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은 여주(驪州) 땅에 들어서면서 그 이름이 여강(驪江)으로 바뀐다.
그 여(驪)는 가라말 여(驪)다.'가라'는 '검다'는 뜻의 우리 옛말이다. 가라말은 요즘의 말로는 검은 말이다.
여강(驪江)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힘차게 달리면서 신비한 땅 여주의 전설을 엮어내고 있다.
여주에 들어서는 길목에서 두 용마(龍馬)가 날뛰며 여주의 땅을 위협하고 있다.
황마(黃馬)와 검은 말 여마(驪馬)이 바로 두 용마(龍馬)이다.
황마(黃馬)와 여마(驪馬)는 기세 좋게 여주의 땅을 삼킬 듯 공격에 나서고 있다.
설악의 봉정(鳳頂)에서 출발해 기세 좋게 북에서 남동쪽으로 달려온 봉미산(鳳尾山)이다.
봉황의 힘찬 꼬리로 용마의 기를 짓누르고 있는 모양의 봉미산(鳳尾山)이다.
그 봉미산이 펄펄 날뛰는 두 용마의 길목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여주읍 상리에 위치한 영월루(迎月樓) 아래의 벼랑 중간에 있는 괴암 마암(馬巖)이다.
영월루 누각의 바로 아래에는 커다란 괴암이 절벽을 이루고 있다. 그 위에 힘있는 필체로 ‘마암(馬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두 마리 웅장한 말이 기이하게 물가에 나와(雙馬雄奇出涯)
황여라는 이름을 이로부터 얻었네.(縣名徒比得黃驪)
시인은 옛것을 좋아하여 번거로이 캐 묻지만(詩人好古煩微喆)
오가는 고기잡이 늙은이야 어찌 알리오!(來往漁翁豈自知)
고려시대 문인인 이규보는 황려현(黃驪縣)이라는 지명이 마암(馬巖)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하였다.
마암의 현재 높이는 약 3m, 너비 약 1m 50cm로서 아랫변이 약간 넓은 긴 사다리형을 이루고 있다.
이 마암 바위는 벼랑의 한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마치 괴암을 하나 끼어 넣은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글자는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그 한 획 한 획이 힘차다.
마암 글씨의 위쪽과 좌측에서 각각 '이인응(李寅應)'과 '…시월(十月) 일각(日刻)'이, 그리고 우측의 또 다른 바위에서
'신현태(申鉉泰)'라는 글씨가 확인된다.이인응은 1870년(고종 7)에 여주목사로 부임한 인물이다.
"어느 날 포악한 황마(黃馬)와 여마(驪馬)가 나타나 농작물을 마구 짓밟고 사람들이 얼씬만 하면 그냥 물어뜯어
사람들은 이를 피해 집안으로 숨기 바빴고 절 근처도 얼씬 못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농민의 피해가 심한 것을
절에 와 있던 나옹선사(懶翁禪師)가 못 들을 리 없었다. 선사가 하루는 포악한 황마와 여마를 다스리기 위해
신비한 굴레[勒]을 씌워 용마를 다스렸더니 이후부터는 양마(良馬)가 되었다. 그 후 신기한 굴레로 말을 다스렸다 하여
이 사찰을 신륵사(神勒寺)라 부르게 되었고 이 지역의 지명도 황려(黃驪)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여주의 지명과 관련해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봉황의 꼬리인 봉미산 끝자락에서 도통한 자칭 게으른 노인 나옹선사가 도술을 부린듯 신비한 굴레(神勒)를 씌워
황마와 여마를 순한 양마(良馬)로 바꿨다는 것이다.
황마(黃馬)와 여마(驪馬)는 무엇인가.
여주를 집어삼키려는 듯 위협했던 홍수 때 누런 남한강 물이 황마(黃馬)다.
평상시 여강의 강물은 검은 색을 보인듯 해서 여마(驪馬)라고 했다.
여주지역은 산의 비율이 높지만 중심부로 흐르는 남한강 때문에 늘 피해가 많았다.
여주는 홍수에 약한 도시이다. 남한강의 범람으로 홍수 피해가 많았던 여주 땅이다.
여주의 땅 이름은 골내근현(骨乃斤縣) - 황효(黃驍) - 황려(黃驪) - 여흥(驪興)- 여주(驪州)로 바뀐다
세종의 영릉이 서울 대모산에서 외갓동네 여주로 천장되면서 여흥(驪興)이 여주(驪州)로 바뀐다.
그 남한강의 굽이쳐 흐르는 곳에서 용마가 나왔다는 마암이 있다.
여주를 상징하는 정자 영월루(迎越樓)이다. 영월루는 기가 막힌 풍수지리상의 비보(裨補)다.
비가 많이 쏟아지면 홍수가 밀려온다.거세게 쏟아지는 폭우도 달(月) 아래서는 맥도 못춘다.
홍수에 약한 여주에 달맞이 정자 영월루를 둔 것이다.
둥근 달을 맞이하면서 홍수를 원천 차단하려고 하지 않았나 싶다.
도심에 있던 영월루를 아예 용마 황마와 여마가 나왔다고 전해오는 마암 곁으로 옮겨
만만치 않게 공격해오는 용마의 기세를 꺽고 있다.
생기가 왕성한 땅에서 걸출한 인물이 많이 나온다. 봉황과 용마가 엮어내는 명당 여주에서도 많은 인물이 나왔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9명의 왕비를 배출한 여주다.순조의 어머니와 고종의 어머니까지 11명의 왕비급 여인을 배출한 곳이다.
1. 순경태후(順敬) 고려 원종의 비
2. 원경왕후(元敬) 태종 이방원의 비. 세종. 양녕. 효령. 성녕의 모친
3. 인현왕후(仁顯) 숙종의 계비
4. 정순왕후(貞純) 영조의 계비
5. 순원 숙황후(純元肅皇后) 순조의 비
6. 효현왕후(孝顯) 헌종의 비
7. 철인왕후(哲仁) 철종의 비
8. 명성황후(明成) 고종의 황후
9. 명효황후(明孝) 순종의 비
10. 현목수빈 박씨(顯穆綏嬪) 순조의 생모
11. 부대부인 민씨(府大夫人) 고종의 어머니.
문인으로도 걸출한 인물이 나온다.
1.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2. 목은(牧隱) 이색(李穡):고려시대 삼은의 한분
3. 류주현 근대 소설가 조선총독부가 있음.
정치가로는 김안국(金安國). 김조순(金祖淳). 민치록(閔致錄)등 수십인이 있다.
여주의 땅은 전형적인 행주형(行舟形) 명당으로 꼽힌다.
행주형의 땅에서는 우물을 파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여주에서도 우물을 찾아 보기 참 힘들다.
옛 법원 앞 홍문2리에 있는 우물 터가 유일하다고 전한다.
이 우물이 옛 여주읍민들의 유일한 식수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조선 인조의 인조반정에 가담했다가 반기를 든 이괄(李适)이 살던 집터다.
사람들은 이 우물 터를 '이괄 우물 터'로 불렀다.
예로부터 여주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둥지를 틀었다.
6만5천년 전의 구석기가 2004년 무더기 발견된 곳이다.
1970년대 흔암리 주거지에서 탄화미(炭化米)를 발굴했다.
흔암리에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벼농사를 지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탄소측정을 한 결과 이 숯으로 된 쌀(炭化米)은 3천5백년 전 청동기 시대 이곳 주민들이
벼농사를 짓고 살았음을 확인시켰다.
여주는 흙이 비옥하고 좋다.
그래서 좋은 흙으로 빚은 도자기 등 좋은 그릇이 많이 나왔다.
벼 땅콩 고구마 인삼 각종 과일 등이 비옥한 땅에서 많이 생산되는 여주다.
거칠게 사납게 공격해오는 용마를 슬기롭게 다스린 여주사람들이다.
그 사나운 용마의 기(氣)를 결코 만만치 않은 봉황(鳳凰)의 기세와 순화 균형을 이뤄낸 것이다.
여주의 땅이 갖추지 못한 그 허(虛)한 부문을 굴레(勒)와 달맞이(迎月)로 비보(裨補)해 양명한 땅으로
만들어 낸 여주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