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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의 유적지 스크랩 불교계 최초로 수목장시대를 연 은해사
이팝나무 추천 0 조회 334 11.03.20 21:03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위: 은해사 대웅전, 중간 추사의 대웅전 현판, 아래 은해사 입구 


유난히 자주 오던 가을비가 멈춘 어느 날 은해사를 찾기 위해 하양 정류장에 도착하였더니 불과 2분전에 차가 떠나고 없다.

미리 전화라도 해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으나 60평생을 주도면밀(周到綿密)하지 못해 손해 본 것이 어디 이 일 뿐이랴. 이러한 나의 게으름으로 무려 한 시간여를 기다려야 했다.

차가 홍수를 이루고 있는 마이 카 시대에 운전을 못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나마 위안인 것은 아직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손님들이 많고 하도 바삐 살아온 터라 이런 느긋함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니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었다.

건너편 가게에서 김밥을 사고 편의점에 들였더니 이외로 특급호텔에서나 나옴직한 세계 최고급 광천수인 에비앙이 있어 한 병  사 버스에 올랐다.

한적한 시골 버스는 새로 타거나 내리는 손님들로 가다 섰다를 거듭한다. 나는 아주 편안하고 느긋한 자세로 바깥 풍경을 살펴보았다. 누렇게 황금색으로 익어가는 들판의 평화로움이 유년시절 고향의 품에 안긴 것 같은 행복감에 젖게 한다.

이미 완연한 가을인 것이 차창으로 보이는 언덕에 보라색 쑥부쟁이가 하늘거린다싶더니 어느덧 절 앞 주차장에 도착했다.

영산(靈山) 팔공의 북록(北麓)을 대표하는 큰 가람인 은해사로 들어가는 솔숲은 언제 찾아도 좋다. 고향의 의성 고운사 입구도 이런 분위기다. 얼마쯤 걸었을 까 전에 보이지 않던 “사랑나무” 즉 연리지(連理枝)를 알리는 팻말이 있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누군가 안내문을 참 재미있게 써 놓았다. ‘오른 쪽으로 돌면 딸을 낳고, 왼쪽으로 돌면 아들을 낳으며, 사이가 좋지 않는 부부가 손을 잡고 돌면 사랑의 묘약(妙藥)이 되어 잃었던 정을 되찾는다는 구전(口傳)이 있다’ 고 했다.


연리지(連理枝) 


연리지는 각기 다른 나무의 가지가 서로 붙어 자라는 기이(奇異)한 현상을 두고 남녀간의 사랑에 비유한 말이다. 하지만 원래부터 사랑을 상징했던 말은 아니었다. 중국 후한(後漢) 시대의 학자 채옹(蔡邕)이 효심이 지극하여 병으로 자리에 누운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다. 그러나 모친이 끝내 돌아가시자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했다. 그랬더니  방문 앞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자라더니 가지가 서로 붙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채옹과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혼이 한 몸이 되었다는 ‘후한서’에 따라 효(孝)를 상징했었다.

그 후 당나라의 시인 백낙천(772~846)이 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인 사랑을 한 장편의 서사시(敍事詩) “장한가(長恨歌)”로 노래 하니 그 내용 중에


“칠월 칠일 장생전에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맹세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기를 원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되기를 원하네.

높은 하늘 넓은 땅 다할 때 있는데

이 한 끝없이 계속되네.”


라는 문구(文句)가 있었다.

즉 두 사람의 지극한 사랑을, 하늘에서는 눈과 날개가 각기 하나이기 때문에 두 마리가 함께 날지 않으면 날수 없는 전설의 새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에서는 각기 다른 두 나무가 서로 손을 잡은 듯이 자라는 연리지(連理枝)가 되자는 표현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나무라는 데는 이의가 없으나, 난데없이 아들을 낳고 딸을 낳는다는 말을 조금 과장된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이 늘어났으면 그것도 괜찮다는 생각도 든다.

경내(境內)에 있는 졸참나무와 느티나무 연리지는 소나무와 소나무, 단풍나무와 단풍나무 등 동종(同種)의 나무 가지가 이어져 자라는 지금까지 자주 발견되는 연리지와 달리 조직(組織)이 서로 다른 이종(異種)이라는 데 희귀성이 높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는 원효 스님의 탄생지인 경산의 제석사와, 설총 선생의 성장지인 반룡사,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편찬한 군위의 인각사를 비롯하여 하양의 환성사, 청송 주왕산 대전사 등 4개 시,군 40여 개의 말사를 거느리는 천년 고찰이다. 특히 정부기관이 아니면서도 ‘일연학연구원’을 설립하여 스님의 사상을 조명하고 원효, 설총과 함께 3현의 현창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이채로운 도량이다.

처음 절은 신라 제41대 헌덕왕 1년 (809)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지으며 해안사(海眼寺)불렀다고 한다.


은해사를 빛낸 스님들


명산(名山) 팔공에서 천년에 걸쳐 불법을 펼쳐오고 있는 고찰 은해사는 유서 깊은 사찰답게 수많은 스님들의 공덕으로  불법이 이어져오고 또 이어져가겠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기억해야 할 스님을 속인의 잣대로 꼽으라면  대체로 창건주 혜철국사,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지으며 사명(寺名)을 은해사로 바꾼 천교스님, 고려 원종 11년(1270) 선교양종의 총본산으로 사격을 높인 홍진국사, 조선조 은해사를 화엄도량으로 우뚝 서게 한 영파 성규스님, 전소(全燒) 되다시피 한 당우(堂宇)를 현종 13년(1874)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한 팔봉(八峯)· 해월(海月) 여섯 분이다. 따라서 이 스님들의 행적을 살펴보기 위해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아쉽게도 천교·팔봉·해월 세 스님은 이름만 전해 올 뿐 이렇다할 기록을 남기시지 않는 것 같다.


혜철국사    

창건 주 혜철국사(惠哲 또는 慧徹國師)는 속성이 박씨로 원성왕 1년(785) 경주에서 태어났다. 15세에 부석사로 출가하여 그곳에서 8년 동안 화엄학(華嚴學)을 공부하고 헌덕왕 6년(814) 당나라로 건너가 선종계열의 서당(西堂) 지장(地藏)선사로부터 심인(心印)을 받고 그 곳에서 구도활동을 하다가 55세 때인 신무왕 1년(839)에 귀국하신 것으로 알려진 스님이다. 처음에는 무주(현 광주)쌍봉사에서 9년간 머무르셨다. 이후 63세 되던 해인 문성왕 9년(847)에 곡성의 태안사로 옮겨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한 파인 동리산문을 개산(開山)하니 스님의 법문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원근(遠近)에서 구름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신라 48대 경문왕이 스님의 높은 경력과 고매한 인격을 알고 나라를 다스리는 바른 길을 물었다고 한다. 그러시다가 경문왕 1년(862) 77세로 열반에 드니 인적(忍寂)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스님이 주석한 태안사 상량문에는 ‘우리 나라 명산이 허다한데 동리산도 그중 하나이다. 신라시대 이래 훌륭한 스님들이 많이 배출됐는데 혜철 노(老) 스님은 둘도 있기 어려운 분이다. 스님의 명성이 드날려 사람들이 다투어 찾아와 귀의함으로써 절은 창건된 이후 국사의 교화를 계기로 가장 크게 확장되었다. 그것은 아마 그의 도(道)와 덕(德)이 높고 깊은 경지에 이른 까닭에 교화가 그토록 크게 퍼진 게 아닌가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스님의 행적을 살펴볼 때 스님이 은해사 초창(初創)에 관여한 것은 부석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이제 막 승려생활에 접어들려는 24세 때로 보여 진다.

우리 나라 풍수지리설의 비조(鼻祖)로 불리는 도선 국사는 바로 스님의 제자이다.


홍진국사 

홍진국사(弘眞國師)는 이름은 혜영, 법호는 보자(普慈)로 고려 고종 15년 (1228) 경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11세에 머리를 깎고 충연(沖淵) 스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17세에 승과를 합격하고, 42세에 고려불교의 최고 직인 승통(僧統)이 되었다. 원종 15년(1274) 양산 통도사에서 사리 여러 과를 얻어 항상 좌우에 두었더니 많은 분신사리(分身舍利)가 생겨났으며 이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주었다는 신묘한 스님이셨다. 충렬왕 16년(1290) 사경(寫經)을 잘 하는 스님 100명을 이끌고 원나라 수도에 들어가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써서 원의 세조에게 바쳤다. 2년 후인 1292년 충렬왕이 다시 불러 동화사 주지가 되어 오창(五創)에 관여하시고 국존(國尊)으로 추대 받았다. 당시 고려는 원(元)의 속국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국사(國師)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없었으며 이는 그 전에 이미 국존에 올랐던 일연스님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 스님으로서는 최고의 지위인 전국의 모든 계파의 불교를 통제 조정하는 오교도승통(五敎道僧統)에 올랐으며 충렬왕 20년 (1294)에 77 세로 동화사에서 열반하셨다.


영파 성규스님     

이후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영파 성규대사가 주석하면서 은해사는 비로소 화엄교학의 본산으로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른다. 본 찰인 은해사를 비롯한 산내 말사 모두 지금까지도 사세가 활달한 것은 영파(影波)성규스님의 큰 공이 아니었든가 한다. 본찰 은해사는 물론 운부암이나, 백흥암의 앞을 떡 받들고 있는 아름다운 누각 보화루(寶華樓)는 그 누명(樓名)이 시사하듯 화엄학을 보배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영파 스님은 법명이 성규(聖奎)로 영조 4년(1728) 경남 합천군 가야산 부근에서 아버지 전만기(全萬紀)와 어머니 웅천 박씨 사이에 태어났다. 어느 날 청량암(淸凉菴, 오늘 날 가야산 청량사?)에서 글을 읽다가 공양할 때 여러 스님들이 절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오묘한 느낌을 받아 출가할 뜻을 굳히고 4년 뒤 용천사(湧泉寺, 오늘 날 비슬산 용천사?)에서 환응 스님으로부터 계(戒)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해봉, 연암, 용파, 영허 등 당대의 이름 난 스님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정진하였지만 특히 서산대사의 5세 함월 스님의 의발(衣鉢, 가사와 바리때) 즉 불교의 진리를 전수받는 분이다.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한 방을 들어갔더니 서가(書架)에 꽂힌 책이 모두 화엄경이었다. 한 노인이 책을 가리키며 “진리가 모두 여기에 있다.(道在是矣)” 라고 말 했는데, 세월이 흐른 뒤 은퇴한 장로 황산(黃山)을 만났더니 그가 공부하던 화엄경 전부를 내 주어 꿈이 맞아 떨어졌다고 한다. 이 때부터 스님은 30여 년 동안 오직 화엄경만 공부하였다고 “동사열전”이 전하고 있다. 순조 12년(1812) 입적하니, 세수로는 85, 승랍으로는 66세였다. 당시 조선 제일의 문장가였던 규장각 제학(提學) 남공철(1760~1840)이 쓴 비가 절 입구에 현존(現存)하고 있다.


추사와의 인연                         


대웅전(大雄殿)은 영웅보다 높은 대웅(大雄) 즉 석가모니부처님이 계시기 때문에 부쳐진 이름이라고 한다. 따라서 절의 가장 중심지역에 배치할 뿐만 아니라, 기단도 높게 쌓아 위엄을 보이게 한다. 또한 현판 역시 아무나 쓰지 않고 선지식이 뛰어난 스님이거나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분의 글을 받아 내건다.

헌종 13년 (1847)에 일어난 대화재는 천여 칸의 당우 중에서 극락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잿더미로 변한다. 그러나 인종의 태실(胎室)을 관리하는 책무와 사찰을 잘 수호(守護)하라는 영조의 완문(完文)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의 영천 군수는 물론 대구에 있는 경상감영과 왕실의 대대적인 지원에 힘입어 중창 불사를 벌인 결과 3년여 만인 헌종 15년(1849) 마무리하게 된다.

새로 지어진 당우(堂宇)에 내걸 현판 글씨를 누구로부터 받아야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당대 최고 명필이자 대학자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던 분이자, 30대 초반, 아버지 김노경이 경상도 관찰사를 하면서 지역의 경승지를 심방할 때 함께 따라와서 이 절을 보았거나, 진외고조인 영조(英祖)와 인연 때문에 추사(秋史) 김정희 (1786~1856)가 써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여기기에는 석연치 않는 점도 있으니 그런 묵은 인연이라기보다는 추사 역시 노년에는 불교에 심취해 있었던 만큼 마지막 중창에 관여했던 팔봉·해월 두 분의 스님과 교분이 돈독해 글을 써 주었거나, 아니면 영파 성규스님이 오랫동안 전라도에서 불법을 펼쳤고 특히 대흥사에서 주석하면서 11분의 제자를 배출했다고 하니 대흥사의 대종사(大宗師)의 한분이자 추사와 아주 가깝게 지내며 많은 일화를 남긴 다성(茶聖) 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가 영파 스님의 11분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스승 영파가 말년에 머물다가 입적하신 은해사에 추사에게 글을 써 주기를 부탁해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조금은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어떻든 사내(寺內)의 ‘은해사’ ‘대웅전’ ‘보화루’ ‘불광’ ‘일로향각’ 등 다섯 점의 현판과 문액의 글씨는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되어 무려 9년 동안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비로소 자기만의 독창적인 필법인 추사체를 확립한 시기에 쓰인 작품들이라고 한다.

미술평론가 최완수 (간송미술관)선생은 이를 두고 ‘추사 친필 현판의 보고’라고 하였으며 특히 ‘은해사’ 현판(懸板)에 대해서는 “과연 추사체의 진수를 보인 졸박천진(拙撲天眞)한 글씨다. 무르익을 대로 익어 모두가 허술한듯한데 어디에서도 빈틈을 찾을 수가 없다. 둥글둥글 원만한 필획이건만 마치 철근을 구부려놓은 듯한 힘이 있고, 뭉툭뭉툭 아무렇게나 붓을 대고 땐 것 같은데 기수(起收)의 법칙에서 벗어난 곳이 없다. 저러니 추사체라 하지,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고 격찬 했다.

은해사는 한창 바쁘다. 특히 지난여름에는 일연국사(一然國師1206~1289)의 탄생 800주년을 맞아 산사음악회, 학술대회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했을 뿐 아니라, 전국에서 처음으로 수림장지(樹林葬地)를 설치하여 산림의 훼손을 막아 국토를 아름답게 보존하고, 중생들이 지은 악업(惡業)을 소멸시키기라도 하듯이 목탁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잠들도록 하여 우리나라 장묘문화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데 앞장서고 있어 21세기 또 다른 모습으로 광명의 불을 밝히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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