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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요20:1-18; 막16:9-15; 눅24:1-12; 마28:9-10)
<사순절은 회개의 기간이다. 회개한 자만이 부활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형식이 아니라 영 안에서의 인격의 만남이다. 요한복음 20장은 초실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초실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양육지향점은 부활에 맞추어놓고 이끌어 가신다.
매일 일어나는 일, 매일 사람을 만나는 일, 이 모든 환경이 부활과 관계성으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마귀는 이 부활의 도를 말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이 부분은 2025년 특집, 절기(節氣)에서 자세히 설명할 예정이다.
나는 초실절에 대한 말씀을 묵상 중에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의 부활을 맛보곤 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당신도 날마다 시시때때로 회개와 부활의 은총을 누리시기를 기도드린다! 아멘!>
<그리스도와 종교의 차이>
불행히도 많은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와 다른 종교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부활의 신앙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이라고 소개하셨다.
요11:25-26절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한다.
이방인들이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은 나름대로 목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 목적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종교란 대개 자기 수양이나 자기 수련으로 자기를 개선하고 완성하는, 곧 깨달음의 경지를 얻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혼의 단련에 있는 것이다. 불교도 혼을 단련하는 종교이다.
다시 말하면 의식을 통제하는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원인을 찾아내고, 수련을 통하여 습관을 바꿈으로써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해탈) 행복에 이르게 하는 극히 심리적인, 곧 혼적인 종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죽어 무덤에 있던 예수가 수많은 예언대로 삼일만에 이른 아침 부활하여 첫 열매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족시키시고, 저녁에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20:22)”고 말씀하신다.
우리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다. 곧 죽음에서 살아나셨고, 지금도 여전히 살아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우리의 영 안에서 실재로 접촉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기도하고, 그분의 통제를 받으며, 내가 아니라 그분이 내 안에서 살아내시도록 나는 죽고 그분의 내 안에서의 움직임, 곧 성령의 움직임을 허락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자.
<본문 묵상>
요20:11-13절은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면서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는데,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하였던 자리 머리맡에, 또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이여, 왜 울고 있습니까? 라고 하니, 마리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가져가 어디에 두었는지 내가 모르기 때문입니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을 간절한 사랑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들에 의해 증거되었다. 마리아가 무덤 속을 보았을 때, 그녀는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는데,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하였던 자리 머리맡에, 또 한 천사는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두 천사는 마치 법궤 위의 속죄소 위에 있었던 그룹과 같았으며, 부활하시고 사망의 위협으로부터 걸어 나오신 주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두 천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강한 증거이다.
세마포와 수건이 사람 편에서의 증거였던 것처럼, 천사들은 하나님 편에서의 증거였다. 이 모든 것들은 오직 주님을 간절히 추구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만 보여졌다!
요20:17절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만지지 마십시오(Do not hold on to me.).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나의 아버지 곧 여러분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여러분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씀하십시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그분은 부활하신 날, 그분을 간절히 추구하는 마리아에게 부활 안에서 나타나신 후에, 아버지께로 비밀리에 승천하셨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오랫동안 주님의 비밀한 승천에 관한 이 구절을 두고, 이의 해석이 분분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사십 일 후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승천하시기 전에(행1:9-11), 주님은 그분의 부활하신 날 이른 아침에 아버지의 누림과 만족을 위해 비밀리에 아버지께로 승천하셨다.
주님은 자신을 요제를 위한 “수확물의 첫 열매의 한 단”으로 아버지께 드렸다(레23:10-11, 15). 구약에 의하면 수확물은 곡간으로 들여졌으나, 첫 열매는 항상 요제로 성전 안으로 가져갔다(출23:19; 레23:10-11). 앞뒤로 흔들어 드리는 요제는 부활을 예표하며, 위아래로 들어 올려 드린 거제는 승천을 예표한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 앞에 요제로 드려진 첫 열매는, 부활하신 날 이른 아침에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가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렇다면 레위기 23장 11절에서 말하는 “수확물의 첫 열매의 한 단”의 “단”이란 무엇인가? “단”은 수확한 밀 한 이삭이 아닌 함께 묶여진 많은 이삭들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마27:52-53절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무덤들이 열리며, 잠들었던 많은 성도의 몸이 일으켜졌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에게 나타내 보였다”(원문 참조)고 말한다.
그러므로 부활의 첫 열매는 비단 주님 자신일 뿐만 아니라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진 다른 이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함께 하나의 “단”이었다. 부활하신 날 이른 아침에 그분은 아버지를 만족케 하기 위해 승천하셨다가, 저녁 늦게 그분의 제자들에게 돌아오셨다(요20:19). 그분의 부활의 신선함은 구약의 예표에서 수확물의 첫 열매가 맨 먼저 하나님께 드려졌던 것처럼, 먼저 아버지의 누림을 위해야만 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만지지 마십시오.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20:17; 원문 참조).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셔서 아버지께 하셨던 것보다도 먼저 자신을 마리아에게 계시하셨다. 마리아는 하나님보다 일찍 부활한 주님을 보았다. 그때 마리아는 주님을 접촉하려고 했으나 그분은 그녀를 금하셨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주님은 마리아가 그분을 만지지 못하게 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아직 승천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먼저 그분 자신을 아버지께 드려 그분을 접촉해야 했기 때문이다. 같은 날 저녁에 그분이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요20:19), 그분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만져보라고 요구하셨다(눅24:39).
이 사건으로 우리는 마리아가 부활한 주님을 본 첫 번째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대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 구절에서 당신은 주님께서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주목한 적이 있는가? 그분은 그분의 부활 전에는 결코 그분의 제자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전에 그분이 사용했던 가장 친밀한 용어는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분은 부활하신 후에 그분의 “친구들”은 그분의 “형제들”이 되었다. 주님의 모든 제자들은 그분의 부활 안에서 거듭났다.
벧전1:3절은 “…하나님은 그분의 크신 긍휼에 따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어 살아 있는 소망을 갖도록 하셨으며”(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그분의 모든 제자들은 그분의 부활 안에서 거듭났다. 주님이 그분 자신을 영으로 그의 모든 제자들 속으로 넣은 것은 그분의 부활을 통해서였다(요20:22). 그분의 생명을 받음으로 그들은 모두 다시 태어나고 거듭나 그분의 형제들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제자들은 주님의 형제들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주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분의 부활 안에서 독생자는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셨다(롬8:29). 그러므로 주님은 마리아에게 “나의 친구들에게 가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의 형제들에게 가라”고 하신 것이다!
“내가 나의 아버지 곧 여러분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여러분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씀하십시오(요20:17).”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주님은 그분의 제자들을 그분과 하나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의 아버지는 또한 그분의 제자들의 아버지이며, 그분의 하나님은 또한 그들의 하나님이었다.
그분의 부활을 통해 그들은 아버지의 생명과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을 받았다. 그러므로 내적으로 생명과 본성 안에서, 외적으로는 아들의 지위 안에서 그분의 형제들은 그분의 어떠하심과 동일하다. 곧 내적으로 우리에게 실재(reality)가 있으며, 외적으로 우리에게는 아들의 지위가 있다!
아버지는 주님 자신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제자들의 아버지이시다. 이후로부터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우리는 맏아들과 동일하며, 그분의 어떠하심과 동일하다. 이것이 그분의 부활 안에 있는 교회이다.
주님은 왜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님께 승천하신다고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한편으로는,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아들의 인격 안에서 아버지를 볼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은 여전히 사람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한편으로는 사람들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우리가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또한 우리에게 아버지이시다. 바로 이 순간 사람들이자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아버지가 계신다.
사람의 존재로서 모든 제자들은 주님께 형제들이 되었으며, 아버지께 아들들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님과 동일한 생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의 형제들에게 가져왔던 계시이다!
막16:1절에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부활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본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다(눅8:2). 이 보잘 것 없고 비천한 여인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일 먼저 나타나시다니! 참으로 놀랍고도 영광스럽다!
제자들은 부활의 현장을 보고도 믿지 못하고, 닥쳐올 두렵고 무서운 핍박을 무서워하여 집 안에 숨어 숨죽이고 있는 이른 새벽, 아무도 없는 음산한 무덤가를 정신없이 서성이고 있는 이 여인을 보라!
예수님을 가장 진실로 사랑했다는 그 사실 때문에, 주님은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분을 보이셨다(요19:25; 20:1). 제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죽으신 후 삼 일만에 부활하신다”는 그분에 대한 수많은 예언을 단지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을 뿐, 아무도 믿지 못하였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우연이겠지만,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다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분을 모셔가겠습니다.”(요20:15)라고 말하는 그 절실한 사랑으로 부활의 현장, 바로 그 시각에 오직 그녀만이 그곳에 있게 된 것이다! 오! 주 예수님!
그리고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라뿌니!”하고 존경과 친밀하게 부르실 때(요20:16), 마리아의 눈이 열린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첫댓글 눈이 열린 사랑하는 마리아처럼~
눈이 열려 예수님을 뵈옵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