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진짜 '소설'이다. 절대 '실화'가 아니다

[나는 소나무]

요즘, 어느 괴뢰정권의 '점'조직이 암약하고 있다고 난리 부르스다.

뭐, 어디 교육계 뿐만인 줄 아냐? 그리고 '점'조직 뿐인줄 아냐?

점조직보다 '털'조직이 더 심각하다는 거, 아직도 모르냐?

아, 여사님, 안 여사니~임! 

(1)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시간, 밭둑 가에 나지막하게 늘어져 있던 대봉감이 자취를 감췄다. 곡예사의 줄타기처럼, 종 모양의 주황빛 감들이 물구나무서기라도 하는 것 같았었다.

15평 남짓한 기와집이 남쪽을 바라보며 사뿐한 여사님의 집. 정원 한 귀퉁이, 층층나무 아래 탁자와 잔디밭에 쌓인 낙엽들이 바람을 기다리고 있다. 개나리와 영산홍의 이중 울타리가 은밀한 요새와도 같다. 길 쪽에서 바라보면 집과 정원의 존재를 알아볼 수 없을 만치.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도 100여 평의 텃밭엔 수확기가 지난 작물들과 수확 적기인 작물들이 뒤섞여 단정치 못한 모습으로 떨고 있다. 무, 배추, 당근, 서리태, 갓, 고추, 도라지, 상추.

밭 한가운데 자그마한 창고는 문이 활짝 열려 있다. 꼼꼼한 성격 그대로, 호미, 낫, 삽, 곡괭이, 쇠스랑, 톱, 조루, 바가지 등등의 농기구와 소품들은 예전처럼 고분고분한 상태가 아닌, 뻐드러지거나 틀어지고 퉁겨지고 엎어진 채다.

다시, 정원으로 갔다. 닿을 듯 말 듯, 비슷한 위치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간 가지는 빈손이다.

‘아주 멀고 먼, 옛날이었을까?’ 생김새도 다양하고 직업과 연령대도 천차만별이었던 남녀노소들의 활기 가득했던 정원풍경이 생생하다. 누군가는 숨넘어가는 듯 웃어 제끼고, 누군가는 언성을 높이며 씩씩거렸다. 간혹, 또렷한 이목구비와 균형 잡힌 몸체를 하신 여사님의 목소리도 후렴처럼 들려오곤 했다. 그들이 둥그렇게 마주 앉았던 탁자엔, 여러 종류의 술과 담뱃갑, 과일과 과자, 건어물, 견과류 등이 풍성했다.

휴양을 온 것처럼, 그들은 마냥 즐겁고 편안해 보였다. 중소기업 사장, 노동자, 교사, 디자이너, 프로그래머, 무슨 영업팀장, 유치원 원장, 방송작가, 농장주 등등.

지금으로부터 7년 전,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안 여사님은 이미 귀촌살이 4년 차였다. 교육공무원을 정년퇴직하고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으로 홀로 와 계셨다. 다소 중량감 있는 몸 매무새에 이목구비가 또렷한 얼굴의 여사님은 내게 무척 친절했다. 처음엔 그 지나친 친절이 당혹스러워, 안절부절 이었다.

여사님은 음식에 그다지 정성을 쏟는 성격은 아니었다. 텃밭이나 정원에서 일하다가 내가 지나가는 걸 보면 꼭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때마다 당신이 지으신 자연농법 농산물에 대한 자부심이 워낙 커서인지, 최소한의 음식혼합공식도 무시한 음식을 꼬박꼬박 차려주셨다.

다소 부담스럽긴 했지만, 여사님 인심에 화답하여 ‘맛있게’ 먹고 있노라면 어김없이, 그 특유의 ‘강연’이 서비스로 따라붙었다. 강연주제는 거의 변동이 없었고, 큰 틀에서 두 가지 주제를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 하나는 여사님이 믿고 있는 종교 관련이었는데, 그 당시 새롭게 급부상한 신흥종교였다.

다른 하나는 이곳 마을 사람들에 대한 너무나도 가혹한 평가였다. 물론 일부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지나치게 여사님의 관점에 매몰된 평가가 거슬렸다. 그러나 굳이 여사님의 견해를 반박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겸손을 떨었다거나, 온순한 성품이라서는 절대 아니다.

풍성한 음식과 열성적 강연을 대접받고 돌아올 때면 여사님은 언제나, 몇 개의 작은 비닐봉지를 내 팔을 꽉 잡아당기며 건네주셨다. 마을에서 얻은 해산물, 손님들이 사 들고 왔던 과일이며 과자 따위였는데, 절대 사양하지 말라는 듯 내 팔을 꽉 잡으며 다독거렸다.

(2)

어젯밤 늦게, 여사님의 밭 가에서 사람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었다. 하여,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 집으로 갔다. 여전히 문은 잠겨 있었고, 정원의 낙엽도 그대로였다. 탁자에 내려앉은 낙엽들의 이동을 빼고는 별반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그러나 연장창고 물건들이 무사하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고, 텃밭의 수확물 모두가 안녕한지는 모르겠다.

길에서는 볼 수 없지만, 마을 뒤의 야산 등성이에 오르면 여사님의 정원과 텃밭이 풍경화처럼 걸려 있는 위치가 있다. 내가 마을에 나타나 산책을 즐기는 모습을 본 여사님도 덩달아 그 길을 오르다 나와 마주치곤 했었다. 텃밭과, 그보다 몇 배는 넓은 정원 가꾸기에 하루 왼 종일 눈코 뜰 사이 없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순간을 여사님도 즐기기 시작한 거였다. 사는 게 이렇게 재미있는 줄 예전엔 미처 알지 못했다고, 유행가 가사를 읊고 있는 듯 말하는 여사님의 모습은 진짜로 행복해 보였다.

30대 초중반쯤일까? 보통 키에 깡마른 체구의 오드리될뻔 양은 아마도 미혼일 것 같았다. 웨이브가 들어간 윤기 나는 짧은 머릿결과, 작은 얼굴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였다.

경쾌한 목소리로 종알거리며, 주방에서 층층나무 아래 탁자 사이를 깡총걸음으로 오가는 그녀와 텃밭 옆길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 그 유명한 미국 배우 오드리 햅번을 보는 듯 했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긴 머리채를 짧게 컷한 오드리햅법 헤어스타일은 당대 여성들에게 컷트 머리를 유행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한 번도 그네들 누구와도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적 없지만, 통성명을 했다 해도 일일이 기억하지 못했을 거다. 그러다 보니 처음 봤을 때의 이미지에 따라 별명을 붙여 기억하는 게 정석이 되었다. 오드리될뻔 양의 경우처럼.

여사님과의 교류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무렵, 여사님은 친절하게도 그들이 모일 때마다 잊지 않고 나를 초대해 주었다. 나 또한 그때마다 정중히 사양의 말을 늘어놓았다. 저만치 거리를 두고, 아름다운 풍경화나 인물화를 감상하는 것 같은 잔잔함을 놓치긴 싫다고.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 즐거움은 저의 취향이니, 양해해 달라고.

그들의 발걸음이 뜸하게 된 건 아마도 최근 1~2년 사이인 것 같다. 간혹, 경기도 어느 도시의 유치원 원장이라는 뺑덕어멈이, 유난히 달랑거리는 귀고리를 차고 잠시 다녀가는 모습을 몇 번 보긴 했다. 주름살 하나 없이 윤기 나는 피부를 가진 여자였다. 적당하게 살 오른 얼굴에 밉지 않은 이목구비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심술보가 숨겨져 있는 듯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안 여사님 텃밭에 유난히 관심이 많던 개미 씨였다. 구형의 낡은 승용차를 끌었고, 전에 다 같이 모일 때도 언제나 텃밭 옆 공터에 주차를 했다. 그리고 텃밭으로 성큼성큼 들어서서 풀을 매고 코춧대를 세우거나 뽑는 등,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일을 찾아서 했다. 정원수 가지치기며, 잔디 깎고 다듬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그 일을 위해 먼 길을 달려온 것처럼, 신바람 나게 움직이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누구라도 덩달아 기분이 경쾌해질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안 여사님은 그가 떠날 때마다 텃밭농사에서 얻은 것들을 챙겨주었고, 나하고 얘기할 때도 그에 대한 칭찬을 가장 많이 했다. 저 아랫지방에서 현장노동자로 일한다는 그의 얘기를 전하는 말투나 표정이 참으로 애틋해 보였다.

소재지 근처에서 농장을 운영한다는 배추머리 씨는, 가까운 거리임에도 거의 왕래가 없는 것 같았다. 그동안은 헐값으로 경매에 내보냈을 수확물이, 여사님 정원모임을 통해 제값을 톡톡히 받으며 판로를 확보했음에도 말이다.

누가 뭐래도, 안 여사님의 친절과 건실함이 내게 많은 위로가 되어주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10여 명 안팎의 외지(?)인들에게 흔쾌히 휴식공간을 제공하며 즐거워하던 여사님의 처사는 더없이 신선했다.

전형적인 농어촌 마을의 보수적 이중성이 굳건한 지역에서, 여사님의 정원에서 벌어지는 남녀노소들의 격의 없는 어울림은 내게도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함께 어울리지 않아도,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겐 위안이 되었다. 위선 떨지 않고, 서로를 인정하며 어울리는 모습은 늘 상 나의 이상이기 하다.

내가 사람들의 이중성, 위선적 행태에 유난히 민감한 게 선천성인지, 후천적 경험에 의한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모르겠다.

저 앞에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씩씩하다, 혹은, 영화배우 누구처럼 멋져 보인다”라고 말하면 잘못일까? 나는 여자인데, 저 앞에 걸어가는 사람이 하필 남자라서?

가령, 어떤 사람에 대하여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이나 일하는 모습을 보고 칭찬하면 안 되는 걸까? 내 편 네 편, 혹은 질투심 때문에 확인할 수 없는 정보나, 자기 멋대로 짜낸 거짓으로 모욕을 일삼고도 오히려 큰소리치는 게 맞는 걸까?

(3)

내가 안 여사님과의 대면을 기피 하게 된 게 벌써 2년 하고도 몇 개월은 더 된 것 같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일을 다니게 되었다는 건 어디까지나 핑계였다. 눈치 빠른 안 여사님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휴일이면 거의 방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답답하다 싶으면 안 여사님 집과는 반대 방향으로 산책을 다녔다.

그렇다 해도 안 여사님의 부재가 마치 내 탓이라도 되는 양, 문득문득 죄책감 비슷한 게 밀려오는 건 무슨 조화란 말이냐! 오히려, 서로에게 넘어설 수 없는 ‘벽’을 깨닫게 만든 건 안 여사님 자신이 아니던가?

매번 손에 쥐어 주었던 과일이며 해산물 따위를 거절할 수 없었던 게 문제일까? 내용에 동의할 순 없었지만, 여사님의 식탁강연을 말없이 경청했던 게 실수였을까? 어느 날부턴가, 여사님의 정원모임을 외면하고 반대편으로 발길을 돌렸던 게 내 잘못일까?

50대로 보이는 부엉 씨. 약간 튀어나온 이마 아래 짙은 눈썹과 동그랗게 패어 들어간 눈동자가 부엉이를 연상시켰다. 양 볼에 살집이 두툼한 데다 체격 또한 튼실한 남성이었다. 약간 어그적거리는 걸음걸이에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는 중성에 저음이었다.

그다지 덥지 않은 여름 날 아침 일찍, 여사님은 내게 전화로 비단 조개 잡으러 바다에 가지 않겠느냐 했다. 전날 밤 일행들의 촛불 정원모임을 저만치서 감상했다는 걸 여사님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혹시나 한 번 권해보는 거였는데, 나는 또 거절했다.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 여름 해는 벌써 타오르는 것 같았다. 여사님의 정원이 가장 잘 보이는 산책로 한쪽에 가져다 놓은 의자에 앉아, 유난히 여인네의 치마폭처럼 다소곳한 소나무와 여사님 정원의 층층나무를 번갈아 비교해 보는 건 내게 일상의 재미였다.

매끈하게 가꾸어진 잔디 위에 두 개의 자그마한 텐트가 나비처럼 예뻤다. 하나는 무지개 빛깔로, 다른 하나는 완전 노랑나비였다. 여사님 말처럼, 모두가 바다로 떠났던 터라 사람 없는 정원은 말 그대로 풍경화 그 자체였다.

그들이 떠난 지 한 시간여 지났을까? 여사님네 주차장에 낯설지 않은 승용차 차 한 대가 들어섰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재빠르게 의자에서 일어나 잎이 무성한 참나무 가지 사이로 몸을 숨겼다. 어그적거리며, 차에서 내린 부엉 씨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여사님의 기와집 거실로 들어서는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잠시 후, 부엉 씨는 오드리될뻔 양의 팔을 이끌고 무지개빛깔 텐트 쪽으로 향했다. 짧고 윤기 나는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며, 부엉씨의 손에 이끌려 텐트 안으로 들어가는 오드리될뻔 양은 저항하는 것 같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들 둘이서 몸을 밀착하고 있는 광경을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보다 몇 달 앞서, 겨울이었다. 달이 밝아봐야 태양에 비견될 순 없기에, 확실하게 그들이었다고 단정 짓는다는 게 무리일 수 있겠지만. 늘씬한 키에 긴 머리채를 가진 여성은 안졸리나졸려 양 외에는 없었다.

안 여사님 텃밭과 이어진 농로에서 그녀를 처음 대면했을 때,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아서, 몇 달을 고심했었다. 그 여자의 직업은 아마도 무용선생이거나, 남녀공학 체육선생? 그도 아니면 무슨 마케팅 팀장?

기억력이 결코 월등한 편은 아니어서, 잠깐 알고 지낸 정도로는 쉽지 않았고, 고심하다 결국 포기했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서야 우연히, 인터넷 검색 중에 그녀와 흡사한 얼굴을 발견했다. 돼지고기 껍질 부위가 후라이팬 열에 녹아 뒤집혔을 때의 모양과 딱 들어맞는 입술을 가진, 바로 헐리우드 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였다.

안졸리나졸려 양과 함께 정원 한 귀퉁이에서 뭔가 말다툼 비슷한 대화를 주고받는 대상은 아마도 채틀러 씨가 아닐까 싶었다. 들창코 개미 씨 다음으로 안 여사님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잘 나가는 중견기업 사장이라 했다.

보통 키에 보통의 체격, 평범한 생김새였지만. 영화감독 겸 배우인 채플린, 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주범 히틀러의 이미지에서 볼 수 있었던 콧수염이 특징이었다. 부인은 지방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라 했다. 여사님 전언에 의하면, 모임 때마다 소소한 물품이나 도구들을 도맡아서 챙긴다는 채틀러 씨. 웬만한 여성보다 더 살뜰하게 설거지와 빨래를 손쉽게 해치운다고.

구름도 바람도 추위를 피해 달아났는지, 달빛이 제 세상을 만난 듯 유난한 밤이었다.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산책길에 나섰던 참이었다.

정원 한 귀퉁이를 벗어난 두 사람의 그림자가 텃밭 창고로 들어가는 걸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꽁꽁 얼어버린 손발을 녹이며 ‘워낙 날씨가 추우니까!’ 무슨 일인지 몰라도, 다른 사람 모르게 둘이서만 꼭 해야 할 얘기가 있는 거라고.

배추머리 씨가 유난히 뺑덕어멈에게 친근하게 구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일 수 있었다. 농장 일로 밤낮을 지새우며 촌아줌마로 늙었을 아내 얼굴보다는, 매끈하게 윤기 나는 피부와 패션모델 뺨치게 훌륭한 뺑덕어멈은 그저 바라만 봐도 기분이 좋아질 게 틀림없었다. 더구나 농장 생산물의 안정적 소비처 확보까지 덤으로 따라붙어 주니 말이다.

(4)

텐트에서 나온 부엉 씨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검정색 지프차를 몰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무지개빛깔 텐트에서 빠져나온 오드리될뻔 양은 층층나무 옆 수돗가로 다가갔다. 상큼한 연분홍빛 원피스에, 물이 쏟아지는 호스를 갖다 대고 깡총거리는 오드리될뻔 양! 톨스토이 원작의, 영화 ‘전쟁과 평화’에서 나타샤를 연기했던 오드리 햅번이 왈츠를 추고 있는 모습처럼 화사했다.

그 이전에도 언뜻언뜻 그와 유사한 모습들이 흔하게 눈에 띄긴 했었다. 안졸리나졸려 양과 채틀러 씨 외에도,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쳐 본 적 없는 몇몇들도 서로 친밀했다. 팔짱을 끼거나, 앞뒤 좌우로 허리를 끌어안고 상대방의 몸 어딘가에 얼굴을 기대고 걷거나 멈춰 서서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영화에서나 봄 직한, 백인 귀족들의 정원풍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이. 산 쪽 방향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영산홍과 개나리로 담장이 쳐진 여사님의 정원은 그런 용도로 안성맞춤이다.

공식적으로 부부나 연인관계는 아닌 남녀들이 스스럼없이 먹고 마시고 놀다가 한 공간에서 잠까지 같이 잔다 해서 이상할 건 없다. 인간사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괜스레 남.녀.노.소, 네 편 내 편을 가르며 서로 이간질하는 것만큼 소모적이고 피로한 일이 또 있을까!

그런 관점에서, 한동안 나는 그들이 만들어 내는 정원풍경의 열렬한 팬이 되어 있었다. 대충 2~3개월, 늦으면 3~4개월마다 열리던 정원풍경이 좀 늦어진다, 싶으면 우울해지기까지 했다.

갈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사내대장부 같은 컬컬한 목소리의 안졸리나졸려 양은 술잔을 기울일 때마다 건배를 외쳤다.

오드리될뻔 양의 가냘픈 몸매가 경쾌하게 리듬을 타면서 걷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뺑덕어멈의 늘어진 귀고리와 모델 같은 차림새는 멀리서도 향수냄새를 맡을 수 있게 만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음흉해 보이는 부엉 씨가 어그적거리는 걸음걸이로 텃밭 가를 맴도는 이유가 있었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관심 없다는 듯, 농부처럼 텃밭과 정원을 오가는 개미 씨를 골려 주는 걸 부엉 씨는 즐겨했다.

콧수염에도 염색을 하는지, 머리는 반백인데 비해 콧수염은 항상 검은색을 칠해 놓은 것 같은 채틀러 씨. 텐트를 친다거나, 물건 따위를 정리하고 옮기는 일, 정원 수돗가에서 과일이나 야채를 씻고 다듬는 행동이 살림 잘하는 주부의 전형처럼 보였다. 그 사이사이, 텃밭과 정원을 바쁘게 오가는 개미 씨를 골려 먹는 부엉 씨에게 면박을 주는 것도 그가 맡은 역할인 듯 했다.

배추머리 씨는 언제나 예약이라도 한 듯이 뺑덕어멈 곁에 자리를 잡았고, 뺑덕어멈이 뭐라 장설을 늘어놓으면 두 손을 탁자에 올려놓고 필기라도 할 듯한 자세로 경청했다. 말끝마다 군부독재 시절에 무슨 운동인가를 하다가 고문당해 후유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떠드는 모양이었지만. 내가 볼 땐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게 넘실거리는 배추머리 만큼이나 허풍일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 그래도 그게 먹혔던지?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정권이 바뀌면서 배추머리 씨는, 연봉 몇천짜리 감투를 썼다 한다. 그에 따라 맹꽁이 울음소리 같은 목소리도 덩달아 몇 옥타브 치솟았을 거였다.

그 밖에 몇몇 사람은 가까이 대면한 적 없었다. 안 여사님을 포함하여 7명이 고정멤버였고, 그 나머지는 새로운 사람이거나 교대로 참석하는 것 같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여사님의 정원모임이 심상치 않다는 걸, 여사님이 심취해 있던 종교로 인하여 어렴풋이 알아차렸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나에 대한 여사님의 친절까지 폄하되어선 안 된다는 강박증도 공존했다.

또 하나,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어떤 열망 따위가 여사님의 정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싶었던 심리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덧붙여, 세상사 요모조모를 판별하며 골머리 썩고 싶지 않다는 피로감도 부인할 수 없다. 이해타산이 개입되지 않은, 서로를 믿고 존중하며 의지하는 어울림을 상상만으로라도 즐기고 싶은, 아주 강한 소망 같은 거 말이다.

가령, 부득이하게 선량한 누군가를 보호해 주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또한, 공공의 이익을 위한 중대함이 아니라면 굳이, 골머리 아프게 앞뒤 재며 거짓말이나 위선을 떨어야만 하는 건지!

거짓말의 완벽성을 위해선 전후 상황까지 미리 짜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거짓말은 들통나기 마련이다. 들통나도 아무렇지 않게, 오히려 당당하게 큰소리치며 상대방을 탓하는 배짱을 가진 사람을 나는 견디기 힘들다.

내 머리는 그다지 영특하거나 민첩하게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아닌 걸 잘 안다. 그래서 보고 느낀 그대로를 말하고 표현하게 된다. 그래야만 내가 무슨 말을 했던가 기억해내려 애쓸 이유나 필요가 없을 테니까.

(5)

어느 날 여사님은 커다란 가방 가득 뭔가를 담아 들고 나를 찾아오셨고, 삐거덕거리는 구옥 툇마루에 조심스레 가방을 내려놓으며 내 얼굴을 살폈다.

“요즘 통 안보이데? 어디 아픈가, 해서…”

냉동 대봉감 몇 개, 전복죽, 잣죽, 과줄, 튀밥과자 등등을 차례로 내놓는 모습이 정말로 병문안 온 사람처럼 보였다.

“아뇨, 여사님!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데요?”

“아니, 며칠 전에 우리 정원에 사람들이 왔었잖아. 이번엔 한꺼번에 오질 않고, 몇 명씩 차례로 오다 보니까, 며칠 걸렸지 아마? 한, 닷새 동안이었나?”

진지하게, 여사님은 손가락으로 날짜를 가늠해 보았다.

“그렇게나 오랫동안요? 여사님 애 많이 쓰셨네요. 손님 치루는 일이 보통 일인가요?”

“아냐, 사람들이 이렇게 찾아와 주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 요즘 젊은 사람들이 뭐, 이런 촌구석에 늙은이를 찾아다니기나 하나?”

“에이, 여사님 정원처럼 아름다운 곳에서 하룻밤 잠자려면, 비용이 얼만데요! 여사님이 편안하게 대해 주시니까, 맘 놓고 찾아와서 놀다 가는 거죠.”

“아 참, 그런데 왜 이번엔 산책 안 했어? 사람들이 그렇게 시끌벅적했는데?”

“아, 네…그게, 요즘 좀, 마음이 좀 심란한 일이 있어서요.”

“뭔데 그래? 나한테 못할 얘기야?”

“뭐, 꼭 그런 건 아니고요. 생각할 일이 좀, 있어서요. 나중에, 정리되면 얘기해 드릴 께요.”

눈치 빠른 여사님이 그들의 행동거지를 눈치채지 못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뭐, 증거를 내놔보라면 할 말 없긴 하지만. 그러나 대쪽같이 올곧고 깐깐하신 여사님이, 증거 따위가 불확실하기 때문일까?

마을 남자들 몇 명이 집단으로 놀다 온 게 발각되어 난리가 났던 적이 있었다. 물론 농어촌 남성들도 도회지 남성들 못지않게 그런 열망이 있을 거였고, 실제로 그런 곳에 드나든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남자라면 그럴 수 있는 거라고, 농어촌 여성들은 너그럽다. 다만 일 년 벼농사 대금을 한 사람이 몽땅 날린 게 문제였다. 분을 참지 못한 아내가 방방 뜨면서 동네방네 소문나고 죽네 사네 난리가 났었다.

그 소문을 전하며 여사님은 “무식한 놈들! 무식하니깐 그 모냥 그 꼴로 왜놈과 내통하는 놈들에게 평생을 표 몰아주며 살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 마누라들은 이 추운 날, 뻘밭에 드나들며 그 고생인데! 일 년 농사 지은 돈으로 오입질이나 하러 다니면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자식새끼들 앞에서 고개 쳐들고 다닌 다냐?”

시국이 몹시 시끄러웠던 시절이었다. 서울 한복판에선 금방이라도 무슨 일인가 터질 듯이 사람들이 모이고 꼬여 들고를 반복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여사님의 마을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여사님이 그토록 믿고 따르는 종교를 개입시켰고, 그 종교만 믿으면 세상 모든 사람들 성자성인이 되어 범죄도 설움도 없는 태평성대가 저절로 와 줄 것처럼 말이다.

인간사 종교 앞에선 답이 없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종교라는 괴물의 위력은 참으로 엄청나다. 직업이 목수였을 거라는 예수가 그러했듯, 급작스레 죽음을 맞이한 어떤 인물을 기리는 그들의 열성이 급기야는, 기존의 그 어떤 종교와도 비견될 수 없는 광신종교를 탄생시켰다.

안 여사님 경우만 보더라도 칠순이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해 그 먼 길을 수시로 오가는 열정은 누군가 강요해서 될 일은 아니었다.

(6)

사람의 발자취가 끊겨버린 정원.

잔디 위에 탁자 위에 쌓인 낙엽들은 이제나저제나 바람을 기다린다. 영산홍과 개나리 꽃나무로 겹겹이 장막이 쳐진 상태여서, 웬만한 바람이 아니고서는 저 낙엽들이 비상(飛上)하는 일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병문안 오듯이 오셨던 그 날 이후로, 여사님과 나는 서먹해졌다. 내가 둘러댔던 ‘거짓말’을 여사님이 눈치채셨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굳이 해명 따위를 하고 싶진 않았다.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입장과, 직접 함께 어울리는 여사님 입장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걸 인정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여사님은 나만 보면 종종걸음으로 집안에서 뭔가를 들고나와 내 손에 꼭꼭 쥐어주셨다. 병문안 오시듯이 다녀가셨을 때도, 보답하고 싶은 마음 굴뚝 같았으나 참았다. 내가 뭔가를 드리기만 하면 그에 몇 배가 되돌아오는 걸 몇 번 경험한 뒤로는 아예, 어설픈 답례 따위는 하지 않기로 정해버렸다.

긴 겨울이 지나자 세상이 뒤집혔다. 그러나, 뒤집혔다는 건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전보다 더 나쁜 쪽으로 강화되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예상대로 결국, 여사님이 교주로 모시던 분이 나라를 통째로 집어삼킨 거였는데, 여사님과의 몇 마디 대화조차 끊기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번에, 누구 찍을 거야?”

“글쎄요, 마땅치 않아서, 기권을 생각하고 있네요.”

“아유, 참! 그러다가 저, 왜놈들하고 붙어먹은 당에서 또 되게?”

“여사님께서 믿는 분이면, 저쪽보다 나을 거라고 보시는 거죠? 말씀드리기가 좀 뭐합니다만은. 제가 볼 땐, 지금까지 주로 저쪽에서 도맡아 해오던 짓을 더 강력하게 강화하기 위해 그분을 세우는 거 같던데요?”

“아, 아니, 세상에나! 지, 지금 뭐라는 거야?! 이, 이건 뭐…”

그날 이후로 여사님과 나는 거의 결별하다시피 되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일을 다니게 되어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그렇더라도 어쩌다 길에서라도 마주치게 되면 의례적인 인사말 정도는 주고받았다.

그렇게 1년여가 흐른 시점에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 하나가 유난히 내 관심을 끌었다. 그야말로 국가 존재의 기초부터가 개망나니라는 걸 증명하는 사건이었지만, 희생양 하나 만들고 금 새 조용해졌다. 물론 그 이전과 이후, 지금까지 연이어 그와 흡사한 - 정말 말도 되지 않은 사건들은 끊임이 없었다.

나는 종종 안졸리나졸려 양을 생각한다. 허스키하게 컬컬한 목소리와 당찬 행동거지가 꼭, 어느 조직 행동대장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정원모임을 주도하고 이끌어가는 것도 그 여성인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도 여전히, 어떤 비밀스러운 조직의 ‘’행동대장‘으로 더더욱 가열 차게 활동하고 있을 것만 같다.

(7)

설령 여사님의 나에 대한 친절이 일종의 ‘포교 활동’이었다 해도 상관없다. 내가 그에 응하지 않았고, 그런 나를 여사님은 존중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여사님의 부재가 그 종교와 연관이 있을 거라는 판단이 들어서 걱정이다. 종교가 여사님을 구원한 게 아니라, 오히려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다.

일반적으로, 잘못된 종교의 폐해는 그 종교를 믿는 교인들에게만 해당된다. 물론 사회적으로 많은 물의를 일으키긴 하나, 그렇다고 전 국민, 나라 전체가 통째로 영향을 받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 더군다나 그 종교단체를 운영 함에 있어, 국민 세금이 통째로 바쳐지는 일은 없었다 지금까지!

* 에필로그

오늘 여사님네 주차장에 차 한 대가 보였다. 텃밭으로 다가가니, 중년 남성이 서툰 솜씨로 무를 뽑고 있었다. 영국에 나가 있다는 아들 얘기는 들었지만, 본적은 없었다.

중년 남성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가 여사님을 발견하는 순간, 그만 입을 틀어막았다. 웬 노숙자 같은 노인이 구부정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검버섯이 파리처럼 달라붙은 얼굴이며, 그토록 총기 발랄하시던 눈동자는 초점 없이 흔들거렸다.

여사님이 나를 어떻게 대할까, 생각해 볼 겨를 없이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울컥, 뜨럽게 올라오는 목덜미를 누르며 손을 잡았다. 건강은 어떠시냐고, 왜 갑자기 그렇게 떠나셨냐고, 여사님이 안 계시는 동안, 여사님이 없는 마을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고.

“위선 그만 떨어! 너도 왜구적폐놈들과 다를 바 없잖냐? 너 같이 개돼지만도 못한 천민들 챙기느라 잠도 못 주무시는 … 흐,흐,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