운 일이다
부군께서는 아우이신 副正公과 안동부 북쪽 주촌으로 이사하셨다. 그 후 공의 후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우거하게 되었다. 그 당시 임진왜란 등 사회적인 혼란으로 문적을 잃어버려 후산공이 지적 하신 것처럼 사행을 고증하기 어려웠다. 그 후 천우신조로 보계를 다시 밝혀 1972년(壬子)에 改碣을 하게 되었으니 이야말로 조상의 음덕이 아니고 무엇이랴!'
3세조 두 분 가운데 맡 분이신 휘 운구 할아버지에 대한 족보는 생현파(栍峴派) 파보(派譜)에서 인용하였으며, 아래의 주석은 열하지 16호(世德誌, p. 74)를 참조하여 정리한 내용이다. 또한 휘 운구 할아버지의 후손들에 관한 내용들은 열하지 25호(2010, pp.34-60)에서 자세한 내용을 구할 수 있다.
2) 子 云侯(휘 운후)
中訓大夫軍器寺副正以曾孫堣貴贈司僕寺正移居府北周村墓府東佳邱加幕山子坐有碣配淑人安東權氏父贈左議政希正墓府北刀沓村修理洞子坐有碣
'중훈대부(조선시대 관리에게 주어지던 종3품 관직 명칭) 군기시(고려와 조선시대 병기구를 제조하고 관리하던 관청)의 부정(부책임자)으로 재직하시었고 증손 우가 귀하게 되어 사복시정(조선시대 왕실의 말을 관리하던 관청의 최고책임자)으로 증직되시었다. 안동부의 북쪽 주촌으로 거주를 옮기시었다. 묘소는 안동부의 동쪽 가구동 가막산에 정남향으로 계시며 묘비문이 있다. 배위 숙인(조선시대 정3품, 종3품 관직의 부인에게 주어진 작호) 안동권씨의 부는 좌의정으로 증직되신 희정이시고 묘소는 안동부의 북쪽 도답촌 수리동에 정남향으로 있으시고 묘갈명이 있으시다.'
송안군(子修)의 둘째 아드님이신 휘 운후 할아버지는 조선 시대에 무기를 제조하고 관리하던 관청에서 종3품 부책임자로 근무하시었고, 후에 사복시정으로 추징되시었음을 알 수 있다. 안동 풍산 마애동에서 와룡면 주촌(두루)으로 거주 이전을 하시어 지금의 주촌 종파를 이루시었다. 풍산 마애동(당시 마라촌)에는 그 후 5세에 이르러 둘째 할아버지이신 휘 흥양(興陽)께서 거처를 삼으신 후 망천파를 이루시었다.
라. 4世 禎(諱 禎)
蔭仕歷宰寧邊韓山善山並有遺愛詳載地覽名官錄及崔致雲寧邊運籌樓記世宗朝征北狄有功錄原從勳以曾孫滉貴 贈嘉善大夫戶曹參判忌八月十五日墓府北水多村可倉山壬坐有碣配 贈貞夫人安東金氏父知甫州事挺忌五月二日墓祔前
‘음사(蔭仕; 조선시대에 있었던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관리로 임명하는 제도)로 역재, 영변, 한산, 선산부사를 두루 거치시었으며 지람명관록과 최치운이 기록한 영변운주루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세종 때 북방 오랑케를 정벌한 공으로 원종훈(원종공신에게 주어지는 공훈)이 되시었다. 증손 황(퇴계선생)이 귀하게 되어 가선대부(조선시대 정2품 관리에게 주어진 품계) 호조참판(지금의 기획재정부 차관) 직위가 증직되시었다. 기일은 8월 15일이고 묘소는 안동부의 북쪽 수다촌 가창산에 계시며 묘갈명이 있으시다. 배위 정부인 안동김씨의 부는 지보주사 정(挺)이시다. 기일은 5월 2일이며 묘소는 앞에 있으시다.’
선산할아버지에 대한 주석은 아래와 같이 네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좀 상세히 기록해보고자 한다.
1) 동기
내가 선산할아버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첫째는 지난해부터 조상의 시제나 묘사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가끔씩 족보를 펴보며 조상의 내력을 알아보게 되었다. 그때 나는 4세 할아버지이신 선산할아버지에 대해 좀 알아보고 싶었다. 시조 할아버지와 2세 송안군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릴 때 자라면서 어른들에게 많이 들어왔으나 나의 분파 시조 할아버지이신 5세조 흥양((興陽) 할아버지를 낳으신 분이 바로 선산할아버지 이시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선산할아버지께서 관직에 계시면서 남다르신 선정으로 백성들의 칭송이 매우 높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탓이다. 마지막 이유로는 시조할아버지 이후 3대 까지는 자손이 귀하여 집안이 번창하지를 못하다가 선산할아버지대에 와서 아들 삼형제와 따님 6자매 등 모두 9남매를 두시어 가문이 널리 융성해질 수 있게 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아들 삼형제분은 우양(遇陽), 흥양(興陽), 계양(繼陽)이시다. 이 삼형제분의 후손들이 두루, 도산, 예안을 비롯하여 풍산, 예천, 의성 등 경북 북부지역에 널리 흩어져 진성이씨 향리를 이루어 500년을 이어왔으며, 특히 셋째 분이신 계양 조상님의 손자 퇴계 선생의 출생으로 진성이씨의 성씨가 명문거족으로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 출생
선산 할아버지는 진성이씨 4세조이시며, 휘는 정이시다. 선산할아버지가 태어나신 생은 기록이 분명치 못하여 미상이시다. 다만, 세종조(1397-1450)에 벼슬을 하시고 공훈을 받으시었으므로 오로지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주민등록제도가 있거나 백성들의 출생, 사망을 기록하는 호적제도가 발달되어 있지 못하였고, 또한 일반 가정에서도 기록하는 일이 없었으며 족보 역시 아직 개념이 없을 때이었기 때문이다.
3) 원정공신(原從功臣)이 되시다.
고려 및 조선시대에는 나라에 큰 공을 세웠거나 국가적으로 큰 인물로 칭송을 받은 조상을 둔 자손들은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었는데 이런 제도를 음사(陰仕) 혹은 음직(陰職)이라고 하는데 선산할아버지께서도 바로 음사 제도에 의해 관직으로 진출하시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영변, 한산, 선산 등의 고을의 부사를 역임하시었는데 재임기간에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태종, 세종시대에 이조참판을 지낸 강원도 강릉 출신 경호(鏡湖) 최치운이 기록한 '運籌樓記仔善政遺愛與地勝覽名官錄'에 기록으로 뒷받침 되고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이러한 선정을 베푸신 공덕과 더불어 세종 때 정북적유공록(征北狄有功錄)에 원종공신(原從功臣, 친공신과 더불어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으시어 原從勳을 하사받으시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사후에 증손자이신 퇴계 선생의 귀하심으로 할아버지께서는 가선대부호조참판(嘉善大夫戶曹參判)직위를 증직(贈職) 받으셨다.
할아버지의 기일은 음력 8월 15일이시며, 묘는 안동시 북후면 물한리 마을에 있으며 가창제사에서 제사를 올린다.
4) 작산정사(鵲山精舍)
안동에서 서후를 지나 영주 방향으로 조금 지나다보면 북후면 물한리(勿閑里) 마을이 있다. 북후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4Km 떨어져 있는 곳인데 이 마을은 본마, 작산, 아랫마, 덕거리 등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바로 작산 마을에 가보면 진성이씨 선조들의 산소, 사당, 재사 등이 가득히 들어서 있으며 중심은 곧 진성이씨 4세조이신 선산할아버지(휘 정)의 산소와 재사이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는 민속자료인 작산정사(鵲山精舍), 가창재사(可倉齋舍), 작산산구강당(鵲山山舊講堂) 및 낭사(廊舍) 등이 있으며, 특히 2세조이신 송안군 祠堂이 이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작산골에 들어서보면 마치 진성이씨 聖地와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작산골 뒷산에 선산할아버지의 묘소가 있으시다. 나는 작년 10월 14일 할아버지 묘사에 생후 처음으로 참석하였다. 진성이씨 대구화수회 회장님과 부회장님, 고문님과 함께 참석하고 돌아왔는데 참으로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직장 생활을 핑계로 시조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조상님들의 묘사나 시제에 한 차례도 참배하지 못한 채 살아왔었는데 퇴직 후 조상님들을 찾아뵙자는 생각에 주변 일가 어른분들께 부탁드려 함께 참배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 때 처음으로 참석한 곳이 4세조 선산할아버지 묘사였다.
4. 마치며
지금까지 조상 공부는 왜 필요하며,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이 논문은 학술적인 바탕이나 체계적 이론의 바탕에서 기술한 글도 아니다. 생활에 쫒기어 조상에 대한 공부를 체계적으로 할 수 없는 독자들을 위해 갖어야 할 인식과 자세에 해한 소회를 정리난 논문이다. 자신의 뿌리와 내력에 대한 공부를 통해 우리는 물질 만능과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으로 붕괴의 위기를 맞고 있는 인류 사회를 구할 수 있는 건강한 정신 세계의 구축과 인성 교육의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으며, 글로벌 사회로 나아가는 미래 사회에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바람직한 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