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이 화성(華城)에서 돌아왔다. 직산(稷山) 사람 박기복(朴基復)이 상언(上言)하기를,
“신의 6대조인 신(臣)
박승종(朴承宗)이 의리를 지킨 바름과 절조를 온전히 한 아름다움은 모두 근거할 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폐모(廢母)를 주장할 적에 신의 할아버지가 보호하는 일을 당신의 소임으로 삼자
이첨이 뭇 흉인들을 사주하여 온갖 방법으로 헐뜯고 없는 일을 꾸며내었습니다.
윤유겸(尹惟謙)·
박시준(朴時俊) 두 사람의 소에서 살펴보면, 신의 할아버지가 무옥(誣獄)에 참여하지 않고 폐모의 논의에도 참여하지 않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초상 때에는 부고(訃告)할 것을 주장하였고,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이 귀양살이 할 적에 속전(贖錢)을 납입하기를 원하였으며,
이식(李植)과
조직(趙溭)이 국문을 받을 적에 의금부의 직을 맡아 온전히 살려준 바가 많았으며
이귀(李貴)와
이서(李曙)가 무함(誣陷)을 받을 적에 힘을 다해 문서를 마감 정리하였고,
백대형(白大珩)이
경운궁(慶運宮)에 함부로 뛰어들었을 적에 달려가서 몰아냄으로써 다행히도 예측할 수 없는 화를 제거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훈신(勳臣)
김류(金瑬)·
이귀(李貴) 등 여러 사람이 말한 것이 모두 공사(公私)의 실기(實紀)에 있습니다.
흉도가 폐모론(廢母論)을 주창하자 폐주(廢主)가 점점 깊이 빠져들어 갈 적에 신의 할아버지는 나아가자니 간언(諫言)이 들어가지 않고 물러나려니 마음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변치 않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흉악한 논의를 힘껏 배척하였고, 당의 편액을 읍백(挹白)으로 걸어서 서궁(西宮)을 향하는 뜻을 부쳤습니다. 에 와서 정승에 임명되자, 항상 독약을 차고 다니면서 말하기를 ‘대신의 몸이 되어 위태로운 상황을 구제하지 못한다면 오직 한번 죽어 스스로 속죄함이 있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반정(反正)이 일어나던 날 밤에 아들인 경기 관찰사
박자흥(朴自興)과 동시에 목숨을 끊었는데 유서(遺書)에 이르기를 ‘노신(老臣)이 변변치 못하여 임금을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부자가 같이 죽어 천지 신명에게 사죄한다.’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특별히 신의 6대조
승종 및 그 아들
자흥의 관직을 회복토록 해 주소서.”
하니, 그 일을 이조에 내렸다. 이조에서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니, 명하여 일찍이 이조 판서를 지낸 사람에게도 아울러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헌의(獻議)하기를,
“
박승종이 의 변을 당하였을 적에 힘을 내어 호위한 사실은 조야(朝野)의 역사서에 두루 나오니, 이는 족히 믿을 만하고 증명할 수 있습니다. 또 반정(反正) 초기를 당하여 그 아들
자흥과 동시에 자결하였으니, 이 또한 애초에 섬기던 바의 임금에게 마음을 다한 것입니다. 가령 그 자신이 수상이 되어 부귀(富貴)에 빠지고 권세를 받아들여 혼주(昏主)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 채 종묘 사직을 경복(傾覆)하는 지경에 이르게 할 뻔하여 바른 논의를 주장하는 선비에게 죄를 얻은 것으로 말하면, 이는 진실로 변명할 만한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비하기를 책망하는 것은 어진 사람에게 하는 것이니, 어찌 사람마다 이로써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단서(丹書)의 죄명을 씻어주지 않고 관직을 회복시켜주지 않은 것은 곧 역신(逆臣)으로 감정(勘定)했기 때문입니다. 일단 역신과 다른 것이 있음을 인정한다면, 살아서 위태로운 상황을 구하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역률(逆律)로 감정(勘定)을 한 것은 사리로 헤아려 볼 때 부당할 듯합니다.”
하고,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는 의논드리기를,
“
박승종은 폐조(廢朝) 때의 수상으로 부귀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으로 병칭(幷稱)되었습니다. 폐모하던 때에 흉도가 악법을 처음 만듦에 옥사를 교묘하게 꾸며내어 도리어 조성한 단서가 있었으니, 마지막에 자결한 것을 가지고 용서하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이병모(李秉模)는 의논드리기를,
“
박기복(朴基復)이 신의 할아버지
이식(李植)이 국문을 받을 적에
승종의 덕택으로 살아났다고 하면서 사류(士類)를 보호한 증명으로 삼았으나 그 말은 사실과 다릅니다. 대개
서양갑(徐羊甲)·
심우영(沈友英)의 옥사가 일어났을 적에
심우영의 문서 안에 신의 할아버지의 서찰(書札) 3장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서책을 서로 빌린 것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그 서찰이 국청(鞫廳)에 내려지자, 의금부 당상
박이서(朴彛敍)가 판부사
박승종에게 말하기를 ‘저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끼리 편지를 왕복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 또 듣건대 그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장사를 지내지 못하였다 하니 장사지낸 뒤에 회계(回啓)해도 늦지 않다.’ 하였는데,
승종이 평소에
박이서의 말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마지못해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홍호(洪鎬)가 간언(諫言)한 일로 장차 중죄(重罪)에 빠지게 되자 신의 할아버지가 옥당(玉堂)으로 주강(晝講)에 입시(入侍)하여 홍호가 다른 뜻이 없음을 힘껏 진달하였으므로 상의 뜻이 풀리어 홍호에 관한 논의가 마침내 정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할아버지의 뜻은, 특별히 홍호의 마음이 다른 뜻이 없으므로 깊이 죄줄 것이 없음을 밝혔을 뿐이지 홍호의 말이 옳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의 할아버지의 사실을 부득불 대략 진달하였습니다만, 수백 년의 단안(斷案)이 이미 정해졌으니, 용서하자는 한두 사람의 논의 때문에 이를 조정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고, 상호군(上護軍) 정민시(鄭民始)는 의논드리기를,
“삼창(三昌)이 권세를 탐하여 화의 징검다리를 조성한 것은 그 죄가 똑같습니다. 다만
박승종이 노하여
이이첨을 꾸짖고, 역적
백대형을 달려가 쫓아버린 것으로 말하면 흉악한 모의를 앞질러 꺾은 공이 적지 않습니다. 또 유서(遺書)에서 죄를 자인하고 부자가 같이 자결하였으니, 또한 그 본심을 볼 수 있습니다. 공을 가지고 허물을 보완하고 실정을 따져 죄를 정함에 있어서는 참작하여 용서하는 단서가 있어야 합당합니다.”
하고, 대호군(大護軍) 김재찬(金載瓚)은 의논드리기를,
“
박승종의 죄범은 공사(公私)의 문서에 분명하게 실려 있어 각각 고거(考據)가 있을 뿐만 아니라 반정한 뒤에 특교(特敎)와 비지(批旨)가 해와 별처럼 게재되어 있으니 백세(百世)토록 증명할 수 있습니다.
대개 정월에 사건으로 옥사의 상황이 날로 다급해져 자궁(慈宮) 본궁(本宮)의 종
오윤남(吳允男)의 부처(夫妻)가 고문을 혹독히 입고는 승복하지 않은 채 죽었습니다. 그때 그 아들의 나이가 13세였으므로 율관(律官)이 나이가 차지 않아서 형벌을 가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박승종이 그때 판부사로 국청(鞫廳)의 자리에 있으면서 성을 내어 큰소리로 말하기를 ‘본궁(本宮)의 노예로는 다만 이 아이가 남았을 뿐이다. 이 아이를 형신(刑訊)하지 않는다면 캐낼 길이 없게 된다. 형을 가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압사(壓沙)마저 할 수 없겠는가.’ 하고 드디어 압사(壓沙)하여 거짓 초사(招辭)를 받아내었는데 이렇게 하여 옥사가 비로소 이루어지면서 서궁(西宮)의 화가 더욱 급박해졌습니다.
같은 달 3일에
광해(光海)가 자전(慈殿)을 받들고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移御)하여 분사(分司)를 설치하고 수위(守衛)를 구비하였는데,
박승종이 또 궁궐문을 굳게 잠그고 금병(禁兵)을 별도로 두어 방수(防守)를 더욱 엄하게 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계해년 거의(擧義)하던 밤에 미쳐
박승종이 수상으로 비변사에 있으면서 일이 급하다는 말을 듣고 그 집으로 도망쳐 돌아온 뒤 아들
자흥과
수구문성(水口門城)을 넘어 곧바로 그 일족인 양주 목사(楊州牧使)
박안례(朴安禮)의 임소로 달아났는데, 체포장(逮捕將)이 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 면할 수 없음을 알고는
송산(松山)으로 달아나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이는
박승종의 종적이 문자에 나타난 것으로서 환하여 가리울 수가 없습니다.
계해년 3월에 양사(兩司)가 발론하기를 ‘
박승종의 죄는
이이첨·
유희분과 같습니다. 임금의 지친(至親)임을 의거하여 국옥(鞫獄)을 담당하고는 13세의 어린 아이를 압사(壓沙)하여 저주의 화를 얽어 만들었으며, 군사로 하여금 자궁(慈宮)을 지키게 하여 외부 인사의 왕래를 끊게 함으로써 모후(母后)를 유폐(幽廢)하는 단서를 열어놓았으니, 그 종용(慫慂)하고 조성한 죄로 볼 때
이이첨이나
유희분과의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설사
박승종이 난에 임하여 제몸을 잊고 군부를 호위하다가 죽었다 하더라도 그 죄를 청산할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몸을 빼어 달아나 숨었다가 형세가 궁하고 힘이 쭈그러들자 면할 수 없음을 알고서 자결한 자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죽음에 임하여 한 말에 이르러서는, 자기의 악을 스스로 덮어버리고 그 임금에게 허물을 돌렸으니, 교활하게 사람을 속인 것을 더욱 환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박승종의 죄악에 대하여 대신(臺臣)이 징토(懲討)하며 논한 것입니다.
이해 3월 19일에 하교하기를 ‘삼창(三昌)의 죄악은 다를 것이 없는 듯하다.’ 하고, 4월 30일에 특지(特旨)를 내려 이르기를 ‘
박승종 부자를 추삭(追削)하고 적몰(籍沒)하라.’ 하였습니다. 또 5월에는 정언
홍호(洪鎬)가 상소하여
박승종을 구원하다가 엄한 견책을 받았습니다. 그때 부제학
조익(趙翼)이 차자를 올리기를 ‘
홍호의 말이 망녕되기는 하나 그런 말 때문에 언관(言官)을 죄줄 것까지는 없습니다.’ 하였는데, 비답을 내려 준엄하게 꾸짖기를 ‘
박승종이 비록 폐모론을 극력 주장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몰래 사주하여 옥사를 일으킨 것은
이이첨과 다를 것이 없다. 그대들이 자세히 알지 못하고서 이런 말을 하는가.’ 하고, 이어서
조익을 체직시켰습니다. 이것은 전후로 상이 분부한 것을
국사(國史)와
야승(野乘)에 갖추 기재해 놓은 내용입니다. 지금
박승종을 두고 범한 바가 없다 하여 죄를 깨끗이 씻어주는 조목을 적용한다면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고, 우참찬 심환지(沈煥之)는 의논드리기를,
“
박승종은 지벌(地閥)로 보면 지친(至親)이고 관직으로 보면 정승이었습니다. 그 시대를 논하면
이이첨과
유희분이 국권을 잡고 있을 때였으니, 흉악한 논의에 참여하지 않고서 이와 같이 출세할 수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삼창(三昌)으로 이름이 나란히 일컬어졌으니, 당시의 공의(公議)를 또한 볼 수가 있습니다. 계해년 반정(反正) 초에 대각(臺閣)이 죄를 성토한 계사에서 논열(論列)한 바가 매우 엄했으니, 이는 관석(關石)과 같이 믿을 만한 내용이라 할 것입니다. 또 우리
인조께서 하교하여 ‘삼창(三昌)의 죄는 다름이 없는 듯하다.’ 하셨고 특명으로
박승종 부자를 추삭(追削)하고 재산을 적몰케 하였으니, 그 의리 또한 이미 영원토록 해와 별처럼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고(故) 정승
조익(趙翼)과 대신
홍호(洪鎬)로부터 근세의 선비에 이르기까지 더러 용서하고자 논의하는 자들이 있는데,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진실로
박승종 부자가 스스로 그 죄를 알고서 일시에 같이 죽은 것을 가지고 섬기던 임금에게 절의를 다하였다고 말하면서 마침내 생전에 지고 있던 바의 죄를 덮어버린다면 의 무리에 대해서도 모두
한(漢)나라에 절의를 세운 사람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근년에 법망이 너무 넓고 은전(恩典)이 두루 베풀어진 탓으로 이름이 단서(丹書)에 실려 있고 죄가 철안(鐵案)에 관계된 자까지 모두 깨끗이 씻겨지고 관대히 사면하는 은전을 받는데도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이리저리 눈치만 보고 우물쭈물하면서 감히 다투어 논할 계책을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처럼 분수 밖의 일을 넘보는 무리들이 잇달아 일어나고 외람된 호소가 어가(御駕) 앞을 범하여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조장시키면 국법이 쉽게 동요되어 죄있는 자를 징계할 길이 없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에 대비를 유폐시켰던 일이야말로 천하 만고에 없던 큰 변고입니다. 이 일이 빚어지고 행해지게 된 것은 실로 에서 기인한 것인데, 그 무옥을 성립시킨 수범(首犯)이 바로
박승종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수백 년에 걸쳐 철안(鐵案)이 이미 정해진 뒤에 와서 비록 한두 사람이 용서하자는 논의를 내놓는다 하더라도 어찌 그 애매한 자취를 가지고 그 사이에서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다년간 권세를 잡아 이미 삼창(三昌)으로 이름이 나란히 일컬어졌고, 밤중에 달아나면서 스스로 자기 죄를 벗기 어려움을 알았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살아서는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고 죽어서는 정적(情跡)이 다 드러남을 더욱 볼 수 있으니, 반복하여 참작해 보아도 용서할 만한 단서가 하나도 없습니다.
박승종을 복관(復官)시키는 일은 그만두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7책 4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