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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그]Ἰησούς Χριστός [라]Iesus Christus [영]Jesus Christ
정양모 신부 / 신약학
차 례
Ⅰ.사료
비그리스도계 사료
그리스도계 사료
Ⅱ.역사의 예수
개관
활동배경
예수의 가르침
예수의 행적
예수의 수난사
Ⅲ.신앙의 그리스도
예수 부활 신앙
그리스도론적 존칭
Ⅰ.사료
비그리스도계 사료
타치투스 : 역사가 타치투스(P.C. Tacitus, 56~120)는 110년경에 쓴 《연대기》(Annalia)에서, 예수는 티베리우스 황제(14~39)가 로마 제국을 다스릴 때 빌라도(Pontius Pilatus) 총독에게 처형당했다고 한다(15권 44장 22절). 이 단락의 배경은, 64년 7월 19일 네로 황제(54~68)가 로마 시내를 불 지르자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당황한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지목하고 4년 동안(64~68) 심하게 박해하였다. 그리고 황제는 사법 절차 없이 그리스도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라고 지시하였다. 네로 박해 때 베드로와 바오로도 순교한 것으로 여겨진다. 《연대기》 단락은 이렇다 “네로는 자신에 대한 소문에 종지부를 찍고자 방화범들을 조작하고 극형으로 다스리게 했다. 이들은 온갖 추행을 저질러 미움을 산 사람들인데, 민중은 이들을 그리스도인들(Cherstiani로 誤記)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인들이란 명칭은, 티베리우스 치세 때 폰시우스 빌라도 총독에 의해 처형당한 그리스도에게서 비롯한다.”
플리니우스 2세 : 로마제국의 속주인 비티니아(지금의 터키 이즈미트 지역)의 총독으로 재직하던 플리니우스 2세(Plinius Secundus, 61/62~113)는 112년경 트라야누스 황제(98~117)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티니아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보고하면서 그들을 어떻게 다룰지 답변을 요청하였다. 이 서간 가운데서 중요한 단락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장하기를, 자신들의 죄악 또는 잘못이라야 다음과 같은 사실뿐이라고 합니다. 즉 그들은 일정한 날 밝기 전에 관례적으로 모여, 서로 번갈아 가며 마치 신을 위하듯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찬송가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 이런 일들이 끝나면 그들의 관습에 따라 헤어졌다가 나중에 다시 모여 음식을 드는데, 이는 해롭지 않은 보통 음식입니다”(《서간집》10권 96신 7항). 이 글의 내용인즉, 비티니아 지방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 새벽 해가 뜨기 전에 모여 미사를 드렸는데, 그들은 그리스도를 신처럼 여기면서 성가를 불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헤어졌다가 점심때 또는 저녁때 다시 모여 함께 아가페(agape, 愛餐)을 가졌다는 것이다.
수에토니우스 : 플리니우스 2세의 친구이자 뛰어난 전기 작가인 수에토니우스(Suetonius, 69?~122?)는 120년경에 《황제들의 생애》(De vita caesarum)를 썼는데, 그 가운데 <클라우디우스의 생애> 편에서 클라우디수스 황제가 49년에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황제는 그리스도(크레스투스로 誤記)의 사주로 계속해서 분란을 일으키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황제들의 생애》5권 25장 4절). 수에토니우스는 그리스도가 로마에 살면서 그리스도인들을 사주한 것으로 착각했다. 로마에서 분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사실 유대계 그리스도인 부부 아퀼라와 브리스킬라가 이때 로마에서 쫓겨난 다음 고린토에 정착해서 천막 만드는 일을 했는데, 마침 사도 바오로가 고린토에 전교하려 와서는 이 부부와 함께 살면서 같은 일을 했다(사도 18,1-3).
요세푸스 : 제1차 유대 독립 전쟁(66~70) 때 갈릴래아 지방의 유대인 독립군 사령관으로 있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로마군에 투항한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37/38~100)는 로마로 가서 시민권을 얻고 연금을 받아 살면서 그리스어로 《유대 전쟁사》(De bello Judaico) · 《유대 고대사》(Anriquitates Judaicae) · 《자서전》(Vita) · 《아피온 논박》(Contra Apionem)을 썼다. 《유대 고대사》총 20권은 90년경에 쓴 것으로서, 천지 창조부터 제1차 유대 독립 전쟁 발발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다룬 대작인데, 이 가운데 이른바 그리스도라는 예수와 동기간인 야고보가 62년 대제관 아난(그리스어로 아나노스)의 명으로 돌을 맞아 순교했다는 토막 기사가 있다(20권 200항 = 9장 1절).
바빌론 탈무드 : 바빌론 탈무드(Babylon Talmud)는 메소포타미아에 살던 유대교 율법 학자들이 6세기 말엽에 편찬한 법전인데, 그 가운데 산헤드린 43a에 예수의 죽음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의 역사적 신빙성을 부정하는 견해가 있으나(J. Maier, J. Gnilka) 여기에는 소중한 전승이 들어 있다. “과월절 전날 저녁때 예수를 매달았다. 그 40일 전에 전령이 이렇게 외쳤다. ‘예수는 성 밖으로 끌려가서 돌을 맞아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마술을 부리고 이스라엘을 현혹하고 빗나가게 했기 때문이다. 그를 변호할 말이 있는 사람은 나와서 발설하라.’ 그러나 변호하는 말이 없었으므로 과월절 전날 저녁때 그를 매달았다.”
위의 다섯 가지 비기독교계 사료에 실린 예수에 관한 정보를 취합하면 다음 다섯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는 기적을 행하고 오설을 퍼뜨렸기 때문에 처형되었다(바빌론 탈무드).
-예수는 과월절 전날 저녁 때 처형되었다(바빌론 탈무드).
-예수는 티베리우스 치세 때 본티우스 필라우스 총독에 의해 처형되었다(타키투스).
-예수의 아우 야고보는 62년 대제관 아난의 명으로 돌을 맞아 순교했다(요세푸스).
-112년 경 비티니아 속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 해가 뜨기 전에 미사를 드렸는데, 그 때 예수를 신처럼 섬겼다(플리니우스 2세).
그리스도교계 사료
그리스도교계의 대표적 사료는 신약성서이다. 그중에서도 예수의 언행을 비교적 충실히 담고 있는 공관복음서가 가장 중요하고, 예수의 정체와 행적에 대한 명상을 적은 요한복음서가 그 다음으로 중요하다. 예수의 언행은 한 세대 또는 두 세대 동안 구전과정을 거쳐 차츰 기록되었다. 구전 과정과 기록 과정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구전 과정 – 전승사 : 신약 학계에서는 구전 과정을 전승사라고 한다. 예수의 말씀과 행적은 일정한 양식(樣式)을 지니고 구전되었다.
①말씀 양식 :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우선 첫번째는 ‘비유’이다. 그런데 본래의 비유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고 전하려는 메시지도 한 가지이다. 본래의 비유가 특수 비유 또는 우화로 변질되는 수도 있다. 두번째인 ‘은유’는 상징적 표현이 들어 있는 간결한 비유이다. 세번째로 ‘단구’(短句,logion)는 우리말로 ‘토막 말씀’이다. 전혀 발설 배경 없이 전해 오는 짤막한 말씀이다. 속담과 매우 유사한데, 세분하면 잠언 · 예언 · ‘나 말씀’ · 유행어 등으로 나뉜다.
②사화 양식 : 예수의 행적을 이야기로 전할 때 일정한 양식이 있었다. 우선 ‘단화’(短話)는 단구와는 달리 발설 상황이 명시된 말씀이다. 흔히 상황 묘사 다음에 말씀이 달려 있다. 그래서 상황어라 해도 좋다. ‘논쟁’은 예수의 상대가 적의를 품고 예수의 처신이나 말씀에 반론을 제기 한다. 그러나 예수가 항상 이긴다. ‘대담’은 논쟁과 유사하지만, 상대가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오히려 슬쩍 떠보거나 예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이적 사화’는 쉽게 말해서 기적 이야기인데, 세분하면 치유 이적 사화 · 구마 이적 사화(=축귀 이적 사화) · 소생 이적 사화 · 자연 이적 사화로 나뉜다. 네 복음서에는 치유 이적 사화 14편 · 구마 이적 사화 5편 · 소생 이적 사화 3편 · 자연 이적 사화 8편이 수록되어 있다. ‘발현 사화’는 하느님 · 천사 · 부활한 그리스도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야기이다. 예수 부활 발현 사화가 돋보인다. ‘수난 사화’ 가운데서 마르코복음서 14-15장에 수록된 예수 수난 이야기는 일찍이 예루살렘 교우들이 길게 엮은 가장 일관된 이야기이다. 마태오와 루카 복음사가는 마르코복음서의 수난 사화를 옮겨 썼다. 반면, 요한복음서의 수난 사화는 요한계 교회에 따로 구전되던 것을 요한 복음사가가 채록한 것이다.
기록 과정 – 편집사 :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①예수 어록(Q) : 마태오복음서와 루카복음서를 비교해 보면 순서와 낱말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우선, 두 복음사가가 70년경에 쓰여진 마르코복음서을 베끼지 않은 단락인데도 순서와 낱말이 일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왜 그럴까? 두 복음사가가 또 다른 문헌을 제각기 구해서 베꼈기 때문이다. 이 문헌의 존재에 대해 홀츠만(H.J. Holtzmann, 1832~1910)이 <공관복음서>(Die synoptischen Evangelien, Ihr Ursprung und ge-schichlicher Charakter, 1863)란 논문에서 확증했다. 그래서 독일 신학계는 이 문헌을 Q(‘원천’을 뜻하는 독일어 Quelle의 약자)라고 이름 지었다. 예수에 관한 사료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소중한 사료라는 생각에서 지은 이름이다. 우리말로는 ‘예수 어록’, 또는 줄여서 ‘어록’이라고 한다. 시리아의 어느 그리스도인이 예수의 가르침에 심취하여 50~60년경 그분의 말씀 70여 편을 모아 예수 어록을 펴냈다고 여겨진다. 마태오복음서와 루카복음서와 같이 이용한 사료는 마르코복음서와 ‘어록’이라는 학설을 이출전설(二出典設)이라고 한다. 이 주장이 처음에는 가설이었지만 지금은 정설이다.
어록의 형태를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 사화는 두 편뿐이고(루카 7,1b-10=마태 8,5-10.13; 루카 11,14-15.17-22=마태 12,22-29) 나머지는 모두 예수의 말씀이다. ‘그리스도’라는 존칭은 나오지 않고, 그 대신 ‘사람의 아들’이라는 존칭은 자주 언급된다. 이 존칭의 용법을 살펴보면 사람의아들은 이미 오셨다고도 하고(루카 7,34; 9,58 등), 장차 오시리라고도 한다(루카 12,8.10.40 등). 예수 어록은 세례자 요한의 출현과 심판 설교로 시작해서(루카 3,1-17=마태 3,1-22), 제자들이 이스라엘을 심판하리라는 예언으로 끝난다(마태 22,28-30=루카 19,28). 그렇기에 어록 편집자는 종말 임박 신앙에 심취했던 그리스도인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어록에는 예수 수난 사화와 예수 발현 사화가 없다. 두 가지 사화가 본래부터 쓰여지지 않았을까? 마지막 장에 쓰여졌지만 관리를 잘못해서 떨어져 나간 것일까? 이 문제는 큰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어록의 순서와 낱말을 많이 고친 반면, 루카 복음사가는 어록의 순서와 낱말을 비교적 잘 보존했다. 그래서 어록을 복구할 때 루카복음서를 따르는 게 관행이다. 예수 어록의 형성과정에 관심이 있는 이는 조태연 지음,《 예수 운동》, 대한기독교서회 1996, 325-404쪽을 보라.
②공관복음서 : 예수 어록은 예수의 말씀 모음집인데 비해, 말씀뿐만 아니라 예수의 행적을 이야기로 엮은 사화까지 기록한 작품을 복음서라고 한다. 70년 전후해서 어느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역사상 처음으로 복음서를 펴낸 것이 마르코복음서이다. 마르코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선재(先在)나 그의 사생활을 거론하지 않는다. 아울러 빈 무덤 사화로 복음서를 마무리하고, 부활한 그리스도의 발현 사화를 언급하지 않은 것도 특색이다.
아마도 시리아에 살던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80~90년경에 마태오복음서를 펴냈을 것이다. 그는 마르코복음서와 예수 어록을 인용하면서 가감 · 수정을 하였다. 말하자면 자기 교회의 실정에 맞게끔 예수의 언행을 재해석했던 것이다. 아울러 마태오 복음사가는 자기 교회에 구전되던 예수 전승들을 부지런히 채록했다. 이를 일컬어 마태오복음서의 고유 사료(약자 SM)라고 한다. 같은 시기에 어느 이방계 그리스도인이 루카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집필하였다. 그는 루카복음서를 쓸 때 마르코복음서와 예수 어록을 부지런히 인용하면서 자신의 관점에 맞추어 가감 · 수정하였다. 또한 그는 신자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예수 전승들을 열심히 채록했다. 이를 일컬어 루카복음서의 고유 사료(약자 SL)라고 한다. 이처럼 사료와 내용에 있어 서로 관계가 밀접한 마르코 · 마태오 · 루카복음서를 합쳐 공관복음서라 한다. 앞으로 공관복음서를 중심으로 <역사의 예수>를 엮을 것이다.
③요한복음서 : 예수를 가까이서 따른 제자들 가운데는 열두 제자 외에도 예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애제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알 길이 없고 애제자라는 별명만 전해 온다. 후대 학자들은 애제자를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요한과 동일시했다. 1세기 말엽에 애제자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그의 제자들이 이른바 요한계 문헌이란 작품집을 남겼다. 애제자의 첫 제자가 요한복음서 1-20장을 쓴 데 이어, 둘째 제자가 요한복음서 21장을 가필했다. 또한 셋째 제자(들)이 요한의 편지 1~3편을 썼고, 넷째 제자가 요한묵시록을 썼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 사건의 뜻을 새긴 명상가이다. 요한복음서는 예수 명상록이다. 그래서 역사적 정보는 비교적 빈약한 편이다. 그의 사상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예수를 하느님으로 받들었다는 점이다. 요한복음서을 좋아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나는 요한의 명상을 따라가기 무척 어렵다. 우리나라 중견 시인 한 분은 요한복음서를 정독하고 나서 복음작가에 대해 딱 한 마디 평을 내렸다. “당돌해요.” 네 복음서의 형성과정을 자세히 익히려면 헤르만 헨드릭스 지음, 《예수에게서 복음서까지 · 복음서의 형성과정》(분도출판사 1985)을 보라.
Ⅱ.역사의 예수
개관
네 복음사가들은 객관적으로 예수의 역사를 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예수에 대한 믿음을 적었다. 예수의 말씀과 사화는 그리스도 신앙으로 심히 윤색되어 있다는 말이다.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결코 쉬운 일도 아니다. 1950년대까지는 역사의 예수를 규명하는 일이 불가능할 뿐더러 중요하지 않다는 견해가 널리 퍼졌었다. 역사적 예수의 구체적 모습을 소홀히 여기고 오직 초월적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만 강조하는 신학 사조가 한 세대 이상 계속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 역사의 예수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그 중요성도 인정하는 상황이다.
탄생일 : 디오니시오 엑시구우스(Dionysius Exiguus, 470?~550?)라는 수사가 525년 로마에서 예수 성탄을 기점으로 서력을 만들었다. 그는 예수가 로마 건국 754년에 탄생한 것으로 여겼는데, 계산이 틀렸다. 예수는 헤로데 대왕 생존 시에 탄생하였다(마태 2,1.19; 루카 1,5). 그런데 헤로데가 로마 건국 750년 즉 기원전 4년에 예리고의 별궁에서 병사하였기 때문에, 예수는 기원전 4년보다 앞서 탄생하였다. 하지만 정확히 몇 년이나 앞서 탄생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흔히 기원전 7~6년경에 탄생하였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12월 25일도 예수의 진짜 탄생일이 아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313년 신앙의 자유를 얻고 난 후 예수 탄생일을 기념하기 시작했는데, 언제 태어났는지 몰라 당시 로마 시민들이 ‘불멸의 태양 탄일’을 경축하던 12월 25일을 예수 성탄으로 정했을 뿐이다.
3세기경 이집트에서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150?~215?)의 주장에 따라, 예수가 5월 20일에 태어났다고 여겼다(《양탄자》1권 145장 6절). 하지만 동방 교회 대부분은 1월 6일에 예수 성탄을 경축하며, 아르메니아 정교회는 1월 17일에 예수 성탄을 지낸다.
탄생지 : 마태오복음서와 루카복음서의 예수 탄생지에 따르면, 예수는 예루살렘 남쪽에서 10㎞ 떨어진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마태 2,1; 루카 2,4). 베들레헴은 성군으로 추앙받은 이스라엘 제2대 임금 다윗의 고향이다. 그의 후예 가운데서 미래의 성군인 메시아가 탄생하리라고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조상 다윗처럼 그 후예 메시아도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리라는 믿음이 예수 성탄 이전 수백 년 전부터 내려왔다(미카 5,1).
역사비평학계에서는 예수가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에서 태어났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말하자면 베틀레헴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반영하는 신앙적 탄생지이고, 나자렛은 사실을 반영하는 역사적 탄생지라는 것이다. 동방에서 점성가들이 베들레헴을 찾아와서 예수 아기를 경배했다는 이야기의 의미는, 예수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사람들의 메시아라는 것이다.
가족 사항 : 예수의 어머니는 마리아, 아버지는 요셉이었다. 예수가 27~30년 까지 팔레스티나에서 공생활을 하는 동안 어머니는 가끔 찾아왔지만, 아버지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사실로 미루어 요셉은 일찍 사망한 것 같다. 예수께는 야고보 · 요세 · 유다 · 시몬 등 남동생이 네 명 있었고 누이동생들도 있었다(마르 6,3). 가톨릭에선 성모 마리아는 평생 동정이셨다는 교리를 신봉하는 까닭에 흔히 이들을 예수의 친동기로 보지 않고 가까운 친척들로 간주한다. 반면에 개신교계에서는 이들을 친동기로 본다. 마리아가 예수를 낳을 때까지는 동정이셨지만 그 후에는 요셉과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맺어 많은 아들 딸들을 낳았다고 본다. 신학적으로 이 문제는 그리 중요치 않다. 가족 사항에서 유의할 점은,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조혼이 관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독신으로 지냈다는 사실이다(마태 19,12). 그리스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스키는《 예수의 마지막 유혹》 에서 포르투칼 출신으로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주제 사라마구는 《예수의 제2복음》 에서 막달라 출신 마리아를 예수님의 정부로 묘사했는데, 이는 매우 무책임한 짓거리이다.
직업 : 예수는 기술자였다(마르 6,3). 더 자세히 말해 나무를 다루는 목수 · 돌을 다루는 석수 · 나무와 돌을 다 같이 다루는 건축 기능공이었다. 고향 나자렛에서는 일거리가 별로 없었겠지만, 기원전 4~20년까지 갈릴래아의 수도로 나자렛에서 북쪽으로 5㎞ 떨어진 세포리스(Seporis)에는 일감이 제법 있었을 것이다. 또한 헤로데 안티파스가 갈릴래아 호수 서쪽에 새 수도 티베리아를 건설할 때(18~20)는 일감이 넘쳤으리라 여겨진다. 마태오는 예수의 직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아버지 요셉의 직업이 기술자였다고 전한다(마태 13,55). 당시에는 직업이 세습되었기에 예수의 직업이 기술자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셉의 목공소를 그린 그림으로는 조르주 드 라 투르(1645년경 루브르), 존 E. 밀레이(1849-1850 런던 테이트)의 작품이 돋보인다.
교육 수준 : 석가 · 공자 · 소크라테스는 모두 당대로서는 남달리 많이 배운 지식인들이었다. 대조적으로 막내둥이 성인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성서를 읽고(루카 4,16-30), 땅바닥에 글을 쓸 정도의(요한 8,1-11) 초보적 교육을 받았을 뿐이다(요한 7,5). 우리네 식으로 말하자면 언문해독을 했다 하겠다. 예수께서 율법 학자들과 논쟁한 사실을 근거로, 그가 상당한 지식인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설득력이 약하다.
출가 : 루카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가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제15년이라고 한다(루카 3,1). 시리아 지방의 역산법에 따르면 제15년은 서기 27년 10월 1일부터 28년 9월 30일까지이다(샤를르 뻬로 지음, 박상래 옮김, 《예수와 역사》 , 가톨릭출판사 1985, 84쪽). 요한은 유다 지방 요르단 강(마르 1,9)과 그 동쪽에 있는 베다니아에서(요한 1,28), 하느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날이 임박했으니 서둘러 회개하라고 설교하면서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받으라고 촉구했다. 이때 많은 유대인들이 요한에게 몰려갔는데, 예수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다른 이들은 세례를 받은 후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예수는 잠시 동안 세례자 요한의 세례 운동에 가담했다가(요한 3,22),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예수는 세례를 받을 때 엄청난 체험을 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결단을 내렸다. 이 체험에 대해 세례 사화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예수께서 즉시 물에서 올라오시면서 보시니, 하늘이 갈라지고 (하느님의)영이 비둘기처럼 당신에게 내려왔다. 이어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울러 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마르 1,10-11). 예수는 세례 때 천지가 상통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거룩한 기운이 당신에게 내리는 시각 체험, 당신 자신을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는 귀한 아들이라는 청각 체험을 하였다는 것이다. 세례사화는 예수님의 신체험을 집약한 뜻깊은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가족들은 예수의 출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와 형제들은 출가한 예수를 정신병자로 여기고 강제로 귀가시키려고 찾아온 적도 있다(마르 3,20-21.31-35). 이 단화(短話) 끝에 나오는 예수의 반응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입니까?” 하고 나서, 당신 주변의 청중들을 가리키면서 “보시오,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사람이야말로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핏줄을 나눈 혈연 가족을 버리고 당신이 천명하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신앙 가족을 택한다는 말씀이다. 같은 내용의 단화가 루가복음에 실려 있다. 어느 부인이 예수의 설교에 감복해서, 저런 아들을 낳은 어머니는 복도 많다고 하는 소리에 예수는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은 복됩니다”라고 대꾸하였다(루카 11,27-28).
활동 지역 :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다음 주로 갈릴래아 지방에서, 정확히 갈릴래아 호수변에서, 더 정확히 호수 북부 주변에서 활약하였다. 호수 북반부 예수님의 활동 지역들을 티베리아에서 부터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꼽으면 다음과 같다. 갈릴래아 영지의 수도인 신도시 티베리아, 마리아 막달레나의 고향 막달라, 예수가 배를 타고 와서 뭍에 내린 적이 있는 겐네사렛 평야 ·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셨다는 타브가 · 예수님의 활동 근거지 가파르나움 · 가파르나움 북쪽에 있는 코라진 ·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필립보의 고향인 베싸이다 · 무덤에 사는 이방인 미치광이를 고친 게르게사(지금의 Kursi) 등이 예수의 활동 주 무대였다. 또한 예수는 열두 제자들을 양성하고 둘씩 짝지어 이스라엘 각지로 파견하였다.
활동 기간 : 루카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제15년(24. 10. 1~28. 9. 30)에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출가하였다(루카 3,1). 그리고 예수는 거의 확실히 30년 4월 7일 금요일에 처형되었다(졸고, "예수 수난사" , 《종교신학연구》 제9집, 분도출판사 1996, 321-325쪽). 그렇다면 예수는 두 해 반쯤 공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생각된다.
요한복음사가는 예수의 공생활 초기에 성전 정화 사건을 배치하였다(요한 2,13-22). 그때 유대인들이 이르기를 “이 성전을 짓는데 46년이 결렸다”고 한다(요한 2,20). 그 뜻 인즉, 헤로데 대왕이 기원전 20~19년 예루살렘 성전 개축 공사를 시작한 때부터(요세푸스,《유대 고대사》15권 380항) 언쟁 때까지 46년째 공사가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쟁의 시기는 27~28년경이 된다. 이는 루카복음서 3장 1절의 기록과 일치한다(빼로,《예수와 역사》 , 84-85쪽). 그렇기에 예수가 공적으로 활약하는 동안 과월절을 한 차례 지냈다는 공관복음서의 기록보다는, 세 차례(요한 2,13; 6,4; 11,55) 과월절을 맞이하였다는 요한복음서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다. 눈 먼 장닭도 어쩌다 모이를 쪼아먹는 수가 있다더니, 역사적 신빙성이 빈약한 요한복음서의 증언이 더 믿음직스러운 경우도 있다.
예수는 헤로데 대왕이 기원전 4년 예리고에서 병사하기 전에 탄생하였다(마태 2,1; 루카 1,5). 학자들은 예수의 출생 연도를 기원전 7~6년경으로 산정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는 대략 36~37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가 지상 생활을 33년 동안 하였다는 것이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이다.
활동 배경
정치적 배경
기원전 63년 로마군 사령관 폼페이우스( G. Pompeius, 기원전 106~48)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다음, 이스라엘 남부의 반 사막 지역인 이두메아 출신 이방인인 안티파테르(Antipater)가 로마의 환심을 사서 팔레스타인에서 실권을 행사했다. 기원전 43년 안티파테르가 암살당하고, 기원전 40년 그의 아들 헤로데가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유다와 사마리아의 왕’ 이란 칭호를 받았다. 그는 기원전 37년 로마군의 지원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33년 동안(기원전 37~4) 팔레스티나 전역을 다스렸다. 기원전 4년 과월절을 앞두고 헤로데는 예리고 별장에서 병사했다. 죽기 5일 전에, 그는 친아들인 왕세자 안티파테르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의심해서 처형했다(요세푸스, 《유대 전쟁사》1권 661~664항). 헤로데의 아들 셋이 아버지의 영지를 나눠 가졌다. 아르켈라오(Herod Archelaus, 기원전4~서기 6)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안티파스(Herld Antepas, 기원전 4~서기 39)는 갈릴래아와 베레아를, 필립보(Herld Philip, 기원전 4~서기 34)는 골란 고원 북부 지역을 각각 다스렸다. 서기 6년 아우구스투스 로마 황제(기원전 27~서기 14)는 유다와 사마리아의 임금 아르켈라오를 현재 프랑스의 비엔(Vienne)으로 귀양 보내고, 총독을 파견하여 두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폰시우스 빌라도(26~36)가 제5대 총독으로 재직할 때 예수는 공적으로 활동하다가 이스라엘 주권을 복원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상론을 바란다면 박상래 지음, 《성서와 그 주변 이야기》 , 바오로딸 1977, 156-188쪽을 보라.
종교적 배경
①성전 중심의 사두가이파 : 이스라엘 백성의 신심 중심지는 예루살렘 성전이다. 기원전 20~19년부터 대대적으로 개축하기 시작한 성전에서는 오전 · 오후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렸고, 그 밖에도 유대인들이 제물을 가져오면 수시로 속죄의 제사 · 친교제 · 번제를 그리곤 했다. 매일 오전 · 오후 정기 제사 때에는 “기름에 반죽한 고운 밀가루와 함께 어린 양을 잡아 번제로 살라 바쳤다(민수 28,1-8 참조). 한 살짜리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는 제단에 뿌리고 몸통은 네 쪽으로 잘라 남김없이 불에 살라 바쳤다(레위 1,3-13 참조). … 안식일에는 어린양을 두 마리 더 바쳤고 고운 밀가루 반죽도 그렇게 했다. 매월 초하룻날(일종의 新月祭)에는 속죄를 위해서 황소 두 마리 · 숫양 한 마리 · 어린 양 일곱 마리 · 숫염소 한 마리를 바쳤고 아울러 고운 밀가루와 포도주도 바쳤다”( 박상래 , 《성서와 그 주변 이야기》, 204-205쪽). 예수 시대에 성전에서 일하던 사제(제관)들과 그 보조원 레위들의 숫자를 예레미아스(J. Jeremias) 교수는 1만 8,000명으로 추산했다. 그들은 십일조와 성전세와 헌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사제들은 24개조로 나뉘어 한 주간씩 돌아가면서 제사를 바쳤다.
사제들의 우두머리인 대사제와 그 측근 사제들이 귀족들과 야합하여 사두가이 당파를 형성했다. 이들은 기득권에 집착한 나머지 평신도 당파인 바리사이파와 대립관계에 있었다. 이들은 항상 정권과 헬레니즘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들의 사상적 특징으로는 구전 부정(《유대 고대사》13권 297항) · 천사의 존재 부정(사도 23,8) · 영혼 불멸 부정(《유대 고대사》18권 16~17항) 등이다. 부활을 부정했다는 설(마르 12,18-27)과 모세 오경만 경전으로 인정했다는 설도 있다.
예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자주 부딪히지 않았다. 그러나 30년 4월 초순 예수가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 낸 성전 정화 사건으로 이들의 비위를 거슬린 것이 그분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인 것 같다.
②율법 중심의 바리사이파 : 마카베오가 독립 전쟁 때 ‘경건자들’(하시딤)이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 독립 전쟁이 성공하여 하스모네 왕조가 세워졌을 때 현실 정치에 동조한 경건자들이 바리사이파로 발전했다. 그리고 하스모네 왕조가 대사제직까지 겸직하는 것에 분개해서 사해 서북쪽 쿰란으로 가서 묵시 문학적 영성을 추구한 이들이 에세네파가 되었다. 바리사이파들은 요한 히르카누스 1세(기원전 134~104) 치세 때 사두가이파의 적수로 나타난다(《유대 고대사》 13권 288~290항). 알렉산데르 얀네우스(기원전 103~76) 치세 때에 정권에 저항했고, 그 후계자인 살로메 알렉산드라(기원전 76~67) 치세 때는 정권과 화해하면서 영향력이 급상승했다. 예수 시대에 바리사이들은 6,000여 명이었으리라고 예레미아스 교수는 추정했다.
바리사이파들은 성서와 더불어 구전도 중시했다(《유대 고대사》13권 297항). 이들은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즐겨 결의론을 전개했다. 이들은 천사들의 존재와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었다(사도 23,6-8). 복음서에 보면 예수는 주로 바리사이파와 논쟁을 하였다. 이는 예수가 그만큼 그들과 어울렸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후에 발생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논쟁을 소급해서 예수의 입에 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졸저,《마태오 복음이야기》중 “유대교 심판설교”).
③종말에 집착한 에세네파 : 에세네파의 출현 동기는 이렇다. 시리아 정권을 상대로 이스라엘 독립 운동을 일으킨 마타티아 제관의 넷째 아들 요나단(기원전 160~142)이 독립군 지도자가 된 것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그가 과욕을 부려 152년에 대사제 직분까지 겸직했다(1마카 10,21; 1Q 하바꾹 주석 8,1-13). 그로 인해 당시까지 독립 운동에 가담했던 경건자들 가운데 사제들이 몹시 저항했으며 사독계 사제인 ‘의로운 스승’이 이 저항 운동을 이끌었다. 대사제는 사독 가문에서 배출되는 전통을 요나단이 거스렸다는 것이다. 에세네 중앙 수도원인 쿰란을 발굴한 드 보(R.G. De Vaux, 1903~1971)에 따르면, 요나단의 조카 요한 히르카누스 치세 때(기원전 135~104) 의로운 스승 또는 그 후계자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쿰란으로 이주하여 큰 수도원을 세웠다. 기원전 31년 대지진으로 쿰란 수도원이 파괴되자 수도자들은 어디론가 이주했다가, 헤로데 대왕의 아들 아르켈라오 치세 때(기원전 4~서기 6) 다시 쿰란으로 돌아와서 수도원을 재건했다. 서기 66년에 제1차 유대 독립 전쟁이 일어나고, 로마 진압군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68년 6월 21일 예리고를 탈환했다(요세푸스,《유대 전쟁사》4권 450항). 예리고에서 남쪽으로 불과 13㎞ 떨어진 쿰란의 수도자들은 서둘러 도서관 장서를 뒷산 11개 동굴에 숨기고 도망치다가 모두 몰살된 것 같다. 그들의 장서가 1947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이른바 쿰란 문헌이다.
에세네는 묵시 문학에 빠져서 종말 전쟁 · 종말 잔치를 기대하였다. 이들은 종말에 구원되고자 엄격한 계율을 만들어 정성껏 지켰으며,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수시로 목욕[洗淨浴]을 했을 뿐만 아니라, 독신으로 살았다. 적어도 쿰란 수도자들은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독신으로 살았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동조하는 일반인들은 재산도 소유하고 결혼도 했다.
예수가 에세네파의 회원이었다는 주장이 유포되고 있다(B. Thiering). 그런가 하면 쿰란 제7 동굴에서 발견된 그리스 파피루스(7Q5)는 마르코복음서 6장 52-53절과 일치한다는 주장이 25년 전에 처음으로 제기되더니(J. OʼCallaghan), 최근에 다시 나타나고 있다(C.P. Thiede · M. dʼAncona, Der Jesus-Papyus, Müchen, 1996). 그러나 쿰란 문헌 판독 전문가 푸에쉬(E. Puech)는 이들의 주장을 일축했다(Welt und Umwelt der Bilbel, Heft 10, 4. Quartal 1998,P.44). 에쎄네와 쿰란에 관한 논문 세 편만 적는다: 졸저, 《이스라엘 성지 어제와 오늘》, 생활성서사 1988, 72-78쪽; 박상래 지음,《성서와 그 주변 이야기》, 바오로딸 1997, 222-249쪽; 안성림/조철수 역주,《사해문헌》 1, 한국문화사 1996.
④독립 투사들의 젤롯당 :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에서 간혹 ‘열혈당’이라고도 하는 젤롯당(Zealot)의 유래와 활동을 언급하는데, 그 기록들을 모으면 다음과 같다. 서기 6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의 임금 아르켈라오를 비엔으로 귀양 보내고 총독을 임명하여, 세금을 거둘 목적으로 호구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러자 갈릴래아 호수 북쪽의 천연 요새 가믈라(지금의 Khirbet es-Salam) 출신 유다가 호구 조사와 납세 거부 운동을 벌였다. 그가 내세운 기치는 이스라엘 성지의 주인은 하느님 한 분뿐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젤롯당의 효시이다(2권 118·433항; 7권 253~257항). 유다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시몬도 반로마 운동을 벌이다가 티베리우스 알렉산델 총독(46~48)에게 처형당했다. 그의 후손과 자객들이 알비누스 총독 때 (62~64) 대사제 요나단을 죽였다(2권 254~257항). 손자 메나헴은 66년 예루살렘에서 독립 운동을 하다가 다른 독립군 단체에 의해 살해당했다(7권 253항). 유다의 후손인 엘레아자르 벤 야이르는 마사다 천연 요새에서 독립군을 지휘하다가 74년 해방절에 장열히 순국했다(7권 391~401항, 졸저 《이스라엘 성지 어제와 오늘》,83-85쪽).
이상이 요세푸스가 기술한 젤롯당, 일명 자객당의 유래와 활약상이다. 열혈당(그리스어로 젤로티스, 아람어로 칸느안)은 하느님과 민족에 대한 열정이 넘쳐 로마인과 로마에 동조하는 동족을 배척한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열혈당원들 가운데는 단도로 로마인들과 로마에 동조하는 동족을 죽이는 극렬 분자들이 있었다.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에도 젤롯당원으로 활약하였던 시몬이 있었다(마르 3,18). 열혈당의 유래와 활약상은 여기서 약술한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박상래, 《성서와 그 주변 이야기》,249-264쪽).
예수는 민족 독립 운동을 비롯해서 정치 문제에 관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로마의 군국 정치나 그리스의 민주정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거니와 관심조차 표명하지 않았다. 경제 문제 대해서도 그렇다. 예수는 유산 분배 문제에 개입한 것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만일 그분이 이승에 환생하신다면 자본주의, 사회주의 또는 제3의 길에 관심을 드러내실까? 단지 온 겨레에게 혜택이 가는 경제를 추구하라는 정도의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요즘 우리의 시각이긴 하지만 당시 최대의 사회 문제는 노예 제도였다. 예수나 바오로는 노예 제도 철폐를 거론한 적이 없다. 단지 노예를 학대하지 말고 사람으로 아껴야 한다고 하셨을 따름이다. 또한 예수는 문학 · 음악 · 조형 예술에 대해 말씀하신 적도 없다. 문화에 대한 그분의 뜻을 감히 헤아린다면, 나날을 살아가는 데 보람을 심어주는 문화를 가꾸라는 정도였을 것이다. 위의 관점이 옳다면, 예수님 또는 신약성서에 근거해서 정치신학, 경제신학, 사회신학, 문화신학을 전개하는 것은 번지수가 빗나갔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우리나라 경제위기를 맞아 개신교계 신약학자들이 힘을 합쳐《신약성서의 경제윤리》(한들 1998)라는 논문집을 펴냈는데, 과연 경제위기 해소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묻고 싶다.
⑤묵시 문학 사조 : 묵시 문학은 기원전 2세기부터 서기 2세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크게 유행한 종교 문학이다. 이때는 이스라엘이 시리아와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던 시대로서, 이집트에서의 종살이와 바빌론 유배에 이어 참으로 처참한 시기였다. 묵시 문학자들은 의기소침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교적 위안을 주려고 애썼다. 이들은 현실에 절망하고 오직 초현실에 희망을 걸었다. 이들은 세상을 양분하여 ‘이 세상’과 ‘오는 세상’으로 나누었다. 이 세상은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기에 죄와 악의 소굴이다.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고 중단 없이 퇴보한다.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죄와 악이 늘어난다. 작게는 가정이 파괴되고 나라는 가뭄 · 홍수 · 기근 · 지진 · 전염병으로 쑥밭이 되며 국가 간에 전쟁이 자주 일어난다. 마침내 해 · 달 · 별이 빛을 잃고 떨어지는 등 우주적 파국 현상이 일어나서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통곡할 때 하느님 또는 대리자인 사람의 아들(人子)이 땅에 내려와 선민을 구원하고 만민을 단죄한다. 선민은 새 하늘 · 새 땅 · 새 예루살렘에서 지복을 누린다. 이것이 묵시 문학의 큰 줄거리이다.
그렇다면 묵시문학자들은 어떻게 천지 창조부터 종말까지의 역사 전체와 종말 사건과 종말 이후의 신세계를 알았을까? 그들은 사적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계시나 정보도 없이 단지 상상 · 공상 · 환상 · 망상을 통해 책들을 집필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숨기고 과거 이스라엘 위인들의 이름을 도용했다. 묵시 문학은 모두 가탁 작품이다.
예수 시대를 전후해서 쓰여진 유대교 묵시 문학 작품 가운데 중요한 작품으로는《다니엘서》· 에티오파아어《에녹서》· 라틴어로 전해 오는《모세의 승천기》와《제4에즈라서》· 시리아어《바룩서》등이 있다. 신약성서에서 유대교 묵시 문학 유형을 가장 닮은 작품은 요한묵시록이다. 앞에서 소개한 에세네파도 묵시 문학에 심취했다.
예수도 묵시 문학적 표현을 더러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선포도 묵시 문학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종말 설교(마르 13장; 마태 24-25장; 루카 17, 20-37; 21, 5-36)를 보면 공관복음서 작가들도 묵시 문학적 표현들을 상당히 사용하였다. 그렇지만 예수나 공관 복음사가들이 묵시 문학과 거리를 둔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이들이 종말 임박 신념을 지녔던 것은 사실이지만 종말의 날짜와 시간을 정확히 계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날과 그 시간을 천사들도 모르고 예수 자신도 모른다고 한다(마르 13,32). 사람의 아들이 내려올 장소도 거론하지 않는다. “마치 번개가 동쪽에서 서쪽까지 빛나는 것처럼” 온 세계 어디서든 사람의 아들의 오심을 볼 수 있다고 한다(마태 24,27; 루카 17,24). 종말에 “구원 받을 사람이 적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고 예수는 많다, 적다고 답변하지 않고, 회개를 촉구하시는 뜻으로 “여러분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애쓰시오”라고 말했을 따름이다(루카 13,23-24).
예수의 가르침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뜻을 밝히는데 심혈을 기울이셨다. 그런가 하면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쌍것들을 거두고 귀신을 추방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이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차례로 일별코자 한다.
하느님의 나라
예수의 설교 주제는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마르 1,15)는 선포이다. ‘하느님의 나라’ 또는 ‘하늘 나라’(마태오복음서에서만 32번)는 당시 유행하지 않던 표현인데, 오직 예수만 자주 말하였다.
*마르코복음서 13번(1,15; 4,11.26.30; 9,1.47; 10,14.15.23.24.25; 14,25).
*마태오복음서 와 루카복음서 공동 9번(마태 5,3=루카 6,20; 마태 6,10=루카 11,2; 마태 6,33=루카
12,31; 마태 8,11=루카 13,29; 마태 10,7=루카 10,9; 마태 11,11=루카 7,28; 마태 11,12=루카 16,16;
마태 12,28=루카 11,20; 마태 13,33=루카 13,20).
*마태오복음서의 고유자료 27번(5,10.19ab.20; 7,21; 8,12; 13,19.24.38.43.44.45.47.52; 18,1.3.4.23;
19,12; 20,1; 21,31.43; 22,2; 23,13; 24,14; 25,1).
*루카복음서의 고유자료 12번(4,43; 9,60.62; 10,11; 12,32; 13,28; 7,20ab.21; 18,29; 21,3; 22,16.18).
*요한복음서 2번(3,3.5).
그럼 오늘날 우리에게는 생경하기 이를데 없는 “하느님의 나라”를 예수께서는 어떤 뜻으로 말씀하셨을까?
①예수는 묵시 문학의 영향을 받아 사탄이 역사를 지배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역사의 마지막에는 사탄과 그 졸개들을 없애고 온 누리의 임금인 하느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보았다. ‘하느님의 나라’(그리스어로 basileia tou theou)는 하느님의 종말 왕정(終末王政)이다.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이 종말 왕정을 펴실 때 심판과 구원이란 두 가지 일을 하신다고 보았다. 세례자 요한과 대다수 유대인들은 무서운 종말 심판을 연상한 데 비해서, 예수는 종말 심판보다는 종말 구원을 강조하셨다.
②하느님의 나라는 미래에 도래할 것이지만 자신의 행적으로 이미 실현되고 있다고 예수는 확신하였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으니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여러분에게 왔습니다”(루카 11,20=마태 12,28). “나는 사탄이 번갯불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루카 10,18). 이 경우 하느님 나라의 미래적 성격(Weiss, Schweizer)과 현재적 성격(Dodd)을 변증법적으로 함께 고려해야 한다.
➂예수는 종말 도래 시기를 정확히 계산하지 않았다(마르 13,32). 그러나 한 세대 안에 종말이 도래할 것으로 여겼을 가능성은 있다(마르 9,1; 13,30; 마태 10,23). 어쨌거나 예수께서는 종말이 임박하다고 하셨는데 2천 년이 지나도 종말이 도래하지 않으니 기독자로서는 고민이 없을 수 없다. “예수께서는 신국을 선포했는데 교회가 태어났다”(Alfred Loisy).
➂항에 관한 해석학적 반성을 시도하겠다.
기다리던 하느님의 나라는 오지 않고 기다리지 않던 교회가 태어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위기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묵시 문학적 종말 사상이 예수와 교회의 근본 신념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둘째, 하느님의 나라가 우주적 차원에서는 도래하지 않았지만, 예수 개인의 차원에서는 하느님이 그분을 부활시킴으로써 온전히 도래했다. 왜냐하면 부활은 종말 사건이기 때문이다.
셋째, 예수가 예고한 종말이 도래하지 않았다고 고민 할 필요는 없다. 미래를 예견하는 데 차질을 빚음으로써 예수도 지능의 유한성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분은 죄를 짓는 것 말고도 인간의 연약함을 고스란히 타고났다는 히브리서의 말씀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대제관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죄 외에는 모든일에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히브 4,15).
넷째, 오늘날 우리는 묵시 문학적 종말 임박 사상을 제외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이해해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랑이신 하느님(1요한 4,8.16)의 보살피심,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섭리하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행복과 불행, 우리의 삶과 죽음 전부를 보살피신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하느님이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우리를 거스르겠습니까? 그분은 당신의 친아드님 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넘겨주셨는데 어찌 그 아드님과 더불어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혜로 베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누가 감히 이 하느님께 선택받은 이들을 고발하겠습니까? 의롭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신데 말입니다. 단죄 할 자가 누구입니까? 죽으시고 더구나 부활하시어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해 대신 기도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신데 말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궁핍입니까? 핍박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아니면 칼입니까? (그것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당신 때문에 우리는 온종일 죽임을 당하며 도살되는 양들같이 다루어졌나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에 힘입어 이기고도 남습니다. 사실 나는 이렇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죽음이나 생명도, 천사들이나 주천사들도, 현재 일이나 장래 일도 능천사들이나 높이나 깊이도, 다른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이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로마 8,31b-39).
끝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우리말 논문 한 편을 소개한다. 박태식, “예수의 신국관 이해”《종교신학연구》제10집, 분도출판사 1997, 45-72쪽.
하느님의 뜻
예수가 게쎄마니에서 바친 간구는 너무나 유명하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어떤 일이든 하실 수 있사오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 예레미아스와 피츠마이어(J.A. Fitzmyer)의 연구로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유대인들은 과거는 물론 지금도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다. 지존하신 하느님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불경스럽다는 것이다. ‘아빠’는 아기가 말을 배우면서 아버지를 부르는 아기 말[小兒語]이다. 아기가 다 자란 다음에도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정감이 듬뿍 담긴 호칭이었다. 간구의 내용을 살펴보면 예수의 뜻과 하느님 아빠의 뜻이 상충하는 경우가 있었던 모양이다. 게쎄마니에서 간구하실 때 당신은 좀 더 살고 싶은데 아빠의 뜻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이때 예수는 자신의 뜻은 접어 두고 아빠의 거룩한 뜻을 앞세웠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의 이런 태도를 곰곰이 묵상하여 명언을 빚었다. “내 음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요한 4,34).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청중에게 회개를 요구하였다(마르 1,15). 회개란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삶이다. 예수는 전권 의식(全權意識)을 지니고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밝히셨다. 율사들은 성서와 전통의 권위에 기대어 계율을 확정했다. “성서에 이렇게 쓰여 있다”, “선대 율사 ~에게서 이렇게 들었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와는 달리 예수는 성서와 전통에 기대지 않고 전권 의식을 가지고 말하였다(마르 1,22.27).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또는 “아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아멘”(야무지게=진실히)으로 말을 시작한 분은 유대교 역사상 오직 예수뿐이다. 결국 예수의 독창적인 말투이다. 얼마나 확신이 강하셨으면 그러셨을까!
예수가 하느님의 뜻을 밝힌 단락 세 가지만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잘 알려진 대로 율법 학자들은 모세의 이혼법(신명 24,1)에 따라 이혼을 쉽게 허락했다. 하지만 예수는 인류 창조 때로 소급하여 하느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근거로 이혼을 반대하였다(마르 10,1-9). 예수가 형식상으로는 태초로 소급하여 말하였지만 그 깊은 뜻은, 남녀는 똑같은 인격체로서 온전히 평등하다는 것이다.
둘째 사례로 안식일 논쟁 단화(論爭短話)가 있다(마르 2,23-28).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비벼 먹는 것을 바리사이들이 보고 손바닥으로 타작을 했으니 안식일법을 어겼다고 나무라자, 예수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기지 않았습니다”(27절). 안식일법은 인류 창조 때는 없었고(창세 1,26-2,4), 후에 제정된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는 태초로 소급하여 말하는데 그 깊은 뜻은, 안식일은 휴식의 필요성 때문에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현대식으로 번안한다면 사람이 법을 지키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법이 인간의 복지를 위해서 제정되었다는 것이다. 인간 창조로 소급하는 시원적 말씀은 인본주의적 법률관을 밝히는 근원적 말씀이다.
셋째 사례는 산상 설교에 나오는 여섯 가지 대립 명제(마태 5,21-48)이다. 예수는 여섯 차례에 걸쳐 구약성서나 조상들이 전한 전승을 인용하고(命題)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反命題)라고 한다. 구약성서와 조상들의 전승을 상대화하거나 아예 폐기하는 말씀인데, 여기에는 예수의 전권 의식이 담겨 있다. 하느님에게서 새로운 영감을 받지 않고서는 엄두도 못 낼 말씀이다. 그렇기에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의 이런 말씀들을 곱씹은 후 다음과 같은 명구를 만들었다. “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입니다”(요한 7,16). 예수가 613가지의 율법 전부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환원시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마르 12,28-34). 그런데 예수보다 먼저 활약한 율법 학자 힐렐(Hillel)도 애주애인(愛主愛人)을 중시했지만, 그렇다고 율법 일체를 애주애인으로 환원시키지는 못했다.
예수의 행적
예수의 행적 가운데에서 소외자들에 대한 관심 · 네 복음서의 이적 사화 · 성전 정화 사화를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소외자들에 대한 관심
예수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모으려고 하였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가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과 한 맺힌 이들(마태 5,3-12=루카 6,20-21), 무식한 이들(마태 11,25-26=루카 10,21), 그리고 직업상의 죄인들과 윤리상의 죄인들(마르 2,14-17; 루카 15장; 마태 11,18-19=루카 7,33-34; 마태 21,31-32=루카 7,29-30; 마태 22,1-10=루카 14,15-24)을 편애하였다. 또한 당시에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던 어린이들(마르 10,13-16)과 여자들(마르 5,25-34; 7,24-30; 12,41-44; 14,3-9; 루카 7,36-50; 8,1-3; 13,10-17; 18,1-18; 요한 4,1-42; 7,53-8,11)을 가까이하였다. 예수가 여자들을 존중한 것은, 당시에는 무척 파격적 처신이었다. 예수는 이들 밑바닥 인생을 가엾게 여기는 측은지심이 넘치는 자애로운 분이었다.
왜 그렇게 하였을까?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골고루 햇빛과 비를 주시는 하느님(마태 5,45), 잃은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목동 같은 하느님, 잃은 은전을 되찾고 기뻐하는 부인 같은 하느님, 잃은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 같은 하느님(루카 15장), 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기꺼이 탕감해 주는 임금님 같은 하느님(마태 18,23-35), 해 떨어지기 직전에 단 한 시간 일한 품팔이에게도 그 가족의 생계를 생각해서 하루치 일당을 주는 선한 포도원 주인 같은 하느님(마태 20,1-16)을 의식했기 때문에 예수는 소외자들에게 사랑을 보여 주었다. 예수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아빠를 깊이 체험하고 맑게 체현하였다.
네 복음서의 이적 사화
여기서는 예수가 공생활 동안 행한 구체적인 이적 사화만 살피겠다. 이적 사화 집성문, 그리고 수난 · 부활 사화에 나오는 이적 사화는 다루지 않겠다. 네 복음서의 기적은 신기한 사건이 아니라, 심오한 진리를 가리키는 징표 · 표징이다. 공관복음서의 경우 기적은 하느님 구원 능력을 가리키는 상징 행위이다(神論的 表徵). 이와 달리 요한복음서의 기적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알리는 독보적 계시자라는 것을 보여 주는 상징 행위이다(基督論的 表徵). 예수 어록과 네 복음서에 실린 이적 사화를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어록 편집자는 50~60년대에 주로 예수의 말씀 전승들을 모아 예수 어록을 엮었다. 그는 치유 이적 사화 한 편(마태 8,5-13=루카 11,14) · 구마 이적 사화 한 편(마태 12,22-23; 9,32-34=루카 11,14)을 채록했다. 이는 어록에 잘 어울리지 않는 예외 현상이다.
마르코복음서에는 치유 이적 사화 8편 · 구마 이적 사화 4편 · 소생 이적 사화 1편 · 자연 이적 사화 5편 등 18편이 실려 있다. 이 중 구마 이적 사화가 돋보인다. 구마 사화에서 마르코복음서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자인 예수가 사탄과 그 졸개들인 마귀들을 제압했다고 한다. 마르코복음서가 예수의 이적 사화를 18편이나 채록한 것은 그리스 이적 사화집(aretaloge)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김득중, 《복음서의 이적 해석》, 컨콜디아사 1996, 62-64쪽).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의 말씀 전승을 소중히 여겨 다섯 곳에 모아 실었다(5-7장; 10장; 13장; 18장; 23-25장). 마태오복음서는 예수의 이적 사화를 그분 말씀의 보조수단으로 여겼다(김득중, 같은 책, 177-18쪽). 그는 8-9장에 이적 사화 10편을 모아 실었는데, 그것들을 마태오복음서의 출전인 어록 및 마르코복음서의 이적 사화들과 비교해 보면, 마태오복음서가 확장한 경우도 있고(마태 8,5-13과 루카 7,1-10 비교), 중복한 경우도 있다(마태 9,27-31; 20,29-34과 마르 10,46-52/ 마태 9,32-34; 12,22-23과 루카 11,14 비교). 그렇지만 마태오복음서가 마르코복음서의 이적 사화를 축소한 경우가 훨씬 더 많다(마태 8,1-4과 마르 1,40-45; 마태 8,14-15과 마르 2,1-12; 마태 9,18-26과 마르 5,21-43 비교). 마태오복음서가 이적 사화를 옮겨 쓸 때 이야기 부분을 축소하거나 삭제한 반면 예수의 말씀 부분은 비교적 잘 보존한 사실로 미루어, 마태오복음서는 이적 사화 자체보다는 그 의미에 관심을 둔 것이다. 마태오복음서가 고유 전승에서 오직 자연 이적 사화 한 편만 채록한 사실도(17,24-27) 그가 이적 사화 자체에는 관심이 적었다는 증거이다.
루카복음서는 마르코복음서의 이적 사화 18편 가운데 6편은 삭제 했으나 12편은 옮겨 썼다. 그리고 예수 어록에 실린 이적 사화 2편도 다 옮겨 썼다. 또한 루카복음서는 고유 전승에서 이적 사화 5편을 채록했다. 루카복음서는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이적 4편(사도 13,1-10; 5,1-11; 9,32-35. 36-43), 바오로의 이적 5편(사도 13,8-11; 14,8-12; 16,16-18; 20,9-1; 28,7-8)을 소개한다. 결국 루카복음서는 마르코복음서만큼 이적 사화에 관심이 많았다. 마태오복음서가 예수의 행적보다는 말씀을 중히 여긴 반면, 루카복음서는 그 둘을 다 소중히 여겼다(루카 24,19). 아니 루카는, 말씀보다 예수님의 행적을 더 강조했다(사도 10,38).
요한복음서에는 이적 사화 7편이 실려 있다. 요한 복음사가가 표징 출전이란 책에서 이적 사화 7편을 옮겨 썼다는 것이 루돌프 불트만(R. Bultmann, 1884~1976) 이래 신약학계의 통설이다. 이미 서두에서 말했거니와 공관복음서의 기적이 하느님의 구원 능력을 가리키는 상징행위라면(神論的 表徵), 요한복음서의 기적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계시자로 드러내는 상징행위이다(基督論的 標徵).
①치유 이적 사화 : 치유 이적 사화에 명시된 질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구마 이적 사화 두 편도 함께 살펴본다. 구마 이적 사화 두 편도 함께 살펴본다.
복음서 치유 이적 사화의 양식을 보면 상황 묘사 · 기적적 치유 · 치유 실증 · 목격자들의 반응 순으로 되어 있다. 이는 그리스 치유 이적 사화의 양식과 닮았다(알폰스 봐이즈, 《성경은 무엇을 기적이라고 하는가?》 분도출판사 1987, 48-57쪽). 그렇지만 복음서 치유 이적 사화의 양식은 극히 자연스럽기도 하다. 그런식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어떻게 달리 이야기하겠는가?
그리스 치유 이적 사화와 다른 점이 복음서 이적 사화에 있는데, 그것은 치유자와 환자의 신앙을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적을 행하려면 믿음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마태 17,20=루카 17,6; 마르 11,23=마태 21,21). 예수는 환자가 나으려면 하느님의 능력으로 치유하는 당신께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 형태로 말하였다(마르 1,40; 2,5; 5,34; 7,29; 9,19; 10,47.52). 고향인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를 불신한 까닭에 그는 고향에서 기적을 행할 수 없었다고 한다(마르 6,5). 치유자와 환자 사이에 교감이 있어야만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치유자의 신앙과 환자의 신앙을 다 강조하는 문단도 있다(마르 9,22-24).
동양인의 처지에서 예수님의 치유이적을 풀이한다면 예수님은 기의 작용으로 병자를 고치셨다고 하겠다(졸문, “생명의 힘, 氣” 《공동선》, 1997년 5 · 6월호, 41-48쪽). 예수님은 축기와 운기의 도사였다고 생각된다. 어디 그 뿐이라, 예수는 하느님 아빠의 성령을 충만히 받았다(마르 1,9-11). 예수께서는 기가 충만한데다가 하느님의 영능을 듬뿍 받으셨으니 그분이 여러 가지 질병을 고쳤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간다. 예수는 치유 이적을 통해 하느님나라의 능력을, 곧 하느님의 구원 능력을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이어서 다룰 구마 이적사화도 치유 이적사화처럼 이해하면 무난하다.
병명 주제관련 성서 구절
고열 안식일에 시몬의 장모를 고치다 마르 1,29-31 병행
나병 나병환자를 고치다 마르 1,40-45 병행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치다 루카 17,11-19
중풍 중풍 병자를 고치다
백부장의 중풍 병자 종을 고치다
안식일에 베쩨타 못에서 중풍병자를 고치다 루카 7,1-10
마비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안식일에 고치다 마르 5,25-34 병행
하혈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다 마르 5,25-34 병행
청각언어 장애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치다 마르 7,31-37
언어 장애 귀신들린 벙어리를 고치다 마태 9,32-34;12,22-23=
루카 11,14
시각 장애 베싸이다 소경을 고치다 마르 8,22-26
예리고의 바르티매오 소경을 고치다 마르 10,46-52 병행
안식일에 예루살렘의 태생 소경을 고치다 요한 9,1-41
간질 귀신들린 간질 병자 아이를 고치다 마르9,14-29 병행
척추병 안식일에 곱사등이 부인을 고치다 루카 13,10-17
수종 안식일에 수종 병자를 고치다 루카 14,1-6
②구마 이적 사화 : 복음서의 구마 이적 사화는 5편인데 그 가운데 4편이 마르코복음서에 수록되어 있다. 요한복음서에는 구마 이적 사화가 한 편도 없다. 마르코복음서는 마치 예수와 사탄이 격전을 벌이는 것처럼 구마 사화를 서술한다. 그 단적인 예로, 안식일에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부마자를 고쳐 주신 이야기(마르 1,21-28)를 들겠다(요아킴 예레미아, “사탄의 권세를 분쇄하신 예수, 《신학전망》20(1973년 3월), 124-139쪽). 예수가 귀신들을 쫓아낸 것은 다음 논거로 분명한 사실이다.
첫째, 예수 어록, 마르코 · 마태오복음서의 특수 사료, 루카복음서의 특수 사료에 구마에 대한 언급이 두루 나온다. 둘째, 전승별로 보면 그리스 구마 이적 사화 양식의 양향을 받은 구마 이적 사화가 있는가 하면, 그보다 더 오래되고 신빙성도 더 많은 단구들이 있다. 어록(마태 12,28=루카 11,20)에 실린 단구를 루카에 따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으니 참으로 하느님의 나라는 여러분에게 왔습니다.” 셋째, 바빌론 탈무드 산헤드린 43a항에서도 예수의 구마 행적을 시인했다. “과월절 전날 저녁때 예수를 매달았다. 그 40일 전에 전령이 이렇게 외쳤다. ‘예수는 성 밖으로 끌려가서 돌을 맞아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마술을 부리고 이스라엘을 현혹하고 빗나가게 했기 때문이다. 그를 변호할 말이 있는 사람은 나와서 발설하라.’ 그러나 변호하는 말이 없었으므로 과월절 전날 저녁때 그를 매달았다.
끝으로 해석학적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시대 사람들은 귀신들이 우굴거리는 세상에서 살았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전기불이 전국적으로 보급 되기 전인 1950년대에만 해도 귀신 이야기가 무성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귀신의 존재를 불신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느 종합병원에도 구마과란 없고 그 대신 신경정신과가 있다. 구마사화에 나오는 귀신들린 사람들은 정신병자들이라 하겠다. 따라서 예수님의 구마행적은 예수께서 당신 영능으로 정신병자를 고쳐 주신, 정신요법이라 하겠다.
➂소생 이적 사화 : 야이로의 딸을 되살린 이야기(마르 5,21-24. 35-43), 나인 과부의 외아들을 되살린 이야기(루카 7,11-17), 라지로를 되살린 이야기(요한 11,1-53)는 모두 예수 부활을 전제하는 사화들이다. 소생 사화의 뜻은, 예수가 부활해 삶과 죽음을 다스리는 주님이 되셨다는 것이며, 주님을 믿으면 죽음을 넘어 새로운 삶,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라자로 소생 사화에서 분명하게 언표되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입니다”(요한 11,25).
➃자연 이적 사화 : 예수는 사람의 병든 몸이나 병든 마음을 바로잡았다. 그런데 네 복음서에는 예수가 자연에 이변을 일으켰다는 일화가 8편 수록되어 있다. 자연 이적 사화를 대할 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사실 여부를 묻지 말고 그 이야기가 전하는 근본 취지를 찾아야 한다. 자연 이적 사화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을 언표하기도 하고, 구약성서에 대한 성찰을 드러내기도 한다. 풍랑을 가라앉힌 이야기(마르 4,35-41), 물위를 걸은 이야기(마르 6,45-52)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을 드러내는 현현이적(Epiphaniewunder)이다. 이 현현이적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 이야기와 몹시 닮았다. 5,000명을 먹인 이야기(마르 6,30-44)와 4,000명을 먹인 이야기(마르 8,1-10)의 전례가 구약성서에 있다. 곧, 엘리사 예언자가 보리 떡 20개로 100명을 먹였다는 이적 사화가 그것이다(2열왕 4,42-44). 마르코복음서 이적 사화의 뜻은, 빵 20개로 100명을 먹인 엘리사 예언지도 위대하지만, 그보다 예수님이 훨씬 더 위대하다는 것이다(졸저, 《마르코 복음서》, 분도출판사 1981, 78-79쪽). 자연 이적사화 전반에 관해선 졸저 《마르코복음서》, 63-64쪽과 알폰스 봐이저가 지은 《성경은 무엇을 기적이라고 부르는가?》, 127-143쪽을 보라.
참고문헌
* 요아킴 예레미아스 씀, 정양모 역, “사탄의 권세를 분쇄하신 예수”,《신학전망》20(1973년 3월), 124-139쪽.
* 알폰즈 봐이즈 지음, 김윤주 옮김, 《성경은 무엇을 기적이라고 부르는가?》, 분도출판사 1987.
* 휴버트 리처즈 지음, 정승현 옮김, 《예수의 기적》, 분도출판사 1993.
* 김득중, 《복음서의 이적 해석》, 컨콜디아사 1996.
성전 정화 사화
예수는 30년 4월 초순에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했다. 넓은 이방인 구역(450×300m)에서 소 · 양 · 염소 · 비둘기 등 제물을 사고파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그리스 · 로마 화폐를 이스라엘 전통 셰켈로 바꾸어 주는 환전상들의 상을 둘러엎었으며, 성전을 가로질러 지름길로 물건을 나르는 것을 금했다고 한다(마르 11,15-25). 예수께서는 성전 제사를 폐기하시는 뜻으로 전대미문의 상징 행위를 하셨다는 풀이가 있는데(페로,《예수와 역사》, 152-153쪽), 아무래도 과잉 해설 이라고 생각된다. 아마도 예수는 기도하는 분위기는 사리지고 장사로 소란한 성전 분위기에 의분을 금치 못한 것 같다. 아울러 이방인 구역에서 장사를 허락해서 돈벌이를 하는 대제관과 제관장들에게 분개하셨으리라. 예수님은 성전정화 사건으로 대제관과 제관장들의 분노를 사서 결국 죽음을 맞게 되셨다고 보면 틀림없다(마르 11,18).
그런데 예수가 가야파에게 심문을 받을 때 고발이 있었다. “우리가 (직접) 들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나는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헐어 버리고 손으로 짓지 않은 다른 성전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고 했습니다”는 고발이 있었지만, 증인들의 증언이 일치하지 않아서 유효한 증언으로 채택되지 않았다고 한다(마르 14,58-59). 사실 예수는 친히 성전을 허물겠다고 한 적은 없다. 다만, 구약의 예언자들이 성전 파괴를 예고한 것처럼(미카 3,12; 예레 26,6.18) 예수도 성전과 예루살렘의 파괴를 예고하였을 따름이다(마르 13,2; 루카 19,44).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이는 졸문 “예수 수난사 연구”, 《종교신학연구》제9집, 분도출판사 1996, 349-350쪽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