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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회 시인 작품론
생生을 일으켜 세우는 치열한 불협,
그 ‘만질 수 있는 소리’들 -김부회 시인 작품론
박성현
1.
특이하게도 김부회 시인의 시집 [러시안룰렛]은 시인만의 문장으로 꽉 차 있다. 작품의 시작과 동시에 섬세하면서도 장엄하게 울리는 시편들이 유장한 흐름을 이루며 펼쳐지다가, 마지막에는 “시는 물이다”라는, 친근하면서도 도발적인 비평적 화두를 던지며 작품집을 정점에 이르게 한다. 두 번째 시집이라 하기에는 무척 깊고 서늘한 풍혈風穴을 지나는 듯하다. 마치, 지리산 지류의 완만한 둘레길을 걷다가 갑자기 나타난 뱀사골의 가파른 경사를 오르고 마침내 새파란 운해가 내려다보이는 노고단에 입성하는 그런 아찔한 기분이다. 시집을 몇 번이고 정독한 후에 문장마다 서려 있는 생生에 대한 치열한 화음과 불협이 계속 눈가를 맴돌았다. 나는 시집을 통해, 자기에 대한 집요한 ‘바라봄’과 자기를 둘러싼 생활을 ‘생활답게’ 엮고 계열화하며 끝내는 성찰의 한 방편으로 펼쳐 내는 자기 확신으로 향한 ‘여정’을 읽은 것이다.
주목할 것은, 시인의 ‘바라봄’과 ‘여정’이 그의 감각적 집체集體로써 문장을 적극적으로 투영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그는 「지구본 탈출기」에서 “수평 낙하 중”이라는 기묘한 문장을 만들어 냈는데, 거의 언어유희에 가까운 이 문장은 우리의 경험이 얼마나 치명적인 오류투성이라는 것을 잘 보여 준다. 왜냐하면, 우리의 감각적 작용은 무수한 예외로 이뤄져 있으며, 그 예외는 논리적으로 해명될 수 없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문장에서 이끌어 낸 보편적 사유와 이성이란 어쩌면 수많은 예외를 품은 우연의 또 다른 흐름일 것이다. 게다가 시인이 노래했듯, 현 존재란 존재 일반(혹은 ‘존재’-라는 개념)이 아닌 살아감의 실존에 따른 구체적이고 생생한 ‘사건’들로 맞물린 ‘현상’이라 할 때, 시인의 목소리는 ‘자기’라는 이념과 의지를 생활에 적극적으로 기투하는 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한다. 바로 이것이 언어에 부가되는 모든 의미의 원천이자 시인이 돌보는 ‘자기-자신-으로서-의’ 시다. 때문에 김부회 시인의 질문이 갖는 파괴력은 이 ‘이후/너머’로 약진하는 ‘바라봄’과 ‘여정’에 깃들어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가장 고유한 문장 속에서 또한 가장 고유한 세계-내적 가능성이 된다. 그것은 “의도되지 않은 비상구를 따라 / 회색으로 버무린 단 하나의 출구”(「태평양 블루스」)를 형성하는 예지豫知이며, “내 안에서만 겹쳐 포갤 듯 휘감기는 발소리”(「불면에 대한 가설」)와 같은 직관이다. 비록, “귀항지 멀리 / 뱃고동이 울린 것 같다 / 어쩌면 도착해 있을지도 모를 신호 / 청각의 바깥에 / 이미, 나는 없”(「서해에서」)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내적 논리가 이끌어 낸 근거이자 생각의 주체, 곧 ‘코키토’의 무한에 가까운 표정들이다.
다만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은, 시인이 지적하는 것처럼 ‘코키토’에는 무수한 공백들이 내재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문장이 배출하는 표면의미들은 공백에 의해 균열되고 멈춰지며 감춰진다. 어쩌면 의미란 그 ‘공백’의 목소리일지 모른다. 물론 코키토의 결말은 대체로 주체의 자기 확신이나 공고한 정체성에 대한 확인으로 끝나야 하는 것이지만, 사실 인간의 이성이란 생각만큼 강권하지 않다. 구멍이 무수한 치즈 덩어리처럼 중간중간 끊어지고 파였으며 어떤 곳은 얇은 빛조차 닿지 않는다. (그곳에 무엇이 웅크리고 도사려 있는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시인은 이를 명백히 알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요약한다: “수평을 일으켜 수직이 되고 / 3차원의 직립이 되기까지 / 그 거룩한 투쟁을 증명이라도 하듯 / 파고 있다, 구멍”(「구멍」). 라캉 식으로 접근하면 공백에는 일종의 ‘주이상스jouissance’까지 포괄한다. 무의식으로서 문장의 문맥 속에서 혹은 여백과의 상관성을 통해 생산된 의미라 할지라도 단번에 소진되고 마는, 마치 블랙홀처럼 주변의 모든 것들을 빨아들여 공간의 진공을 만들어버리는 비非-의미들의 매혹적인 세계, 그것이 [러시안룰렛]에 은밀하게 도사린 ‘공백’이다.
2.
그런데 과연 ‘공백’이 향한 장소는 어디일까. 시인에게 찾아온 세계에 대한 직관은 또 어떤 풍경을 담아내고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시인은 이 같은 오류들을 거침없이 직관하면서 현대 사회를 “별빛 숨어 있는 쪽창 너머 새벽이 / 밤새 잘린 발목을 도마뱀 꼬리처럼 되돌려 주는”(「프로크루스테스 호텔」) 위악僞惡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제사 대행업’ 같은 가짜들을 한 방에 보내고 싶어 ‘중지에 방아쇠’를 걸기까지 하지만(「총 한 자루」) 세계는 “싸늘하게 식은 녀석의 몸”(「투鬪」)과 같은 ‘후미진 세트장’일 뿐이다. 물론 우리는 「구타 유발자들」, 「페이소스」, 「링반데룽」, 「깜냥 랩소디」 등의 시가 적확하게 대칭하는 것처럼 “내일로 가지 못하고 / 거슬러 되돌아갈 수밖에 없”(「재방송」)음을 본능적으로 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시인은 세계의 이와 같음을 ‘환청’으로 돌려세운다. “들어 봐 신비한 소리가 저 창밖에 쌓이고 있어 / 소리는 모두 환청이야 / 소리는 들리는 게 아니야 / 몸을 감싼 소음의 덮개를 제왕절개하면 / 소리를 볼 수 있을 거야 / 만질 수 있는 소리 말이지”(「환청」)라는 문장처럼, 진정한 소리를 갈망하는 시인은 오직 “만질 수 있는 소리”를 갈망한다. 이것이 그가 평생 추구해 온 시 쓰기의 핵심이 아닐까.
요컨대, 그는 위악으로 점철되는 세태의 무수한 가짜-현상들 속에서 스스로의 껍질을 벗어던짐으로써 삶의 본질을 찾고자 한 것이다. (환청이라는) “그 구멍 안 / 스스로 길들은 가장 완벽한 유토피아 / 셈도 없어 미지도 없는 / 스스로 가둬버린 / 囚 / 네모 속 인간”(「수인囚」)일지라도 “모태母胎를 뚫고 나오며 들었던 태초”(「적的」)는 명징하게 존재하며, 그 힘으로 삶은 지속된다. 어쩌면 그 좌표에서 우리는 시인이 향했던 시의 아찔한 본향本鄕, 곧 “관객으로 되돌아가는, 망라網羅를 서로 잇는 그네 위”(「형상기억합금」)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3.
하여, 우리는 “나는 내 속에 나의 기원을 갖지 않는다.”는 레비나스의 놀라운 통찰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의 함의는, 인간이라는 개별자들은, 단독의 좌표를 갖지만 그것은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무수한 관계-망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인의 문장들은 김부회 시인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람들과 온갖 사물들, 그리고 그 망들에 촘촘히 얽힌 사건들에서 비롯된다.
‘나’는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도 없다는, 이 몽롱하고도 명백한 현실 위의 흐름들은 그의 문장 위에서 빈칸을 만들고, 그 속에 소여所與된 바의 수많은 “것”들로 하여금 서로 마주보고 뒤엉키며 스며들다가 사라지도록 한다. 존재란, 마치 산마루에 우뚝 선 정자亭子와도 같아 그를 둘러싼 존재자들과 잇닿으며 상대방에게 스스럼없이 포섭된다. 그것은 단순히 열려-있음으로 해서 유발된 사태가 아니다. 존재자들이 산출하는 화음과 불협의 유장한 교향악과도 같이 그를 둘러싼 사건들의 전체가 그에게 겹겹이 둘러싸고 엄습하는 일련의 복합적인 사태다. 뙤약볕을 피해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그늘’은 숲 전체의 ‘기울어짐’이자 ‘보듬어 안음’이 아닌가.
때문에 우리는 앞서 언급한 “청각의 바깥에 / 이미, 나는 없는데”(「서해에서」)가 향하는 지점이 바로 빈칸으로 표상되는 ‘공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공백은 ‘있음’이 ‘없음’으로 역전되는 곳이며, 동시에 없음이 ‘꽉 찬 부재’라는 역설로 자리매김되는 곳이다. ‘아버지’라는 이름이 기입되었고, 그 ‘이름’ 위에 시인의 이름이 덧칠되며, 또한 후대로 끝없이 이어지는 장소가 빈칸이다.
아버지가 입원했다
평생 내 빈칸을 채우며 살아온 아버지, 그러다
빈칸이 된 아버지, 그 자리에
내 이름을 적었다
이제 내가 보호자다
─ 「빈칸」 전문
아버지가 입원하셨다. 아버지는 “평생 내 빈칸을 채우며 살아온” 분이다. 그런 아버지가 갑작스레 쓰러진 후, 아들의 세계는 조금씩 균열되고, 붕괴되며, 새로운 무엇으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이른 바, 공백이 생긴 것이다. 아들은 병원에서 내미는 서류에 사인을 하며, 문득 ‘아버지’가 ‘빈칸’이 되지 않았는지 궁금해진다. 내 이름을 적은 뒤로 빈칸 속의 아버지는 끊임없이 물러나는 듯했다. 그러나 ‘내’가 보호자가 된들, 아버지는 결코 완전히 소진된 것은 아니다. 그는 남아 있고, 움직이며, 작용한다. ‘나’는 다만, 아버지와 ‘함께’ 세계에 던져진 존재, 요컨대 부재로 꽉 찬 후대와의 매개다.
한편, 「숫돌」에서도 이 ‘부재로 꽉 찬’ 역설이 등장한다. 이 시에서 ‘아버지’는 “제 몸 닳는 줄도 모르고 / 갈고 또 갈고 // 무뎌질 때마다 / 쓱쓱 // 날 시퍼렇게 세워 주다 움푹 팬 몸”으로 환치되는데, 여기서 아버지도 스스로를 계속 빈칸으로 만들면서 ‘자식’이라 일컬어지는 후대를 이끌어 낸다. 그리하여 존재의 자기 부재는 어쩌면 적극적인 자기-완성이자 돌봄이 아닐까.
“물 한 잔이면 됐다”
수돗가 한쪽 구석에 오도카니
부서질 듯
아버지
─ 「숫돌」 부분
그런데 아버지는 자신의 몸을 계속 비우면서도, 그 자리로 밀려오는 허기를 “물 한 잔”만으로 달래는 것이다. 숫돌에 칼을 갈면서 아버지는 달팽이처럼 둥글게 휘어진 등을 잠시 펴 보지만, 아직 칼은 무디고 녹마저 슬어 있기 때문에 오랜 시간 굽은 등은 다시 펴지기는 쉽지 않다. 아버지의 집중은 칼을 벼리는 것보다 더 날카롭고 무겁다.
시인은 수돗가 한쪽 구석에서 아무 말 없이 칼을 가시는 아버지를 본다. 멀리서도 그의 허기와 목마름이 느껴지지만, 그 몫은 순전히 아버지의 것이다. ‘나’ 또한 ‘나’의 시간을 온전히 감내하고 후대로부터 밀려오는 시간들에 닿아야 한다. 이 말은 유전자에 뭔가의 흔적을 남기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공존’이라는 당대성이 깃든다. 이것이 아버지가 ‘죽음’과 맞닥뜨리면서 부서질 듯 위태해 보이는 이유가 아닐까. 아버지는 스스로 빈칸이며 공백인 것이며, 그러하기 때문에 꽉 찬 무엇인가를 가질 수 있다.
공백(빈칸)이란, 비유하자면 시인이 주목했던 접속사 ‘와’와 동일하다. 그는 “어머니는 아버지와 살아요 / 나는 나와 살아요 / 때때로 (와)라는 것이 주인이 되기도 하죠 / (와)에 붙어서 산다는 것은 기생한다는 말이에요 / 어느 날은 이집트에서 날아온 모래를 손에 쥐어요 / 이집트와 내가 사는 것이 아닌데 / 손에 쥔 모래가, 밤마다 별이 되는 꿈을 꾸네요 / (중략) / 나는 나와, / 나는 (와)의 (나)일까요? 나는 나의 (와)일까요?”(「와」)라고 서술하면서 존재자 각각의 실재보다는 그가 차지하는 시공간의 물레와 깊이, 무게와 그것에 닿는 사물들의 나타남에 더 집중한다. 시에서 ‘와’는 괄호 속으로 밀려나는데, 특이하게도 전후를 연접하는 주인이자 매우 두꺼운 매개-체가 된다. 그러면서 (와)는 밤마다 별이 되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4.
김부회 시가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은 그의 직관이 통찰에 닿는 순간, 윤리의 문제까지 이끌어 내는 데 능숙하다는 점이다. 시인이 산출하는 ‘윤리’란 존재의 방식이자, 존재자들이 맺는 관계-틀이라는 점에서 실존의 근본적인 토대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삶이 주체로 향하는 모든 시간에 윤리는 집요하고 끊임없이 우리의 사유와 태도, 말과 행동에 작동한다. 비록 산다는 것이 “악상樂想의 낡은 음계를 조바꿈하다 잘 못 누른 건반 / 그 불협화음에서부터”(「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 흔들리는 생生일지라도 시인의 윤리는 실존의 아이러니에서부터 생활-세계에 명징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펼쳐 놓는다.
이를테면, 이 시집의 표제시인 「러시안룰렛」의 문장, “여섯 개들이 탄창에 다섯 발만 있고 한 발이 비었다면, 다섯 개의 목숨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한 개의 행운이라고 할 것인가?”(「러시안룰렛」)이 죽음과 삶의 기묘한 ‘경계-가르기’라면, 「불면에 대한 가설」의 문장, “정시를 울리는 괘종시계 / 하루 두 번의 낮과 밤을 공간이라고 읽는다 / 피카소와 붓처럼, 소리와 나는 각각의 퍼즐을 맞춰 본다 / 벽을 깨고 들어오는 소음 다발, 여전히 / 굴착기가 그곳에 있다 소음과 소리 사이 / 더 허물어질 것도 없는 불규칙한 호흡 속으로 / 저벅저벅, / 발의 그림자가 들어온다 유독, / 내 안에서만 겹쳐 포갤 듯 휘감기는 발소리 / 물방울처럼 / 둥근 말소리들”은 「러시안룰렛」의 화두를 대칭하면서도 ‘생활-속-에’ 밀착된 수많은 감각들의 착종을 적합하게 그려내고 있다. 각각의 시는 그 가치를 어디로 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생生을 대하는 사유와 태도, 말과 행동을 적확하게 보여 주고 있다.
문득
내가 내 자리에, 혹은 이 자리에 지금
있을 수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오늘이
오늘이,
매일,
있다는 것
─ 「어제와 다른 이유」 부분
주단 암막을 쳤다, 따뜻하다
창으로 벙긋 들어오는 햇살이
직접 만든 환한 하루를 덤으로 준다
사고, 파는 것에 익숙하다 보니
차고 넘치게 많은 무료 나눔을 몰랐다
하루라는 쇼핑백에
하늘, 햇살, 공기, 공짜로 얻은 것에 덤으로 나를 담았다
슬그머니 당신에게 건넨다
버리지 못하고 살던 나, 이제 내게도
무료로 나눌 것이 가득하다
─ 「무료 나눔」 부분
「어제와 다른 이유」는, 시인의 낙관적 풍모를 강하게 엿볼 수 있는 시다.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또한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으며 다만 “매일, / 있”는 ‘오늘’을 사는 것이 실존의 윤리이자 할 일이다. 시인은 “내가 내 자리에, 혹은 이 자리에 지금 /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말한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윤리가 화석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금’과 ‘여기’를 위한 시인의 긍정은 절대적이다.
한편 「무료 나눔」에서 시인은 좀 더 구체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우연한 기회에 무료로 받은 “직접 만든 수세미 두어 개”를 보며 그는 그것이 ‘덤’일지라도 거기에 마음이 얹어지면 ‘나눔’으로 승화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동시에 그는 세상에 무료로 나눌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내 것’만 고집하는 세대에게 ‘나눔’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물론 사고파는 것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무료 나눔’이란 무척 생경한 풍경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의 주고받음이자 마음이 일으켜 세우는 새로운 가치 창조이며 ‘오늘’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축복 같은 행위다.
시인은 암막을 친다. 창을 타고 들어오던 냉기가 사라진다. 대신 따뜻한 햇살이 벙긋벙긋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직사直射의 예리한 빛을 보니 그 ‘빛’을 받기 위해 우리가 지불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태양은 머나먼 지구의 인류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렇게 스스로를 운행하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 ‘하루’ 또한 덤과도 같은 무료 나눔이다. 시인은 “하루라는 쇼핑백에 / 하늘, 햇살, 공기, 공짜로 얻은 것”은 물론이고, ‘나’를 담아 당신에게 건네는 것이다.
5.
그런데, 과연 ‘나’를 ‘무료 나눔’하는 것이 말처럼 가능할까. 행여 ‘나’에 대한 무료 나눔이 주체를 물신화하여 속박하는 자본주의적 발상은 아닐까. 아니다. 정확히 말한다면, 나눔이 향하는 곳은 타자가 아니라 ‘나’다. 나눔을 통해 나는 타자와 함께 공존하는 법을, 오히려 ‘나’를 필멸(죽음)로부터 보호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만물에 깃든 숭고한 정신들을 일으켜 세우고 ‘나’와 더불어 실존하도록 종용하는 것이 ‘무료 나눔’의 실체이며 이것을 문장으로 번역한 것이 바로 ‘시’다.
더러는 잊어버리고
생각 속으로 생각이 휘돌다 지친, 바람의
둥근 모서리들만 남아 있는
금빛 술 한 잔 빚은 노을이 정자 너머
시가 되는 곳
대숲 푸르른 선인들 넋이 깃든 소쇄원 언덕배기
하늘이 남겨 둔 여백 아래
수백 년 고단을 홀로 지키는 수막새 와당
긴 고드름이 뚝뚝 떨어지는 곳
말소리, 바람 소리, 오가며 어우러져 심은 메타세쿼이아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가 땅 부치며 살았던 가난한 이유가
하나둘 상념 놓아 둔 서낭당 돌탑 사이
붉은 천들 너머 들려주는 낮은 목소리
희끗한 귀밑머리에 새움 틔우는
거침없이 달려가던 산등성이, 대숲 울음이 봄 마디 휘어
초서체 흘려 쓰는 들녘
햇살에 녹아 버렸던
나와의 내밀한 언약을 파종했던 그곳으로
나는,
─ 「담양 가는 길」 전문
시인은 담양 가는 길에 잠시 소쇄원에 들른다. 여전히 소쇄원에는 500년이 넘도록 사라지지 않는 조선의 옛 정취가 묻어 있다. 물론 그 ‘정취’란 결코 가상이 아니어서 “더러는 잊어버리고 / 생각 속으로 생각이 휘돌다 지친, 바람의 / 둥근 모서리들”이라 해도, “금빛 술 한 잔 빚은 노을이 정자 너머”는 시詩가 될 수밖에 없는 풍경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나’와 ‘소쇄원’의 거리는, ‘소쇄원’과 ‘자연’의 거리이며 동시에 ‘자연’과 ‘나’의 거리이기도 하다. 때문에 시인은 “대숲 푸르른 선인들 넋이 깃든” 언덕배기를 “하늘이 남겨 둔 여백”으로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소쇄원은 담양에 자리 잡은 신성한 장소다. 사람에 따라서는 한 채의 절대적인 풍경이기도 하다. 어쩌면 소쇄원을 낱낱이 살펴보고 그 ‘낱낱’의 길들을 산책한다는 것은 사물에 깃든 신령을 마중하는 것과 동일하다. 겨우내 자란 긴 고드름을 단호히 움켜쥐면서 수백 년 동안 고단을 홀로 지키는 ‘수막새 와당’이 “말소리, 바람 소리, 오가며 어우러져 심은 메타세쿼이아”를 고즈넉하게 바라보는 정오는 소쇄원 500년을 집약하는 수묵화가 아닐까. 그것은 물 흐르듯 흘러가는 ‘목소리’이고, 돌탑처럼 쌓인 ‘상념’이며, 그렇게 실존과 존재가 일치하는 내력이다. 아버지가 땅을 부치며 살았고, 아버지의 아버지가 살았던 생활의 유구한 지대다.
시인은 소쇄원을 걷다 말고 문득 시간의 아득한 너머에서 조선이 말을 걸어오는 듯한 환청에 빠진다. 세월이 쌓인 모양 그대로 소쇄원의 희끗한 귀밑머리에는 새움이 트고 또한 정원의 굴곡은 고스란히 산등성이로 달려가는데 그는 “궤도의 밖을 빙빙 돌기만 하는 카이퍼 벨트의 / 얼음 유령들”(「인썸니아」)처럼 ‘옛날’과 ‘지금’을 무수히 교차하는 것이다. 봄의 마디마디에 서린 대숲이 자신이 놓아 버린 울음을 초서체로 다시 쓰면서 시인은 어디를 향했던 것일까. “햇살에 녹아 버렸던 / 나와의 내밀한 언약을 파종했던” 바로 그 장소들이었을까. 아니면 “무시로 화엄을 파고드는 꿈속”(「무렵」)이었을까. 그곳이 어디든 “멀리 새벽이, 꽃단장한 등롱을 들고 작정 없는 나의 무딘 부피를 침범했”(「상강霜降 부賦」)기에 ‘나’와 함께 자연과 세계를 나누면서 “빙그레, 당신을 끌어안는”(「하여何如」) 것이다.
박성현 | 시인. 200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등.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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