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리 한반도 길 나의 길 한국의 산문화 천왕봉의 비밀
통일 신라에 오악이라는 산이 있었다. 동악은 신라의 수도 경주 토함산 서악은 충청도 계룡산 남악은 경상도 지리산 북악은 강원도 태백산 중악은 대구 팔공산이다. 당시 신라인들은 이 오악의 산이 통일 신라를 지켜주는 호국의 성산이라며 신성시하고 굳게 믿었다. 신라 왕실에서는 매년 중악(팔공산)과 북악(태백산)에 천제단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서 지금 것 전하고 있다 불교는 또 호국 불교로 신라 천년을 찬란히 꽃 피웠다. 지금도 중악(팔공산)과 북악(태백산)에는 천제단 터가 남아 있어 관련 단체 등에서 매년 재현행사를 하고 있고 또한 동악(토함산)과 중악(팔공산) 에는 많은 통일신라의 불상들이 지금 것 남아있다. 동악(토함산)의 석굴암 마애불과 중악(팔공산)의 갓바위와 팔공산 제2 석굴암 등이 천년을 넘게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중악(팔공산)의 주봉은 비로봉(1912m) 북악(태백산)의 2봉도 문수봉(1517m)이다. 비로나 문수는 불교 용어로 통일신라의 고유 명칭들로 추정된다..
최근 경상북도는 대구 팔공산과 마주한 비슬산 주봉도 고지도등에 천왕봉으로 표기돼 있다며 천왕봉으로 지명하고 국토 지리원에 신청하자 국토지리원 측에서 받아들여 비슬산 정상도 현재 천왕봉으로 각종지도에 표기돼 발행되고 있고 경상북도는 비슬산 정상에 천왕봉이 표기된 정상석까지 세웠다 이와 함께 중악(팔공산)의 주봉인 비로봉도 현지 주민들로부터 지금 것 천왕봉으로 불리었다며 경상북도는 지명 위원들의 심의 및 의결을 거쳐 국토지리원 국가지명 위원회에 천왕봉으로 상정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다. 천황봉(天皇峰)이나 천왕봉(天王峰)은 다 같은 소리로 하늘의 왕으로 일본 천황을 지칭하는 것으로 많은 국민들 사이 오랫동안 각인돼 있다. 필자는 팔공산의 깊이를 처음 접하고 지금껏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팔공산 계곡 능선길. 등 산골 마을을 두루 다니며 때로는 야사 등을 수집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지금 것 누구한테도 팔공산 비로봉이 천왕봉이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대동여지도나 산경표 등 어느 지도에서도 팔공산과 비슬산 주봉이 천왕봉이라는 표기는 없다. 중악(팔공산)의 주봉은 비로봉이다. 현재 서악(계룡산) 의 주봉도 천황봉. 남악(지리산)의 주봉도 천왕봉. 속리산 주봉도 천왕봉(天王峰1058m)이다. 한국의 중요 산과 신라의 오악을 다 천왕봉으로 비슬산과 팔공산 주봉까지 천왕봉으로 바꾸어 가는 이들의 정체를 반드시 알고 싶다. 경상북도는 고지도의 출처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 대구에 갑자기 천왕봉이 2개가 생겨나는 꼴이다. 지금 경북도백이나 대구시장 등 지명위원들이 일본 천황의 후예들이 아니고는 도저히 발상할 수 없다. 비슬산은 행정구역상 대구시 달성군 현풍군 유가면에 소재하며 박근혜의 정치적 지역구다
일제 강점기 당시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 지리학자 야스 쇼야가 한반도 하나의 대간을 여러 개로 쪼개어(태백. 소백. 노령. 차령산맥등), 표기한 한국 지리라는 가장 근대화된 조선의 지리 책자를 발간했고. 이때 대부분 산 봉우리 명칭들이 지도에 표기되고 당시 각급 학교로 공급된다 이후 . 광복 후에도 검증 절차 한 번 없이 책이 다시 각 학교에 그대로 공급되고 불행히도 우리는 왜곡된 산맥 개념의 역사를 배웠고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그렇게 알고 있다. 일본은 임진왜란이나 일제 강점기 당시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수많은 역사 왜곡을 저지른 집단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석회를 발라 글체를 날조한 국내성 광개토대왕비다
1882년 일본군 스파이 사쿠오가 국내성 광개토대왕릉비를 발견하고 글체가 마모된 자리에 석회로 글자를 만들어 부쳐 조작해 탁본한 쌍구가묵본(新羅城 □城 倭滿倭潰城)에는 왜가 신라성에 가득 차고 왜가 신라를 궤멸시켰다.”라고 돼 있다. 그러나 100여 년이 지나 1989년 석회로 만들어 부친 글이 자연현상으로 떨어져 나간 뒤 중국학자 왕첸에 의해 만들어진 탁본에(新羅城 □城 倭寇大潰城)는 신라성에 들어온 왜구가 고구려 원정군에 크게 궤멸되었다는 쌍구가 묵본과는 정반대의 뜻을 가진 원형 글자가 100여 년 만에 살아나면서 신묘년에 대한 논란의 종지부를 찍었다. 아직도 신라 오악과 한반도 중요한 산 봉우리들이 왜 천왕봉으로 바뀌어가는가에 대해 많은 궁금점과 의문이 남고 일본 쌍구가 목본의 왜곡과도 연결 해 볼 수 있다. 또 이들은 또 이순신 같은 영웅들이 다시는 이 땅에 태어나지 못하게 한다며 백두대간의 중요 지점 곳곳에 쇠말뚝을 박고 백두대간의 신성한 기(氣)를 다 끊어 놓은 지난 역사도 있었다. 남한의 유명 100 산 중 현재 7개가 천왕봉이다. 더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하고 이들의 정체를 찾아야 한다.
팔공산 사람들
박근혜 밑에 있는 놈들 면면을 보면 전부 시커멓고 어두운 인간들만 득실거린다. 박근혜가 인혁당 피해자들에게 사과했는데 인혁당이 뭐냐 박정희 유신독재를 비판했다고 무고한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잡아다가 고문하고 재판이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날 교수대에 목을 매단 것이 아닌가 그것도 한두 명도 아니고 8명의 젊은이들을 무고하게 형장의 이슬로 보내버린 사건이다. 이제 것 버티다가 국민들의 여론에 밀려 이번에 사과했다. 사과했으면 자숙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바로 그날 오후 부산에 내려가 젊은이들과 말춤을 추었다 억울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애달픔도 인간에 대한 예의도 없는 사람이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되면 참으로 끔찍스러운 사건이다. 대한민국이 앞으로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위의 글은 홍성담 화백의 글에서 퍼온 글이다.
홍성담 화백이 언급한 무고한 죽음의 8명 중에는 송상진이라는 사람이 있다 대구 팔공산 사람이다. 당시 팔공산은 경북 달성군 공산면 백안동이다. 송상진은 백안동 산골에서 양봉업을 하면서 농사일에 바쁜 어느 날 아침 집으로 가관원들이 들이닥친다. 영장도 없이 연행이 시작되고 가족들은 공포 분위기다. 마침 학교에 갈 준비를 하던 중 3 아들이 우리 아버지 어디 가느냐고 묻자 기관원들은 잠시 조사할 게 있다며 저녁에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며 지프차에 태우고 사라진다. 이것이 아들이 본 아버지 송상진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리고 소식이 없다. 얼마 후 서울 서빙고 안기부 분실에서 인혁당 간첩 사건으로 조사와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가족들은 면회를 신청하지만 거절당한다. 경상중학교 3 학년이던 아들이 청와대 박정희에게 편지를 보낸다. 우리 아버지는 절대 간첩 아니다라며 아버지를 살려 달라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편지를 보내지만 답이 없다. 그리고 얼마 후 교수형에 처해진 아버지 유골함이 집으로 도착한다. 가족의 비극은 10월 유신을 합법화 내지 정당화하기 위한 하나의 시범 케이스로 안보팔이 빨갱이 장사꾼들에게 당한 희생물로 박정희가 저지른 명백한 살인극이다 세계 법학자회서는 이날을 세계 사법 암흑의 날로 선포하기까지 이른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나 민주화 정부에서 인혁당 사건 재심이 받아들여져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날조된 사건으로 관련자 전원에게 무죄가 선고된다 이것이 인혁당 사건이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독재자 박정희는 김재규 장군의 총에 죽고 3 공화국이 막을 내린다. 박정희가 죽고 민주화 바람이 부는 80년 봄 광주 5.18 민주화 항쟁 다음 날 오후 대구 중심지 동성로에서 체류탄 연기가 자욱하다. 이때 시민과 학생들의 맨 앞 시위대에서 온몸으로 체류탄을 막아내며 시위대를 인솔하는 앳된 학생이 있었다. 송상진의 아들 송철환이다. 인혁당 사건 당시 중3이던 소년이 어느새 대학교 운동권 학생으로 변신해 있었고 잔인한 80년 5월은 결국 전두환의 군홧발에 짓밟혀 또다시 시민들의 꿈과 송철환의 꿈은 좌절되고 만다. 그해 겨울 방학 송철환은 또 다른 변화를 시도한다. 지금 대구시 2.28 민주화 기념 공원이 당시는 중앙초등학교 자리다 한일로에서 2.28 민주화 기념 공원 후문 빙향으로 약 50m쯤 들어가면 좌측 지점이 당시 중앙초등학교 정문 자리며. 이곳서부터 2,28 기념공원 후문까지는 시멘트 벽돌로 된 중앙초등학교 담벼락 자리다 당시 해 질 무렵 이곳 담벼락에 리어카를 끌고 와 광목천으로 된 천막을 리어카에 설치하고 송철환은 등록금벌이 포장마차 영업을 시작한다. 상호가 이판사판이다. 바로 옆으로 그냥 갈 수 없잖아. 앵무새는 술로 울었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취했다는 등등... 대학생들의 창의성 있는 상호들이 당시 언론의 시선을 받으며 몇 년간 동성로 명물 거리가 된다. 상호들 중 눈에 띄는 게 이판사판 송철환의 상호다. 경북대학교 운동권 학생들이 전두한 군사정권에 대한 울분을 토하며 매일 밤 이판사판 술판이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어둠이 깔릴 무렵 포장마차를 끌고 오는 송철환의 눈 언저리에는 늘 슬픔에 젖어 있었다. 두해 겨울 내내 옆에서 지켜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32년이 지나 이번 18대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박근혜는 인혁당 사건 판결은 두 가지가 있다며 막말을 쏟아낸다. 이때 인혁당 희생자 유족들은 서울 새누리당 당사로 올라가 박근혜의 사과를 요구했다. 송철환은 기자 회견문을 읽어가다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뇌졸중이다. 박근혜는 이때 부산에서 말춤을 추고... 18대 대통령 선거 투표일 3일 앞두고...
노태우와 팔공산 나무꾼
팔공산 용수동은 현재 팔공산 집단 위락시설 지역의 중심지다. 40여 년 전 용수동은 경북 달성군 공산면 용수동으로 당시 자그마한 연못을 중심으로 자연과 더불어 2 0여 가구가 모여 이웃 간의 정을 나누던 전형적 경상도 첩첩산골 마을로 자전거길도 없고 오솔길을 따라 동화사 구 주차장까지 20여 분 걸어 내려와 2시간 간격으로 운행되는 대구행 버스를 이용하는 게 당시 유일한 교통수단으로 대구 나들이가 쉽지 않던 산골 마을이다. 80년대 중반에 접어들자 이곳에도 개발붐이 밀려온다; 이곳이 고향으로 5공 2인자인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파워다 팔공산은 당시 경북 달성군 공산면이었으나 경북에서 떨어져 나와 대구광역시 동구에 편입되고 팔공산 전체가 대구 경북 도립공원 지역으로 지정된다. 선대로부터 수백 년간 터를 잡은 용수동 원주민들은 어느 날 갑자기 토지가 강제 수용되고 쥐꼬리만 한 보상금을 받고 다들 뿔뿔이 흩어진다. 그리고 가장 먼저 도학동 산봉우리가 까뭉게지고 골프장이 들어오고. 팔공산 초입에 직선 도로가 생겨나고 터널이 뚫린다.. 소나무 삼거리 좌측 계곡에 다리가 놓이면서 천혜의 절경들이 다 까뭉게지고 굽이돌아 용수동 자연 연못을 되메우고 케이블카, 호텔, 청소년 캠프장, 연수원 등이 당시 전국 최고 시설로 완성된다. 이후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고 팔공산 순환도로는 다시 파계사 쪽으로 연결되고 노태우 선친의 산소와 신용동 생가를 반으로 갈라놓고 파계사를 지나 기성동 삼거리와 한티재를 넘고 팔공산 2 석굴암을 거쳐 군위 부계서 끝난다. 경산시 와촌면 대한동 갓바위에서 시작된 팔공산 순환도로는 산허리를 반토막 내며 100리가 넘는다 국책사업에 준하는 이 엄청난 사업을 대구시는 단 몇 년에 해치운다
2008년 세계관광협회는 팔공산을 아시아 10대 관광지로 선정했고 20여 년 지난 당시 그 완성도를 본다. 그러나 현재 신용동 노태우 생가에는 아무도 찾는 이 없다. 마을 주민들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밤이면 밤고양이 소굴로 변해 있다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며 아이러니한 현대사의 현장이다.
당시 시설 지역에서 벗어나 아직껏 살아남은 한 가구가 있다 용수동 시설 지역에서 산골짝으로 잠시 들어 기면 다섯 가옥이 있다 지금 네 가구는 도시인들에게 집을 팔고 떠나고 없다.. 현재 가옥은 폐가로 방치돼 있고 한 가구에서 원주민 노부부가 살고 있다. 200여 년 전 조상들이 지은 토담집으로 선조 대대로 이 집에서 살아온 분이다 이분이 살아 있는 팔공산 마지막 나무꾼이다 본채 뒤로 소나무가 우거져 있고 아래채 뒤편은 대나무가 빼곡히 둘러진 전형적 산촌 가옥이다 대나무 밭에 토닭이 방사돼 있고 손가락만 한 지네들과 함께 온갖 벌레들 천국이다. 봄에 토종 병아리 100여 마리 분양받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대나무밭에 방사한다. 병아리들은 크면서 반은 족제비들에게 물려가고 반은 살아남아 이분들의 1년 생활비를 대신한다. 손님이 찾아가면 무척 반긴다 닭 한 마리 40.000원이다. 수탉이나 암탉들이 엄청 크다. 한 마리 주문하면 할아버지는 대나무밭에 사냥을 가고 할머니는 아래채 소죽솥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핀다. 잠시 후 할아버지가 잡아온 토닭을 가마솥 온수를 이용해 깃털을 뽑고 통째로 다듬어 옛 방식 그대로 찹쌀과, 마늘 팔공산 약초 뿌리등을 넣고 한 시간 정도 곤다 이제 방으로 들어간다. 구들장 틈새로 연기가 조금씩 스며든다. 소주가 들어온다 안주는 기대 않는 게 좋다. 방금 잡은 닭똥집 육회와 참기름소금과 김치뿐이다. 몇 접 안 되는 똥집 육회 맛이 아주 일품이다. 할아버지 들어오이소 못 이긴 체 들어온다 소주 한잔 하이소!! 소주잔이 돌아간다. 할아버지 이제 이 집 팔고 시내 아들 집으로 가야죠 연세도 있는데... 그런 소리 하지마소 내사마 성내 가서 하루도 못 산다카이 80년 넘게 산 내 집 두고 내가 지금 어데 가겠노... 할아버지 한잔 더 하이소!! 몇 잔 더 하고 취기가 오른다.
노태우도 공산국민학교 내 후배 아이가 내사 그때 국민학교 다니다 집안 형편이 하도 어러버 학교 때리 치우고 지게 지고 소깝하러 댕길 때 노태우는 중고등학교 댕기고 사관학교 졸업하고 별도 달고 대통령까지 해 묵지만 이번에 지 동생 글마 하는 꼬라지 보이 만정이 뚝 떨어진다 아이가 여서 살 때 형제간에 우애도 그리 조티만 동생 글마 우에 그 꼬자지고 히가 그래도 대통령 해묵은 히 아이가 돈에는 히도 대통령도 없는 기라 할아버지 젊었을 때는 여기서 어떻게 살았어요 아이고 말도 마소 산골짝에 논이 있나 밭이 있나 머가 있노 산 신나깨이 띠지가 채전밭 하고 약초 캐고 소깝 한 짐 지고 장날마다 내다 팔아 묵고 살았는데 우리 할머이 그때 다 죽을 고생 했다. 새벽달 울마 밥 한 숟가락 묵고 소깝 한 짐 지고 자 간다카이 백안 삼거리쯤 니러가마 날이 뿌허히 새는데 배는 우에 그래 고프노 파군재 가마 주막이 하나 있는데... 돈이 있나 머가 있니 소깝 팔고 올 때 준다카고 막걸리 한 사바리로 요기하고 나무자 가마 11시가 넘는다카이 주먹밥으로 또 요기하고 기다리마 소깝이 안 팔린다 카이 팔아야 집에 패이 가는데 내가 멀리서 온 거 알고 안 산다 카이 파장 때 되마 헐키라도 팔고 간다 카 느거 알고는 요 장돌뱅이들이 사람 참 허패 뒤 빈다 카이 결국 파장때 돼가 미푼 빼고 겨우 팔고는 막걸리 한 사발이 하고 간고등어 한 손 사가 지게 달고 인자 집에 간다카이 이때 벌서 네댓 시 댈 끼라 그때는 또 봉다리가 있나 머거 있노 간고등어는 지푸라기에 묶아가 지게에 달고 온다카이 그때 파군재 막걸리 맛이 최고지 최고 요새는 그때 비하마 내가 사는 게 지금 노태우보다 나따카이 한참 열을 내는데 밖에서 할머니 소리다 영감 문 여소 달 들어 가느마. 조금만 나가면 위락시설 단지에 오늘도 하루 수 천 명 넘게 들락거리지만 천혜의 자연적 입지 조건으로 이곳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이분들은 홍보도 모른다 그렇게 자연과 함께 팔공산 마지막 지게꾼으로 살아가고 있다; 2015. 현재 노태우 생가는 대구시에 의해 다시 관리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생가 학습 효과다.
화산 (828m)
화산은 행정상 경북 군위군 고로면과 영천시 신녕면. 화남면. 화산면등 3개면 경계에 걸쳐 솟은 산으로 팔공지맥 중심에 자리한 산이다. 영천 신녕에서 갑재를 넘으면 바로 앞 우측 정면에 옥녀봉이 솟아있고 그 아래로 고로 천이 흐르고 화수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 3~400m 못 미쳐 우측 산기슭으로 난 좁은 시멘트 포장길이 화산 정상 길 초입으로. 2000년대 초반까지는 비포장길이었는데 지금 말끔히 포장돼 있어 10여분이면 화산 정상에 갈 수 있다 화산 정상부에는 수만 평 고랭지 채소 재배단지가 자리하고 있는데. 90년대 중반 당시 잡초가 무성해 밭과 길 등 경계 구분이 어려웠고. 채소밭 중앙에는 폐교와 교회등 수십 호 폐가들이 방치돼 있어 당시 화전민들의 열악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당시 이곳에서 동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잠시 걸으면 화산산성이 계곡을 가르며 원형 그대로 방치돼 있었고. 산성 아래로 흐르는 1급 청정수 맑은 물줄기는 냇가 수준으로 청석으로 된 냇가 암반 위로는 많은 피라미 떼와 골뱅이들이 유유히 놀고 있었다. 필자는 많은 국내산을 다녀 보지만 정상부에 이곳처럼 많은 물이 흐르는 곳은 처음 접했다. . 68년 삼척 무장공비 사건 이후 박정희 정권은 전국 화전민을 상대로 산에서 철수하라는 이주 명령을 내린다. 당시 화전민들은 한 푼의 보상도 받지 못했고 한 생을 투자해 일군 전답등을 다 버리고 산을 떠나야 했다. 이들은 도시로 나서지만 농사와 더불어 자연과 벗하던 이들이 도시생활 적응이 어렵고 아이들 교육문제 등 먹고살기 막막했다, 이들은 다시 이곳에 모여들어 농사를 짓고 노숙 같은 생활이 10여 년 넘게 이어진다 10.26 사태로 3 공화국이 막을 내리고 어느새 좋은 시절이 찾아오고. 주거가 가능했지만 90년대 당시 누구 한 사람 정착하는 사람이 없었다.. 2019년 현재 떠났던 주민들이 다시 찾아들어 집을 짓고 전원주택을 선호하는 도시인들과 어우러져 30여 호 마을이 형성되었다. 세월의 격세지감이다.
사룡산 (655m) 낙동정맥 중앙에 자리한 사룡산은 비슬지맥의 발원지다. 경주 산내면과 건천읍 영천시 북안면 등 3개 읍면에 걸친 나지막한 산으로 생태계 통로에서는 아주 중요한 산이다. 대구 금호강을 중심으로 대구의 동쪽과 창녕 화왕산을 중심으로 북쪽에 산재한 모든 산의 야생 동물들은 이곳 사룡산을 거치지 않고는 백두대간으로 이동할 수 없다. 영호남 지역의 열차 길이 대전을 거치지 않으면 서울을 갈 수 없듯 같은 이치다. 60여 년 전 소백산 비로사 주변에 생활하던 채식주의자들이 당시 빈번히 나타나던 무장공비들을 피해 이곳에 모여들어 작은 마을이 형성되고.. 일명 시루미기 마을이다... 마을 구성원 모두가 모든 음식을 익혀 먹지 않고 날것 그대로 먹는다고 해 생식마을이라고도 했다. 마을 구성원 대부분 독신자들이며 노인 한 사람은 지구 밖 외계인들과 매일 밤 대화를 나눈다며 언론에 가끔 등장한다. 이들이 전국 산을 다니며 채집한 다양한 약초를 모아 둔 이곳 약초보관 창고는 국내 한의대생들의 현장 학습장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사룡산 정상부에 20여 호 마을이 형성돼 있고 정상부위 대부분 개간돼 민둥산으로 채소밭 등을 일구어 놓았다 생태계 통로로 동물들에게는 엄청난 타격이라는 것을 간과한 체... 낙동정맥 대표적 생태계 파괴현장이다. 사룡산을 중심으로 동쪽에 경주시 산내면과 남쪽은 청도군 운문면 서쪽은 영천시 북안면이며 북쪽은 경주시 건천읍이다, 건천읍에서 들어가는 길과 산내면이나 청도 운문면을 거쳐 신원리에서 우라리로 진입하는 길이 있다. 두 길 다 사룡산 정상부에 자리한 생식마을까지 차량 접근이 가능하다..
구룡산 (675m)
구룡산은 비슬지맥의 발원지인 사룡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직선거리 약 7Km 떨어져 있다. 경산시 용성면과 영천시 대창면 청도군 운문면 등 3개 면이 경계를 이루고 있고 경주시 산내면이 바로 이웃해 행정구역 4개 시군이 인접해 잇다.. 구룡산을 중심으로 경산시 용성면과 청도군 운문면 지촌리를 잇는 차로가 현재 포장돼 있어 용성면에서 차로 20여 분이면 구룡산 정상 마을에 갈 수 있고 경산 청도 영천 경주 어디서든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정상부는 행정구역이 경산시 용성면 매남 4리다. 마을 주민들은 예부터 구룡이라 부르며 현재 1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는데. 이들의 주업은 고랭지 채소 재배와 흑염소 사육 등 가축 사육을 많이 하고 있다. 마을 앞 구룡산 정상 부근에 용성초등학교 매남 분교가 폐교로 방치돼 있는 것으로 보아 70년대 이전 까지는 많은 가구가 거주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마을 서쪽으로난 영천 대창 방향의 하산 길은 인적이 끊겨 잡목들 사이 온갖 산나물이 지천에 늘려 있다 이곳에서 사룡산 방향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10여 분 거리에 마을이 하나 더 있다 이곳은 5~6호가 살고 있고 행정구역이 청도군 운문면 비석리다. 비석리는 매남리와 달리 벼농사가 주업이다 벼가 익는 10월. 이곳 마을. 논에서눈 수많은 벼 메뚜기들이 축제를 벌이는데 손을 펴 허공을 가르면 한두 마리 손에 잡힐 정도다. 할아버지 이 높은 산 꼭대기 어디서 물이 나 이 많은 벼농사를 지을 수 있으세요? 머리도 찔러보라며 피가 나듯 이곳 산꼭대기도 같은 이치라며 천연덕스럽게 웃던 모습이 기억이 새롭다. 4개 면 어디서 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관룡산(740m)
관룡산은 창녕 화왕산 군립공원 내 자리하고 있으나 화왕산 갈대 축제에 가려 지금껏 비경에 숨어 있다 화왕산(757m) 정상에서 남쪽으로 난 길을 따라 10여 분 거리에 드라마 동의보감 촬영 세트장이 나오고. 이곳에서 관룡산 정상까지는 30여 분 소요된다.. 옥천에서 출발 기점을 잡으면 관룡산 군립공원 매표소를 지나 관룡사까지 차량 진입이 가능하고. 고려 고찰 관룡사에는 국보 1점과 보물 3점이 보관돼 관리되고 있다. 관룡사 법당 뒤뜰 좌측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20여 분 걸으면 거대한 자연 암반 위 노상 부처를 만날 수 있다. 부처는 관룡산 정상 기암괴석을 등지고 천년이 넘는 세월을 옥천계곡을 내려다보고 있다. 크기와 모양은 대구 갓바위와 흡사하다. 이곳에서 정상까지 30여 분 소요된다, 정상부 능선길은 수려한 기암괴석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화왕산과 달리 작은 소금강이라 일컬어지며 산세가 수려하다. 80년대 당시 기암괴석 사이 키 작은 소나무 군락지가 많았는데 지금 거의 보이지 않고 불법체집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하산 길 관룡사 아래 자리한 식당을 찾는다. 관룡산 토박이라는 주인장과 함께 소주잔을 나누며 옥천지역의 정보를 듣는다. 고려 마지막 왕 공민왕 당시 스님 신분으로 왕비와 스캔을 일으킨 신돈의 생가가 관룡산 자락 초입에 있는 옥천이다. 풍수로 본다면 한반도에서 불도의 기(氣)가 가장 센 곳이 이곳이 다며 관룡산 예찬을 늘어놓는다.. 노상 부처도 대구 갓바위보다 더한 영험이 있으나 불편한 교통 문제 등 미개발로 아직 찾는 이가 적다며 아쉬워한다. 신돈의 인생 실패는 말이 없다. 주변계곡 곳곳에 무속인들이 춤을 추고 있다 신돈의 영화를 다시 한번 내려주소서
아미산(700m))
새야 새야 아미새야 아미새가 나를 울리네 아미새야 아미새
아미산은 군위군 고로면 산골에서 찾아본 산이다. 삼국유사 집필지로 유명한 인각사를 지나자 고로면 소재지 전체가 수몰된 흔적만 남긴 채 거대한 댐 공사현장이 나오고. 좌측으로 말끔히 포장된 도로를 따라 2~3분이면 댐 상부에 도착, 한다 이곳에서 호반길 도로를 따라 10여 분 거리에 호수가 끝나고 호수 끝지점 우측 작은 다리 하나 건너면 좌측에 양지리 산골마을이 나온다. 이곳 마을에서 잠시면 도로변 우측 개울가 한켠에 아미산 안내 표지판이 시야에 들어오고. 우측 개울가 징검다리를 하나 건너면 좌측에 데크 계단이 나온다. 아미산 산행 기점이다 계단을 따라 잠시 오르면 기암괴석 상층부에 올라선다. 이곳에서부터 정상 길은 기암괴석의 리지로 이어지는데 설악산 용아장성의 축소판으로 다가온다. 중간중간 위험 지역이 도사리고 있으나 군위군에서 설치해 둔 데크와 밧줄 등 안전장치의 도움으로 3~40 분이면 기암괴석의 리지가 끝나고 부드러운 토산 길로 이어진다 토산길을 따라 10여분이면 아미산 정상이다. 정상 길 내내 좌측 시야가 확 트여 전망이 아주 좋다. 2009년 현재 아미산은 국립지리원 표준지도에 표기가 없다 근래 군위군에서 지명한 아미산은 팔공지맥 방가산의 한 줄기에 지나지 않는다. 방가산은 행정구역이 영천군 화남면에 속하며 방가산 정상 서쪽으로 뻗어 내린 한 줄기 작은 산줄기를 따라 2~300m 내려오면 행정구역이 바뀌고 군위군 고로면 자칭 아미산이다. 아미산은 정상에 봉우리가 없다. 방가산 줄기 능선 일부가 정상을 대신한다. 아미산은 가을에 송이버섯과 능이버섯 등이 많이 채집된다 군위군은 이러한 것 등을 자원으로 해 고로댐 준공과 함께 고로댐, 삼국유사 집필지 인각사. 아미산 등을 한 벨트로 묶어 현재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고 있다. 댐이 생기면서 아미산이 탄생했다고 보면 된다. 군위군은 또 매년 가을에 아미산 버섯자생 지역을 무료로 개방해 놓아 송이, 능이버섯 등 누구나 채집이 가능하다. 하산길 기암괴석 앵기랑바위에 오르자 서쪽으로 뱀산 북서쪽에 매봉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시야가 멀리까지 확보돼 있어 조망권이 아주 좋다.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아미새가 울고 있다.
기백산 (1330.8m)
기백산(1351m)은 거창에서 인월 방향 도로를 따라 약 10km 지점 도로 우측으로난 산골길을 따라 10여분 걸으면 용추폭포가 나오고 이곳 북쪽에 기백산이 솟아있다 남덕유를 지난 백두대간의 본 줄기는 육십령을 동서로 가르며 지리산으로 치닫는다.. 육십령을 지난 백두대간의 본줄기에서 동쪽으로 살짝 벗어난 지점에 기백산이 솟아있고. 기백산을 중심으로 서쪽에 월봉산(1279m) 북쪽에 금원산(13253m) 남쪽에는 황석산(1190m) 등이 바로 이웃해 솟아있다 백두대간의 지맥들로 각 1000m가 넘는 고봉들로 산세가 자뭇 웅장하다 기백산 정상은 3개의 봉우리로 이뤄져 있는데. 북쪽 봉우리는 마치 메주 덩어리를 쌓아 올린 것 같은 기이한 형태의 바위로 형성돼 있다. 거창에서 기백산 북쪽으로 난 육십령을 넘으면 도로우측으로 1급 청정수 안의계곡 맑은 물줄기는 거창으로 흘러내리는데 많은 소들로 이루어진 우측 계곡 한켠에 옛 선비들이 산수에 취해 시를 읊조리던 농월정이 있다 이곳에서 하늘 천 따 지를 읊조리던 양반가 선비들이 이리 오너라 춘향이를 부르며 풍월을 노래하던 곳이다. 필자가 70년대 말 이곳 용추폭포 아래 산골 독가촌에서 똥돼지 사육 현장을 직접 목격한 곳으로 말로 든든 제주도 똥돼지 사육이. 당시 이곳 산골 농가에서도 사육하고 있었다. 지금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다
금오산 명금폭포 암장
70년대 당시 대구에서 금오산 가는 것도 쉽지 않다. 하루 한 두 차례 운행하는 통일호나 비둘기호 열차를 타고 한 시간여 소요되고 구미역에 도착한다. 역을 빠져나와 금오산 입구까지 한 시간여 걷는다. 금오산 초입 우측에 큰 호수가 하나 나오고 금오산 관광호텔을 지나면 바로 산행 기점이다. 이곳에서 명금폭포까지는 한 시간여 거리다. 마지막 가파른 경사 길을 하나 올라서면 정면에 거대한 암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암장 좌측에 명금폭폭 물줄기가 떨어지고 폭포 우측으로 펼쳐진 큰 암장이 명금폭포 암장으로 우측 암장 끝부분에 도성굴이 자리하고 있다. 대구 근교 제일 큰 암장으로 단단한 편마암 계통인데 작은 테라스 등에서 발생되는 낙석 등이 당시 클라이머들에게 많은 위험이 뒤 따랐고 직벽 높이 60m가 넘는 코스 등 난이도가 쉽지 않은 코스로 중급 이상 클라이머들에게 당시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77년 박정희는 자신의 고향 방문길에 잠시 이곳 금오산에 들러 직접 자연보호 캠페인을 벌인다 다음 해 정부는 자연보호 헌장을 발표하고 금오산에 자연보호 헌장비를 세운다. 이후 전국적 자연보호 운동이 시작되고 금오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보호 운동 발상지가 된다. 이후 금오산에 암벽등반 행위 등이 일체 금지되고 이후 이곳 암장은 클라이머들에게 추억 속 암장이 된다.
팔공산 바윗골 슬랩 바위
팔공산 매표소에서 동화사를 거쳐 염불암 바로 아래 좌측으로난 작은 언덕(빵재) 하나 넘으면 바윗골 슬랩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당시 산길은 오로지 이 길 한길뿐. 수태골등 동화사 위락시설 지역도 없던 시절이다. 규모가 좀 크면서 완만한 경사도를 가진 화강암으로 이뤄진 대구 근교 가장 큰 암장이다 슬랩(slab)이란 산악 용어로 평평하고 넓은 바위를 말한다 마땅한 홀드나 테라스가 없고 신발의 마찰력으로 바위를 오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시 팔공산 가는 길은 좁은 포장길로 중간중간 비포장길 등 아주 열악한 도로로 버스가 2~3시간에 한 번식 운행하는 교통문제 등으로 당일 바윗골 산행이 쉽지 않고 당일은 앞산 해골바위를 많이 찾았고 슬랩 바위는 대부분 주말에 1박 2일이다 바윗골 주변은 마땅히 야영할 공간이 없다.. 비좁은 공간에 겨우 텐트 몇 동 설치하면 선배들의 몫이다. 후배들은 바윗골 주변에 비박을 하며 밤새 선배들의 술심부름으로 밤을 새운다. 술재(염불암 옆 작은 언덕)를 넘고 동화사 매표소 입구 구멍가게까지 2번 다녀오면 날이 밝아 온다 이것도 일종의 극기 훈련이다는 선배들의 말에 후배들은 밤새 술재를 넘나들었다. 빵재가 밤에는 술재가 되고 낯에는 또 고픈 배를 웅켜잡고 빵 하나 간절하던 시절 넘나든 재라고 하여 빵재라고 헸다. 지금도 몇몇 지도에는 빵재나 술대로 표기하고 있다. 밤을 지새우는 것은 선후배가 따로 없다. 선배들은 텐트 속에서 술로 밤을 새우고 아침이면 선후배가 같이 눈을 비비며 쟈일에 생명을 같이 묶었다.. 하루 내내 같이 슬랩 바위에서 훈련 했고 해 질 무렵 끝나는데. 당시는 장비등 모든 것이 열악했지만 선후배 간의 끈끈한 정과 낭만이 있었다. 1970년 이러한 불편을 덜기 위해 경북 학생산악연맹과 경북산악회가 주 측이돼 무인산장을 건립한다 팔공산장은 염불암 바로 아래 우측 산기슭 한쪽에 터를 잡고 바윗골과 병풍바위 갈림길 중간 길목에서 양 지역 전진캠프 역할을 했고 당시 몇 안 되는 대구 산악인들에게 가히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아무런 시설 하나 없고 10 여 평 규모의 단층인데 시멘트 바닥에 침낭을 깔아 몸을 맡기고 남녀가 공동으로 이용했다 시설은 벽면에 뻬치카 하나가 전부다. 80년대 들어 산장 내부에 군대식 목재 침상이 1~2층으로 리모델링되었으나 88 서울올림픽 이후 서서히 밀려오는 국민 레포츠바람에 밀려나 알피니스트들은 결국 그들에게 자리를 다 내주고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찾아 하나 둘 떠나고..... 이제 노래 제목 같은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추억의 산장이 되고 말았다 본 글을 쓰기 며칠 전 추억의 산장을 찾았는데 산장은 폐허처럼 텅 비어 있었고. 산길에서 만난 몇몇 사람들에게 팔공산장에 대해 물었지만 팔공산에 산장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산장은 옛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
연경 하늘바위(듬바위)
서변동 유니버시아드 레포츠센터 우측 건너편 도로를 따라 약 2Km 지점에 도덕산에서 흘러오는 동화천 지류에 작은 다리 2개가 나란히 놓여있다. 좌측 조금 큰 다리가 연경 신도시가 형성되면서 근래 새롭게 놓였고 우측 동화천 합류지점 작은 다리가 옛 다리다. 이곳 옛 다리를 건너 동화천 둑길을 따라 약 150m 지점의 도로변 우측에 2m 정도의 발아래로 동화천이 흐르고 도로좌측에는 사람 턱모양의 제법 큼직한 암벽이 하나 솟아 있다 연경 듬바위(하늘바위)다 이곳은 1980년 여름에 개척된 암장으로 당시 대구 C산악회 안재호라는 친구가 오토바이를 타고 대구주변 외곽지를 다니며 찾아낸 암장으로 1980년 봄 코스 개척에 들어갔다 침니형 오버형, 볼트 코스 등 5개 코스가 그해 여름 완성되고 조선일보 월간 산 지에 발표되고 일반인들에게 알려졌다. 비포장 농로에 접한 암장으로 당시는 교통 흐름이 거의 없고 시내에서 접근성이 용이해 몇 년간 반짝 인기를 얻었으나 88 서울 올림픽 이후 농로가 포장되고 밀려오는 차량들로 더 이상 암장으로 가치가 없었다. 이곳에서 동화천 상류 100여 m 지점 우측에 나지막한 잠수교가 하나 있었는데. 이곳 다리를 건너면 좌측 냇가에 약 20m 높이의 직벽 암장이 하나 더 있다. 당시 클라이머들이 하늘바위를 찾았다가 차량을 피해 이곳으로 몰려들어 개척된 암장으로 지금도 주말이면 레포츠로 변질된 클라이머들이 꽤나 찾는 곳이다 2019년 현재 이곳 주변 전체가 도시개발 에 밀려 당시 정겨운 과수원길 등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대형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신도시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하늘바위(듬바위)는 지금도 그 자리 그대로 있고 동화천 건너 맞은편 학봉 자락 한켠에 하늘바위를 본뜬 인공 암장 하나 만들어지고 있다. 현재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데 박힌 돌에 대한 최소한의 예를 표하고 있다. 세월의 격세 지감이다. 아래 사진은 1980년 하늘바위 개척 이후 무사등반을 기원하던 시산제 풍경으로. 당시 대구에서 내 노라는 산제이들이 이곳 강변에 다 모여들어 무사 등반을 함께 소망했다, 필자가 두 번째 아헌을 올리고 있다, 이후 88 서울 올림픽 전후 해 영화 히말라야 주인공 계명대 산악부 대원 박무택이도 자주 찾았다. . 당시 한국 산악인들의 모습과 현재 스틱 2 개식 들고 백두대간을 호령하는 산 동무들의 복장을 한번 비유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2019년 현재 사진 속 강변 자갈 풍경은 고스란히 남아있고 뒤편 포플러 나무가 서 있는 자리는 나무가 사라지고 작은 둑을 쌓아 동화천을 따라 산책길이 길게자리 잡았다.
대구경북 산악 운동사
6.25 전쟁이 끝나고 자유당 혼란기 당시 어려운 시절 대구. 경북 산악인들은 발품을 팔며 발군의 활약으로 초창기 대한민국 산악계를 끌어간다. 1957년 당시 경북대학교 산악부를 이끌던 서해창. 김기문 씨가 주축이 돼 경북대. 청구대. 대구대. 계명대. 효성여대 경북고. 사대부고. 대구고 등 산악부 학생들을 끌고 경북 학생 산악연맹이 전국 최초로 대구에서 창립된다. 1959년 가을 경북학생 산악연맹이 주최한 제1회 팔공산 60km 극복 전국 등반 대회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최초로 팔공산에서 열리고. 이후 매년 가을 팔공산에서 이 대회가 열리자 당시 전국 산악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이들을 팔공산으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된다.. 이 여세를 몰아 경북 학생 산악연맹과 경북 산악회가 모태가 되고 다시 한번 서해창 김기문 씨가 주축이 돼 1962년 4월에 전국 조직의 사단법인 대한산악연맹을 대구에서 창립한다. 이후 당시 대구. 경북 산악인들의 꿈이던 팔공 산장을 전국 최초로 염불암 바로 아래 우측 산기슭에 건립했고. 당시 팔산장장은 바위골과 병풍바위 중간 길목에 자리하고 양지역 전진캠프 역할을 했다. 이후 대한산악연맹은 해가 갈수록 발전을 거듭하다 드디어 1977년 대한산악연맹 한국 에베레스트원정대가 발대식을 갖고 네팔로 떠난다. 1977년 9월 15일 12시 50분 한국 최초로 고상돈 씨가 에베레스트 정상(8848m)에 태극기를 펼치고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다며 베이스캠프에 무전이 날아든다. 고상돈 씨가 정상에 서기까지는 대구 사나이 팔공산 곰 박상열 씨가 있었다
박상열 씨는 대구 고등학교 산악부 출신으로 경북 학생 산악연맹 초창기 멤버다. 대한산악연맹 77 에베레스트 원정대 부대장으로 참가한 박상열 씨는 에베레스트 정상등정 1차 공격조로 선발된다. 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는 네팔에 도착해 긴 카라반 끝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전진 5 캠프까지 설치한다. 드디어 한국 최초의 에베레스트 정상 공격의 날이 밝았다.
새벽 5시경 세르파와 함께 전진 5 캠프를 출발해. 정상 공격이 시작되고. 눈보라와 악천후 속 루트를 확보해 쟈일을 깔고.. 12시가 넘자 에베레스트 정상등정에 가장 난코스로 알려진 수직빙벽 힐러리 스탬(8800m)에 올라서자 이때 갑자기 몰아치는 돌풍과 악천후로 박상열 씨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도 내려갈 수도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산소마저 바닥나고 없었다. 에베레스트 정상 바로 아래서 무산소 비박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음 날 새벽 박상열 씨는 살아 있었다.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로 세르파의 부축을 받으며 팔다리 등 성한 곳이 없을 정도의 동상을 입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캠프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날 정상 40여 m 남겨둔 지점서 하룻밤 무산소 비박으로 사투를 벌이며 살아남은 박상열 씨에게 당시 한국 산악계서는 살아 있는 에베레스트의 전설이라 칭했다. 일반인 배가 넘는다는 폐활량과 팔공산에서 다진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 및 등반지식 등으로 박상열 씨는 살아 돌아올 수 있었고 에베레스트의 전설이 된다. 다시 캠프가 정리되고 2차 공격조에 고상돈 씨가 선발된 것이다 이렇듯 팔공산은 한국 산악 운동의 매카였다는 사실. 아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다. 아쉬운 부분이다,
소백산(1439m) 젊음이 있어 열정도 있었다. 아래 사진의 좌측 소나무 뒤쪽이 연화봉 천문대 자리며 우측 대각선 아래가 소백산 비로봉으로 설경에 가물 거린다 당시 대구역에서 영천 안동을 거쳐 영주역에 도착해 강릉에서 내려오는 열차를 받아 타고 소백산 희방사역에 도착한다. 희방사역은 죽령 바로 아래 자리한 당시 깊은 산골 간이역이다. 역 주변의 민가를 찾아 허름한 빈방 소죽솥에 군불을 지피고 1박 하는데. 주인 할머니가 아궁이불에 고구마 구워 주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다. 쪽잠으로 하룻밤을 지새고 새벽에 일어나지만 물이 다 얼어 세수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께 인사를 건네고 죽령 칼바람을 안고 비로봉으로 출발한다. 희방사역 바로 위쪽에 죽령을 가로 지러는 도로를 건너면 바로 희방사 초입이다. 희방폭포 우측 철계단을 올라서면 바로 희방사가 나오고 희방사 뒤편 능선에 올라선다 이곳에서 연화봉 천문대룰 지나면 소백산 철쭉 군락지로 유명한 철쭉터널 구간의 긴 능선길이 나오고 능선길이 끝나면 정상 바로 아래 주목 군락지가 나온다 이곳에서 잠시면 비로봉이다. 비로봉에는 눈이 정강이까지 빠지고 세찬 바람과 온통 하얀 겨울이다. 비로봉에서 다시 희방사 간이역까지 내려오는 백코스로 오후 4시경 희방사 간이역에 도착한다. 새벽부터 이때까지 사람 구경은 희방사 스님괴 고구마 구워주던 할머니가 전부다. 서울 청량리에서 내려오는 완행열차를 타고 영주역으로 간다. 당시 난방이 되지 않던 영주역대합실 한쪽 공간에서 추위에 떨며 새벽까지 열차를 기다린다, 새벽 4시경 대구행 완행열차를 타고 대구에 도착. 2박 3일간의 소백산 등반을 마무리하던 시절 열정이 있어 좋은 시절이었다. 한국의 山 문화
내설악 초입 용대리에서 백담산장까지는 백담계곡을 따라 약 8km 의거리로 2시간여 소요되고 백담산장에 도착한다. 백담사 조금 못 미쳐 백담 산장이 백담사와 마주하고 있다 백담사는 한용운의 님의 침목 탈고 장소이기도 하고 전두환의 귀양살이로 유명세를 더한 곳이다. 이곳에서 대청봉까지 약 16km다 7~80년도 당시 내설악에서 대청봉 길 초입으로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하는 전진캠프로 당시 백담산장은 내설악을 찾는 많은 산악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아래 사진은 1983년 10월 9일 버마 아웅산 사건이 나던 날 영상에 담았다. 그날 밤 백담산장 주변은 무장 군인들이 쨕 깔려 불안감에 잠 못 이루던 하룻밤 기억이 새롭다.
백담산장
백담 산장에서 약 4km 지점에 삼거리가 나온다. 좌측 길이 오세암길. 우측 길은 수렵동 계곡의 초입으로 봉정암과 대청봉 길목이다. 이곳 삼거리 좌측에 자리한 수렴동 산장은 당시 한국산에 유일한 자연 통나무 산장이다. 첫날 용대리를 출발해 대청봉에 좀 더 가까이 접근을 위해 백담 산장을 패스하고 이곳 수렴동 산장에서 많이 1박했다. 당시 수렴동 산장은 대청봉이나 용아장성 진입을 위한 전진 캠프 2로 여름 시즌 1박 하기 쉽지 않다. 1박 요금이 300원으로 기억되는데 당시 국내산장 1박 요금은 거의 비슷했고 어디던 남녀 혼숙이며 침낭은 제공되지 않는다. 각자 챙겨가던 시절이다. 7~80년대 당시 설악산에 백담 산장. 수렴동 산장. 중청 산장, 희운각 대피소. 양폭 산장, 권금성 산장이 있었고. 지리산에 로터리 산장. 장터목 산장, 연화천 대피소와, 노고단산장. 등이 있었다. 또 한라산에 어리목 산장 그리고 팔공산에 유일하게 무인산장 팔공 산장이 있었다. 팔공 산장은 지금도 무인 산장으로 방치돼 있다.
당시 산장은 한국 산악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고 각종 산악 정보 등 대부분 산장에서 얻을 수 있었다. 당시 산장 관리인으로 유명세를 더한 동국대 산악부 출신인 설악산 권금성 산장의 반달곰 유 털보(유창서)와 지리산 노고단 산장의 함 털보(함태식)가 가장 모범적인 산장 관리로 유명세를 더 했다
수렴동 계곡을 따라 오르면 봉정암, 소청, 중청에 이어 대청봉이 나온다. 대청봉에서 하산길로 다시 중청에 내려오면 중청에서 좌측으로 난 오솔길이 남설악 오색 약수터로 내리는 하산길이며 북쪽 공룡능선에서 이곳 중청을 거쳐 서쪽으로 길게 뻗은 내린 하나의 큰 산줄기가 서북주능이다. 서북주능은 이곳 중청을 거쳐 서쪽으로 끝청과 , 귀때기청봉 한계령, 장수대, 대승령까지 뻗어있다. 중청에서 서북주능을 따라 북쪽으로 잠시 내리면 소청봉이다 소청봉에서 우측 희운각으로 내리는 하산길은 너덜지대로 급경사 내리막길이다, 아래 사진은 중간쯤 내려온 고사목 지대에서 바라본 천화대 범봉이다. 범봉 좌측으로 천화대 리지가 공룡능선으로 이어진다 저곳 범봉 아래 대구 산 친구 1명 잠들어 있다. 79. 년 1월 눈 덮인 저곳 범봉에서 동계 훈련 중 40m 아래로 떨어져 그 자리에 잠들었다.
범봉과 천화대 리지
고사목 지대에서 잠시 내리면 급 경사 내리막 길이 끝나고 천화대 가는 길과 양폭으로 내리는 길목 삼거리 우측에 희운각 대피소가 자리하고 있다. 외설악에서 들어오면 대청봉을 가장 가깝게 둔 전진 캠프로 아주 열악한 산장이다 10여 평 체 안 되는 작은 공간으로 여름 시즌 1박 하기 쉽지 않다. 자리가 없으면 비박이다. 비박 공간도 치열한 확보전이 벌어졌고 간혹 다툼도 있었다. 산장 투숙자들은 작은 공간에 보통 30명 넘는 남녀가 혼숙으로 시멘트 바닥에 뒤엉켜 칼잠 자던 시절. 설악동에서 희운각 까지 약 15km의 먼 거리지만 아이러니하게 당시 산장 이용객은 이곳 휘운각이 가장 많았다. 당시 설악산의 알피니스트들과 하이킹 그룹 거의 다 선남선녀들로 30대 찾기 쉽지 않던 시절이며 40대 이상은 희귀종으로 불리던 시절이다. 88 서울올림픽 이후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40대 이상 중노년층 스틱조들이 떼거리로 몰려들고 온 동네 아지매, 아재, 할매 할배 등 심지어 땅꾼, 약초꾼까지 모여들어 각종 산악회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어느 날 갑자기 한국 산은 아웃도어 경기장으로 변질되고 중노년층 스틱 조들이 스틱 2개 식 들고 한국산을 호령하기 시작한다. 한국의 알피니스트들은 결국 이들에게 자리를 다 내주고 미지의 새로운 길을 찾아 지금 다 떠나고 없다.
우리는 잘 웃지도 속삭이지도 않는다 쟈일에 맺은 정을 내 향기에 비기 리오 깎아지른 수직의 암벽도 매서운 눈보라도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한다 상가의 휘황한 불빛도 아가씨들의 웃음도 좋지만 산사나이는. 이 조그마한 정으로로 살아간다.
70년대와 80년대 중반까지 산사람을 풍미한 산사나이 정이 담긴 노래 가사다. 70년대 초기 당시 대구 모 대학 산악부 대원이 작사해 자신들이 등반 때 부르던 산 노래로 수년 내 전국 대학 산악부 등 일반 산악회로 다 번졌다 지금 한국 산에 20대는 희귀종이다 상업화된 백두대간에 지금 종 노년층 스틱 조들이 산을 접수하고 산사나이 정을 목이 터지라고 흥얼거린다. 토끼길처럼 반들반들하게 길 난 백두대간을 따라 스틱 2개씩 들고 자칭 산사나이들로 알피니즘의 본질인 개척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참 희한한 사회적 현상으로 21세기 한국 산 문화의 현주소다. 채소도 과일도 제철에 먹어야 영양가가 풍부하다. 한 번씩 돌아볼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이 정보도 희귀종이다. 반세기 가까이 경험에서 나온 펙트다. 상업화된 백두대간 팔이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은 박원순 서울 시장이 가장 앞선다, 히말라야 역시 상업화된 지 오래다. 히말라야 팔이로는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큰 이문을 남겼다..
귀한 사진 공개한다. 70년대 당시 희운각 대피소. 양폭산장. 한라산 어리목 산장, 팔공 산장이며 마지막 사진이 동화천 하늘 바위 오버형 풍경이다
희운각 산장에서 무너미 고개를 내리고 양폭 철계단을 내려서면 바로 좌측에 양폭 산장이 자리하고 있다. 외설악 천불동 계곡이 역으로 시작되는 기점이다. 양폭산장은 동계 적설기 등반 시 가장 인기가 많은 산장으로 당시 산악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팔공 산장은 7~80년대 당시 대구 산악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고 병풍바위와 바윗골 중간 지점인 염불암 바로 아래 우측 산기슭에 자리하고 병풍바위와 바윗골을 찾는 당시 클라이머들의 전진캠프 역할을 했다. 에베레스트의 전설 박상열. 살아 있는 한국 산꾼의 전설 손칠규. 에베레스트 정상 길목에 잠들어 있는 영화 히말라야 주인공 박무택 등이 모두 대구 출신으로 팔공 산장에서 알피니스트의 꿈을 키웠다.
청춘이 있어 용기도 있었다 열정 넘치던 지난날 암벽과 산장 추억이 새롭다. 백두대간 어미산 백두산에도 한류를 심어야 한다. 중국 대륙에서 떼거리로 밀려오는 중국 대학생들의 배낭족 이들이 중국의 다음 세대를 책임질 중국의 동량들이다. 백두대간의 문화를 심어줄 절호의 기회다. 저들의 동북공정에 맞서 우리도 작은 것부터 하나식 대응하자 .
팔공산 자락에서 이 정우
백두산과 1만 리 한반도 둘레길 어느 구간이던 정보가 필요하신 단체 개인등 연락 주세요 현지정보 및 교통 숙박 숙식등 상세한 정보 나누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하시길 기대합니다. E_mail : kdjj80@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