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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장제도(殉葬制度)에 대하여 논하라.
Ⅰ. 서(序)
사람이 죽으면 시신이나 유골을 묻는 무덤은 구석기시대에는 기록이 없고 신석기시대에 처음 나타난다. 무덤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기를 바라는 영혼불멸(靈魂不滅, immortality of the soul)의 신앙 위에서 시체를 매장(埋葬, 薶葬)하였던 풍습 때문에 만들어진 유물이며 고대사회에서 근대사회에 이르기까지 한 집단의 지배층 계급에 속하는 사람(왕. 귀족)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의 뒤를 따라 첩, 신하, 종 등이 강제로 혹은 자진하여 산 사람을 함께 묻던 순장제도(殉葬制度)가 있었다. 청동기시대부터 세계 각지에 이런 사례가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철기시대 부여, 중국을 위시한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특히 많이 행해졌다.이하에서 순장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Ⅱ. 순장 제도
1. 순장(殉葬)
가. 의의
임금이나 남편 또는 신분이 높은 사람 등이 죽으면 그 신하나 아내·종 등이 뒤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강제로 죽여서 함께 매장하는 장례 습속으로 순사(殉死), 딸려묻음을 말하며 신분계급이 뚜렷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볼 수 있다.
나. 의미
순장은 사람들이 죽음 뒤의 세계를 인정하고 내세에도 현세에서의 신분과 지위를 누리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관습이다. 순장은 사회적으로도 손실이 큰 장례 방식이었고 점차 순장의 실제적 효과에 대한 확신이 약화되면서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죽은 자의 세계에서는 현세의 사람과 물건이 별 쓰임새가 없을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2. 순장(殉葬)과 순사(殉死)
가. 광의의 순장과 협의의 순장
광의의 순장에는 순장(殉葬)과 순사(殉死)가 있으며 순사(殉死)는 순장의 일종이며 하위 개념이며 순장의 진화된 또는 후발 형태로서 순절(殉節)이라고도 한다. 협의의 순장은 순장만을 말하며 광의의 순장에는 순장과 순사를 포함한다.
나. 순장(殉葬)과 순사(殉死)의 차이
순장 | 순사 | |
매장 장소 | 피장자와 동일한 무덤에 매장 | 피장자와 다른 무덤에 매장 |
자발성 | 피순장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매장 | 형식적으로 피순장자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 매장 |
3. 순장의 방식
가. 살인 순장(殺人旬葬)
피장자가 사망하면 강제로 죽여서 피순장자를 함께 매장하는 순장. 부여(夫餘.扶餘).
나. 자살 순장(自殺순장)
피장자가 사망하면 피순장자가 망자를 따라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어 피순장자를 함께 매장하는 순장.
4. 순장 묘의 조건
어떤 무덤이 순장을 행한 무덤으로 판명되기 위해서는 인골이나 매장의 흔적으로부터 세 가지 필요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가. 동시성
무덤의 주인공과 순장 당하는 사람이 동시(반드시 한날 한시를 뜻하는 것은 아님)에 매장되어야 한다(동시성).
나. 강제성
순장 당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사에 관계없이 강제로 죽임을 당하고 따라 묻혀야 한다(강제성). 다. 종속성
순장 당하는 사람이 무덤의 주인공에게 종속되어야 하며, 다수의 사람들이 하나의 무덤에 동시에 매장되어 있을 경우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 나머지 사람들이종속적임이 판명되어야 한다(종속성).
5. 순장 제도의 사례
가. 한국
⑴ 개요
한국에서도 고대에 순장의 풍속이 있었다.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 부여(夫餘)의 귀인(貴人)에 대한 순장의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에도 순장의 풍속을 금지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신라의 순장 풍속은 개국 초기에서부터 전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 부여, 신라, 가야와 고구려에는 순장제도의 기록이 있고 백제에도 순장의 풍속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⑵ 내용
① 고조선(古朝鮮)
BC 7C 강상(岡上)무덤에서 100여명을 매장한 旬葬制度가 있었다.
강상(岡上)무덤과 누상(樓上)무덤 : 둔덕 무덤
사람 머리만한 돌을 쌓아 올려 둔덕을 만들고 그 안에 돌널을 만들거나 움을 파고 그 위에 시신 매장한 무덤으로 1963년 북한과 중국 두 나라 고고학자들의 공동발굴에 의해 이루어졌다. 기원전 6~7세기경의 崗上무덤과 약간 늦은 시기의 樓上무덤은 누상(樓上)이라고 불리는 작은 언덕 위에 있는 이 무덤은 언덕의 정상부를 평평하게 고른 뒤 주위에 커다란 돌로 담을 쌓아 한 변에 20m 가량의 방형 구획을 정한 후 그 내부에 여러 개의 무덤구덩이를 만든 형태이다. 그 위에는 검은 흙과 자갈을 섞어서 전체를 덮었다. 심양 정가자와 6512호
② 부여(夫餘. 扶餘)
殺人殉葬, 多者以百數(살인순장, 다자수백)(후한서 동이열전[後漢書 東夷列傳] :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송(宋)나라의 범엽(范曄))
사람을 죽여 순장시키는데 숫자가 많은 자는 백 명이나 되었다.
③ 신라(신라)
22대 지증왕(500~514) 3년 502년에 순장을 금하였다(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 지증왕조(智證王條)에는 502년(지증왕 3년) “春三月 下令禁殉葬 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봄 3월에 명령을 내려 순장을 금하였다”).
④ 가야
신라, 금관가야(본가야), 아라가야도 순장을 하긴 했지만 많아야 1~5명 같이 묻는 정도였던 반면] 대가야의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대형 고분마다 순장덧널이 수십 개씩 있어서 한국사에서도 독보적으로 순장을 많이 했던 것이 밝혀졌다. 총 22명 18기의 유골이 출토된 44호분과 4명의 유골이 발견된 45호분이 유명하다. 순장곽의 숫자와 크기로 볼 때 44호분은 약 36명, 45호분은 약 12명 정도가 순장된 것으로 보인다. 연령대는 성인부터 10세 이하 여아까지 다양하며 칼이나 둔기에 의한 사망 흔적이 발견되었다. 순장을 마지막 시기까지 유지하던 가야가 신라 24대 진흥왕 22년 562년 이사부(異斯夫)의 대가야의 정복으로 멸망하면서 한국 역사에서는 영구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다만 발해에서는 순장이 남아있었다고도 한다.
⑤ 고구려와 백제
고구려 11대 동천왕(227~248) 22년 248년 왕이 승하하자 가까운 신하들이 스스로 순장하려고 하여 사왕(중천왕)이 이는 예가 아니라 하면서 금하게 했으나 정작 장례일에 이르자 스스로 목숨을 버린 자가 매우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⑥ 백제
신라와 부여와 같은 문화권에 있는 고구려, 백제에서도 순장의 풍속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 인도
① sati : 힌두교의 관습. sati(정숙한 아내)로 sat의 여성형
② sutee(殉死)
힌두교의 관습으로 아내가 남편을 따라서 목숨을 버리는 것. 영국식민지시대 이전의 인도에서 행해진 풍습 중에 미망인이 죽은 남편을 화장하는 불에 함께 타서 죽는 풍습의 명칭에서 유해하였다.
다. Africa
⑴ Nigeria 주쿤족(Jukun)
왕이 죽으면, 동시에 남녀 2명의 노예를 액살(縊殺, 雉經)하여 시체를 왕의 묘 입구 근처에 두었는데 남자노예의 오른손에는 왕의 창을 쥐어주고 머리맡에 말고삐와 낫을 놓아두었고 여자노예의 머리 곁에는 물동이를 놓아두었다. 왕이 총애(寵愛)한 노예가 자발적으로 또는 선발되어 순사하고, 왕비나 종자(從者)도 왕과 함께 매장되었다고 한다.
주쿤족(Jukun) : 나이지리아 베누에 강 상류에 사는 종족.
⑵ 짐바브웨(Zimbabwe)왕국
왕이 죽으면 왕비도 따라 죽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러한 풍습은 왕후(王侯)문화적인 일련의 문화복합에 속하며 특히 왕의 신체를 우주와 동일시하여 고령(高齡)·병약·금기위반·재액(災厄) 등의 이유로 의례적으로 왕을 살해하는 풍습과 관계가 있다.
라. America
⑴ 남아메리카의 잉카제국(Incan Empire)
신분이 높은 사람이 죽으면 그의 부인과 종이 희생
1. 마야문명(2000 BC ~AD 250 Pre-Classic period/AD 250~900 Classic period )
고대 멕시코 및 과테말라를 중심으로 번성한 인디오 문명 및 이를 이룩한 민족의 명칭.
2. 톨테카(Toltecas)문명
10~13세기에 번영했던 멕시코 중부에서 새로운 정주 문명인 톨테카 문명이 출현하여 마야 문명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다가 1168년에 북서부로부터 걸어와 아스테카제국을 세운 노마드 전사들인 쇼손족에 패망
3. 아즈텍문명
아즈텍 문화는 톨테카 문화를 이어 13~15세기경에 멕시코 중앙고원에서 인디언에 의해 꽃피워 졌던 마지막 고대 문명이다. 주로 옥수수, 양파 등을 재배하는 화전 농업을 기반으로 도시, 사회 조직, 정치 기구, 군대, 토지 제도를 정비하고 신권 정치를 행하였다.
4. 잉카문명
15세기부터 16세기 초(1438~1533년)까지 남아메리카의 중앙 안데스 지방(페루·볼리비아)을 지배한 고대제국의 명칭.
1533년 사파 잉카라 불리우는 마지막 황제 아타왈파는 점령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명령에 의해 살해당하고 잉카 제국의 멸망과 동시에 에스파냐 지배가 시작되었다.
⑵ 북아메리카의 나체즈족(Natchez族)
수장(首長)이 죽으면 저승에서 수장에게 봉사할 요리사·하인, 그리고 아이들까지 함께 매장. 저승에서의 죽은 사람의 안녕을 기원하고 사후세계를 현실세계와 같이 생각하는 것에서 생긴 풍습으로 계층화된 사회를 그 배경.
마. 중국
순장이 역사적으로 가장 활발히 행해진 곳은 중국으로 상(商)나라 때 이미 순장제가 나타나 서주(西周) 시대까지 성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기(史記)에는 BC 7세기 진(秦)나라의 순장기록이 나타나며 이후에 때때로 순장의 금지령이 공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청(淸)나라 초기까지도 황제나 왕·왕족이 죽으면 장식품·일용품·거마 등과 함께 많은 처첩과 종자·노예가 희생되었다.
바. 기타
⑴ 고대의 게르만족과 켈트족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사
⑵ Fiji와 인도양의 니코바르제도(Nicobar Islands)
태평양의 피지에서는 아버지가 죽으면 자식이 손가락을 자르는 풍속이 있었고 인도양의 니코바르제도에서도 미망인이 손가락을 자르는 풍속이 있다.
⑶ 일본
주군(主君)을 따라 가신(家臣)이 자살하는 일은 있지만 남편을 따라 죽는 풍습은 없었다.
Ⅲ. 결어
순장(殉葬)제도는 고대 노예제(奴隸制) 사회에서로부터 출발한 가장 극단적(極端的)이며 야만적(野蠻的)이고, 잔인(殘忍)한 제도(制度)였다. 문명사회가 되면서 점차로 없어졌지만 인간의 존엄과 가치나 인격이 전혀 인정되지 않는 야만적 문화였다.
비록 순장 제도가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풍습이긴 하지만 고대사 특히 매장 제도를 연구라는 데는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
소도(蘇塗)에 대하여 논하라.
Ⅰ. 서(序)
소도(蘇塗)는 성읍국가 시대 삼한 등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특수한 신성 지역인 성역(聖域)이다. 성읍국가 시대의 삼한은 제정분리(祭政分離)의 사회로서 정치와 종교(제사)가 분리되어 있었는데 정치적 지도자는 거수(渠帥, 渠率), 신지(臣智), 험측(險側), 번예(樊穢), 살해(殺奚), 불예(不例), 견지(遣支), 읍차(邑借) 등의 군장(족장)이 있었고 제사장(祭司長. 종교지도자)은 천군(天君이 삼한시대 천신에게 제사를 지낸 신성지역(성지. 입간)인 소도(蘇塗)를 다스렸다. 이하에서 소도에 대해서 논한다.
Ⅱ. 내용
1. 기록
소도에 대해서는 후한서 마원전(後漢書 馬援傳), 삼국지 위서(三國志 魏書) 한전(韓傳), 진서사이전(晉書 四夷傳), 통전(通典) 중국측의 기록에만 나오고 그 뒤의 우리나라 최고의 기록인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그 중 가장 자세한 기록인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한전(韓傳)에서는 소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귀신을 믿으므로 국읍(國邑)에서는 각기 한 사람을 뽑아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 사람을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이들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別邑)이 있는데 이것을 소도(蘇塗)라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거기에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도망자가 그 속에 들어가면 모두 돌려보내지 않아 도둑질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이 소도를 세운 뜻은 마치 부도(浮屠)를 세운 것과 같으나 그 행해진 바의 선악은 달랐다.”
2. 유래 및 연구
가. 어원
소도란 ‘솟대’·‘솔대’·‘소줏대’ 등에서 온 말로, 여기의 ‘소’는 ‘길게 또는 곧게 뻗은’이라는 의미이고 대는 ‘간(竿)’이므로, 소도는 입간(立竿)이라 한다. 혹은 소도는 고간(高竿)의 몽고어 발음에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나. 연구
삼국지 위서 한전에 실린 기사의 내용은 소략하지만 신앙이나 의례 및 삼한시대의 정치·사회상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일찍부터 이에 대한 연구가 많이 행해졌다.
일련의 민속학적 연구에서 소도는 제의(祭儀)가 행해지는 신성 지역(神聖地域. sanctuary)이며 별읍(別邑)의 성역(聖域)이다. 소도는 읍락(邑落)의 원시 경계표라고도 한다. 소도는 신단(神壇)의 의미인 ‘수두’나 높은 지대의 의미인 ‘솟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성역으로서의 소도는 대마도(對馬島) 등에 일부 전하기는 하나 우리 민족의 현존 민속에서는 전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큰 나무에 방울과 북을 단 신간(神竿)으로 해석하였다.
역사학적 연구에서 소도는 특히 도망자를 잡아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철기문화가 성립시키고 있는 새로운 사회 질서에 대항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소도가 청동기의 시대적 산물이라면 그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한 성읍국가(城邑國家)의 지배자들은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 우리 민속에서의 소도
소도는 현재 우리 민족의 민속에 나타나는 세 종류의 장간(長竿)을 의미한다.
⑴ 일시 시간(一時神竿)
개인의 가정에서 경사나 기도를 드릴 때에 임시로 세우는 신간이다. 일시적 신간에는 일시신간(一時神竿), 볏가리, 화적(禾積), 화간(禾竿), 보리볏가리, 풍간(風竿) 등의 이름이 있다
⑵ 솟대
마을의 동구에 건립하는 것으로 명칭은 목조소도(木鳥蘇塗), 솟대, 솔대, 소주, 소줏대, 포줏대, 거릿대, 갯대, 수살이, 수살이대, 수살목(木), 액(厄)맥이 등 다양한다.
⑶ 화주(華柱)
등과자(登科者)가 자기 문전이나 산소 또는 마을 입구에 세우는 화주(華柱)이다.
이러한 의미의 소도는 만주의 신간이나 몽고의 오보(鄂博), 인도의 찰주(刹柱)나 인타라주(因陀羅柱)와 같은 성격을 가진다.
3. 역할 종교적 성역 및 별읍
가. 제의 공간
⑴ 종교적 신성지역(성역)
소도는 종교적인 일정한 성역이며 그 안에 긴 장대를 세웠고 그것을 중심으로 천군이 주재하는 제의가 행해졌다. 제단을 만들고 방울과 북을 단 큰 나무(神竿. 신간)를 세워 산천의 귀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삼한 사회에서는 제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매년 1~2차에 걸쳐 각 읍(邑)별로 소도에서 천군을 선발하여 제사를 지내었으며 질병과 재앙이 없기를 빌었다. 이 소도는 매우 신성한 곳으로서 죄인이라도 도망하여 소도에 숨으면 잡아가지 못하였고 제사에 참석하면 처벌하지 않았다. 이 소도에는 큰 소나무를 세우고 신악기(神樂器)의 구실을 하는 방울과 북을 달아서 강신(降神)에 대한 안내 또는 신역(神域)의 표지로 삼았다. 무속신앙의 솟대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소도는 성읍국가 이전 단계인 군장사회(君長社會)에서 천군이 임무를 수행한 장소이며 신전(神殿)과 같은 위엄을 가지면서 당시 사회의 중심지가 되었고, 제사장으로서의 천군은 통치자와는 별도로 농경 의식과 종교 의례를 주관하였다. 그 뒤 천군에서 왕으로 사회가 발전하면서 종교적 입장의 소도는 정치적 중심지로 그 위치가 변하여 갔다.
⑵ 별읍
소도의 의례는 천군이 주재한 것으로 정설화되어 있지만 별읍이 바로 소도였다는 점을 중시하여 소연맹국시대(小聯盟國時代)에 행해진 제의였던 것으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 소연맹국 안의 별읍이 소도여서 그 곳에서는 지신(地神)이나 토템 신(totem神) 등 귀신이 숭배되었고, 천신을 제사하는 천군은 국읍에 있었다는 설로서 소연맹국의 지배자가 정치적 실권을 가지자 그 안에 들어온 다른 읍락이나 소국은 별읍을 이루고 있었으며, 종교적으로는 독립된 제의를 주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삼한의 국읍에는 별도로 한 명의 천군(天君)이 세워져 천신(天神) 제사를 주관하였다는 설은 국읍의 천군과 소도의 무당을 구별하여 천군은 상위의 천신 제사를 주관하고 소도는 그보다 하위의 토착적인 귀신 제사가 행해지던 장소로 구분하는 것이다.
나. 읍락(邑落)의 원시 경계표
삼한의 소도를 읍락 사이의 경계 표시로 보기도 한다. 동예의 풍속에서는 산천을 중요하게 여겼고 산천에는 각각 구분이 있다고 간주하였다. 동예인은 아무 곳에나 함부로 들어가지 못했고 읍락 사이의 경계를 넘어 침범하면 생구(生口. ①포로/노비. 잉걸② 소)와 소·말로 벌금을 내는 ‘책화(責禍)’가 있었는데 삼한의 소도도 이와 같은 산천 경계의 표시라고 보는 것이다. 삼한에는 성책과 성곽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산천 등의 자연 경계가 갖는 사회적 의미가 동예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약했을 것이고 삼국지에서 소도를 세운 취지에 대해 불교의 부도(사찰)에 비교하는 점을 보아도 소도는 기본적으로 신앙을 위한 일종의 신성 공간임을 알 수 있다
4. 읍락국가에 편재한 제의
소도는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1145)나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1281)에는 나오지 않고 삼국지 위서(三國志 魏書) 한전(韓傳)에만 나오기 때문에 삼한사회에만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성읍국가나 각 읍락이 받드는 시조 신앙(始祖信仰)이 소도 신앙(蘇塗信仰)으로 되면서 국읍(國邑)의 천신(天神)과 별읍(別邑)의 지신(地神)으로 각각 신앙되다가 연맹왕국이 확립되면서 천신과 여러 부족의 지신을 함께 묶어 제의(祭儀)를 행하는 제천 의례(祭天儀禮)로 바뀌어간 것이라고 본다면 소도 신앙은 연맹왕국이 확립되기 이전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한 것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Ⅲ. 결어
소도(蘇塗) 신앙은 당시 사람들의 사회생활이었고 정치생활이었으며 문화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삶의 정신적 원동력과 같은 것이었다. 소도의 시작은 하느님(神.天神)과 태양숭배(太陽崇拜), 수목숭배(樹木崇拜), 새(鳥) 숭배의 사상에 있으며 그 신앙은 법(法)도 정치도 없던 그 당시에 있어서 정신적 중심체가 되며 사회질서의 안녕과 유지에도 큰 몫을 차지하여 그 역사적 사회적 역할은 컸을 것이다. 소도가 신성구역으로서 또는 경계표로서 역할을 하고 소도를 통해서 고대 읍락국가나 군장사회의 종교의식과 제정분리의 관행을 이해할 수 있고 그 당시의 천군(제사장)과 군장(정치적 수장)과의 관계 및 발전과정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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