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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 상반기 문예바다 신인상 발표 | 소설 부문 당선작 |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강호연
“43층 좀 눌러 줄래.”
남자가 말했다. 지하주차장에서 본 남자다. 출입구를 막으며 초대형 벤츠가 서더니 기사가 먼저 튀어나왔다. 차문을 열어 주고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엘리베이터도 잡아 주었다. 그런데 저런, 기사가 버튼을 안 눌러 드렸구나. 수영은 못 알아듣는 척 어깨를 으쓱했다. 외국인이 드물지 않은 아파트다. 없는 검을 씹는 척 건들거리자 남자가 더듬거렸다.
“우쥬 프리이즈…… 어엄, 포리쓰리…….”
“노 잉글리시, 쩌우 까우 떤 랑.”
남자의 얼굴에 낭패한 빛이 스치더니 부지런히 버튼을 찾기 시작했다. 흥, 진작 그럴 것이지. 오십여 개 숫자에 달라붙어 헤매는 남자를 보며 수영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42층 문이 열리기 직전, 43층 버튼을 눌러 주고 날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버렸다.
4201호 식탁 위에는 새카맣게 글자를 끼적거린 종이가 흩어져 있었다. 흐엉이 오늘도 모든 단어를 완벽하게 외웠다는 증거다. 수영은 백팩에서 교사용 문법 교재를 꺼내려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이번 주 문법은 아주 쉬우니까 흐엉 씨 혼자 공부하기로 하고, 쓰기 과제를 볼까요?”
지난 수업 시간 말하기 주제는 베트남의 음식이었다. 흐엉은 쌀국수나 분짜처럼 잘 알려진 음식 대신 쩌우까우 이야기를 했다. 쩌우까우 설화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고, 스물한 살 베트남 출신 흐엉은 한국어로, 스물여덟 한국토박이 수영은 베트남어로, 음식과 사랑과 청춘을 논하다 시간을 다 보냈다. 둘이 상의해서 과제도 정했다. 흐엉은 쩌우까우 이야기를 한국어로 정리하고, 수영은 한국의 사랑이야기를 베트남어로 써 오기로 했다. 흐엉은 이틀 전 작문을 해서 메일로 보내왔지만 수영은 과제의 제목도 정하지 못했다.
“사실은, 저는 과제를 하지 못했어요. 적당한 이야기를 찾지 못했어요.”
거짓말은 아니다. 사랑이야기 뭐가 있지? 학원의 아이들에게 물었더니 일초도 망설이지 않고 춘향전을 외쳐 댔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여자는 목숨 걸고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세뇌교육이 아닐까, 반론을 제시했더니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그 일로 원장에게 불려가 중간고사 앞둔 중학생들 데리고 쓸데없이 사랑타령 따위 하고 놀지 말라는 잔소리를 듣고 나자 의욕이 서리 맞은 호박잎처럼 시들어 버린 것이다.
흐엉은 자신의 과제를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베트남에서는 결혼식 때 쩌우까우를 먹습니다. 쩌우까우에 대하여 아름답고 슬픈 설화가 있습니다.”
흐엉은 베트남인 특유의 단단한 발성으로 또박또박 읽어 내려간다.
“옛날에 까우 집안에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의 이름은 떤, 동생의 이름은 랑이었습니다. 형제는 유명한 학자인 르우 선생에게 가서 공부를 했는데 선생에게는 쑤안 푸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아름답고 착한 딸은 형인 떤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르우 선생은 떤을 사위로 만들었습니다…….”
수영은 발음에 귀를 기울이며 듣다가 한 문단이 끝나면 준비해 온 보충 자료를 이야기한다.
“떤을 사위로 맞이하였습니다, 사위로 맞아들였습니다, 하고 말하면 돼요. 사위, 며느리, 아내, 남편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걸 맞이하다, 맞아들이다, 그렇게 말해요.”
흐엉은 수영의 발음을 따라해 보고는 다음 문장을 읽어 나간다. 그러나 화기애애 달아오르던 수업 분위기는 날카로운 소리에 깨어져 버렸다. 흐아악, 아악, 흐엉을 부르는 외침이 단단한 벽에 못을 박는 망치소리처럼 연달아 울려왔다.
“아이구, 흐엉! 어서 좀 와 봐!”
도우미이모님이 고함치자 흐엉은 벌떡 일어나 복도 쪽으로 달려갔다.
수영은 첫 수업을 하던 날을 기억한다.
“우리 며느리, 한국어 잘해요, 어찌나 똑똑하고 영리한지 금방 배우더라고요.”
대화하는 데 아무 불편이 없다며 시어머니의 자랑이 이어졌다. 그렇겠지. 7살 지능을 가진 남편과 대화하는 데야 충분할 것이다. 수영은 ‘며느리’를 흘끗 보았다. 아주 앳되고 예쁜 여자가 입가를 약간 올린 채 말없이 있었다. 편한 소파에서 담소나 나누시라며 시어머니가 거실을 떠나자 흐엉은 탁자 위의 차와 과자를 식탁 위로 옮겼다. 굉장히 비싼 소파인데요, 글씨를 쓰기 어려워요. 겸연쩍게 웃으며 수영의 동의를 구했다. 두 여자는 킬킬거리며 첫 수업을 시작했었다. 선배에게 들은 대로 흐엉의 수업 열의는 대단했다. 그러나 수영의 청각은 귓바퀴가 돌아가는 동물처럼 바짝 긴장해 있었다. 수업을 시작한 지 이십 분쯤 지났을까, 거실 왼쪽으로 이어진 복도에서 흐아아악, 선배가 얘기하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순간 안방에서 튀어나온 시어머니가 거실을 가로질러 복도 쪽으로 달려가고, 소리는 곧 잠잠해졌다. 그날은 그것으로 끝. 그러나 두 번째 수업부터 시어머니는 항상 외출 중이다. 소리가 들리면 흐엉이 달려가고 수영 혼자 식탁에 앉아 기다리는 일은 이제 익숙하다.
오늘따라 흐엉은 돌아오지 않는다. 수영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63빌딩에서 롯데월드까지 서울특별시의 사분의 일이 펼쳐져 있다. 마카롱과 홍차와 창밖의 전망에 빠져 있던 수영은 갑작스런 소리에 깜짝 놀랐다.
“선생님, 오래 걸릴 것 같네. 발작이 멈추질 않아.”
도우미이모님의 목소리가 쩌렁거린다. 그만 가라는 은근한 압박이지만 그럴 수는 없지. 완전 오지라퍼 스피커인데, 말이 고파서 죽을라구 해, 선배의 정보는 유용하다.
“이모님, 혹시 43층에 누가 사는지 아세요? 아까 엘베 타고 올라오는데 나이 좀 먹은 남자가 43층 버튼을 못 찾아서 쩔쩔매던데.”
이모님 얼굴이 전구를 켠 듯이 환해진다.
“알 만하네. 4303호, 며칠 전에 어린 여자애가 이사 왔어. 인물은 아주 이뻐요. 꾸미고 다니는 거며 고개 빳빳한 거며 어느 재벌 댁 따님인가 했더니, 세상에나, 스무 살도 안 된 게 술집 나가다가 남자 물어서 들어앉은 거래요. 배 좀 나오고 머리 벗겨진 남자가 엄청 큰 벤츠 타고 와서 출입구 바로 앞에 차 대 놓지? 쬐끄맣고 멸치 같은 기사가 아주 발발 기지 않아?”
그럴듯하다. 아무리 바보라도 자기 집이야 찾아갈 줄 알겠지. 가끔 오는 곳이니 엘리베이터 버튼을 못 찾을 수 있겠다. 그런데 바보는 아니라도 로리콘이었군.
“그 참, 집은 몇 십 억짜리라면서, 사는 인간들 참 저렴하네요. 그러니까 배불뚝이 대머리 아저씨는 미성년자 성매매범에다가…….”
수영의 농담에 이모님은 갑자기 정색을 했다.
“그 사람 생긴 건 그래도, 자기 돈 많아 비싼 집에 사는 게 어때서. 분수 안 맞게 호강하는 건 흐엉 저 애지. 신랑이 쬐끔 부족하기로, 자기 신분에 당할 일이야? 다른 외국인 며느리들 사는 것 봐. 얼마나 비교되나. 아니, 외국인 며느리들 볼 거 없이 거기, 한국어선생님만 해도 온몸에 걸친 거 다 모아 봐야 흐엉 양말 값도 안 될걸?”
수영은 저도 모르게 제 발을 내려다봤다. 워커 안에서 하루 종일 고생한 투박한 면양말에 쓴웃음이 났다. 정작 흐엉은 양말을 신지 않았던 것 같다. 바깥세상은 겨울을 향해 가지만 42층 주상복합은 딴 세상이니. 매끈한 맨발에 반짝이는 페디큐어를 하고 있었지.
그러나 이모님의 저울은 불공정하다. 이모님의 저울에는 미래 눈금이 없다. 언젠가 남편이 죽기라도 하면 흐엉은 어떻게 될까.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다. 앞으로도 없으리라는 게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주도권을 쥔 건 흐엉의 시동생 한 사장이라고 했다. 아직은 흐엉의 시아버지가 회장님이지만 회사운영과 집안 대소사 모든 걸 한 사장이 결정하고, 심지어 흐엉을 간택해 온 것조차 한 사장이라나. 이모님은 큰 소리로 한 사장을 칭찬했다. 잘생기고 능력 있고 예의 바르고 형제 잘 챙기고 좋은 집안 딸하고 결혼해 손자도 셋이나 안겨 주고……. 우렁차던 목소리가 낮아지며 중얼거렸다. 한 사장이야 흐엉이 아이를 낳아서 좋을 게 뭐가 있겠어. 그냥 이대로면 이 집 재산이 다 자기 건데.
수영도 한 사장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저녁 본가에 온다. 이모님 칭찬대로 깎아 놓은 듯 반듯한 인상이다. 언제나 딱 떨어지는 정장 차림에, 모처럼 부모 집에 왔으면 소파에 나가떨어질 만도 한데 정중한 태도를 흩트리지 않는다. 수영을 볼 때마다 형수님에 대한 자상한 관심도 표현했다. 예를 들면,
“형수님의 한국어 공부는 잘되어 갑니까?” 같은 질문.
“잘되어 갑니다. 아주 열심히 하시고, 굉장히 빨리 배우세요.”
한 사장은 금방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아, 그러시군요.”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미묘하고 애매하다.
“형수님은 지금도 부족한 게 없는데 왜 공부를 하시죠?”
“네?”
수영에 대한 칭찬도 잊지 않는다.
“선생님은 학생에게 꿈을 심어 주는 능력이 탁월하신 것 같군요.”
“…….”
* * *
“제 꿈은, 빨리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에요. 베트남에 한국 회사가 많아요. 우리 시댁도 호치민 시에 지사가 있어요. 내가 한국어를 잘하면 일하게 해 준댔어요.”
그건 결혼조건의 하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다문화센터에서 제공하는 무료 한국어교육을 수강하겠다고 하자 시부모는 서로 얼굴만 마주 보더라나. 잠시 후 먼저 입을 뗀 건 시아버지였다고 한다. 집에만 곱게 있던 아이가 혼자 어떻게 돌아다니려고 그러냐……. 베트남에선 혼자 잘 다녔다고 말하려는데 시어머니가 나서더란다. 거기에는 가난뱅이 노총각들, 마누라 도망간 늙은 남자들, 그런 사람들하고 결혼한 밑바닥 여자들이 모여 있을 텐데, 네가 어떻게 어울리니…….
“그 말을 들으니까 마음속에서, 이렇게,”
흐엉은 적당한 한국어를 몰라 주먹만 쥐어 보였다. 울컥하다? 불끈하다? 수영이 몇 가지 표현을 알려주자, 흐엉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람들하고 어울리지 않고 공부만 할 거라고 해도 시어머니께선 계속 반대하셨어요. 네가 없으면 그 애가 많이 찾을 텐데. 그 애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도 알잖니.”
시댁에서는 흐엉의 요청을 슬슬 피하고 결국 흐엉이 직접 센터에 접촉해 한국어 방문교사가 오게 되었는데, 그렇게 오게 된 게 수영의 선배였다. 센터의 무료교육 기간이 끝나자 선배는 수영을 소개했다. 돈이 없는 흐엉을 위해 수업료 대신 베트남어 교육이라는 조건을 붙여 준 것이다. 해외 한국어학당의 강사를 꿈꾸는 수영으로서는 괜찮은 조건이다.
“나도 베트남어를 빨리 배우고 싶어요. 베트남의 대학에서도 한국어 강사를 구하는데, 베트남어를 할 줄 알면 훨씬 유리해요. 나는 원래 국문학 전공이라 기업에서 일하기는 어려워요. 외국의 한국어 학당이나, 한국학과가 있는 대학에서 일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 꿈을 위해서 외국어로서의 한국어교사 자격증을 따고 대학원에 다녔어요.”
그러나 한국어 교육 2급자격증과 석사학위 따위는 이미 기본사양. 가고 싶은 자리에서는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의 강의 경력 수백 시간을 추가로 요구했고, 강의 경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관에서 자원봉사라도 하려면 또 경력을 요구했다. 수영은 천신만고 끝에 외국인 근로자 지원 기관에서 경력을 쌓는 중이다. 일요일에 하는 자원봉사 자리에도 자격이 넘치는 자원봉사자들이 대거 지원했었다. 기관에서는 지원자들에게 시범강의를 요구했고 중학생 아이들 대상의 강의가 밥줄인 수영이 발군의 실력을 보여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꿈을 이루려면 미리미리 준비를 해 두어야 해요.”
수영은 흐엉에게 대학졸업 자격부터 갖추라고 권유했다.
“대학을 다니려면 돈이 필요하지 않나요?”
“방송통신대학교나 학점은행제를 이용하면 얼마 들지 않아요. 집에서 공부하고 몇 번만 학교에 가면 될 거예요. 한국어자격시험은 제가 도와줄 수 있고요, 그런데 준재벌 집에서 무슨 돈 걱정을 그렇게 해요?”
그런데 흐엉은 돈이 정말 한 푼도 없단다. 시어머니가 명품 옷을 사다 주고, 시어머니와 함께 피부관리를 받는다. 시어머님께서 언제나 흐엉에게 말씀하신다.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지 말해라. 다 사다 줄게. 그래서 흐엉에게 필요한 물건은 더 이상 없다. 흐엉은 집 밖으로 나갈 필요조차 없다. 아파트 지하 1층에서 전철역으로 곧장 이어지는 편리한 통로가 흐엉에게는 무용지물이다. 하긴 한 사장도 43층의 부자 로리콘도 지하철 따위는 타지 않겠지. 수영은 터덜터덜 지하통로를 걸어 전철역으로 간다. 옆에 늘어선 고급차들 대신 깡통이라도 걷어차고 싶지만, 주차장 바닥은 담배꽁초 하나 없이 깨끗하다.
* * *
수영이 일하는 학원 강의실에는 쾨쾨한 냄새가 차 있다. 남자 중학생 열다섯 명이 참으로 아름다운 한국어로 왁자지껄 담소를 나누다가 수영이 들어가자 큰 소리로 야유했다.
“쌤 찍어 준 거 하나도 안 나왔어요!”
그래도 표정을 보니 중간 이상은 됐다. 시험 후 첫 수업이니 조금은 여유가 있는 날, 수업을 삼십 분 남겨 놓고 수영은 칠판을 깨끗이 지운 후 큰 글씨로 정성들여 썼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국어학원에서 시 한번 써 보자. 시인이 별거냐? 나는 어떤 작은 일에 화를 내는가, 생각해 보고 시 한편 씩 써 봐.”
“난 작은 일에 화 안나요. 나를 화나게 하는 건 무조건 큰일이에요.”
“그럼 한솔이 넌 그렇게 써 봐. 나를 화나게 한 모래 한 알에 눈이 멀든지, 눈물 한 방울에 빠져 죽든지. 그럴듯하게 뻥 좀 쳐 봐. 문학적으로, 시적으로.”
“내 빵 빼앗아 먹은 준영이새끼, 배가 뻥 터져 죽어라, 이런 것도 돼요?”
“시발새끼, 고거 한 입 먹고 배 터져 죽으면, 한 개 다 처먹은 넌 배에서 핵폭탄이 터졌겠다.”
“예 좀 들어 주세요. 1, 2, 3, 4, 사지선다로 주시면 고를게요.”
경험에 의하면, 이 엉망진창인 녀석들에게서 제법 괜찮은 물건이 한두 편씩 나오곤 한다. 수영은 녀석들을 제압하려는 노력 대신 예를 들어 주마, 한마디하고 소리 내어 김수영의 시를 읽었다.
조그마한 일에만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김수영. 시인 아버지가 지어 주신 이름이다. 장남에겐 집안의 돌림자를, 딸에게는 당신이 사랑하는 이름을 주셨다.
* * *
“오늘 말하기 주제는 가족이에요. 흐엉씨 가족 이야기를 해 볼까요?”
흐엉은 남편과 시부모가 아닌 베트남의 가족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 가족은 여덟 명이에요.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동생이 네 명 있어요. 남동생이 두 명, 여동생이 두 명…….”
이모님이 눈을 끔뻑이며 거액을 주고 사 왔다느니, 베트남으로 매달 송금을 해 준다느니, 속삭이던 일이 생각나 수영은 화제를 돌렸다.
“베트남의 가족 말고 한국의 가족 이야기를 해 보세요. 흐엉 씨 남편 분, 시부모님, 시동생이요.”
“제 남편은…….”
또박또박 유창하던 한국어는 그 한마디가 나오자마자 긴 날숨소리와 함께 사그라졌다. 다시 말을 이을 때는 좀 더 느리고, 작은 목소리였다.
“많이 아픕니다. 저는 제 남편이 그렇게 아픈 줄 몰랐어요. 제가 잘 간호하면 좋아진다고 했는데.”
흐엉의 얼굴이 흐려졌다. 이 집에서 부모가 뭔 치료를 안 해 봤겠어, 이모님에게 들은 이야기가 수영의 목구멍을 막았다. 가능성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베트남 애를 구해다가 맡긴 거다. 그런데도 이모님은 빈정거렸다. 흐엉 저 애는 자기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도 모르고 불만이 많은데, 한번 제대로 대접을 당해 봐야 주제를 알려나…….
수영은 오래전 아버지가 하던 목장의 외국인 목부들이 생각났다. 아버지는 소규모의 목장을 했다. 시를 쓰는 아버지에게는 벅찬 노동이었다. 목장 일을 거들 목부가 필요했다. 수영이 아주 어린 시절에는 세상에서 밀리고 밀려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오는 곳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자리를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신했다. 아버지는 외국인 목부를 구하느라 전전긍긍했고, 이웃 농가에서는 외국인 며느리들이 가출해서 난리가 나곤 했다. 운이 좋은 건 그대들이지, 돈까지 훔쳐서 잠적하는 외국인 며느리 얘기 못 들어 봤나, 한번 제대로 당해 봐야 고마운 걸 알려나.
수영은 망설이다가 흐엉에게 물었다.
“상태가 좋아지지 않나요?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나요?”
흐엉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흐엉이 물었다.
“전에 방송대 이야기 하셨지요? 등록금이 많이 비싸지 않던데요?”
수영은 깜짝 놀라 흐엉을 바라봤다. 스물한 살 나이에 과부가 된 미래를 준비하는구나. 시부모가 쉽게 허락하지 않겠지만 흐엉은 굳건했다.
“처음 다문화센터에 전화할 때도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나는 했어요. 나는 할 수 있습니다. 돈이 필요하면 알바를 할 거예요. 허락하지 않으면 몰래 할 거예요.”
수영은 이 해맑고 용감한 스물한 살짜리 여자애를 돕고 싶었다.
“몰래하기 어려우면 내가 도와줄게요. 내가 일하는 학원 쪽으로 와서 공부한다고 핑계대고 나오세요. 혹시 나한테 확인하려고 하면 거짓말해 줄게요.”
두 여자는 의기투합 한바탕 깔깔 웃었다.
그러나 그런 거짓말은 필요 없었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힘들게 공부를 한다고 그러니, 처음에는 탐탁지 않아 했지만 시동생 한 사장이 설득을 한 모양이었다. 허락은 물론이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수영은 흐엉과 마주 앉아 입시요강을 확인했다. 입학시험은 따로 없다, 지원서 작성은 내가 도와준다, 베트남에서 여러 가지 서류를 떼어서 한글번역공증도 받아야 한다, 베트남 대사관에 가서 학력인정확인서를 받아야 한다.
“서류는 미리 준비해 둬야 해요. 시간이 많이 남은 게 아니에요.”
조급해지는 수영을 오히려 흐엉이 안심시켰다.
“한 사장 서방님이 다 준비해 준다고 했어요. 공증비용도 내 주실 거예요.”
진학을 준비하며 흐엉은 생기발랄해졌다. 한국어 실력도 급상승했다. 강의를 따라가려면 더 열심히 해야 한다며 글을 통째로 외워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자신의 작문도 외워 버린다.
“어느 날 쑤안 푸는 시동생 랑을 남편으로 착각하고 다정하게 끌어안았습니다. 남편 떤이 이 광경을 보고 아내와 동생의 사이를 오해했습니다. 동생인 랑은 고민하다가 집을 나가고 말았습니다.”
떤과 랑의 이야기는 비극이다. 랑은 방랑하다가 바위가 되어 버리고, 떤은 동생을 찾아 헤매다가 바위 옆에서 죽어 까우나무가 되고 쑤안 푸는 쩌우나무가 되어 까우나무를 감아 올라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혼식에서 쩌우 잎에 까우 열매를 싸서 먹는다는 것이다. 수영이 물었다.
“어째서 이 이야기가 사랑 이야기인가요? 삼각관계로 오해받고, 남편이 동생을 찾다 죽었는데요?”
“부부애와 형제애, 그러니까 가족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쩌우까우를 먹을 때는 석회를 함께 씹어요. 동생이 변한 바위를 긁어 함께 먹는 거예요. 한 사장 서방님도 형님과 저를 항상 걱정하시고, 저도 베트남의 제 가족들을 위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수영에게도 가족이 있다. 아버지의 목장은 육우 농장이었고 사료 값이 고기값을 넘지 않게 빨리 도축장으로 보내는 게 아버지 사업의 관건. 시인 아버지에겐 무리인 일이었다. 구제역 파동으로 어린 송아지들을 묻고 아버지는 더 버티지 못했다. 아버지의 유산을 몰아 받은 오빠의 사업은 망했고, 수영에게 상속포기각서를 요구하던 엄마는 이제 수영에게 의지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나는 떠나고 싶어요. 가족이란, 누군가의 희생 위에 다른 사람이 짐이 되는 구조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수영은 말을 멈추었다. 흐엉에게는 너무 어려운 문장 아닌가?
* * *
일은 자꾸 늦어졌다. 한 사장 서방님이 다시 시킨다고 하셨으니 잘될 거예요, 그래도 흐엉은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를 떼지 못했다는 말을 전하면서는 표정이 굳었다. 제가 다닌 학교가 시골에 있어서 쉽지 않대요…….
그게 말이 돼요? 베트남에 지사 있다면서요? 한국에서도 하는 일을 현지에서 못해요? 수영이 더 화를 내고 흐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돌아가던 지하주차장 통로에서 한 사장을 만났다. 차 안에서 수영을 기다린 듯 문을 열고 나와 성큼성큼 다가왔다.
“선생님, 목동 학원에서 일하신다고 하셨죠? 어느 학원이신가요?”
그게 무슨 상관이시죠? 말하지 않아도 한 사장은 눈치가 빠르다.
“대답하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받아넘기더니 생각지도 못한 제의를 해 왔다.
“해외 취직을 원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회사도 베트남에 진출해 있는데요…….”
수영은 어리둥절해졌다. 지난 몇 년 인생의 목표로 잡고 노력해 온 일이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현실이 되다니, 뭔가 잘못된 거 아닐까 불안감이 먼저 들었다.
“제가 베트남어도 잘 못하는데요.”
“베트남어 하는 직원들은 따로 있고요, 기초회화는 되시니까 현지에 가면 금방 늘어요. 연봉 섭섭지 않게 드릴 테니 일하시면서 어학원 쪽 자리 알아보시지요? 현지에선 뭐든 쉬우니까요.”
이건 뭔가 이상해. 수영의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상상이 뒤엉키다가 순진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혹시 베트남어 잘하는 직원이 흐엉 씨인가요? 흐엉 씨가 베트남 회사에 가고 제가 흐엉 씨 도와드리러?”
언제나 속을 내비치지 않던 한 사장의 눈이 둥그레지더니 한 사장답지 않은 답변이 튀어나왔다.
“아니 선생님, 형수님이 베트남에 가 버리면 제 형은 어떻게 하고요.”
그러고는 껄껄 웃었다. 한 사장이 소리 내어 웃는 것은 처음 보았다. 수영은 그제야 한 사장의 진의를 파악했다. 고용 조건은 흐엉과의 결별이다. 흐엉과 함께 베트남에 간다는 순진한 발상이 창피하다 못해 억울했다. 배 속에서 숨죽이고 살던 밸이란 놈이 불끈거렸다. 외국인 근로자 지원 기관에서의 경력은 착실히 쌓고 있다. 강의 실력을 인정받아 수업시간을 더 받았고, 경력은 좀 더 빨리 쌓일 것이다.
“아직 제 베트남어가 너무 부족하니 흐엉 씨에게 좀 더 배운 후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사장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수영이 원장에게 불려간 건 이틀 후였다.
“김수영 선생, 어머님들 항의가 들어왔어. 수업 중에 시나 쓰라고 학원 보내는 거 아니라고. 내가 전에도 경고했으니 알아듣겠지?”
툭하면 흥분해서 왈왈대던 원장답지 않게 차갑다.
“제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요? 중학교 여덟 군데, 과제 다 다르고 시험기간 다 다른 걸 각각 다 맞춰 줬는데, 내신대비반에서 뭘 더 어떻게 해 줘요? 시험 끝나는 날 딱 삼십 분 주고 시 한번 써 본 거, 명색이 국어시간인데 그게 문제라고요? 어머님들, 그 정도 이해 못하는 분 아니라고요!”
이유가 무엇이든, 이 년 반을 일해 온 학원에서 잘렸다. 주 5회 매일 여섯 타임씩, 150만 원 학원 월급은 수영의 주 수입이었다. 중학생 영어 수학을 봐주는 과외 두 개 육십만 원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하다. 당장 다음 월세는 어떻게 하지. 월세 50에 관리비 5만, 한 달 월세가 밀리는 순간 경고 문자가 들어온다고 계약 때 들었다. 두 달 체불이면 명도소송 들어간다는 말은 거의 협박처럼 들렸었지. 건물을 팔려는지 복부인 같은 여자에게 설명하는 것도 본 적이 있다.
“풀 옵션이 왜 좋냐 하면요, 가구는 물론 침구와 그릇까지 다 있으니까 따로 짐들이 없어요. 세가 밀렸다 하면 그냥 옷가방 싸서 내 놓으면 끝입니다.”
우연히 그 말을 들은 수영은 괜히 찔끔했었다. 정말로 짐이라야 옷가지와 책뿐이다. 수영은 아파트를 몇 군데 돌며 과외 광고를 붙였다.
그다음 수업에 흐엉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다과를 내려놓은 이모님은 멀리 가지 않고 거실의 화초들을 둘러본다. 흐엉은 목소리를 낮추고 쉬운 베트남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수영의 고향에서 흔히 들었던 이야기가 흐엉의 입에서 베트남어로 나오기 시작했다.
“제 사촌이 한국에 와 있어요. 사촌에게 가고 싶어요. 선생님도 말했잖아요. 가족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되는 게 아니라고.”
다 알아들었구나. 흐엉의 한국어는 거의 완벽하다. 그러나 흐엉의 희생을 요구하는 건 시댁만이 아니다. 친정의 생계 역시 흐엉에게 달려 있다.
“사촌은 양계장 하는 남자와 결혼했는데, 일을 도와주면 월급을 준댔어요. 그리고 베트남 사람 상대로 인터넷 쇼핑몰도 해요. 돈을 잘 번대요. 그 일도 배울 거예요. 이제 곧 많은 돈을 벌 수 있어요…….”
그리고 수영을 쳐다본다. 절박한 시선이 부딪혀오더니 최악의 말이 수영의 귀에 들렸다.
“돈을 좀 빌려 주세요. 제가 곧 갚을게요.”
수영의 입이 벌어졌다. 줄어든 수입과 월세, 평소엔 생각하기도 싫던 오빠의 빚과 엄마의 통장 잔고까지 숫자들이 머릿속을 두서없이 지나갔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입을 다물었다. 수영을 쳐다보던 흐엉에게서 마지막 기대의 빛이 사그라졌다. 수영은 눈을 피했다. 흐엉은 훌쩍이기 시작했다. 화분을 닦던 이모님이 흘끔거리자 흐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복도 쪽으로 사라졌다. 흐엉이 떠난 식탁에 이모님이 다가왔다.
“쟤 남편, 이제 병원에 입원할 거야.”
아, 그래서 서둘러 앞날을 준비하려는 건가.
“상태가 많이 나빠졌나요?”
“날 때부터 그런 건데 나빠지고 말고가 어딨어. 병원 특실에서 영양제나 맞으며 지내라는 거지. 돈이야 장롱에서 썩어나는 집이니까.”
수영은 깨달았다. 병명은 아내의 대학 진학이고 그 치료가 남편의 입원이다. 흐엉의 대학 진학은 불가능하다. 앞으로도 영원히, 남편이 죽고 맨몸으로 쫓겨날 때까지, 흐엉은 꼼짝없이 죽음 같은 고궁에 유폐될 것이다.
“에휴, 내가 걔 돌아오는 거 볼 수나 있으려나 몰라. 그 불쌍한 것 내가 업어 키웠는데.”
도우미이모님은 시어머니 용심으로 흐엉을 못마땅해했던 걸까. 그러나 이모님은 오래 슬퍼하지 않았다.
“전에 말한 43층 그 여자애 말이야.”
눈가를 슥 닦고 화제를 돌려 버린다.
“엊그제 아파트 전체가 떠나가라고 난리가 났어요. 본부인이 친정식구들 다 끌고 와서 여자애 머리채 잡고 집 안 다 뒤집어엎고, 오죽하면 그 집 도우미아줌마가 뛰어 내려와서 날 부르더라고. 같이 좀 말려달라고…….”
이모님 등 뒤에 이상한 게 보였다. 복도 쪽에서 흐엉이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흐엉은 가만히 거실을 가로질러 안방으로 들어간다. 사모님은 외출 중인데? 아냐, 며느리가 시어머니 방에 들어가는 게 뭐 어때서?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모님의 수다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어머니의 방에서 나오는 흐엉의 모습이 보였다. 주머니가 유난히 불룩했다. 돈뭉치? 보석? 여권? 아니, 그냥 옷이 구겨진 걸 수도? 복잡한 수영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채 흐엉은 남편의 방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말이야, 그 개망신을 당하고도 오늘 또 그 남자 오나 봐. 출입구 앞에 벤츠 떠억 대고 있데? 어린 게 겁도 없지…….”
이모님의 수다는 43층 여자를 연료 삼아 끝없이 달리고 흐엉은 오지 않는다. 짐을 싸고 있을까? 아니면, 돈을 세고, 보석 반지를 끼어 보고, 여권을 확인하고. 이런저런 생각에 지쳐 버렸을 때 한 사장이 들어왔다. 아, 선생님, 전에 없이 친근하게 수영을 불렀다.
“제 형님이 입원을 하게 되어서, 그동안의 한국어 교습비를 드리려고요.”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한 사장은 평소보다 더 친절한 미소를 띠고 묻는다.
“얼마 드리면 될까요? 부담 갖지 마시고.”
돈 때문은 아니었다. 한국어와 베트남어 교환 조건이었으니.
“교습비는…….”
수영은 잠시 망설였다. 학원 월급이 끊긴 통장, 며칠 후에 월세가 나가면 잔고의 첫 자리 숫자가 하나 줄어든다. 하지만 도둑년이 되어 버린 흐엉의 모습이 그 위에 겹쳐졌다. 그래도 아직은, 두 달 분의 잔고가 남아 있어. 수영은 고개를 들었다.
“교습비는 백만 원이에요.”
빙글거리며 지갑을 꺼내는 한 사장을 보며 덧붙였다.
“시간당 백만 원이요. 전액 후불로. 주 삼 회 두 시간씩, 작년 삼월에 시작했으니 모두 얼마인가?”
한 사장의 입가에서 가짜 미소가 사라졌다. 수영은 그 눈을 똑바로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하지만 그건 흐엉 씨와 계약한 거니까, 제가 흐엉 씨에게 직접 연락하겠습니다.”
한 사장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수영은 문을 쾅 닫고 집을 나왔다.
지하 출입구 문을 가로막고 낯익은 벤츠가 서 있다.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지만 앞뒤 유리창에 블랙박스가 번쩍번쩍 돌아가고, 운전자석에는 기사가 앉아 있다. 옆을 지나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수영에게 부딪혔다. 수영이 밀쳐진 것은 아랑곳없이 기사는 엘리베이터에서 방금 나온 주인나리를 향해 돌진한다. 43층 남자가 느른하게 풀어진 걸음으로 다가오고 별일 없으셨습니까? 기사가 굽실거린다. 남자가 뭐라고 툭 뱉었다.
“제깟 년이 별일은 무슨.”
상대가 알아듣건 말건 툭 뱉은 몇 마디가 수영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남자와 수영이 마주치며 서로 길을 막자 기사가 수영을 슥 밀쳤다. 수영은 다시 비틀했다. 세상이 휘청, 흔들렸다.
“왜 사람을 밀어요!”
쏘아붙였다. 기사는 못 들은 척 차문을 열고, 43층 남자는 젊은 여자가 벌이는 소동 따위는 아랑곳없이 차에 올라탔다. 기사가 운전석으로 가기 위해 돌아섰다. 수영은 그 앞을 막고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기사는 주차장 바닥에 침을 찍 뱉더니 눈을 부라려 협박했다. 백육십이 겨우 넘으려나, 수영보다 왜소하다. 미친년, 소리가 들리는 순간, 수영은 기사를 힘껏 밀었다. 뚝, 소리가 났다. 머릿속의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 억, 기사의 비명도 들렸다. 고통이 아니라 공포의 비명이다. 벤츠의 사이드미러가 뚝 꺾어져 대롱거렸다. 이년이, 기사가 수영의 멱살을 잡았다.
“이년이 미쳤나! 이게 얼마짜린 줄 알아, 거지같은 년이!”
수영도 기사의 멱살을 잡았다.
“이 개 같은 새끼야, 니가 먼저 밀었잖아!”
옹골찬 한국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사이 기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머릿속은 하얗게 증발했다. 누구를 향한 건지 모를 욕설들이 제멋대로 튀어나오고 목표를 놓친 발길질에 차 문짝이 푹푹 우그러졌다.
소동을 멈추게 한 건 뜻밖에도 한 사장이었다. 한 발 늦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한 사장이 끼어들어 둘을 떼어 놓았다. 그제야 차문이 열리고 남자가 나왔다. 기사의 머리를 쿡쿡 쥐어박는다. 한 사장은 허리를 숙이고 우그러진 차를 들여다봤다. 배려심 깊게도 이웃 주민의 차를 걱정했다.
“어이쿠, 이거 덴트로 안 되겠는 걸요? 판금 도색하고, 사이드미러 갈고, 며칠 렌터카 빌리고, 그게 또 외제차라…….”
한 사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수영을 쳐다봤다. 어이없게도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표정 그대로 남자에게 말한다.
“수리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잘 아는 분이라.”
그러고는 다시 수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였다. 아무 질문도 하지 않은 채 수영의 대답을 기다린다. 침묵 속에서 꺼져, 욕설이 들린 것 같았다. 동전을 받은 거지처럼, 수영은 고개를 꾸벅하고 돌아섰다. 그제야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전철역을 향해 걸으면서, 걷어찰 깡통 따위는 찾지 않았다. 아무 말 하지 못한 입안에서 목젖이 자꾸 울컥거리고 이제는 흐엉에게 가르쳐 주지 못할 한국어 단어들이 토막 난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나도, 이딴 데, 더러워서, 그만둘 거라고. 이 십새들아.
강호연 | 1960년 서울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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