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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주 첫째 날 | 내 용 | 읽을 본문 | 시편 기도 |
세상과 인간의 창조 | 창 1-2 | 시 8 |
오늘 읽은 본문에는 두 개의 창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1:1- 2:4a의 ‘천지창조 이야기’와 2:4b-25의 ‘에덴동산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먼저 1장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읽어보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 지식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과학자들은 지금부터 약 150억 년 전에 거대한 가스폭발로 우주가 시작되었다고 봅니다(빅뱅이론). 이 우주 대폭발로 별들이 생겨나다가, 지구는 약 40억 년 전에 생겨났습니다. 이 지구에 대기권, 산소, 그리고 바다와 육지가 만들어진 후 약 1억5천만 년 전에 생물이 생겨났고, 오늘과 같은 인간은 약 100만 년 전에 생겨났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과학 지식을 가지고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비평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과학’을 가지고 ‘시문학’을 논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을 ‘찬미하는 시’, 즉 찬미가(doxology)입니다. 이 시를 통해서 저자는 “하나님은 창조주다”라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저자는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이 시를 썼기에, 이 찬미가에는 당시 고대 동방사람들이 상상했던 우주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성경 외에 고대 동방의 다른 문헌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우주의 모습은 대체로 [그림1]과 같습니다. 땅(지구)은 둥글넓적한 원반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 땅은 창조된 세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른바 “아랫물”(창 1:7)인 원시바다에 에워싸여 있습니다. 또한 고대 동방사람들은 견고한 기둥들이 이 땅을 떠받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지구 원반 위에는 돔(dome) 모양의 창공이 지붕처럼 걸려 있고, 거기에 해·달·별들이 마치 등불처럼 붙박여 있습니다. 이 창공 위에는 이른바 “윗물”(창 1:7)이 있는데, 이 물이 창공의 창문을 통해 비가 되어 흘러내리기도 합니다. 또 땅 속에는 죽은 이들이 모여 있는 저승(下界), 곧 죽음의 나라가 있다고 상상했습니다. 이것이 고대 동방사람들이 생각했던 우주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1장은 현대 과학의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 당시의 상식과 지식에는 너무나 잘 부합되는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옛 사람들이 창조된 우주를 어떻게 상상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우주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믿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그림 1] 성경 저자들이 상상한 세계의 모습
다음으로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 이야기’를 읽어보면 1장의 ‘천지창조 이야기’와 서로 모순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표 1]에 그것들을 요약해 놓았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각각 다른 시대에 다른 저자에 의해서 쓰였습니다. 1장은 하나님을 ‘엘로힘’이라 부르고, 2장은 ‘야훼’(여호와)라고 부릅니다. 학문적으로 말하면 창세기 1장은 사제계 문헌(=P자료)에 속하고, 2장은 야휘스트 문헌(=J자료)에 속합니다. 구약성경 학자들의 오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창세기의 저자는 적어도 3명 이상입니다. 앞서 밝힌 야휘스트 문헌(J)과 사제계 문헌(P) 외에 엘로히스트 문헌(E)이 더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학자가 아닌 우리로서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창세기를 읽으면서 서로 중복되고 모순되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여러 저자가 써서 그렇구나”하고 이해하면 됩니다.
| 사제계 문헌(1장) | 야휘스트계 문헌(2장) |
창조기간 | 6일 (7일) | 알 수 없음 |
창조공간 | 전 우주 | 땅 |
창조방법 | 하나님의 말씀 | 하나님의 행위 |
원 상 태 | 혼돈의 물 | 황무지 |
동 물 | 인간에 앞서 창조 | 인간 이후에 창조 |
여 자 | 남자와 동시에 창조 | 남자보다 늦게 창조 |
생활환경 | 조화를 이룬 우주(cosmos) | 수목이 울창한 낙원(eden) |
결 과 | 보시기에 매우 좋음 | 인간의 범죄와 추방 |
하지만 창세기 1장과 2장이 쓰인 각각의 시대 배경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가 완성된 것은 바빌론 포로기입니다. 이 창조 이야기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창조주다”라는 것인데,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과 창조를 마친 후 “안식일에는 쉬셨다”는 이야기에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이것은 바빌론 지배자들에게 “포로들인 우리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태어난 천부의 인권을 누릴 권리가 있는 인간이며, 하나님이 쉬셨으니 우리 역시 엿새간의 노동 후에 이레 째 되는 날에는 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천명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이 첫째 날에는 이것을, 둘째 날에는 저것을 창조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주다”라는 것과 “우리도 인권이 있다”는 것을 선언한 것입니다.
또한 창세기 2-3장의 창조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상 정치·경제적으로 가장 번창했던 다윗-솔로몬 시대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정치·경제적으로 잘 나간다고 하여 하나님을 잊고, 죄에 빠지고 있는 왕과 지도계급, 그리고 백성들에게 흙으로 빚어진 인간의 한계성 그리고 쉽게 죄에 떨어지는 비참함을 자각시키고 있습니다.▩
제1주 둘째 날 | 내용 | 읽을 본문 | 시편 기도 |
인류의 타락 | 창 3-5 | 시 38 |
오늘 읽을 본문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서 벌을 받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이야기와 아담과 하와의 큰아들인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이야기입니다.
[그림 2]
이 일련의 이야기들은 인간이 자신의 한계성을 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때,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일치와 조화를 이룬 관계가 깨어지고 서로 대립되어 감을 보여줍니다(그림 2 참조). 그 결과 하나님을 향한 범죄는 형제와 이웃을 향한 범죄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배반하고 죄에 떨어진 인간에게 희망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보호와 자비의 표를 주십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홍수 이전의 족장들의 계보가 나오는데, 하나같이 모두 장수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담은 930년, 셋은 920년, 에노스는 905년, 게난은 910년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다만, 창조 이후에서 홍수 이전까지의 인류 역사는 측정할 수 없는 과거였다는 것, 즉 아주 오래 전 일이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그렇게 묘사했다고 봅니다. 또 예로부터 긴 수명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큰 복으로 믿어왔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고 축복을 받은 아담은 그만큼 수명이 길었다고 표현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포괄적 의미 이외에도 성경에 나오는 숫자 하나하나에 상징적 또는 신학적 의미가 들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에녹의 나이가 그렇습니다. 창세기 저자에 따르면 365년을 산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걸은 사람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는 표현은 그분의 뜻과 계획을 헤아리고 존중하며 의롭고 착하게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365는 1년의 날수와 같은 완벽한 숫자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 덕분에 완벽한 지상 생애를 마치고 죽음을 겪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간 것입니다.
다음 숫자들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완벽한 숫자입니다.
7 :음력 한 달의 4분의 1입니다.
4 :원래는 바람의 네 방향 동서남북, 곧 사방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숫자였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낙원에 흐르는 강 하나가 네 줄기로 갈라져 땅에 물을 댑니다(창 2:10 이하). 고대 근동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은 ‘사방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4는 온 세상을 뜻하는 숫자로 통합니다.
10:역사의 한 주기를 뜻합니다. 아담에서 노아까지가 10대, 셈부터 아브라함까지가 10대였습니다.
12:원래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을 가리키는 이 숫자는 족보에서 후손의 수를 계산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이상의 숫자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우주질서를 완벽하게 유지하실 뿐 아니라, 인간 역사의 질서까지도 가지런하게 주재(主宰)하시고 지혜롭게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을 재천명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제1주 셋째 날 | 내용 | 읽을 본문 | 시편 기도 |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 | 창 6-11 | 시 14 |
오늘 읽은 본문은 대홍수 이야기와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에 이르러 세상에 죄악이 가득 찬 것을 보시고,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시며 결국 대홍수의 심판을 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인 노아를 시켜서 커다란 방주(方舟)를 만들게 하십니다. 흔히 노아의 방주가 교회를 예표(豫表)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종말 심판을 대비한 방주로만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셨지, 세상으로부터 구출해 내려고 교회를 세우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부터 실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홍수 이야기 뒤, 즉 10:1-32에 민족들의 일람표가 기록된 이유는 홍수 이후에 내린 하나님의 축복, 곧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거기에서 번성하여라”(9:7) 라는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보여 주며(10:32), 인류가 한 형제임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나아가 모든 인류는 하나님이 창조하고 보존하며 축복한 민족이라는 점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따라서 타민족이나 타인종에 대한 저주와 멸시는 성경의 입장과 명백히 어긋납니다. 민족들의 일람표에서 또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이스라엘이 결코 가장 위대한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삶의 터전에서 세대를 이어온 평범한 민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기원은 단지 셈족인 아르박삿의 후손이라고 암시되어 있을 뿐입니다. 허다한 민족들이 그들의 우월한 기원을 부각시키려고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갖은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역사를 통하여 자기 민족이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는 것을 고백하여 왔고, 결코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자신들이 선택되었음을 체험하고 이를 고백했습니다(신 7:7-8 참조).
11:10-26에 있는 셈의 족보는 5장과 연결되는 사제계 문헌입니다. 5장이 창조에서 홍수 이전까지의 조상들의 족보를 10대에 걸쳐 기술하였듯이, 11장에서는 홍수 이후부터 아브라함까지를 10대로 정리하였습니다. 5장에서 10대째인 노아가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것처럼, 셈의 족보에서도 10대째인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습니다. 또한 두 족보 모두 세 명의 자손(셈, 함, 야벳/아브람, 나홀, 하란)으로 끝납니다. 사제계 저자가 셈의 족보를 기록한 이유는 원역사(原歷史)를 끝내면서 하나님의 축복이 셈의 후손에게까지 계속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이 “유프라테스 강 건너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지만”(수 24:2), 창조주 하나님은 그들까지도 축복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인간 문명의 발달과 함께 자신들을 신격화하려는 제국들의 세력이 언어의 혼란으로 분열된 역사적 체험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바벨탑으로 묘사된 도시와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은 바빌론 제국에 있던 “꼭대기가 하늘로 치솟은 집”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지구라트 신전을 연상시킵니다. 지구라트는 구운 벽돌로 쌓아 올린 피라미드 구조의 층계식 건축물로서 그 꼭대기에는 신전이나 제단이 있었습니다(그림 3 참조).
[그림 3 ] 바벨탑의 원모델인 우르의 신전 지구라트
제1주 넷째 날 | 내용 | 읽을 본문 | 시편 기도 |
성조 아브라함 | 창 12-14 | 시 145 |
오늘 읽은 창세기 12-14장, 특히 12:1-4는 아브라함 이야기의 머리글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성조(聖祖) 이야기와 이스라엘 역사 전체의 머리글이기도 합니다.
떠돌며 살던 아람인이 유일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 사건은 하나님께서 밑도 끝도 없이 아브라함을 불러낸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이 명령은 신들을 자기가 속한 집단의 수호신으로 숭배하던 당시의 신앙태도와는 전혀 다른 신앙을 요구하는 명령입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장차 보여 줄 땅은 보증도 없는 말뿐인 약속에 불과합니다. 지금 손에 잡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부르시는 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이는 응답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었고, 결국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 여정은 결코 평탄치만은 않았습니다. 그는 여러 번 자신의 나약함 때문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지만,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신 하나님 덕분에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12:10 이하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어머니인 사라가 위험에 던져지는 상황이 이야기됩니다. 이스라엘 초기 역사에 있어서 매우 충격적이었을 이와 같은 사건은 성조 이야기에만도 세 번이나 나옵니다(12장, 20장, 26장). 그래서 학자들 간에는 이 세 가지 이야기가 동일한 전승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보는 이도 있고, 원래부터 독립적인 각각의 이야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10절은 흉년(기근)이란 말을 두 번씩이나 씀으로써 아브라함과 그의 가솔이 흉년으로 위협받은 상황을 알려줍니다. 팔레스타인지방에 자주 드는 흉년은 구약성경에 여러 번 언급됩니다(26:1; 43:1; 47:4; 룻 1:1; 삼하 21:1; 왕하 4:38; 8:1). 흉년이 들었을 때 팔레스타인지방 사람들이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이집트로 가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습니다(26장, 41:54 이하; 43장; 47:4). 아브라함 역시 굶주림을 피해 이집트로 몰려들었던 많은 사람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굶어 죽지 않으려고 이집트로 피해 간 아브라함은 또 다른 죽음의 위협에 직면하게 됩니다. 아내의 아름다움 때문에 죽게 될 것을 예견한 아브라함은 이집트 국경에 왔을 때 사라에게 자신을 오라버니라고 부를 것을 제안합니다(11-13절). 아브라함의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안전과 재산을 위해 아내를 권력자의 손에 넘겨주려는 비굴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변호하려는 듯, 뒤에서는(20:12) 사라가 아브라함의 이복 누이였다고 덧붙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죽음의 위협에 직면할 때 그가 결코 넘겨주어서는 안 될 것까지 넘겨주면서 목숨을 건지려 합니다. 사실 양식을 구걸하는 자로서 아브라함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처신해야 했을까요? 아브라함은 혼인의 성실성을 파괴시킬 윤리적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로 향한 최선의 선택을 했었어야 했습니다. 언제나 해결책을 가지시고, 다른 탈출구를 아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공포에 사로잡힌 그는 살아남기 위해 그의 아내를 넘겨주는 방법 외에 다른 것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보다는 임기응변식의 계략을 꾸미는 아브라함은 신앙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성경 저자가 이런 아브라함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존하고 기록한 것은 도덕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주체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의 처신 때문에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위험에 빠졌으나, 하나님은 이에 적극 개입하셔서 하고자 하신 일을 이루십니다. 결국 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와 사랑을 알려 주는 것이며, 어떤 사람이 선택되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훌륭함이나 공적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선택된 사람의 잘못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성실한 분이십니다.▩
제1주 다섯째 날 | 내용 | 읽을 본문 | 시편 기도 |
계약(언약)과 할례 | 창 15-17 | 시 105 |
오늘 읽은 창세기 15-17장에는 ‘계약과 할례’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무작정 신앙 여정에 나선 아브라함의 삶은 힘겹고 고달팠습니다. 그 삶을 지탱하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이런 삶의 도상에서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것, 내가 꼭 붙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만년에 마침내 그와 계약을 체결하십니다. 이 계약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일방적인 ‘약속’과는 달리 ‘계약’이란 쌍방이 똑같이 구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계약을 맺었다는 것은 인간이 더 이상 하나님과 주종관계에 있지 않고 그와 동등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과 동격이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고, 역사창조에 있어서 인간이 하나의 주체로서 하나님의 동역자(partner)로서 허용됐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15:9-10.17을 보면 짐승을 둘로 가르는 의식이 나오는데, 이것은 고대 근동의 계약 체결 방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사이의 조약이 깨졌을 때, 이를 중재해 줄 국제사법재판소 같은 기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계약의 증인들로 동원된 신들이 조약을 깨뜨린 당사자들을 징벌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 신들 앞에서 장엄한 맹세를 했고, 이 맹세의 효력에 전적으로 의존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맹세 의식이 무척 중요했습니다. 맹세 의식은 보통 짐승을 두 쪽으로 가르는 행위로 이루어졌습니다. 마리에서 발견된 기원전 18세기의 점토판에서 당나귀를 두 쪽으로 가르는 맹세 의식이 확인됩니다. 시리아의 세피르에서 발견된 점토판에 따르면, 조약 당사자들은 매번 짐승을 둘로 가를 때마다, ‘계약을 깨뜨리는 자는 황소가 둘로 갈라진 것처럼 갈라지리라’는 저주문을 외웠습니다.
이 맹세 의식은 구약성경에서도 확인됩니다. 히브리말로 ‘계약을 맺는다’는 ‘카랏 베릿’인데 본디 ‘계약을 가르다’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을 때에 위에서 설명한 맹세 의식을 행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 의식을 보다 명시적으로 언급합니다. “송아지를 두 조각으로 갈라놓고, 그 사이로 지나가 내 앞에서 언약을 맺어 놓고서도, 그 언약의 조문을 지키지 않고 나의 언약을 위반한 그 사람들을, 내가 이제 그 송아지와 같이 만들어 놓겠다. 유다의 지도자들이나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나, 내시들이나 제사장들이나, 이 땅의 백성이나 할 것 없이, 갈라진 송아지 사이로 지나간 자들은 모조리 내가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의 손에 넘겨주겠다. 그러면 그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렘 34:18-20).
또 창세 17:9-14.23-27을 보면 하나님은 계약에 동의하고 준수한다는 외적 표시로서 할례를 명하십니다. 본래 할례는 몽고족과 인도-게르만족을 제외한 전 세계에서 행해지던 고대 관습 중의 하나입니다. 가나안의 셈족들과 이집트에서도 위생적인 이유로 또는 사춘기나 혼인 의식과 관련하여 실시하였고, 이스라엘도 가나안 정복 이후 이 관습을 받아들였습니다(수 5:2-9 참조).
그런데 사제계 저자는 종교적 의미가 별로 없었던 이 관습의 의미를 계약과 연결하여 하나님에게 속한 백성의 표지로 변화시켰습니다. 또한 성인 예식이던 할례를 생후 팔 일 만에 실시함으로써 이스라엘 남자의 일생 전부가 하나님에게 바쳐졌음을 나타내는 신앙의 행위로 삼았습니다. 할례가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 요소 중 하나가 된 것은 바빌론 유배 시대 이후입니다. 사제계 저자는 유다의 멸망으로 인한 정치적인 붕괴, 전통 및 생존과 신앙의 위기를 극복하고 공동체를 단합시키려 했습니다. 그는 할례를 하나님의 약속에 포함시킴으로써 할례에 신성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하나님과 하나님께 의존하는 그 백성의 상호교환적인 계약으로까지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계약의 불이행은 유다 공동체의 붕괴를 뜻하므로, 계약의 표인 할례는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반드시 준수되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할례가 중요시된 것은 할례를 하지 않는 바빌론 사람들과 이스라엘 민족을 외적으로 구분해 주는 표지로서, 민족 일치의 상징이자 신앙 표현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제1주 여섯째 날 | 내용 | 읽을 본문 | 시편 기도 |
소돔의 멸망과 이삭의 탄생 | 창 18-21 | 시 36 |
오늘 읽은 본문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야기’와 ‘이삭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를 읽으면서 참으로 기이한 것은 성서 저자가 롯과 두 딸의 근친상간에 대해서 아무런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창세기 서두는 하나님이 창조주시며 생명을 준 분임을 증언합니다. 또 “자식을 낳고 번성하라”(창 1:28)는 것이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에게 최초로 그리고 거듭해서 강조하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는 파괴되어 폐허로 변했고, 인적이 사라진 유다 사막의 황무지에는 오직 롯과 그의 딸들만 남았습니다. 따라서 롯의 딸들은 적당한 남편을 찾을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는 이어져야 했습니다. 롯의 딸들이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아이를 잉태해서 지상에 인종을 퍼뜨려야 할 임무를 받아들였을 때, 저들은 근친상간의 터부조차도 무시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롯의 두 딸이 낳은 아들들이 그들의 이름을 딴 두 종족, 즉 암몬족과 모압족의 시조가 됐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이스라엘의 증오의 대상인 모압인들과 암몬인들을 비방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흑색선전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후에 룻이라는 암몬 여자가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하여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의 조상이 되었고(룻 4:1-22) 예수의 족보에 들게 된 것(마 1:5)을 볼 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이사악의 탄생은 이와 정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손의 번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불임인데다 나이도 많았습니다. 조급했던 사라는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남편에게 주어 대를 잇게 합니다. 이것이 당시 관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약속의 이행은 아니었습니다. 약속의 이행은 인간의 재간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사라가 아흔 살이고 아브라함이 아흔 아홉 살일 때, 즉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나이에 사라가 임신을 하고 이삭을 낳습니다. 성경 저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출산이 불가능해 보이고, 희망이 사라진 것 같고, 미래는 불투명하여 두렵고, 하나님의 약속은 허황된 것처럼 보일 때에라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조상에게 한 약속을 이행할 길을 여셨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무 죄 없이 쫓겨나 광야에서 죽어 가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일은,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서 체험한 하나님은 약자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는 분이심을 상기시켜 주면서 소외되고 버려진 약자들에게 눈을 돌리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