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解例本)의 발견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것은 1940년이다. 이후에 상주에서도 발견이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말이 많고 이론도 많이 있다. 경북 상주시 낙동면에 사는 고서 수집가인 배익기가 2008년 집수리를 위해 짐을 정리하다 발견하였다며 이를 안동 MBC에 제보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고 최초의 제보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배익기씨는 ‘이해 7월 26일 골동품 판매상 조모 씨의 가게에서 30만 원을 주고 고서적 2상자를 구매하는 중에 상주본을 몰래 끼워 훔쳐갔다.’는 혐의로 구속되어 2011년 9월 기소돼 1심에서 징역 10년 형을 받았다. 그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항소하여 대구지방법원의 무죄 판결을 거쳐 대법원에서 2014년 5월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배익기씨는 억울하게 1년간 수감 생활을 하였다. 다른 의견은 도굴꾼 서 씨가 1999년 안동 광흥사의 대웅전 나한상 토불을 부수고 훔친 복장유물이라고 증언을 하였고 2013년 말에 실제로 안동 광흥사에서 조선 세조 시기에 복장한 선종영가집언해(禪宗永嘉集諺解), 조선 세조 10년, 1464년 간행. 월인석보(月印釋譜) : 조선 세조 5년, 1459년 간행. 등 언해본 서적이 발견되면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처음 보관하고 있던 곳으로 알려져 더욱 주목받고 있다. 간송본과 그 판본이 완전히 똑같고 같은 안동 지역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상주본이라고 부른다.
안동본은 일제강점기의 국문학자 김태준의 제자였던 서주(西州) 이용준(李容準; 1916년 3월 3일 출생)에 의해 그 존재가 처음 밝혀졌다. 당시 김태준은 경학원(성균관대학교의 전신)과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선 문학을 강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태준의 제자 이용준이 자신의 처가인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 광산 김씨 긍구당(肯構堂) 종택 서고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을 발견하고는 스승 김태준에게 알렸다. 당연히 김태준은 깜짝 놀라 이용준과 함께 본가가 있는 안동으로 내려가 ⟪해례본⟫을 직접 확인했다. 이용준은 잘 보관할 만한 사람에게 넘기고 싶다고 말했고, 김태준은 당시 문화재 수집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던 간송 전형필을 떠올렸다.
김태준은 전형필을 만나 ⟪해례본⟫ 이야기를 했고, 전형필은 그 자리에서 은행으로 달려가 1만 1천 원을 찾아와 1천 원은 김태준과 이용준에게 사례금으로 주고 1만 원은 해례본 값으로 치렀다. 그때 당시의 물가로 따지면 기와집 열 채 값에 해당하는 금액이었고, 현대의 물가로 환산하면 무려 30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당시 전형필이 ⟪해례본⟫의 가치를 얼마나 높게 봤는지 알 수 있다.
그림 간송전형필
이 안동 본의 원소장자와 매각 과정에 대해서는 1950년대 안동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있던 정철이라는 사람에 의해 처음 알려졌는데, 당시엔 정철이 원소장자를 경상북도 안동시 진성 이씨 가문의 후촌(後村) 이한걸(李漢杰; 1880년 – 195년 4월 10일) 가문에 소장되었던 것으로 그의 선조 이천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 임금에게 하사받은 것으로 연산군 때의 박해를 피하고자 첫 두 장을 뜯어 버렸고 이한걸은 생활고 때문에 당시 1000원으로 책을 내놓게 되었다고 전해졌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용준이 긍구당의 서고를 열람하다 ⟪해례본⟫과 ⟪매월당집⟫을 여기서 훔쳤는데 표지에 광산 김씨 가보를 뜻하는 도장이 찍혀있어 이를 찢어내어 팔았던 것이 표지 실종의 진실이다. 즉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연산군의 한글 탄압과는 무관하다. 현재 일본에 있는 ⟪매월당집⟫ 역시 ⟪해례본⟫과 마찬가지로 앞 두 장이 인위적으로 찢겨 있다. 나중에 이를 들키고 장인에게 혼나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과 이를 뒷받침하는 편지도 있다. 이용준이 책을 발견한 것은 1940년 3월쯤에 발견된 것이고 최소로 잡으면 5월쯤에 발견된 것이 된다고 한다. 이용준이 해례본을 발견하고 매각 의사를 밝힌 것은 3월 이전이고 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1939년일 수 있다. 간송이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전 : 벌써 오래된 일인데 …, 어떤 친한 서적상이 와서 시골에 좋은 물건이 있는 데 가보지 않겠느냐 하더군요. 그래 무슨 물건이냐고 했더니 훈민정음 원본이 있다고 하길래, 틀림없이 원본이면 무슨 노력을 해서라도 살 테니 가져오라고 했지요. 이런 말이 있고 난 뒤에 하도 오랫동안 연락이 없어서 거의 잊어버리다시피 했는데 1년 후엔가, 그 사람이 또 와서 오늘 저녁에 가져올 테니 보겠느냐기에 가져오라고 했더니 밤중에 왔어요.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그 사람의 표정을 보니 개선장군 (웃음) 모양으로 위세 당당히 웃는 모습으로 나타났어요. 가져왔나 보다. 속심으로 짐작하고 있자니까 아니나 다를까 헌 종이에 아무렇게나 둘둘 말아 쥔 구겨진 종이를 가져왔더군요. 그렇지만 명확히 진부(진위여부)를 분별할 수 없어 권위자에게도 보이고 해방 후에 이희승 선생, 김윤경 선생 등 몇 분에게 보였더니 좋다고 하더군요.(신태양. 편집부편. 1958, 306~307쪽)
간송은 최초 인지 후 무려 1년이나 뒤에 소장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대표적인 간송 전기 작가인 이흥우, 이충렬 등은 이용준의 매각을 도왔던 김태준이 사회주의 활동으로 구속되는 바람에 간송이 실제 해례본을 알아챈 지 1년 늦게 매입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다만 간송이 최초로 해례본의 실체를 인지한 시기를 이흥우는 1942년으로, 이충렬은 1941년으로 계산하여 매입 시기를 이흥우는 다음 인용처럼 1943년, “이충렬(2010). 《간송 전형필》. 김영사.”에서는 1942년으로 기술하였으나 이는 조선일보 최초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간송 댁에는 1943년 6월 29일 셋째 딸 희우暿雨가 태어났다. 그리고 늦여름 어느 날이었다. 간송은 석양 무렵에 우연히 한남 서리에 들러 잠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그때 책 거간으로 이름난 알만한 사람이 모시 두루마기 자락에 바람을 일으키며 바쁘게 가게 앞길을 지나갔다. 그것을 본 간송은 “저 사람이 저리 바쁜 걸음을 치는 것은 필유곡절”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간송은 곧 이순황을 불러 그가 그렇게 급히 가는 사연을 물었다.
“지금 경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訓民正音)’ 원본이 출현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구입해 오기 위해서 돈을 구하러 가는 길이랍니다”라고 했다.
간송은 필요한 돈의 액수를 물었다.
“1만 원이랍니다”하고 이순황이 대답했다. 큰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 간송은 아무 소리도 않고 돈 1만 1천원을 내주었다.
“1천원은 수고비요.”(이흥우 1996: 231).
이 기사가 의미가 있는 것은 김태준(1905~50)은 1939년 2월 경성제국대학과 경학원(현 성균관대)에서 강사로서 조선 문학을 강의했고, 재직 중 경성콤 그룹에 참가하여 인민전선 부를 담당했다. 1941년 ‘경성콤 그룹 사건’으로 검거되어 1943년에 풀려났다(강만길·성대경, 1996: 140~141쪽). 결국 김태준은 이용준의 매각을 마무리한 뒤 검거된 것이다. 그 이후 김태준과 이용준은 이걸 판 돈을 사회주의 운동에 써 경성 콤그룹의 거물이 되었다고 한다. 김태준은 지리산 빨치산으로 붙잡혀 죽었으며, 이용준은 월북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우여곡절 속에 1943년에 전형필의 손에 들어갔으나 1950년 전쟁을 거치면서 제대로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여 연구되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한글 정책이 바르게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미 이루어진 것들을 바꾼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누구나 잘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둘 수도 없다. 더욱 훈민정음의 정신과 그 의미를 오늘에 다시 살려서 교육하고 가르쳐서 그 정신을 이어받게 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도리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이런 연유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성리학의 입장에서 푸는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입장에서 풀어 전도와 신앙의 도움을 주고 싶었다. 어떤 부분은 무리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겠지만 이것은 학문적 풀이가 아니라 선교적이며 더욱 쉽게 알게 하고자 하는 점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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