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머물고 지워지고 다시 피어나고, 태안 바람길
1. 일자: 2021. 5. 19 (석탄일)
2. 장소: 태안 해변 바람길
3. 행로와 시간
[황포항(10:13) ~ 운여해변(11:00~30) ~ 송림/식사(11:30~12:00) ~ 장삼포해변 전망대(12:58) ~ 장곡해변/교회 조각공원(13:27) ~ 바람아래해변 전망대(13:40) ~ 바람아래해변(13:50~14:05) ~ (버스 이동) ~ 옷점항(14:20) ~ 가경주펜션(14:34) ~ (만수동) ~ 영목항(15:17) / 18.57km]
< 태안 바람길 트레킹을 준비하며 >
공지가 올라온 지 꽤 오래되어도 갈 마음은 없었다. 비염과 지독한 황사 그리고 큰 봄비…. 몇 주간 센 놈들을 연거푸 겪고 나니 멀리로 가고 싶다. 아산 카페에 올라온 사진과 글들을 살핀다. 물주름이 깊게 패인 해변가를 걷고 있는 이들의 먼 모습이 마음을 움직인다. 한 장의 인상적 사진은 긴 글보다 훨씬 효과적으로‘그곳의 상(象)’을 만들어낸다. 나도 그곳에 서고 싶다.
카페에 올라온 안내,‘안면도 구간 마지막 구간이며, 황포항에서 영목항으로 이어지며 농촌과 어촌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썰물 때 드넓은 갯벌이 펼쳐지는 바람아래해변은 바다, 해안사구, 곰솔림으로 이루어진 수려한 해안경관을 자랑한다. 고남면 남쪽에 위치한 해수욕장 바람아래해변, 선사시대의 패경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고남 패총 박물관, 고대도, 삽시도, 장고도, 명장섬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장삼포 해변 전망대, 풍부한 먹거리와 주변 섬을 관광할 수 있는 유람선이 다니는 영목항 등이 관광 포인트다.’여러 번 등장하는 ‘바람아래해변’이 길의 하이라이트인 듯하다.
날이 더 더워지면 해안 길은 가기 어려워진다. 지금이 적기다.
< 희망사항 >
주중 휴일에는 먼 길을 떠나지 않은 관행을 깬다.‘후회하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다 하자.’는 응급의학과 교수의 말과,‘먼 곳에 대한 동경이 커지는 것은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극에 대한 역치가 높은 까닭이다.’라는 책 소개 방송의 멘트가 마음을 움직였다. 길에 나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게, 집에 머물며 여러 선택에 갈등하는 것보다 더 낫다. 태안 해변 바람길이 벗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생각이 정해지면 마음은 편해진다. 수요일 아침이 기다려진다.
< 태안 가는 길에 >
집을 나선다. 5시 반이 막 지났는데 날이 훤하다. 하지가 한 달도 더 남았는데…. 대기가 맑고 기온도 서늘하다. 왠지 걷기에 그만인 날씨가 될 것이라는 희망이 생긴다.
서산 땅에 들어선다. 내포 땅이 펼쳐진다. 창 밖 풍경이 매력적인 곳인데 용케 찾아낸 사이트에서 MLB 중계를 보느라 들녘 풍경은 지나쳐 버렸다. 그래도 류현진 선수는 정말 잘 던진다. 위기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고수의 내공이 느껴졌다. 행담도 부근에서 정체도 있어서 그런지 10시가 넘어 들머리에 선다.
< 황포항 ~ 운여 해변 >
낯선 포구에 차가 멈춘다. 황포항 어귀다. 줄지어 서서 걷는다. 솔 숲을 따라 가나 해변으로 내려선다. 돌아보는 시선에 포구가 전모를 드러낸다. 지나고 여유가 생겨야, 아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작은 배들이 해변에 정착해 있다. 일행들은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시원한 바다 풍경 자체가 훌륭한 배경과 모델이 되어 준다. 무리에 끼는 것은 여전히 낯설다.
긴 뚝방을 걷는다. 뒤따라 오는 이들의 모습이 해변 따라 길게 이어진다. 멀리서 보아도 즐거운 표정들이 느껴진다. 물 빠진 해변이 누렇게 배를 드러내고, 해송이 병풍이 되어주는 풍경은 명품이다. 도착 전 코스 안내에서 해안선님이 오늘 걷는 코스는 2007년 태안 기름유출사건이 계기가 되어 조성된 길이라 했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는 눈에는 어처구니 없는 아픔의 역사는 흔적도 없다. 시간과 자연의 치유력, 선한 인간들의 마음, 그리고 관의 노력이 이곳을 평온하고 아름다운 길로 변모시켜 놓았나 보다.
바람길 안내 이정을 지나며 소나무 군락이 호위하는 좁은 길에 들어선다. 발 밑 흙의 색이 하얗고 미세하며 곱다. 왜 일까 하는 의문은 '혹시 만조 시 바닷물이 여기까지 오나' 로 이어지고, 사실이란 확신이 든다.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의문, 해송은 염분을 이리 잘 견딜 수 있나? 한 번 터진 궁금증은 첫 전망대에서 끝이 난다.
운여 해변에 들어선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진다. 해변 언덕에 텐트촌이 형성되어 있고 입구는 하나 같이 바다로 열려 있다. 이런 곳에서 마음 맞는 이들과 밤을 보내는 낭만이 부럽다. 물이 빠진 해변을 따라 걷는다. 카페 안내에 사진이 오른 운여 송림에 도착한다. 물이 차고 낙조 때는 그 풍광이 예사롭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송림에 식당이 차려진다. 가장 큰 무리에 낀다. 순식간에 다양한 음식들이 차려진다. 충무김밥, 멸치주먹밥, 오뎅탕, 김밥, 빵에 과일까지. 도넛 몇 개 싸온 손이 부끄러웠지만, 주는 성의를 마다하지 않고 먹었더니 이내 배가 빵빵해진다. 길을 걸으며 가장 빠르게 흐르는 건 밥 먹는 시간이다. 30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일행들은 다시 해변으로 나가 사진을 찍는다. 여분의 옷까지 준비해 온 이들도 있다. 멀찍이 떨어져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본다. 세상에는 행복한 일이 참 많다. 누군가의 모습을 찍는 행위에, 또 찍히는 일에 이리도 좋아하니 말이다.
12시 무렵 다시 트레킹이 시작진다. 모처럼 언덕을 오른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바다 풍경도 근사했다. 갈림이 나타난다. 해변과 숲, 난 숲으로 일행들은 바다로 길이 나뉜다. 무리와 떨어져 걷는다. 속도를 조금 내어 본다. 비탈을 내려서자 해변에 닿는다. 섬 같은 언덕을 나는 넘고, 일행들은 돌아들었다. 내가 속도를 조금 더 내서 인지 그들의 모습이 멀리서 목격된다. 이상한 것은 수 많은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함께 했던 이들의 모습 구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안 다는 건, 관계가 있다는 건 남과 우리를 다르게 느낀다는 것일 게다.
< 장삼포 해변 ~ 바람아래 해변 >
숲이 나타나면 가능하면 그 그늘 밑을 걸었다. 한참을 걷다 해변으로 내려선다. 장삼포 해변이다. 꽤 길게 모래톱이 있고 물주름이 인 바닷길을 걷는다. 발 밑을 살피자 작은 게들이 바쁘게 굴곡 사이를 오간다. 땅을 파고 들어섰다 다시 올라오고 또 들어가고…. 생명의 몸짓은 어디에서나 활기차고 분주하다.
다시 숲길을 오른다. 오솔길이 이어지더니 장삼포 해변 전망대가 나타난다. 우측부터 명잠섬, 장고도, 삽시도, 고대도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산에서 내려다 보는 섬 풍경은 언제나 근사하다. 눈이 한참을 바다에 머문다. 작은 배들이 물살을 가른다. 짧은 비탈을 내려서자 긴 해변이 드러난다. 물이 빠지고 있나 보다 뻘이 길게 이어진다.
멀리서 느껴지는 녹색 기운에 끌려 물가로 간다. 파래를 닮은 초록 해조류가 바위 틈에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작은 돌들은 마치 산 미니어쳐 처럼 굴곡을 뽐내며 해안이 주인인 냥 해조류를 품고 시선을 끌어들인다. 검고 푸르고 누런 색들이 만들어내는 앙상불에 넋을 잃는다.
길을 걷는 동안 시간의 흐름에 따라 풍경과 행위를 기록하는 것이 서술이라면, 이야기의 시간을 잠시 멈추게 하고 특정 사건을 공간 속에다 펼쳐 놓는 것을 묘사라 할 수 있다. 굴곡진 작은 바위 위에 생명을 내린 수초의 모습은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였다. 생명의 위대함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해변이 끊어진다. 길이 사라진다. 왔던 길을 돌아가려 하니 너무 멀다. 방파제 위로 올라선다. 가파른 계단이 있다. 조심스레 내려선다. 또 다른 해변이 나타난다. 장곡이다.
해변 모래사장의 길이가 무척 길게 느껴진다. 돌아보는 눈은 끝없이 멀리까지 모래사장을 그린다. 모퉁이 돌아서도 또 해변이 있으니 참 넓다. 긴 장곡 해변이 끝이 나고 기독교 조각공원에서 숲길로 올라선다. 이정표가 보인다. 이곳부터는 바람아래 해변에 들어선다고 알려준다. 사막과 같은 모래 언덕으로 바람도 비켜간다고 자랑하지만 내려서니 사구는 구분이 안 되고 해변도 지저분해 실망했다. 마을 어귀로 들어서자 버스가 보인다 반가웠다. 소나무 그늘에 앉아 쉰다. 솔숲의 시원한 느낌이 참 좋다.
< 옷점항 ~ 영목항 >
버스를 타고 바람아래해변에서 옷점항까지 이동했다. 처음 경험하는 버스 이동이다. 기분 전환이 되었다. 마을 뒷길을 돌아 해변으로 내려선다. 돌 많은 자갈 해변을 돌아들자 널따란 모래 해변이 펼쳐진다. 계단을 치고 오르자 정원이 멋진 펜션이 등장한다. 바다를 바라보며 꽤 근사하게 지어진 집들이 여럿 나타난다. 그리고는 가경리 마을 따라 도로가 뻗어있다.
도로에 햇살이 쏟아진다. 바다 풍경이고 모래 해변이고 이제는 감동이 되지 않는다. 멀리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이정이 되어 준다. 산에서는 눈에 들어오면 금방인데 바다에서도 지척인 냥 보여도 한참을 가도 목표는 여전히 먼 그대였다.
< 에필로그 >
영목항에 도착했다. 어느 님이 사주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지나온 길의 흔적을 살핀다. 태안 바람길은 속초 해파랑길과 비교된다. 속초 바닷길이 첫눈의 화려함과 쭉 뻗은 신작로라면 바람길은 볼수록 살가운 구불구불 골목길이다. 그 길은 걷는 내내 낯선 호기심을 자극하여 여러 생각이 머물고 지워지고 다시 피어나게 했다. 모퉁이를 돌면 또다시 나타나는 긴 해변은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한 감동이었다.
귀경 차량 안에서 잠시 졸다가 산행기를 적는다. 사진이 지나온 길에 눈이 되어주었다. 기억을 더듬어 길 상황 정리하고 그때의 느낌을 문자로 옮긴다. 상들의 연속을 그저 그려 나가면 된다.
버스가 서해대교를 건넌다. 낮보다 미세먼지가 옅어졌는지 항구와 먼 바다 풍경이 근사하다. 햇살은 더 강렬하다. 복 받은 날씨다. 걷는 중에도 더위를 느끼지 못할 만큼 쾌적한 날이었다.
오늘 트레킹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출발 전 기대했던 바람아래해변이 아니었다. 오히려 장삼포에서 장곡으로 4km 넘게 길게 이어지는 해변이 훨씬 더 인상적이었고, 해변 작은 바위 위에 자리를 튼 짙은 녹색의 해조류 군락의 풍경은 가히 압권이었다. 주변 어디를 보아도 녹색이 들어설 틈이 없는데 어디서 그토록 짙고 선명한 녹색을 만들어 내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집 나선지 14시간 만에 다시 현관 앞에 선다. 볕 좋은 봄 날, 기분 좋은 꿈을 꾼 듯 마음이 가벼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