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4년 8월2일 새벽 2시에 일어난 회심이었다.
그 사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업을 하던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그날도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새벽 2시나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목사가 되기 전, 나는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벨을 눌러서 아내를 깨웠지만 그날만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내 열쇠로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자리에 엎드려 성경을 읽으면서 나를 기다리던 아내는 잠들어 있었고,
그녀의 얼굴 밑에는 공책이 놓여 있었다.
잠든 아내를 그대로 두고,
그 공책을 펼쳐든 내 눈에 이런 글이 들어왔다.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수유리 너머로 갔다.
시골길을 하염없이 걸으면서 오늘도 어김없이 죽음을 생각했다.
약을 먹고 죽을까? 아니면 손목을 그어서 죽을까?
그러나 그것은 내가 취할 길이 아님을.. 나는 다시 한번 더 확인하고 되돌아왔다.
.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께서 주님의 뜻을 위해
내게 주신 남편이므로 나는 사랑해야만 한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사랑하라 명령하시므로.. 나는 사랑해야만 한다.
주님! 도와주세요.
나의 약함을 주님께서 잘 아시잖아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아내의 깊은 속내를 알게 된 나는 심장이 멎는 듯했고,
귀에서 큰 북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온몸의 전율과 함께 나는 아내가 불쌍해서 펑펑 울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불쌍해서 울었다.
나 자신이 불쌍해서 울었다.
“왜 내가 이런 삶을 살고 있을까?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저의 영혼은 악취가 진동하는,
갈가리 찢어진 더러운 걸레조각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날 밤 나는 예수님이 뒤에서 나를 감싸주는 느낌과 함께
마음 깊은 곳에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나의 사랑하는 재철아,
나는 너를 한번도 버린 적이 없단다.
네가 나를 버리던 그 순간에도 나는 줄곧
너와 함께 있었단다...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저는 자타가 인정하는 거룩한 성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빛으로 저를 조명해 보았을 때,
바로 저 자신이 추잡한 창녀였습니다.
허망한 욕망을 위해 나의 영혼과 인생을 송두리째 팔아먹는 창녀 중의 창녀였습니다.
세상의 창녀는 생존을 위해 창녀가 되지만,
저는 단지 더 먹고 더 지니고 더 즐기기 위해 창녀가 된 자였습니다.
세상의 창녀는 자신이 창녀임을 아는 지혜라도 있지만,
저는 창녀면서도 창녀임을 자각치 못하는 창녀보다 못한 창녀였습니다.
나의 고백(이재철 목사 저. 홍성사 발행)의 내용 일부분.
첫댓글 이재철 목사는 주님의교회를 개척하여 약속한대로 10년 임기를 마치고 스위스 제네바한인교회를 3년간 섬기시고 현재 100주년기념교회 담임으로 계십니다. 신학생들이 제일 만나고 싶어하는 목회자 중의 한분이십니다.
그 사모님, 정애주 사모님은 저의 1년 직속선배이십니다. 솔직히, 처음 이재철 목사님과 결혼한다 그러실 때, 조금은 좋지 않은 마음이 있었었는데.... 한 15년 전쯤 남서울 교회에서 이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특별히 남자 성도님들의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부흥회를 마치고, 담임목사님께서 우리 사모님 어디 계시냐고, 회중 가운데 앉아있던 애주 언니를 일으켜 세워서 온 교인이 언니를 향하여 박수를 치는 모습을 보면서.... 와우, 언니의 걸음을 인도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아래 있었고, 이렇게 아름답게 언니를 세워 주시는 구나 하며 더불어 감격했던 기억이 있네요.
오우.. 그렇구나.. 이재철 목사님은 고은아 권사의 동생이며 사대부속초등학교와 부산 경남중학교 21회를 졸업하고 서울로 가서 외대불어과를 전공하셨습니다. 이목사님이 회심한 후 경남중고 동기생들과 성경공부를 시작한 것이 발단이 되어 동기신우회를 조직하고 이어 전 동문 경남중고기독동문회를 세우고 지금 활발하게 복음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엔 정애주 사모님의 뒷바라지가 아주 컷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