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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선생님의 <제주의 무덤과 동자석 기행> 자료 일부를 그대로 옮겨 적었습니다.
출처 http://cafe.naver.com/jejutour77/639
1. 동자석의 명칭
동자석은 말 그대로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동남(童男), 동녀(童女)의 형상이다. 동자석은 동제석, 동석, 동주석, 동제상, 동자상, 애기동자, 지신(地神), 무석, 자석 등으로 제주도 지역에 따라 다르게 부르고 있으나 가장 일반적인 명칭은 '동자석'이라고 부른다.
2. 동자석의 기원
제주도 동자석에는 유교의 예사상을 중심으로 여러 종교가 습합되었는데 불교, 무속, 민간신앙의 요소가 반영된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제주의 동자석은 유교문화의 중심권에서 잉태되어 변방인 제주에 까지 흘러와서 지역의 독특한 풍토와 여러 신앙과 만난다. 특히 한방도의 동자석이 불교적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채 지역마다 약간의 특징만을 남기고 있는 데 반해, 제주의 동자석은 분명 한반도로부터 온 입도시조, 제주에 부임한 목사(牧使)나 관리(官吏), 그리고 육지에서 벼슬하다 낙향한 제주 관리, 능역을 자원하여 출타한 유림(儒林), 진공(進貢)을 바치기 위해 육지에 다녀온 공인(貢人), 그리고 말 진상을 갔던 토호(土豪), 제주에 온 유배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능역에 참여한 제주인들은 자신의 집안에 무덤 석상을 만들 때 이들이 보고 들은 것을 반영했을 것은 사실이다. 특히 문인석에서 그 영향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육지와 관련된 이들에 의해서 제주의 무덤 석상은 어느 정도 영향을 받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만들어진 석상의 형상을 본다면 제주의 풍토와 사상에 의해 재해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석공들이 들은 것을 가지고 만들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제주의 동자석은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 지방호족에 의해 융성해지면서 민간신앙의 미륵, 기자석 등의 석상이 결합되어 제주의 양식으로 정착하게 된 무덤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헌마공신 김만일의 동자석과 문인석은 편년이 1632년으로 현존하는 제주 최초의 동자석이라고 할 수 있다. 김만일 무덤의 동자석은 제주도 초기의 석상답게 민머리에 민간신앙의 기자석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김만일은 선조 때 말을 바치기 위해 육지 출타가 잦았고 , 이후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육지를 자주 다녀왔다. 이를 감안하면, 김만일의 아들은 아버지가 사망하자 육지에서 보고 온 무덤의 석상을 제주도 석공에게 증언하여 동자석과 문인석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3. 동자석의 기능
동자석은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사자(死者)를 위해 예를 갖추고 있으며 다음의 기능들은 무덤의 기념비성을 강화시켜준다.
* 숭배적 기능 : 사자(死者)를 위해서 제례를 행하기 위한 공경(恭敬)
* 봉양적 기능 : 영혼을 위한 심부름꾼, 죽은 이를 공양하는 시동(侍童)을 상징
* 수호적 기능 : 사자(死者)를 악귀에서부터 수호하기 위한 임무의 수행
* 장식적 기능 : 가문의 권위(權威)를 알리기 위한 무덤의 치장(治裝)
* 주술적 기능 : 사자의 영혼을 위무(慰撫)하기 위한 종교 · 신앙적인 기능
* 유희적 기능 : 사자와 벗해 놀아주는 아이
4. 동자석의 형태
동자석은 특히 얼굴과 두 손 표현을 강조하고 있고, 하단부인 무릎 이하와 발은 표현하지 않는다. 동자석을 기능상 부분만을 강조하데 되는데, 동자석의 신체는 상단부, 중단부, 하단부 등 3단으로 구분할 수 있다.
상단부는 정수리에서 턱까지로 앞면은 눈, 코, 입, 볼을 표현하고, 측면은 두 귀를, 뒷면은 머리를 표현한다.
중단부는 턱 아래부터 손이 꺽이는 배꼽까지로, 앞면은 손 표현과 기물을 들고 있는 모습, 복식을 알아볼 수 있는 옷고름이나 복대(腹帶)를 표현한다. 측면은 손 표현이 연결돼 소매와 복대가 흐름을 유지하고, 뒷면은 댕기머리가 등 뒤로 늘어지거나 복대의 선이 새겨진다. 하단부는 표현을 단순하게 처리하는데, 하단부 중 다시 1/2은 땅에 묻히기 때문에 허리 이하는 대충 다듬은 채 그냥 둔다.
동자석의 형태적 변천을 살펴보면, 원통형 동자석은 편년이 오래된 발흥기의 동자석으로 앞면과 뒷면이 둥근 느낌이 난다. 반원형은 앞면은 부드럽게 각이 지고 뒷면은 반원형이거나, 앞면은 반원형이고 뒷면은 각진 동자석으로 융성기의 동자석이라고 할 수 있다. 각주형은 사각기둥 형태로 민머리가 많고 댕기머리를 표현해도 음각선으로만 표시하며 조형성이 떨어지는 쇠퇴기의 동자석이다.
동자석의 성별에 따른 분류는 크게 동남형(童男形), 동녀형(童女形)이 있으나 동물처럼 생긴 금수형(禽獸形) 등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 동남형(童男形) : 남자아이의 형상이며, 댕기머리나 민머리
* 동녀형(童女形) : 쪽진 머리나 댕기머리, 민머리
* 금수형(禽獸形) : 얼굴 모양을 동물과 같이 표현
5. 동자석의 크기
동자석의 크기는 보통 지상에 세웠을 때 보이는 부분이 작게는 약 30cm에서 크게는 90cm 정도이다. 땅 속에 묻힌 하단부가 10cm~20cm 정도 된다. 동자석의 비례는 2.5등신에서 4등신으로 얼굴부분이 전체 몸에 비해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 그러나 비례의 개념으로 동자석을 바라봤을 때 서양인의 시각을 우리의 전통조각을 평가하는 오류가 발생한다. 특히 얼굴을 강조하다보니 몸체에 비해 얼굴이 큰 것들이 많다.
6. 동자석의 머리 모양(頭飾)
제주도 동자석의 머리 모양은 댕기머리, 쪽진머리, 민머리, 모자를 쓴 머리로 구분할 수 있다.
제주도 동자석의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의 동자석이 댕기머리를 하고 있다. 왜 제주도 동자석이 유독 댕기머리를 하고 있는지는 몽고의 유풍(遺風이 문화적으로 잔존해 있기 때문으로 풀이 된다. 몽고의 유풍은 20세기 초까지 제주에 남아 있다.
쪽이란 시집간 여자가 목뒤에 땋아서 틀어 올려 비녀를 꽂은 머리이다. 즉 쪽진 머리는 결혼한 부녀의 일반적인 머리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마 중심에 가르마를 타고 머리 양쪽으로 곱게 빗어 뒤로 넘긴 후 머리를 말아 뭉쳐 한데 모아 검정 댕기를 묶어서 한 가닥으로 땋아 끝에다 자주색의 조림 댕기를 늘이고 쪽을 찐 후 비녀로 고정시키는 머리 형태이다.
제주 무덤의 동자석 중 동녀(童女)가 있는데, 부인들처럼 머리에 쪽을 진 형상이다. 일반적으로 머리에 쪽을 지면 혼례를 올린 부인을 상징한다.
이증(李增, 1628~1686)의 『남사일록(南사日錄)』에는 제주 여자 아이들의 쪽진 머리 모양을 기로하고 있어 흥미를 끈다. 지금까지 동자석 중에 동녀를 나타내는 쪽진 머리를 시녀(侍女), 또는 부인(婦人)으로 여겼으나 이증의 기록으로 볼 때 제주에서는 어린 여자 아이도 쪽을 지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왜 제주의 어린 여자 아이들이 쪽을 지는 것일까. 이것은 법식에 없는 풍습이다. 아마도 여자 아이들이 머리를 기르는 것은 가채용으로 긴 머리를 잘라 팔고자 하는 것으로 추측 되며, 또 긴 머리칼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쪽을 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7. 동자석의 배치
동자석은 일반적으로 산담 안 상석과 묘비 앞 배계절(拜階節)에 세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다르게 세우기도 한다. 무덤에 동자석을 세우는 형식을 기본형, 변형형, 특수형으로 나눌 수 있다.
8. 동자석이 세워진 무덤이 벼슬
문인석은 왕릉, 왕족, 사대부나 벼슬한 사람의 무덤에 세우는 석상으로 품계가 정확히 명시돼 있다. 하지만 동자석에 대해서는 기준을 제시한 법령이 없다. 그러므로 전국 지방에서는 문인석을 세우지 못할 경우 동자석을 만들어 세웠으며, 문인석을 세우고는 또 그 앞에 시중드는 아이처럼 동자석을 세우기도 했다.
제주도의 동자석은 일반 서민을 나타내는 '학생(學生)'의 무덤이나 벼슬을 하지 않는 사족(士族)인 '처사(處士)'의 무덤에도 세우기도 하지만, 대체로 벼슬한 사람의 무덤에 많이 세워지고 있다.
제주 동자석이 세워진 남자 무덤의 벼슬이나 품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진무(鎭撫), 절충장군(정3품),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 공조참의(工曹參議:정3품), 유학(幼學), 업무(業武), 주부(主簿:종6품), 호장(戶長), 별감(別監), 좌수(座首), 훈장(訓長), 사과(司果), 위장(衞將), 공생(空生), 판관(判官:종5품벼슬), 봉사(奉事:종5품), 무과(武科), 오위장(五衞將:정3품), 감찰(監察:정6품), 의관(議官), 시정(侍正:정3품), 승사랑(承仕郞:종8품), 통사랑(通仕郞:정8품), 이조참의(吏曹參議:정3품), 현감(縣監:종6품), 호조참의(戶曹參議:정3품), 군수(郡守:종4품), 참봉(參奉:종9품), 중추동지사(中樞同知事:정2품), 만호(萬戶:종4품), 병절교위(秉節校尉:정5품), 부호군(副護軍:종4품), 정사공신(靖社功臣:종2품), 전적(典籍:정6품), 도사(都事:종5품) 등이다.
제주 동자석이 세워진 여자 무덤의 품계는 남편의 벼슬이나 품계에 따라 위계가 달라지는데 내명부의 품계는 다음과 같다.
정부인(貞夫人:정·종2품), 숙인(淑人:정·종3품), 공인(恭人:정·종5품), 의인(宜人:정·종6품), 단인(端人:정·종8품), 유인(孺人:정·종9품) 등이다.
9. 동자석의 편년
조선시대 유교 문화에서 줄발한 제주도 동자석의 시대적 편년은 조선후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단. 현존하는 제주도 최초의 무덤 석상은 헌마공신 김만일의 동자석과 문인석(1632)이다.
현존하는 동자석을 중심으로 제주 동자석의 편년을 구분하면, 발흥기(17세기), 융성기(18~19세기), 쇠퇴기(20세기~1970년까지), 소멸기(1970년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제주의 동자석은 15세기 제주의 유교식 상상제도가 유입되면서 17세기부터 서서히 발흥하기 시작하여 18세기~19세기에 이르러 최고의 정점에 달하였고, 20세기 후반까지 그 맥을 이어오다 1980년대에 맥이 끊겼다. 현재에는 중국이나 육지에서 완성되어 들어온 대리석 동자석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 동자석들은 제주의 동자석이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자연과의 부조화 때문에 제주의 무덤을 더욱 어색하게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10. 동자석의 기물과 상징
동자석의 기물은 동자석의 기능과 종교 · 신앙적인 관계를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제주도에 유교식 무덤의 출현한 것은 태종 6년(1460)에 당시 주부(主簿, 종6품)로 있던 문방귀(文邦貴)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무덤을 만들고 3년 상을 치른 것이 최초의 유교식 장법의 시작이었다. 그 후로 유교식 상장제례가 서서히 퍼지다가 18세기가 되면 이형상의 무불(巫佛) 탄압을 계기로 완전히 유교식 상장제례가 정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강력한 유교식 교화(敎化) 정책에도 불구하고, 동자석에는 여전히 무속 신앙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는 오랜 세월에 걸쳐 토착화된 무속의 신앙 체계가 면면히 민중들의 가슴으로 전승되고 있다는 증거를 말해주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까지도 무속의 영향은 장례(葬禮)와 제사의례에 습합되기도 했다. 특히 장례식을 마친 날 밤에 사자의 영혼을 달래고, 가족들의 슬픔을 치유하기 위해 망자가 저승으로 잘 가지를 비는 귀양풀이를 하는 것이 그것이다.
유교식 제사에도 무속의 의례가 습합되었는데 일종의 문을 지키는 문신(門神)에게 상을 따로 차리고 맨 먼저 문 앞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부엌의 신인 조왕할망에게도 상을 차리거나 '고팡(집안의 곡물 창고)'을 지키는 뱀신인 안칠성에게도 상을 차려 대접한다.
따라서 동자석의 지물의 도상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는데 지물의 도상해석을 통해 동자석의 직능, 시대와 사상적 배경, 당대의 문화적인 가치, 사자(死者)와 석상과의 관계를 면밀하게 살필 수 있다.
동자석에 나타난 기물을 크게 유교적인 기물, 무속적인 기물, 불교적인 기물, 기독교적인 기물, 민간신앙적인 기물, 기하학적인기물 등 여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