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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열정
장복단
그녀는 또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산비탈을 무성하게 덮고 있는 칡덩굴을 거머쥐고 산봉우리로 기어오르는 꿈이었다. 그녀는 오르고 또 올랐다. 얼마쯤을 올랐을까? 문득 고개를 들어 산꼭대기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서 있는 자리에서 산꼭대기가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이마에선 땀이 흐르고 몸도 온통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런데 칡덩굴을 너무 세게 거머쥔 탓일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돌부리에 찢겼나. 온통 여기저기가 생채기투성이다. 마침내 그녀의 손에서 피가 흐른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더 올라가야 한다. 더 높이 올라가야만 한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저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야만 한다. 그곳이 바로 그녀의 목표 지점이기에…….
그로부터 몇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여보세요? oo백화점 문화센터죠?”
“네, 그렇습니다.”
“저어~동화 구연 지도자반에 대해서 여쭤볼게 있어서 전화드렸는데요. 저어~동화 구연 지도자반 들어가는데 학력 제한은 없습니까? 그러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대학을 졸업하지 않아도 되느냐는 거죠?”
그녀는 말은 내뱉었지만 아마 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왜냐하면 동화 구연은 교육을 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 교육에 관계된 일을 하려면 최소한 전문대는 나와야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녀는 백화점 문화센터 아가씨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네, 동화 구연 지도자 과정 이수하시는 분들이 대부분 대졸자이긴 합니다만, 꼭 그렇진 않습니다. 고등학교 때 성적 좋으시고 여기서 얼심히 공부하시면 동화 구연 지도자로 활동할 수 있어요.”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래서 재차,
“정말이에요? 정말로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되요?”
라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녀는 뛸 듯이 기뻤다. ‘내가 동화 구연 지도자가 될 수 있다니, 그 일을 하기에는 내가 자격이 되지 않은 줄 알았는데, 그래서 아예 꿈도 꾸지 않았는데, 아! 내가 왜 진작 그 생각을 해 내지 못했을까. 왜?’그녀는 일순 가슴을 쳤다. 그리고 이제야 이 사실을 안 것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라도 그녀가 동화 구연 강사가 될 수 있다는 것 즉, ‘길’을 발견한 거다.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길을……. 그녀는 이내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웃었다.
‘됐어, 됐다구. 하하하, 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하면 늦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찾고 또 찾아 헤맨 길이었던가. 동화 구연 지도자! 그리고 나의 길! 난 찾았어, 드디어 난 찾았다구! 하하하. 이젠 열심히 하는 거야, 이젠 열심히만 하면 되는 거라구! 더 이상 나에게 방황이란 없어, 더 이상 나에게 방황이란 없다구, 하하하.’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녀는 그만 혼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도대체 진정할 수가 없었다. 남에게 베풀면 그만큼 복이 들어온다고 했던가? 그녀는 꼭 이렇게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어쩜 둘이 이렇게 절묘한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신기하기만 했다. 사실, 그녀는 몇 년 전부터 인천시청 사회복지과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도서녹음 봉사’를 해 오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동화 구연이나 도서녹음 봉사나 둘 다 혼자서 책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소화해 내는 것이 아닌가?
어쨌든 조금 전 문화센터 아가씨와 통화할 때 너무나 기쁜 나머지 개강일을 묻지 않았는데 다시 전화를 해 보니, 다가오는 12월 첫째 주에 개강을 할 예정이니 빨리 와서 접수를 하라고 했다. 선착순이기 때문에 늦게 와서 접수를 하면 강의를 듣지 못할 수도 있다고.
그녀의 벅찬 가슴과 함께 했던 태양도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오후 6시다. 앞으로 1시간 후면 남편이 퇴근할 것이다. 그녀는 마음이 진정되질 않는지 조금 전부터 거실을 서성대고 있다.
딩동-. 초인종 소리와 동시에 그녀는 그나마 걸치는 신발인 슬리퍼를 반만 걸친 채 현관문을 열었다.
“아니 당신, 오는 무슨 좋은 일 있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아내를 보고 남편이 한마디 건넸다. 그녀는 퇴근한 남편을 거의 끌다시피 해 가지고 소파에 앉혔다.
“자기, 그동안 내가 내 일을 찾고 있었잖아. 그런데 드디어 오늘, 그 일을 찾았다.”
남편 역시 그녀가 일을 찾고 있음을 이내 알고 있던 터라,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어떤 일이냐고 물었다.
“자기, 내가 원래 성우 되려고 한 거 알지? 그리고 요즘 내가 녹음봉사 하는 것도 알고 있고. 근데 요즘 아이들 배우는 동화 구연 지도하는 거 말이야~ 오늘 문화센터에 알아봤는데 꼭 대학 안 나와도 된대. 물론 대졸자가 많긴 하지만 동화 구연 지도자반에서 열심히 공부하면 동화 구연 가르칠 수 있대. 아! 내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지. 아유 멍청이, 아유 멍청이.”
그러자 남편도 무척 흡족해 했다.
“그래, 잘 됐네. 당신이 원했던 일이고 하고 싶어 했던 일이니까 어디 마음껏 해 봐. 나도 힘닿는 데까지 밀어줄게.”
말을 마친 남편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서 그녀를 안고 한 바퀴 빙 돌리는 것이었다. 아! 그런데 이것이 남편이 그녀를 품에 안은 마지막이 되었으며, 남편의 그 약속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될 줄이야!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오늘은 가수 이용이 그렇게 부르짖었던 ‘10월의 마지막 밤’이며 또한 시아버지 생신이다. 그동안 객지에 나와 있다는 핑계로 제대로 한번 모시지도 못했는데, 그래서 늘 죄스러운 그녀였기에 오늘만이라고 일찍 시부모님을 찾아뵙고 며느리 노릇을 해 드리고 싶었다. 시댁에 도착하니 벌써 친척들이 모두들 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고의는 아니지만 늦게 온 것이 미안해서 시부모님께 인사를 드리자마자 허둥지둥 부엌으로 들어가 음식을 차려냈다. 이윽고 생일 케이크에 불이 켜지고 사랑스런 아들, 딸 그리고 귀여운 조카들이 할아버지를 위하여 ‘생신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생신 축하~합니다~ 생신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할아버지~생신~축하~합니다.”
‘생일 축하’노래가 끝나고 다음은 남편의 특기인 샴페인을 터뜨리는 것으로 분위기는 정점으로 치닫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 남편이 갑자기 들고 있던 샴페인병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뒤로 쓰러진 것이었다. 순간, 주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바닥에 떨어진 샴페인 병은 거품을 쏟으며 산산조각이 났고, 불이 켜져 있던 생일 케이크엔 초가 녹아내려 흉물스럽게 변했다. 그녀는 쓰러진 남편을 안고 비명을 질렀다.
“자기 왜 이래, 자기 왜 이러는 거야? 정신 차려, 정신차리라구.”
그러나 남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그렇게 정신을 잃기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지나 벌써 12월 첫째 주 월요일, 바로 ‘동화 구연 지도자’ 첫 강의가 있는 날이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셔틀버스를 타고 oo백화점 문화센터에 왔다. 그리고 지금 ‘동화 구연’강의실에 앉아 있다. 지금 그녀의 마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참담하다. 이 동화 구연이야 남편이 건강하다는 전제 하에서 계획해 놓은 것이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당장이야 병원비와 생활비는 친척들이 조금씩 보태줘서 살아간다지만 장차 앞으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그녀는 이 자리에 앉기까지 수없이 곱씹어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되뇌이고 되뇌인 끝에 그녀는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결코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이었다.‘그래, 난 여기서 물러설 수 없어.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고지가 저긴데 어떻게 내가 여기서 물러서. 안돼, 그건 결코 안돼.’하며 비장한 각오로 온 것이다. 잠시 후,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며 ‘동화 구연’ 강사가 강의실로 들어 왔다. 강사의 손에는 오늘 강의할 내용인 강의안이 들려 있었고, 분위기에 걸맞게 말투도 세련되어 있었다.
“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그리고 저와 같이 동화 구연 식구가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건 제가 오늘 강의할 내용이거든요, 뒤로 쭉 돌리세요.”
강사는 ‘배불뚝이 덩치'가 인쇄된 강의안을 맨 앞사람에게 나누어주면서 말을 이었다.
“네, 오늘은 ‘배불뚝이 덩치’라는 짧은 동화를 가지고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자, 그럼 leading(읽기).
깊은 바다에 먹보 덩치가
으와! 맛있겠다, 빨리 먹자.
그리고 이 ‘으와! 맛있겠다, 빨리 먹자.’이 부분은 어떻게 연기해야 하겠습니까? 자, 맨 앞줄에 계신 분부터 한번 연기해 보세요.”
강사로부터 지목을 받은 학생은 나중에 알고 봤더니 윤수림이라는 친구였는데, 이 친구는 선생님으로부터 지목을 받자 한껏 감정을 잡고서 동화 구연을 했다. 그런데 아뿔사! 너무 감정을 넣은 걸까? 그녀의 우스꽝스런 연기에 그만 학생들이 강의실이 떠나갈 듯이 웃어댔다. 강사 역시 우스웠는지 한참을 같이 따라 웃더니, 이번에는 그녀에게 동화구연을 해 보라고 말했다.
“자, 그럼 이번에는 그 옆에 계신 분이 한번 해보세요. 그런데 성함이 뭐죠?”
그녀가 꺼져 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이성희입니다.”
그러자 강사는 이미 그녀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듯이,
“아! 이성희 씨. 이성희 씨 이번 지원서 보니까 현재 녹음활동을 하고 계시던데, 그러니만큼 잘 해야 합니다.”
맙소사! 하필이면 이 때에 그녀를 시키다니,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힘이 드는데……. 사실, 연기라 하면 그 어떤 분야보다도 자신 있는 그녀였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교내 행사 때마다 사회란 사회는 다 맡아 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래서 몸이 몹시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다음에 하겠노라고 말씀드렸더니, 구연강사는 이성희 씨 같은 분이 안 하면 누가 하겠느냐며 부득불 시키는 거였다. 그래서 내키지 않은 마음을 억누르고 동화 구연을 했다.
으와! 맛있겠다. 빨리 먹자!
하도 구연강사가 시키는 바람에 떠밀리다시피 동화 구연을 했지만, 역시 연기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어색한 그녀의 연기를 들은 강사는 깜짝 놀라며,
“아니, 이성희 씨! 연기가 그게 뭡니까? 여기 이 대목은 먹보 덩치가 먹을 것을 보고 너무 기뻐서 침을 꿀꺽 삼키며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도 맛이 없는 것 같아요. 자, 다시 한 번 해보세요.”
구연강사는 다시 한번 동화 구연을 할 것을 재촉했고, 할 수 없이 다시 해 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노노, 아니에요. 아니 이성희 씨, 무슨 일 있어요?”
구연강사의 말을 들은 그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첫 강의가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겠다.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셔틀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아! 이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동화 구연도, 녹음봉사도, 성당에서 전례활동도 그 무엇도 하기 싫다. 이젠 지쳤다. 더 이상 일어날 기운이 없다. 그녀는 이런 자신을 저주하며 집으로 향하였다.
남편의 병명은 뇌출혈로 밝혀졌다. 그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엘 왔다. 병원에 도착한 그녀는 시댁식구가 있는 중환자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온 것을 본 막내 시누이가 대뜸 한 마디 한다.
“언니, 물론 동화 구연이 언니가 원했던 일이고 하고 싶은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오빠가 이렇게 됐는데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오빠가 이렇게 된 이상 언니가 이리 이사 와야 되지 않겠어요?”
사실, 맞는 말이었다. 한 집안의 가장이 쓰러졌는데 지금 꿈이 어떻고, 이상이 어떻고를 논할 계제인가? 그리고 그녀 자신이 지칠대로 지친 상태여서 누가 뭐라 하기 전에 도리어 자신이 그만 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이젠 더 이상 ‘꿈’을 접을 수는 없었다.
“물론 아가씨 말이 맞죠! 오빠가 이렇게 됐는데 내가 오빠 곁으로 이사 와야 하는 거야 맞는 말이죠. 하지만 현재 내가 계획한 일도 있고, 인천시청에서 녹음하는 일도 이제 책 중간쯤 녹음했는데 여기서 그만둘 수 없어요. 그러니 고모님들이 협조 좀 해주세요. 네, 제발 부탁드릴게요.”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사람 좋은 큰시누이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올케. 뭐 지혜아범이 이렇게 됐으니 올케라도 돈을 벌어서 자식들 키워야지. 여기는 걱정말고 올케 하려고 한 일 열심히 해, 알았지!”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치솟는다. 너무나 시누이들이 고마웠다. 그러는 사이 면회시간이 되어서 시누이들과 함께 남편을 면회했다.
두 번째 동화 구연 강의시간이다. 오늘 수강할 내용은 ‘뚱뚱보 호박’이다. 문득, 요즘 부쩍 말라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녀는 ‘뚱뚱보 호박’이 인쇄된 종이를 바라보며 남편이 건강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랬다. 그땐 분명 그랬다. 아무리 살을 빼려고 애써도 살이 빠지질 않았다.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식욕은 더욱 왕성해지고, 스스로 조리한 찌개가 입에라도 맞을라치면 밥 두 세 공기는 뚝딱 해치웠던 그녀였다. 그랬던 그녀가 요즘은 굳이 살을 빼려고 하지 않아도 아침에 일어나면 허리가 쑥쑥 들어가고, 눈의 쌍꺼풀 크기가 더욱더 커지는 것만 같았다. 강의가 시작됐다. 구연강사가 수업을 시작하려다 말고 그녀를 보더니 한마디 건넸다.
“어머, 이성희 씨! 요즘 몰라보게 날씬해지시네요. 뭐~ 특별한 비결이라도…….”
구연강사의 말을 들은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구연강사가 그녀에 대해서 무얼 알겠는가!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이야기했을 뿐인데. 해서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선생님께서 들숨날숨 호흡연습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그 연습을 열심히 하다보니 이렇게 날씬해진 것 같아요.”
“아~ 그래요. 역시 제 들숨날숨 호흡강의가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호호호.”
여전히 아무런 눈치를 채지 못한 구연강사는 지난번 자신이 강의했던 복식호흡에 대해 다시 한번 열강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래요. 제가 지난번에 가르쳐 드렸던 복식호흡, 그러니까 들숨날숨 호흡연습을 열심히 하면 아랫배가 쑥쑥 들어갑니다. 굳이 미용체조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시겠죠? 자, 그럼 leading(읽기).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여름날 호박밭에서
난 왜 이렇게 뚱뚱할까?
밥도 조금씩 먹는데
나도 남들처럼 날씬해질 수는 없을까?
학생들은 최대한 호박의 모양에 가깝게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목을 조이고 입안을 둥그렇게 한 다음에 굵은 목소리로 연기를 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현관으로 들어서니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광주에 사는 둘째 언니였다.
“얘, 성희야. 조금 전에 어디 갔다 왔니? 전화를 몇 번이나 했는데 받질 않더구나.”
“응, 동화구연 강의 듣고 왔어. 오늘이 강의 있는 날이거든.”
동화 구연 강의를 듣고 왔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 일순 언니의 호흡이 바뀌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 열심히 해라. 언니는 네가 그렇게 열심히 사니까 마음이 놓인다. 그런데 말이야~ 얘, 성희야! 언니 생각은 그렇다. 요즘 IMF니 구조조정이니 해서 보통 난리가 아닌데다가, 대우자동차도 뉴스에서 보니까 사태가 심각하던데 요즘처럼 힘든 때에 누가 한가하게 ‘동화 구연’을 보낼지 걱정이다. 왜냐하면 언니도 서울 살 때 아이들 피아노 레슨을 했잖니? 그때만 보더라도 일단 살기가 힘들어지면 이런 교양과목부터 끊는 게 순서거든. 어쨌든 한번 마음먹은 일이니까 열심히 하고, 아니다 싶으면 미련없이 그만둬, 알았지?”
언니에게서 동화 구연을 그만두라는 말을 들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쏘아붙였다.
“아니 언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물론 언니 뜻은 알지만 동화구연이 뭐 그렇게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별 볼일 없는 교육인줄 알아? 그리고 난 누가 뭐래도 이 길을 가겠어. 그러니 언니도 날 이해해줘.”
그녀의 단호한 뜻을 확인한 언니는 체념하듯이 말했다.
“그래, 너의 뜻이 정 그렇다면 언니도 말릴 생각은 없다. 어찌됐든 넌 행복한 애야,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니 말이야.”
그렇게 언니와의 통화는 끝났다. 그녀는 자신에게 반문해 본다. 과연 지금 행복하냐고? 그래, 분명 행복한 측면은 있다. 왜냐하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니까. 그러나 그 이면에는 남편에 대한 괴로움, 경제적인 고통이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만든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텅 비어 있다. 지갑을 열어 본다, 돈도 없다. 아이들은 엄마의 사정을 잘 알면서도 아직 철부지들인지라 자꾸만 무얼 사달라고 조른다. 그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녀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그녀는 이럴 때면 병원에 있는 남편이 안쓰러우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남편을 원망하는 자신을 발견한다.‘아! 빌어먹을 인간, 내가 어느 정도 자리나 잡히면 쓰러지지. 이제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제 공부하고 있는데, 아! 하느님,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다지도 저에게 고통을 주십니까?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동화 구연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습니다, 하느님.’그녀의 눈에서 하염없이 고통의 눈물이 흘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는가? 그녀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나아간 결과, 그녀는 이제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절망적이기만 했던 남편도 극히 미미하나마 회복돼 가고 있었고, 아파트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넌지시 알아본 결과 이곳 엄마들도 동화구연에 꽤 관심이 깊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오늘 그녀는 동화 구연 강의실로 가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강의실에 앉자 있자 강사가 다른 날보다 더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면서 강의실로 들어온다. 오늘따라 구연강사가 더없이 멋있게 보였다. 구연강사의 손에는 오늘 강의할 내용인 서정주 님의 ‘국화 옆에서’가 들려 있었다.
“자, 오늘은 미당 서정주 님의 ‘국화 옆에서’를 가지고 시낭송에 대해 배워 봅시다. 시를 낭송할 때는 보통 첫 연을 부드럽게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뭐,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자, 오늘은 이성희 씨 먼저 해볼까요?”
강사는 그녀를 지목했다. 그녀는 이제 자신 있게 앞으로 나갔다. 정말이지 멋지게 시를 낭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볍기만 했다.
“여보세요? 응, 영진이구나.”
전에 없이 들떠 있는 누나의 목소리를 듣고 동생이 묻는다.
“그런데 누나, 무슨 좋은 일 있어? 매형 많이 좋아지셨어?”
“응, 그래~ 니네 매형 점점 회복돼 가고 있단다.”
여기까지 말을 마친 그녀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가슴이 벅차오름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영진아! 이제야 누나의 세상이 온 것 같다.”
그러면서 그녀는 마치 꿈꾸듯이 동생에게 자신의 지나온 날을 이야기해 주었다.
“몇 년 전에 누나는 꿈을 꾸었지. 어깨에 날개가 달려 있는 꿈이었어. 그런데 그땐 날개가 너무 작아 날질 못했단다. 그런 뒤 몇 해가 지난 재작년엔가 누나는 또 꿈을 꾸었지.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났는지 솜털이 보송보송한 새 한 마리가 마침내 낙락장송 사이를 훨훨 날고 있었어.”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러 내렸다.
“영진아! 지금 누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생활을 하고 있단다. 너희 매형을 생각하면 말할 수 없이 괴롭지만, 한편으론 누나가 그토록 원하던 길을 찾아 너무 기뻐. 아! 영진아! 누나는 정말 꿈에서 그 새처럼 하늘을 훨훨 날고 싶다.”
“그래, 누나. 나도 누나가 슬픔에 빠져 있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살아가니까 좋다.”
“고맙다, 영진아! 그리고 오늘 강의 시간에 ‘국화 옆에서’를 낭송했었지.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영진아, 누나는 이 시처럼 마침내 한 송이 찬란한 국화꽃을 피울 거야.”
“그래, 누나. 나도 그런 누나의 모습이 좋아. 사랑해 누나.”
동생 영진이는 누나의 모습이 적이 안심이 되는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요즘 그녀의 기분은 도시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떤 날은 하늘을 날아도 모자랄 정도로 기분이 붕 떠 있다가도, 또 어떤 날은 땅이 꺼질 것처럼 한없이 몸이 추락하는 날도 있었다. 매일매일이 이 상태의 반복이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매주 수요일이면 인천시청 사회복지과에서 녹음봉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남을 도울 처지가 아니다. 남편 병원비도 만만치가 않았고, 아이들 교육비, 생활비조차 모자라는 형편이었다. 아!아! 그렇다고 가던 길을 멈출 수는 없고…… 고지가 저긴데……조금만 더 가면 목표지점에 다다를 수 있는데……아!아! 신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너무나 엄청난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감에서 그녀는 몸부림쳤다. 그녀의 눈에서 고통의 눈물이 흐른다. 고통의 신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아! 난, 왜 이 길을 가고자 했을까? 그냥 평범하게 가정주부로 남편 뒷바라지나 하고 살걸. 이제는 남편까지 쓰러져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다 그만 두고 싶다, 다 그만 두고 싶어. 명예도, 출세도, 꿈도 다 싫다, 다 싫어. 난 평범한 가정이 좋아, 난 평범한 가정을 원해.’그녀가 이렇게 탄식의 눈물을 흘리며 녹음을 하러 가기 위해 차안에 있는데, 차창 밖 너머로 이웃에 사는 아주머니가 남편과 아이들의 손을 잡고 외출을 하고 있었다. 부러웠다, 너무도 부러웠다. 그녀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꼭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추구했던 명예, 출세, 꿈, 욕망 이런 것들이 한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행복은 바로 저런 평범한 가정에 있는지 몰라. 그랬었지, 물론 나도 그랬어. 나도 저런 행복한 가정을 꿈꿨지.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명예, 출세까지 움켜쥐려고 했었어. 아아악, 그런데 이게 뭐야! 도대체 이게 뭐냐구! 으으윽.’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핸들 앞부분을 쳤다. 그랬더니 예의 그 부부가 뒤를 돌아 흘끔 그녀 차에 시선을 준다. 다음 순간, 그녀는 마음을 다잡는다. ‘난 여기서 쓰러질 수 없어. 여기서 포기할 수 없어. 가자! 이성희 녹음실로…….
3층에 있는 녹음실로 들어서니 녹음담당 황인희 씨가 반갑게 그녀를 맞는다.
“어머님, 제가 드린 시집 읽어 보셨어요?”
“음, 그래. 많은 부분에서 공감이 가는 것 같아.”
“그래서 제가 골랐어요, 어머님 힘내시라고.”
“고마워, 다시 열심히 녹음하자구.”
그녀는 인희 씨와 밝게 담소한 뒤 시집을 녹음하기 위해 마이크 앞에 앉았다.
“안녕하십니까? 인천 시각장애인 복지관입니다. 시인 이정하는…… 산문집으로 <우리 사는 동안에>, <소망은 내 지친 등을 떠~미~네> 흐흐흑.”
여기까지 녹음한 그녀는 지금 녹음 중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어머님, 울지 마세요.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사실 저도 어머니가 이 상황에서도 이렇게 나와서 녹음 봉사해 주시는 것 고맙고, 또 어떤 때는 무리한 부탁을 드리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될 때도 있어요. 어머님, 힘내세요.”
“그래, 미안해. 이 책 집에서 연습하는데 특히 이 부분, ‘소망은 내 지친 등을 떠미네’가 나를 울려. 정말 오늘의 나의 상황을 너무나 잘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아. 정말이야, 나는 소망이 있기에 쓰러지지 않을 거고, 꼭 이 소망을 이루어야 되겠어.”
“그래요, 어머님. 그리고 앞으로 동화 구연 가르치신다면서요. 이렇게 한 발짝씩 나가면 되죠. 눈물 닦으세요.”
인희 씨의 말을 들은 그녀는 다소 위안이 된 듯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시 마이크 앞으로 나갔다.
사람은 누구나 탄탄대로를 걷길 원합니다.
그러나 아무 어려움 없이 길을 달려온 사람은
오솔길 가시밭길을 헤쳐오면서 맡았던
풀내음, 새소리의 정다움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그녀는 집으로 가기 위해 셔틀버스에 몸을 실었다. 저 멀리 산 위에 쌓여 있는 눈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발한다. 그 빛을 받아 그녀 가슴에서도 무언가 영롱한 빛을 발했다. 그랬다. 그녀는 오늘 그토록 원하던 ‘동화 구연 수료증’을 받은 것이다.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리로다.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치솟는다. 집에 도착하자 아이들도 엄마가 일구어낸 ‘동화 구연 수료증’을 보더니 엄마를 안고 엉엉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그녀는 ‘동화 구연 교실’을 거실에 낼 예정이다. 그래서 거실을 어떻게 꾸밀까 눈으로 가늠해 본다. ‘음~거실 안쪽 벽은 <동화 구연‧시 낭송 교실>이라고 돌출된 글씨로 써 붙이고, 거실 유리창은 <가자가자 동화나라>라는 음률동화를 글라스데코로 장식하는 거야.’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눈시울이 금방 붉어졌다. ‘그라스데코! 그렇지, 그건 아빠가 쓰러지기 직전 아이들을 위해서 사오신 거지. 아빠, 사랑해!’하며 잠시 생각에 빠진 그녀는 다시 활기를 찾아 ‘동화 구연 교실’ 구상에 여념이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특기적성 신청서가 나왔다며 집으로 가지고 왔다. 신청서를 받아든 그녀는 깜짝 놀랐다. 원래 그녀의 계획은 이번 주까지 ‘동화 구연 교실’을 꾸미고, 다음 주에 단지 내에 전단지를 뿌린 다음 애들이 입학하는 3월 초에 구연교실을 연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신청서가 이렇게 빨리 나오다니! 해서 당황하고 있었다. ‘아니~ 이게 벌써 나왔어! 어떡하지~아직 구연교실이 다 꾸며지지 않았는데……. 할 수 없어, 어쨌든 같이 시작해야 돼. 그래야만 엄마들이 우리 구연교실과 학교 특기적성을 비교해서 선택하지 않겠어. 그래, 어서 빨리 마무리를 짓자.’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는 아직 어리기만 한 아들, 딸과 함께 아직 완성하지 못한 동화 구연 교실을 마무리 짓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12시, 그녀는 단지 내 현관문에 전단지를 붙이기 위해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층계를 오르내리며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나 뛰었을까? 추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느덧 이마에 땀이 배어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아침이 밝았다. 예상했던 대로 여기저기서 ‘동화 구연’에 관한 문의가 쇄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지! 역시 나의 전략은 맞아 떨어졌어. 이쪽도 동화 구연을 찾는 학부모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 이젠 된 거야, 이젠 된거라구. 하하하! 그래, 열심히 하자, 열심히 해. 나의 길, 나의 길……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그녀가 기쁜 마음을 채 발산하기도 전에 또 전화벨이 울린다.
“안녕하세요? 저희 아이가 올해 4학년이거든요. 그런데 숫기가 없어서 학교에서 앞에 나가 발표도 제대로 못하고 책도 잘 읽지 못해서 고민했는데, 이 광고지 문안을 보니까 여기 보내면 참 좋을 것 같더라구요.”
“그렇죠. 선천적으로 말 잘하고 외향적인 아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많이 있어요. 그리고 동화 구연이라고 하는 교육이 늘 앞에 나와서 이야기하고, 연극하고, 시 낭송하는 곳이라 다니다보면 많이 좋아질 겁니다.”
그러자 전화를 주신 어머니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저어~선생님, 요즘 백화점 문화센터에 가 보면 본 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공개수업을 하던데 선생님께서는 혹시 공개수업을 하실 계획은 없으신지요? 그리고 정확히 동화 구연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그렇거든요.”
학부모로부터 공개수업을 할 의향이 없냐는 제안을 받은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왜냐하면 지금 ‘동화 구연 교실’ 단장 작업이 마무리가 지어지지 않은 부분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공개수업을 하려면 수업모형도 짜야 하고,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이번 공개수업을 계기로 그녀의 운명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순간, 말할 수 없는 갈등을 느낀 그녀는 모종의 결단을 내렸다.
“네, 알겠습니다, 어머님. 그렇지 않아도 어머님들께서 그런 말씀을 많이 하셨거든요. 아~ 그러면요, 오늘이 15일이니까 3일 뒤인 18일에 오픈 수업을 갖도록 하죠.”
전화를 끊은 그녀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어쩌면 인생의 성패가 결정지어지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긴장이 흐른다. 그러나 곧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나에게 기회가 왔어. 여기서 나는 나의 운명을 결정지어야 해. 이번 공개수업 꼭 성공시켜서 내가 목표한 세계로 진입하는 거야. 꼭 해내고야 만다, 난!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녀는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옆집에 사는 성당교우인 자매까지 불러서 아직 완성하지 못한 부분을 마무리를 짓고, 18일에 오픈수업할 모형을 만들기에 분주하다. ‘음~ 그날 구연할 동화는 어떤 걸로 하지. 음~ 그렇지! 계절도 봄이 오는 길목이니까 이 <일찍 온 새싹 요정>이 좋겠다. 음~ 그리고 이 동화를 구연하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동화가 어울릴까? 그래, 융판동화로 하자. 나무에 새싹 요정이 찾아오고 바람이 부니까 융판동화가 어울릴거야.’
구연할 동화가 결정되자 그녀와 딸 지혜, 아들 민우는 <일찍 온 새싹요정>에 사용될 소품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딸 지혜는 겨울나무로 등장하는 단풍나무와 참나무를 그려 색칠해서 오려내고, 그녀는 요정과 다람쥐, 곰, 개구리 그림자료를 찾고,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할 예정인 민우는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엄마를 돕겠다고 야단이다.
아! 한 송이 장미꽃이 이보다 더 아름다울소냐! 민들레! 그렇다, 거기엔 정녕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노란 ‘민들레’가 피어 있었다.
2001년 2월 18일, 오후 1시 10분. 시계는 운명의 1시 30분을 향하여 치닫고 있었다. 공개수업 시간인 1시 30분이 가까워 오자 학부모님들이 아이들 손을 잡고 한 사람, 두 사람 몰려들기 시작했다. 기쁨과 긴장이 흐르는 순간이다. 순간 손에 땀이 배어남을 느낀다.
드디어 운명의 오후 1시 30분. 그녀는 어린 자식들과 함께 열심히 준비한 수업자료를 가지고 학부모님들 앞에 당당하게 나섰다. 인사를 마친 그녀는 ‘일찍 온 새싹 요정’을 자신있게 구연동화로 보여줬고, 또한 시 낭송 교실답게 ‘봄 오는 소리’를 시의 분위기를 잘 살려서 낭송하였다. 그녀가 준비한 수업을 모두 마치자 학부모님들께서는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 주셨다. 반은 성공한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녀는 이 기쁜 소식을 어서 빨리 병원에 있는 남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마침내 ‘동화 구연‧시 낭송’ 첫 수업이 있는 날, 수업시간이 가까워오자 그녀의 가슴이 콩당콩당 뛰면서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기라도 하듯이 수업시간이 다가오자 아이들이 며칠 전 공개수업 때 나누어준 책가방을 들고 한 명, 두 명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그녀는 코끝이 시큰거렸다. 그녀는 하마터면 ‘오늘’이 영영 못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너무나 고통에 겨울 땐 차라리 그만 내팽개쳐버리고 싶었다는 게 맞는 표현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열정’ 하나로 꾹 참고 이겨낸 결과 마침내 ‘이 감격스러운 날’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문득 어느 시인의 시구가 뇌리에 떠올랐다.
내 슬픔 때문에 울지만은 않겠다.
펼쳐진 꿈을 바라보며 기대하며
생명의 맥박이 끝날 때까지
모든 사람이 알도록, 보도록, 느끼도록
멋지게 살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