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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근원을 찾아 나선 당나귀에 대한 명상록
-김용언의 시세계
김관식
1. 프롤로그
김용언 시인은 생명의 근원을 찾기 위한 방편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다. 그는 1977년 《시문학》으로 등단이후 현재까지 생명의 근원의 작업을 끈질기게 해왔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발간한 8권의 시집에서 확연하게 밝혀진다.
일찍이 서양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우주의 근원은 물이라고 했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은 공기가 죽음으로써 살고, 공기는 불이 죽음으로써 산다. 물은 흙이 죽음으로써 살고, 흙은 물이 죽음으로써 산다”라고 만물의 기원을 불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상계는 지구계에 있는 흙, 물, 공기, 불 등의 4원소의 어떠한 것으로도 이루어져 있지 않고, ‘에테르’라고 알려진 제5의 원소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의 영향을 받아 4원소설을 수학적 우주관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지구를 구성하는 근본물질인 4원소 안에 우주의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질서가 깊이 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4원소의 종류를 불(정4면체), 물(정20면체), 흙(정6면체), 공기(정8면체) 등 세부적으로 나누어 그의 주장을 세밀하게 제시했다. 이처럼 우주의 근원에 대한 의문은 고대에서부터 현재까지 철학자, 우주과학자 등의 주요한 관심거리였을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관심 사항이었다. 인간의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을 밝히려는 작업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 미래까지 인간이 지구상에 살아있는 동안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우주생성에 관한 철학적인 의문을 예술작품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해명보고자 했던 사람은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였다. 그는 예술작품에 대한 상상력의 근원에 대해 깊은 철학적 통찰력으로 분석해서 이론화해서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가 주장한 물질적 상상력 이론은 우주생성에 대한 상상력의 근원을 물, 불, 흙, 공기 등 4원소로 집약해서 체계화했다.
한편 동양의 세계관과 우주관은 천지인 삼재와 음양오행으로 보는 일원론적인 세계관을 보인다.
음양오행설은 천문현상과 인사와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사상으로 음양설은 하늘과 땅, 낮과 밤, 남녀 등이 二元의 변화로 우주 만물을 설명했고, 오행설은 만물을 지배하는 다섯 가지 원소인 목(木)·화(火)·토(土)·수(水)·금(金)의 성쇠로 우주 만물의 생성과 소멸을 설명했다. 오행상생(五行相生)은 오행의 운행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낳는 원리이며, 오행상극(五行相剋)은 오행이 서로 부정하고 배척하는 이치로 세계를 보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주생성에 신과 결부된 우주탄생 신화가 존재해왔으며, 神 중심의 세계관이 지배하는 시대가 있었고, 르네상스 이후 인간중심 시대로 변천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용언 시인은 등단 이후 이러한 우주론적인 철학적 사유를 해온 시인으로 그의 시세계의 저류에 흐르는 근본 사유를 바탕으로 시적 대상을 통찰하고 형상화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는 40여 년 동안 8권의 시집에 자신의 우주론적인 세계관을 모두 담았는데, 8권의 시집 중에서 각 시집을 대표할 수 있는 작품만을 엄선하여 시선집 『사막을 횡단하는 당나귀』로 상재해놓았다.
“생명의 근원 찾아 나선 당나귀에 대한 명상록”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8권의 시집을 통해 끈질기게 추구해온 그의 시세계를 추적해보기로 한다.
2. 생명의 근원을 찾아 나선 당나귀에 대한 명상
사막의 시인 김용언 시인은 사막에 적응한 낙타를 등장시키지 않고 당나귀를 등장시킨다. 사막에서 살아가는 낙타는 사막의 열악한 환경에 적응하도록 신체구조가 진화하였다. 낙타의 고향은 북아메리카로 알려져 있다. 이런 동물이 아시아에서 건너온 강력한 동물에 의해 쫓겨나게 되고, 현재는 추운지방에서 살던 낙타가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 등 사막으로 이주해 살고 있다고 과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낙타는 사막을 상징하는 동물이 되었다. 추운 지방에도 잘 견딘다는 사실은 몽골의 고비사막에서도 낙타가 잘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도 추위에도 잘 잘 견디는 낙타의 생태습관이 밝혀진다. 사막의 환경은 낮에는 강렬한 햇빛과 모래바람으로 뜨겁지만, 밤에는 영하의 기온으로 뚝 떨어지는 극한의 환경이다. 낙타는 이런 극한의 자연환경에 잘 적응하도록 진화해왔다.
낙타는 털가죽과 넓적한 발은 본래 폭설에 빠지지 않고 걸을 수 있도록 진화한 것이 사막의 모래밭과 일치해 사막에서도 적응하기에 알맞은 신체구조였다. 추운지방에서도 극한적인 환경에 생존할 수 있었던 낙타는 열대지방의 사막에서도 적응할 수 있도록 강렬한 햇살과 모래바람을 보호하고 눈물의 수분증발을 막기 위해 눈썹이 이중으로 발달했고, 두꺼운 털가죽은 햇살을 반사하고 긴 다리는 땅의 열기를 피할 수 있도록 진화했다. 추운 지방에서 생활할 때는 혹이 없었으나 오래도록 물을 먹지 않고 견딜 수 있게 지방을 비축하여 물이 없을 때 생존할 수 있도록 등에 혹으로 진화하여 사막의 환경에 적응했다. 그런데 김용언 시인은 사막에 적응하지 못한 당나귀로 사막을 횡단한다는 기이한 발상으로 시를 형상화 하고 있다. 낙타나 당나귀는 무거운 짐을 옮기는 역할을 한다. 사막에서는 낙타가 짐을 옮기는데, 가장 적합한 동물이고, 산악지방에서는 짐을 옮겨 나를 때는 당나귀가 제격이다.
낙타와 당나귀는 둘 다 모두 주인의 말에 순종하는 순한 동물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의 정신변화 단계를 낙타, 사자, 어린아이 단계로 설명했다.
정신변화 첫째 단계는 무거운 짐을 지고, 묵묵히 견디는 유순하고, 순종적인 낙타와 같은 단계로서 누구나 우리의 내면에 낙타가 한 마리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낙타처럼 두려움과 불안으로 일정한 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단계라는 것이다.
두 번째의 단계는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고가고자 주어진 틀을 과감히 깨뜨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진취적인 정신으로 자아를 찾아가는 단계이다.
세 번째의 단계는 어린아이의 단계로 순수 무구한 동심으로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과거를 잊어버리고 삶을 긍정하는 단계로 있는 존재 그대로 무거운 짐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삶을 놀이로 받아들이는 단계라고 했다.
시인은 사회의 선각자라고 일컫는다. 이 말은 니체의 어린아이 단계에 이른 사람이기에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을 감동시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용언 시인은 사막에서 무거운 짐을 짊어질 낙타가 아니라 짐을 지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놀이로 여기며 사막을 건너는 어린아이 단계에 이른 시인이다. 그래서 그는 시에서 시인을 상징하는 동물로 당나귀를 등장시킨다.
“현세를 살아가는 남자들은 사막을 횡단하는 당나귀와 같다”고 말하고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시인들을 사막을 걷고 있는 당나귀로 비유하고 있다. 그것은 “어느 곳이건 의무만 있고 사랑이 없는 땅이라면 그것은 사막이다.”라고 “시인의 말”에서 밝혀진다.
사막은 사랑이 없는 사회를 상징하는 말이고, 당나귀는 시인들이다. 사랑의 원천은 생명이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물이 존재함으로써 생명의 존재를 보장하게 된다. 따라서 물은 사랑인 셈이다. 사랑이 없는 사회는 물이 없는 사막과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시인의 역할은 생명을 살리는 오아시스인 셈이다. 시인은 시를 창작함으로서 사막을 걷는 사람들에게 견딜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낙타의 혹과 같은 귀한 존재인 셈이다.
그는 “사막을 횡단하는 당나귀에게 목을 축일 수 있는 한 모금의 물이 되고자 시인들은 빵이 안 되는 시를 쓰고 있는 것”이며, 그런 이유로 “나는 시를 사랑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시를 사랑하지 않는 사막과 같은 오늘날의 삭막한 시대에 그는 사막을 걷는 사람들에게 목을 축여줄 오아시스의 역할이 시인의 사명임을 자각하고, 우리들이 다 같이 공생 공존하며 살아가는 길은 서로 사랑하는 길밖에 없다는 문제의식과 생명의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다.
1) 생명의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문제제기- 제1시집 『돌과 바람과 고향』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 살고 있는 시인은 “구름이 무너지고 싶은 날”이나 “황홀해지고 싶은 날”, “불면의 밤”이면, 「북악스카이라운지」에 올라 바람을 만나고, 내려다보이는 한강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인다. 「북악스카이라운지」는 시인 자신을 비롯하여 서울 시민들이 북적대고 살아가는 중심지 종로를 비롯한 시가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와 반대의 올려다보는 생활공간은 서울의 중심지 종로이다. 그는 「종로에서」 바라본 느낌을 “남산도 보이고/우람한 걸작/미남인 북악도 보이고//가다가 보면/시계방에서 산새도 울고/좁은 골목길 공간에선/고구려의 활을 들고 활시위도 당기고//안경을 쓰고 보면/모두가 작은 나사들”들로 인식한다.
시공간을 축소한 시계방을 통해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도시인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나 시인 자신은 톱니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고장 난 나사”가 된 존재임을 자각하다. 고장 난 시계를 고치러 온 시계방이라는 공간에서 맡겨진 존재로 병치시켜 놓는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달리 “남산”과 “북악”을 바라보며, 우주 속에 던져진 돌과 같은 존재임을 자각하게 된다.
돌은 지구를 구성하는 성분으로 풍화작용에 의해 부셔져서 모래가 되고 흙이 된다. 돌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깊은 잠에 빠진 존재다. 그는 돌의 존재를 조각품인 “생각하는 사람”의 조각품을 만든 로뎅이 “돌 속의 잠에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석공들이 “패륜아 두들기듯/돌의 피를 쪼”지만, “쪼임을 당하는 것은 돌이 아니”고 “바람”과 “물줄기” 라고 주체와 객체를 바꿔놓고 있다. 돌은 사랑이 없는 신의 피조물이다. 이러한 돌을 쪼아 생명을 불어 넣고 피를 돌게 하는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을 만들어 내 듯 창조적인 예술작업을 하는 풍화작용의 주체인 “바람”과 “물줄기”가 오히려 쪼임을 당하게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는 시인이 제우스신에 의해 바위에 묶여진 채 독수리에게 끊임없이 간을 쪼아 먹히는 푸로메테우가 돌이라면 푸로메테우스의 간을 쪼는 독수리가 오히려 쪼임을 당하게 된다는 주객전도의 상황으로 돌의 존재를 인식하고 다양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 시대의 시인은 밥이 아닌 생각을 선택한 “생각하는 사람”의 조각상처럼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심각한 사유를 선택한 사람들이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철학의 제1원리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제시했다.
인간의 특권인 생각의 자유, 즉 생각할 때는 언제나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직관의 표현은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으며,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직관적으로 안다”고 말하고 있다.
시인은 돌과 같이 경직된 사회에 직관적으로 생명의 근원적인 존재를 자각하도록 문제를 제기하는 로뎅이며, 데카르트이다. 그가 사후에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은 “돋보기 하나”일 뿐이다.
귀밑으로 흘러가는 바람소리
같은 세상을
떠나간 시인
유산은
텅 빈 놋그릇 하나
외롭던 호롱불도
시들해지고
침묵 속에 추락한
원고지 한 장
빛깔이 바랬는데
유산은
돋보기 하나
-「시인의 유산」 전문
시인이 남길 수 있는 「시인의 유산」은 “텅 빈 놋그릇 하나”, “원고지 한 장”, “돋보기 하나” 뿐이다. 놋그릇은 밥을 담아 먹는 금속성의 물질이며, 시를 쓰는 작업 도구인 원고지, 사물을 크게 확대하여 보는 도구인 돋보기 등이 전부다.
시인이 살아있을 때는 사람들은 “향하는 곳은 오직 같은 곳”을 향하는 “연 날리기”하며 살아가거나 “바람의/두레박을 내려도/줄이 닿지 않는/깊은 곳에/잠이 묻히고 있”는 「폐차장·2」의 풍속도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김용언 시인은 “가을 한 낮 쨍하는 햇빛” 같은 “한 줄이 안 될 사랑”을 재산의 전부로 알고 「사는 연습」을 하며 치열하게 깨어있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그는 「청기와집 추억」을 지닌 시인으로 “노을이/곁에 다가와/거나한 얼굴빛으로/우리의/빈 마당 어귀를 기웃거”리는 것을 “봄비 나린 강둑”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생명의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때로는 「가랑비 오는 창가에」 앉아 「비오는 날」이면, 「고향」을 그려보기도 하고, 「노을이 걸어와」 곁에 앉는 것을 실감한다. 산사의 새벽 「목어(木魚)가 올 때」면, “목어(木魚) 소리”를 듣고, “육십사 킬로그램의/내 죄를” 깨달고 가슴 아파한다.
이처럼 제1시집 『돌과 바람과 고향』에서는 생명의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을 시도하고, 그는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 나선다.
2) 페르소나, 다중의 얼굴 속에서 자기 확인-제2시집 『숨겨둔 얼굴』
제1집 『돌과 바람과 고향』이 생명의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며, 답을 찾아가는 작업은 제2시집 『숨겨둔 얼굴』에서는 내면의 자아를 찾아가는 작업으로 계속된다. 그의 작업은 ‘보이는 것을 보는 것’에서부터 ‘보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보는 것’으로 발전해 나간다.
다중의 얼굴을 지니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여러 페르소나를 지니고 살아간다. 생존을 위한 여러 페르소나 속에서 『숨겨둔 얼굴』은 자기의 꾸밈없는 본래적인 자아상이다.
이는 그가 〈나의 詩 나의 삶〉에서 “첫 번 째 시집 〈돌과 바람과 고향〉은 고향 상실에 대한 회한과 흔들리는 가치관에 대한 안타까움을 쓴 것이라면 두 번째 시집인 〈숨겨둔 얼굴〉은 잃어버린 나와 깨어져 가는 현실의 꿈이 범벅이 되어 나타났다”고 술회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에 빠져서 살아간다. 그는 “물을 즐기던 사람은/물에 취하고/꽃을 찾던 사람은/꽃에 취해 버렸다”고 현실을 바르게 인지하고, 본래 「숨겨둔 얼굴」을 찾아 나설 「임박한 시간」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력서를 쓰면
몇 줄
내보일 것은
열두 살에 철이 들고
스물 여덟 되는 해에 결혼을 하고
사십에 사랑의 깊이를 잰 눈치뿐이다
돋보기를 쓰지 않아도
세상이 보이는 눈이 고작이다
술래꾼처럼 머리카락도 숨겨놓은
비밀들을 알기도 하고
천 리를 들을 수 있는 바람 같은 귀
그런 경력도 있지만
이력서는 몇 줄만 써야 한다
부끄러움이야
처세술로 감춰가며
하잘것없는 이름 석 자를 지키는
능력
엄청 이 능력이 자랑스럽다.
꽃도 피우지 못한 때
그늘에만 숨어사는 창백한 얼굴은
마지막 숨겨둔 내 얼굴이다.
-「숨겨둔 얼굴」 전문
“처세술로 감춰가며/하잘것없는 이름 석 자를 지키는 능력”은 페르소나다. 생활을 위한 페르소나의 이력이 자랑스럽게 지키기 위해 자아를 억압하고 살아가게 된다. 페르소나란 외적으로 나타나는 가면의 인격으로 사회적인 자아이다. 사회적인 역할의 배역을 부여받은 공적인 성격을 지닌 자아이다.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외부로 표현되는 얼굴로 사회적 외관 뒤에 존재하는 개인적 성격과는 대조적인 성격이다. 사회구성 체제가 개인에게 부여한 역할기대에 알맞은 얼굴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인 역할 기대에 알맞은 여러 가지 얼굴로 살아한다. 가장의 역할, 직장에서 주어진 역할, 종교단체, 문학단체, 각종 취미활동, 친목단체 등등 많은 피르소나를 지니고 살아간다.
개인이 페르소나를 가지고 살아갈 때 사회체계 속의 집단정신에 순응하면서 페르소나를 진짜 자신의 모습으로 느끼는 동일시로 인해 페르소나와 자아를 혼동하는 자아상실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동일화는 집단적으로도 체험을 공유하고 행동하려고 한다.
정신분석학자인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 이라는 명제를 내세우며 펼친 욕망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고,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에서 생긴다고 했다.
그는 타자의 욕망으로서의 인간욕망이 형성되는 주체적인 공간의 매우 중요시했는데, 이것을 환상이라고 했다. 환상은 주체의 타자의 욕망과 향유에 대한 응답으로 타자의 욕망을 모르기 때문에 주체가 불안감에 빠지게 되는데, 이러한 주체 불안은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모든 것을 수용하고자하는 일종의 방어수단이라고 여겼다. 욕망으로 가리어진 페르소나 이면에 숨은 「아들의 기침」을 통해 가장으로서의 페르소나의 불안의식을 “아들놈의 기침소리가 요란한 날은/살얼음을 디디듯/아비는 조심스러워졌고/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이/두려워졌다.”라고 진술한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 속에서 형성되는데 욕망의 실현이 좌절되었을 때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소외는 자신의 욕망을 타자에게 양도할 때 발생하고, 순환의 쳇바퀴를 돌 듯 반복되어 나타나는 결핍과 욕망의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김용언 시인은 소외되지 않기 위해 많은 페르소나를 역할을 수행하면서 자연과 진심으로 마주할 때 “어느 날 곱게 피었던/야생화/눈물방울 위에서나 고울 뿐/향기도 빛깔도 없이/먼 발치”에서 소외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보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보는 것’, 즉 주체적인 자아를 찾아가기 위해 마지막 보루인 「숨겨둔 얼굴」을 만나고자 한다.
3) 생명 근원의 이상향 지향과 좌절의식-제3시집 『西南쪽의 끝』
생명의 근원을 장자는 道와 자연에서 찾았다. 道는 자연 그대로의 無爲를 말하며, 생명을 생성하는 근원을 道의 작용으로 보았다.
그는 道의 특성을 첫째, 자기 원인적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자기 스스로가 근원인 根本이고, 道는 만물을 생성하는 自根이며, 감각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것으로 모든 존재의 발생 근원이므로 자기 원인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했다.
둘째, 自生自化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모든 생명체는 살아 가려고 애쓴다는 객관적인 생명 본성은 道와 自然의 이치를 따르는 自生自化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셋째, 보편성에 의한 大通의 특성을 지녔다고 보았다. 모든 만물의 근원이 되는 道는 大通함으로써 만물의 생명을 생성하기 때문에 만물을 평등하게 보고 자연을 존중하는 사상적 근거가 된다.
이와 같이 장자의 道란 결국 자연의 운행 질서를 의미하며, 道는 모든 운동과 변화의 원인되며, 無爲이다. 따라서 自然과 無爲는 동일한 개념으로 해석했다.
김용언의 제3시집 『西南쪽의 끝』은 만물의 생성 근원을 지향하는 이상향이다. “황토흙 고운 언덕”을 지나 바다를 건너서 가는 서남쪽의 끝, 곧 自生自化로을 향한 이상향은 “별빛으로 이야기하고/별빛으로 응답”하는 “찬란한 화술”로 “수없이 보내는 메시지가/황토흙 고운 우리들의 언덕에서/오늘은/ 꽃으로/나무로/어느 것은 흘러가는 물로 빚어지고 있다”고 진술한다.
황토와 물은 꽃과 나무를 키워낼 수 있는 보편성에 의한 大通의 생태환경이다. 그는 “다시 꽃으로 태어날 수 있다면/이승에선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꽃으로 태어나게 하소서”라고 〈서시〉에서 기도한다. 이러한 자연 순환의 질서에 의해 “빗방울”로 다시 떨어져 꽃으로 재생하기를 희망한다. 이는 과거의 삶에서 좌절된 욕망에 대한 회한과 “나를 떠나간 세월, 나에게서 도망치려는 모든 것을, 나에게 절실하게 다가오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압박감에서 벗어나려는 도피처로서의 이상향 『西南쪽의 끝』의 지향이다.
생명지향의 자기 원인적이고, 자생자화, 대통의 특징으로 집약되는 생명근원의 세계를 지향에 걸림돌이 되어왔던 “생활에 대부분의 시간을 빼앗기도 남은” “회한과 추억”을 “흔적지우기” 작업을 시도한다. 그는 “내 생명의 끈을 훔쳐/어디론가 사라진” “보이지 않는 도둑”에 대해 “도둑을 지키는 일보다/도둑을 잊는 일이 더 어려워/드디어 나는/같은 도둑이 되기로 했다/차라리 훔치는 것이 쉬운 일이다”「흔적 지우기·1」 라고 자기 원인적인 인식을 하고, 자생자화하기 위해 도둑이 되기로 작정한다.
가장의 페르소나로 살아온 나의 아내인 서양선녀의 품에 안주해온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있는 자화상을 보게 된다.
겨울바람 앞에서
살 속 깊이 생명을 묻어두고
꺼지지 않는 불씨를 묻어두고
푸른 하늘이나 보는 것이
고작 나의 꿈이지요
가슴이 동파되어도
한 접시 불씨만 살아있다면
숨 거두는 날까지
행복한 것이 아니겠어요
고작 이것이 내 철학이지요
지킬 수 없는 불씨라면
바람이 불지 않아도 티끝일 텐데
가난한 불씨를 지키며
조바심 하는
부끄러움이
고작 행복이지요
어린 시절 언덕에서
풀어 울리는 연줄로 바람의 높이를 가늠했는데
이제사
연줄은 채 풀기도 전에 끊어지는데
세월 탓이라 변명합니다
고작 이것이 아픔의 전부입니다
세월이란 체적에 눌려
부끄러움도 상실하고
철면피가 되었는데
한 줌의 불씨는 이제 생명이 없습니다
바람 앞에서
소리치는 한 마디는
마지막 내 자존심입니다
-「자화상」 전문
“가난한 불씨를 지키며/조바심 하는/부끄러움”을 행복으로 여기며 자성하는 생활은 시인으로서의 일상이다. 부끄러움은 철저한 자기반성에서 발생한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에 의하면 부끄러움은 정신내부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원욕(id), 자아, 초자아간의 무의식적 갈등을 의식으로 표출된 하나의 증상으로 간주하여 충복되지 못한 원욕적 소원에 대한 반응으로 보고 있다.
“부끄러움도 상실하고. 철면피가 되었”다는 자기 성찰의 결과, “한 줌의 불씨”가 생명이 없음을 인식한 그는 “바람 앞에서/소리치는 한 마디”로 항변하며, “마지막 내 자존심”으로 자기를 보호하게 된다. 이것은 생명 근원의 이상향 지향에서 빚어진 좌절의식의 표출이며, 道의 특성인 자기 원인적, 自生自化, 大通으로 無爲의 이상향 『西南쪽의 끝』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4) 관조를 통한 내면 성찰의 공간-제4시집 『너 더하기 나』
김용언 시인은 “집을 짓는다면 내 알몸이 들여다보이는 유리집을 짓고 싶은 것이다. 제4시집 『너 더하기 나』는 유리집을 짓기 위한 기초”라고 「책머리에」에서 밝히고 있다.
장자는 관조를 통해서 만날 수 있는 공간은 氣의 소통 공간으로 관조는 氣를 공간을 드러내는 내향적 소통을 하게 된다. 대상을 차별과 분리하지 내향적 소통으로 바라보다가 주체를 벗어난 외향성을 획득하게 되며, 대상의 안과 밖에 대한 구분이 없어지게 된다. 이러한 소통 공간에서 주체와 대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순환하며, 조화를 이루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物化”라고 했다. 즉, 대상적인 관조를 벗어나 차별하지 않는 관조를 통한 만남으로 대상과 주체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소통하고 변화해 가는 氣의 공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어찌되었던 간에 안에 들여 보이는 유리집은 대상의 안과 밖에 대한 구분이 없어진 소통공간을 만들기 위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풀꽃과 꽃을 관조함으로서 대상적인 관조를 벗어나 차별하지 않는 관조를 통한 만남, 즉 “物化”를 시도하게 된다.
상사 안개로 덮여도
약속한 그날이 오면
주황, 노랑, 보랏빛으로 우리 앞에 서는구나
우리들 감정으로는 담을 수 없는
이방의 언어를 또 듣는구나
잊혀진 얼굴들을 네 모습에서
다시 찾을 수 있다.
「풀꽃·1」 일부
「풀꽃」을 관조를 통해 과거의 인물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나의 거울」을 통해 객관적인 시각으로 자신을 들여다 보고, “내가 타인이 되어 나를 바라볼 때/나의 거울은 빛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한 방향으로 구멍이 뚫린 파이프를 통해 “옆으로 눕히고 보면/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관통되고/위로 세우면 가야할 길이 보인다”「파이프를 보면」다고 여러 가지 방향에서 세상을 관조하고 세상과 소통을 시도한다.
어린시절 선생님을 짝사랑했어요
어른이 되면 고백하리라 마음 먹었어요.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누워 있어도 선생님 얼굴이 화등처럼 어른거려혼자 고민했지요
기도를 했어요 청무처럼 빨리 쑥쑥 자라 어른이 되게 해달라고.
……중략……
너 더하기 나는 언제나 따근거리는 가슴
뜨거워서는 안되는데
모두 뜨거워지려고 성급하네요
지금 다시 너 더하기 나라는 공식으로 사랑을 푼다면 비둘기빛 은은한 하늘같은 사랑이어야 한다고 쓸 거예요
-「너 더하기 나」 일부
그는 내면 성찰의 가장 근간이 되는 공간을 어린시절에 두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유리집 안에 있는 투명하게 들어난 자신의 모습부터 관조한다. 그리고 「풀꽃」과 「꽃의 몸짓」을 관조하여 物化를 통해 세상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5) 物의 타자성과 相生을 통한 존재 확인-제5시집 『휘청거리는 강』
장자는 만물이 생명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데는 대립과 갈등하기도 하지만 상생한다고 보았다. 한 개체가 생명을 유지하려면 타 개체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들의 관계는 상호 밀접하게 연결되어 환경 조건에 적응하면서 살아간다.
우리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서로 공존하며 살아가나 김용언은 시인은 남북분단이라는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정치역사적인 상황에 놓여 “휘청거리는 역사의 江에 얽매여 살아가는 것”이라는 자기 인식과 시인이 인식한 현실을 “세상이 非常口도 없이 삐걱거리며, 저 아득한 사막의 모래 춤이 파도가 되어 밀물과 썰물로 출렁거리는 것”이라고 「책머리에」서 밝히고 있다.
김용언 제5시집 『휘청거리는 강』은 제5부로 짜여있는데, 각 부별로 압축하면, 제1부는 일상적인 감성을 「비상구」로 그려냈고, 제2부는 현실 속에 자기 존재의식을 「모래춤」으로 형상화했으며, 제3부 「부다페스트의 노을」은 그 속에서 시인의 감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의지를 서정적으로 노래했으며, 제4부 「淸溪山」은 자신의 일상공간에서 느낌 감상을 형상화 했다. 제5부 「갑사에서 주워 온 감나무 잎새」 에서는 자연의 서정을 노래한 시로 구성되었다.
그는 과거 속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온 사람들과의 관계를 「우체통」이라는 物을 통해 타자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거리를 지나다
낯익은 얼굴을 만난다
십년 혹은 이십 년은 족히 됨직한 시간
잊고 지낸 얼굴이다
간간이 마주치기도 했으련만
마음 밖이라 눈에 뜨지 않았을 터
미안한 마음 들어
곁에 다가서지만
오늘은 빈손이다
-「우체통」 일부
그리고 수많은 인파 속에 놓인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기 성찰의 자세를 보인다.
오랜만에 시내 구경을 나와 내뱉은 첫마디
‘사람도 참 많구나’
발 끝에 채이고
어깨에 부딪치는 모두가 사람
정말로 우글거리는 모두가 사람일까
나도 사람일까
생각이 깊다
「시내 나들이」 일부
장자는 타자성을 극복하는 상생 방안을 至人은 成心의 자기가 없다는 “至人無己”의 자세를 제시한다. 至人은 인간의 본성인 德을 겸비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라는 의식을 갖지 않아서 ‘나’를 내세우지 않는다. ‘나’를 버리고 나면 ‘나’ 아닌 것이 없게 된다는 타자속의 동일성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이러한 至人의 경지에서 보면 자기가 없으면서 자기가 있는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
아스라한 인디아나 주 사막에서
그리움을 찾아냈다
고독보다
더 푸른 하늘을 보며
마른 모래알을 움켜 잡고 살아가는
유가나무를 바라본다
메마른 사랑이
푸른 하늘에서 흔들린다
사막에 서면
나는
하나의 모래알
사랑하는 사람이 더욱 그리워
어쩔 수 없이
神을 부르듯 이름을 부른다
살아있다는 의미는 바로 이것인가
마른 모래알 속에서
한 방울의 물기를 얻어 내
푸른 잎새를 길러내는 유가나무의 생명력
그리움에 맺히는 끈끈한 물기는
아직
살아 있다는 의미일 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인디아나 주 사막에서
고독보다
더 무서운 침묵을 만난다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던 내 처참한 모습을
앙상한 유가나무가 가시뿐인 몸으로 웃고 있다
아직
더 살아야한다는 의미를
사막을 지나는 바람에게서 얻어 낸다
-「사막에서·1」 전문
사막의 극한 환경에서도 살아있는 “앙상한 유가나무”를 보고 자신이 “더 살아야한다는 의미”를 깨닫게 화자는 자연과 일체감을 통해 생명의 존귀함과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결국 사막의 유가나무라는 物의 타자성을 통해 相生의 원리를 깨닫고 자신의 존재 확인한 셈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시인들이 여행을 자주하는 까닭은 새로운 사물들과 다양한 생명체들의 존재방식을 살펴봄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자성의 시간을 가질 수 있고, 시적인 소재를 많이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6) 사막여행을 통한 자기 발견-제6시집 『사막여행』
사막이라 함은 흔히 모래와 암석으로 뒤덮여 있는 공간으로 평균 강수량 250mm이하 , 우기의 길이가 1∼1.5개월로 증발량이 많아서 동식물이 생존하기가 어렵고 사람도 살기 어려운 환경조건을 가진 건조지역을 일컫는다.
대체로 사막은 생성원인에 따라 열대사막, 해안사막, 우음사막, 온대사막으로 나누고 있는데, 과건조지역에는 일시적인 1년생 식물이 있고, 우기의 하상에 관목류가 자라고 있고, 건조지역에는 1년생 식물의 군락과 여러해살이 식물이 자라기 때문에 가축을 기며 사람이 생존하며, 반건조지역은 초본류와 관목류가 자라고 농사가 가능 하는데, 김용언 시인이 여행한 사막지역은 과건조지역이라기 보다는 건조지역의 사막이다.
사막은 크기에 따라 가장 넓은 사막은 남극 다음으로 큰 사하라 사막이 있고, 나미부 해안사막, 몰골고원의 고비사막,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 사막, 스페인의 국립공원인 바르데나스레알레스 사막,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북서부 그레이트 샌디 사막, 미국 켈리포니아주의 모하비 사막, 오스트레일리아 남서부 그레이트 빅토리아 사막, 기브슨 사막,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사막, 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의 아타가마 사막,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 등 수많은 사막이 지구촌에 있고 사막의 면적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존하고 살아가는 동식물을 여행을 통해 마주하면 경이로운 감정과 누구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다시 뒤돌아보게 된다.
멀리
수리 몇 마리
기류를 타며
바람에 쓰러진
어젯밤의 죽음을 쫓고 있다
사막에서의 죽음은
살아 있는 자의
꽃이다
-「극한의 늪」-사막에서 95-08 일부
“사막에서의 죽음”은 다른 생명체들의 생존을 위한 식량이 되기 때문에 “살아 있는 자의/ 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종이 다른 생명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생명체끼리의 약육강식에 의한 생명체 공존은 죽음 이후까지도 이어진다.
이와 같이 자연환경의 의한 열악한 사막지역이 있기도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랑이라는 물기가 없을 때 사막이 되어버리게 된다.
아버지 산소엔
다북쑥이 무성하다
시간이 나면 달려가
뜯어내고
도려내고
그 짓을 아무리 되풀이해도
잘린 뿌리의
끈질긴 집념이
언제나
나를 조롱한다
-「숙명의 대결」-사막여행 8 일부
아버지 산소에 돋아난 다북쑥은 생존을 위한 것이지만, 화자의 입장에서는 아버님에 대한 효심이 부족한 사랑의 사막화로 보고 틈틈이 다북쑥을 뽑아내는 일을 거듭하지만 잡초의 생명력은 더 강해 사랑의 사막화를 막을 수 없다는 인간위주의 생태적 상상력을 펼치고 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항상 사막을 경험한다. 사막은 욕망의 투쟁 장처럼 비인간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욕망을 실현하는 사랑의 공간이기도하는 사랑과 투쟁의 이중적인 공간으로 인간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사막은 언제 보아도 첫사랑이다
오랜 세월 지난 후 만나도 웃는 모습이다
떨리는 손끝으로 단추를 풀던
떨리는 가슴으로
속옷을 벗기는 신비로움이다
소녀였는데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소녀다
오늘도
소녀로 웃고 있다
바람이 불 때
가슴에 무늬를 만들어 놓고
그리고
사람을 삼켜버린다
사막을 걷노라면
바람만큼 추억이 무성해진다
-「사막의 추억」 전문
사막은 생존의 열악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사막여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전제되었을 때 호기심을 자극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는 사막을 첫사랑의 아내로 등장시킨다. 에로스적인 욕망의 사막에 대한 허무감과 관념적인 사랑 속에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하는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자기 존재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젊은 날/육질 좋은 여자를 보고/허리춤을 움켜잡던 기억을 떠올리며/죽음처럼 펼쳐진 막막한 바다를 걷는다/추억을 되새기는 것도/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라는 진술을 통해, 결국에는 생존의 방법으로서의 욕망과 사랑의 양면적인 속성을 사막과 병치시켜 놓음으로서 우리들의 삶이 사막의 여행과 같음을 시각적으로 명징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7) 자신을 태우고 사막을 건너는 당나귀에 대한 상상력-제7시집 『당나귀가 쓴 안경』
당나귀는 『구약성경』, 『신약성경』에서 “당나귀는 충성스럽고 총명한 동물이며, 지혜롭고 충직한 예언자의 탈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예언자보다 더 현명한 동물”라고 긍정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코란』에서도 에언자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통찰력이 있는 동물이라고 여기고 있다.
당나귀하면, 우리는 『동물농장』, 『돈키호테』 등의 문학작품에서 당나귀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최근에 나온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당나귀와 떠난 여행』에서는 스티븐슨의 여행에서 당나귀가 길벗이 되어주는 역할을 하는 이야기이고, 앤디 메리필드의 『당나귀의 지혜』는 “혼돈의 세상에서 평온함 찾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책에서는 당나귀 이름 “그리부예”라고 붙여주고 메리필드는 당나귀와 함께 한 여행에서는 당나귀를 예찬한다. 메리필드가 촉망받는 교수의 삶을 거부하고 프랑스의 마을로 “그리부예”와 함께 한 여행을 떠나면서 자아를 발견해나가는 이야기이다.
당나귀는 채찍과 당근으로 다루는데, 스스로 움직이게 해야 여행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 타인에게 자신의 욕망을 거세당할지 모르는 현대 사회의 불안감과 현재 누리고 있는 욕망을 사수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경쟁의 발톱을 날카롭게 세우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에서 진정한 나의 정체성은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바쁘게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김용언 시인은 자신이 당나귀를 타거나 자신 스스로가 당나귀가 되어 사막을 횡단하려고 한다. 당나귀는 산악지방의 짐을 싣고 운반하기 용이한 동물이다. 그러나 이런 사막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당나귀를 타고 사막을 걷는다는 발상이 이색적이다. 그래서 김용언의 제7시집 『안경 쓴 당나귀』에 대한 독자의 관심이 컸었다고 한다.
“당나귀는 주인을 부러워하지만/주인은 당나귀를 부러워한다/사막에서 당나귀로 변신한 사람도 있고/당나귀가 사람으로 변한 전설도 있다/그러나/그 비밀을 폭로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진술하고, “사막에서 「당나귀와 단 둘이 있는 건 위험하다」”고 전한다. 그것은 서로 둘이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왕자와 거지』에서 신분이 뒤바뀔 수 있듯이 사람과 동물이 서로 뒤바뀔 수 있다는 재미있는 상상력을 펼치고 있다.
「나는 안경을 쓰고 잠자리에 든다」와 앞의 「당나귀와 단 둘이 있는 건 위험하다」하다는 시편으로 보아 「안경을 쓴 당나귀」는 김용언 시인 자신을 모티브로 한 상징적인 동물로 당나귀를 등장시키고 우스꽝스럽게 당나귀가 안경을 쓰는 것으로 장면을 설정해놓고 있다.
고독한 자신의 모습을 당나귀에 비유한 것으로 당나귀는 삭막한 사막을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낙타의 이미지를 변형하고 확장시켜 병치해놓은 상징적인 동물이라고 볼 수 있다.
모래바람 속에서 태어났으니
돌아갈 곳도 모래벌이다
파도로 출렁거리고 싶은 낙타의 소망
한 주인을 섬기다 떠나는 게 유일한 행복일 게다
사막에서 믿을 건 하늘뿐이다
한 가닥 목숨도 하늘의 뜻
허허로운 벌판에 항시 모래파도
파도가 치기에
낙타는 낙타로서 설 수 있다
지전 몇 장
혹은 곡식 몇 자루에
고삐가 바뀌면 주인이 바뀐 것을 알고
고삐 쥔 사람을 따라 나서지만
낙타는 울고 있다
떨어진 눈물이
모래 위에서 선인장이 된다
긴 바람소리로
주인의 뒷모습을 향해 뿌리는 울음
선인장 가시에 찔려
홍건히 고이는 낙타의 피눈물
그래서
사막의 석양은 붉다
-「낙타의 눈물·1」 전문
“낙타 눈물=선인장”으로 변신 되고, 다시 “선인장 가시→낙타의 피눈물=사막의 석양”의 이미지로 연쇄적인 관계쌍으로 대비시켜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의 고통과 『안경을 쓴 당나귀』와 병치시켜 시인으로서의 고달픈 삶을 우회적이고 해학적인 장면으로 연출해놓았다. 그것이 바로 자신을 태우고 사막을 건너는 당나귀에 대한 상상력이다.
8) 소외 받는 사람들에 대한 휴머니즘적인 시선-제8시집 『백양나무 숲』
제8시집 『백양나무 숲』은 김용언 시인의 냉철한 사회의식이 드러나는 시집이다. 이제까지의 시집들이 간접적인 방법으로 풍자나 상징, 우화 등으로 우회하여 현실의식과 사회의식을 표출해냈다면, 이 시집에서는 휴머니즘적인 따뜻한 시선으로 소외받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표출해내고 있다. 이는 그가 끈질기게 추구해온 생명의 근원을 찾아 나선 시작업의 완숙한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생명관은 생명의 근원이 道에 있다고 주장하는 장자의 생명관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장자는 道에 근원을 둔 생명은 인간과 자연을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생명관이다. 그가 당나귀, 낙타, 선인장, 당나귀와 사람의 바뀜의 가정적인 상황의 제시는 모두 장자의 道와 일치한 생명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장자는 생명의 근원을 道로 보고 道의 특성을 자기 원인적인 특성으로 스스로가 근원이며 근본이라고 했다. 그리고 自生自化하는 특성으로 세계의 근원으로서의 실재적 개념이기보다는 혼돈과 무질서인 자연적 질서라는 의미를 들었다. 따라서 道는 보편성, 즉 大通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道의 가장 중심 특성으로서 만물을 평등하게 보고 자연을 존중하는 사상의 근원이 된다고 했다.
이처럼 김용언 시인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바라보고 불평등의 그늘에서 소외받는 사람에 대해 따뜻한 휴머니즘적인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십여 개의 쇠기둥이 심어졌으나/몸무게는 오히려 줄어들고/지금은 정권이 바뀔 기미도 없는데/남아 있는 몇 개의 이빨이 또 흔들리기 시작한다.”「어금니가 무너진 이후」의 정치적인 현실의식, “철공소에서 뼈를 묻을, 내 친구 영철이는/언제나 내 가슴에서 쇠처럼 무겁다”「내 친구 영철이」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연대의식, “댐이 생기고 나니 뭍사람이 뱃사람이 됐고/두더지가 햇빛을 보니 눈이 멀어버렸다고//전에는 탄광에서 갱도일을 했는데/다행히 폐가 굳어지는 병에 걸려/두더지 인생이 물질 인생으로 바뀌었다고/진폐증이라는 진단서로/회사와 투쟁하여 몇 푼돈을 거머쥐었고/덕분에 노변에 집 한 칸 마련하여 햇볕 구경을 한다고” 진술하는 「매운탕집아줌마」,등 이러한 가슴 아픈 현실의식에 시인은 「몇 병의 소주를 또 준비하며」 “한 시대를 살면서/용기 없이 스러지는/나무들, 사람들, 사내들/얼마나 추울까” 걱정하는 사람들의 「기침 소리」를 듣고 있다.
비릿한 냄새다
백양나무 숲엔 항상 수상한 바람이 숨어 있다
구름이 피어나고 잠시 후 사라지고, 죽었던 구름이 또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고 그럴 때도 새들은 지난겨울처럼 정숙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문에는 며칠 전 염색공장에 군무하던 김씨가 질식사로 숨을 거뒀다는데, 부인은 회사에서 건네 준 돈 몇 다발을 움켜 쥔 채, 젊은 놈과 눈이 맞아 백양나무 숲 속으로 잠적했다고 한다.
백양나무 숲에 숨어 있던 새들은 이미 그들의 염문을 알고 있었지만 백양나무들과 눈 감아주기로했다고 했다
그 후 숲은 언제나 칙칙했다.
우울증에 걸린 몇 사람이 목을 맨 나무는 잘려 나갔지만
잘린 구르터기에 돋아난 새순들이 미안하다는 듯 어설픈 손짓을 하늘로 날리고 있다
나무는 나무끼리 살고 싶은데
인간들이 쉴 새 없이 비릿한 이야기를 퍼 날랐고
숲 속에는 신문에도 나지 않은 우울한 이야기들이, 달동네 쪽방촌 인심처럼 덕지덕지 쌓였다
세월은 흘러 백양나무 숲은 무성해졌는데 숲에선 백양나무 냄새가 없다
-「백양나무 숲」 전문
세상의 모든 비밀의 증인으로 서 있는 백양나무를 통해 소외 받는 자들의 아픔을 객관적으로 표출해놓고 있다. “냄새가 없다”라는 완벽한 아리바이를 만들어 진실을 영원히 함구하는 백양나무 숲은 역사 속으로 자취 없이 사라지는 현실의식의 상징적인 이미지라고 볼 수 있다.
3. 에필로그
김용언 시인의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각 시집에 수록된 시들이 중복되어 수록되기도 한다. 그러나 40여 년 동안 문단 활동하면서 8권의 시집을 묶어낸다는 것은 대단한 시적 열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최근에는 제1시집부터 제8시집까지 자신이 시세계를 명징하게 드러낼 수 있는 시를 뽑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시선집 『사막을 횡단하는 당나귀』를 펴내서 이제까지의 시세계를 알기 쉽게 총망라했다.
그의 시세계의 근원적인 상상력은 물, 불, 흙 공기 등 바슐라르가 말한 4원소를 바탕으로 한 물질적인 상상력이 고루 펼쳐 있다. 가장 많이 등장했던 것은 사막에 대한 흙과 공기의 상상력, 그리고 사막을 걷는 낙타와 당나귀에 대한 동물이 가장 많이 등장했음은 그가 추구하는 세계가 생명의 근원인 물을 절실하게 추구하는 활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은 곧 지구상의 생명체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것이며, 사막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이 간절하게 원하는 물질이다. 그는 인간의 내면에 사막처럼 황폐화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니까 사막의 물은 바로 사랑이라는 등식으로 시세계를 펼친 샘이다.
그의 시세계는 많은 점에서 장자의 생명관과 일치한 특성을 보여 장자의 생명철학에 입각하여 시세계를 비교하면서 조명해보았다.
그의 시집의 시세계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생명의 근원을 찾아 나선 당나귀에 대한 명상록”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40여 년 동안 발간한 8권의 시집의 시세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제1시집 『돌과 바람과 고향』에서는 생명의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둘째, 제2시집 『숨겨둔 얼굴』 에서는 현실 속에서 생존을 위해 여러 개의 페르소나로 살아 온 다중의 얼굴 속에서 자기를 확인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셋째, 제3시집 『西南쪽의 끝』 에서는 생명 근원의 이상향 지향에서 빚어진 좌절의식의 표출했는데, 이는 장자의 세계관과 유사한 道의 특성인 자기 원인적, 自生自化, 大通으로 無爲의 이상향을 지향과 일치한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넷째, 제4시집 『너 더하기 나』에서는 관조를 통한 내면 성찰의 공간을 스스로 마련했으며, 풀꽃과 꽃을 관조함으로서 대상적인 관조를 벗어나 차별하지 않는 관조를 통한 만남, 즉 “物化”를 시도했다.
다섯째, 제5시집 『휘청거리는 강』에서는 장자처럼 物의 타자성과 相生을 통한 존재 확인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여섯째, 제6시집 『사막여행』에서는 사막여행을 통한 자기 발견의 작업을 시도했다.
일곱째, 제7시집 『당나귀가 쓴 안경』에서는 자신을 태우고 사막을 건너는 당나귀에 대한 상상력을 펼쳤다.
여덟째, 제8시집 『백양나무 숲』에서는 소외 받는 사람들에 대한 휴머니즘적인 따뜻한 시선으로 사회의식과 현실의식의 시세계를 펼쳤다. ※ 참고 문헌※
1. 김용언, 제1시집 『돌과 바람과 고향』, 한국문학사, 1980.
2. 김용언, 제2시집 『숨겨둔 얼굴』, 홍익출판사, 1987.
3. 김용언. 제3시집 『西南쪽의 끝』, 홍익출판사, 1989.
4. 김용언, 제4시집 『나 더하기 나』, 인문당, 1991.
5. 김용언, 제5시집 『휘청거리는 강』, 도서출판 사임당, 1995.
6. 김용언, 제6시집 『사막여행』, 혜화당, 1998.7, 김용언, 제7시집 『당나귀가 쓴 안경』, 영하출판사, 2000.
8. 김용언, 제8시집 『백양나무 숲』, 백산출판사, 2014.
9. 김용언, 시선집 『사막을 횡단하는 당나귀』, 인간과 문학사, 2014.
10. 마광수, 『시학』, 철학과 현실사, 1997.
11. 정도언, 『프로이트의 의자』, 웅진, 2009.
12. 조현숙, 『장자』, 책세상, 2016.
13. 오강남, 『장자』, 현암사, 1999.
14. 정동호, 『니체』, 책세상, 2014.
15. 곽광수, 『바슐라르』, 민음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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