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연구 | 이건청 | 신작 시 |
갈라파고스* 외 2편
남미 에콰도르에서
서쪽으로 1000km쯤 가면
열아홉 개 섬들과 암초들로 이루어진
갈라파고스 제도가 있다고 한다.
500만 년 전쯤 바닷속에서
용암으로 솟아올랐다 한다.
어쩌다 파도에 밀려 흘러든 바다거북이나 이구아나
바람에 밀려 길 잃은 미조迷鳥들이
발붙이고 살 뿐,
사람들 드나들지 않고,
외래 식물도 오가지 않아
터 잡은 것들끼리만 오순도순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세상에는 없는 것이 된 이곳에서
육지이구아나와 바다이구아나,
육지거북과 바다큰코뿔새와
갈라파고스 펭귄 같은
목숨들이 목숨들끼리만 살면서
긴 시간이 흘렀으리.
사람들아, 당신들은 세사에 매어 까마득 잊고 살지만
그대들 기억 속의 갈라파고스는 안녕하시다.
망망대해 파도에,
해무海霧에 씻기면서
1000km쯤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
당신들이 까아맣게 잊고 사는
갈라파고스,
그대들이 잃어버린 열아홉 개 섬과 암초들은 늘,
안녕, 안녕하시다.
*갈라파고스: 에콰도르에서 바다로 1,000km쯤 떨어져 있는 섬들과 암초지대. 인간을 포함한 외래종 동식물의 발길이 닿지 않아 희귀, 고유 동식물 등 잔존생물들이 남아 있음.
낡은 배
배를 버리기로 작정한 사람이
바닷가 모래톱 위에
배만 두고 가버린 후
주인이 오지 않는 배는
버려진 자리에서
30년도 40년도
혼자 기다리다 보니,
낡은 배는
아픈 날개 파득이며
바다를 건너온 지친 새들이
머리를 죽지에 묻은 채
한참씩 쉬었다 가는
새들의 것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 빈 바다에
해 뜨고 해 지고
은하수 넘쳐나는 거기서
50년이고 60년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먼바다를 건너오는
지친 새들에게
무너져가는 마지막 몸까지 내어주며
지친 새들을 위해
팔다리까지 펼쳐 들고 서 있는. . . . .
서리
눈 흐리고
귀도 멀기만 한 어느, 어느 날
뒷길 구석 전봇대 곁에
아이 하나 서 있네
얇은 옷 입은
얼굴에 버짐까지 핀
아홉 살이거나 열 살쯤이던
옛날 아이 하나,
검정 고무신 신은 아이 하나
옛날, 아이였던 늙은 사람 곁에 주춤주춤 와 서네
백발 속, 옛날 아이 곁에 와서
들릴 듯 말 듯
전해주고 가는 말
다 안다고, 안다고
고개까지 끄덕이며
전해주는 말
새벽 세상 하이얗게 덮고 가는
가난했던 옛말. . .
| 작가 연구 | 이건청 | 근작 시 |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아파란시스* 외 4편
이제 나
돌아가고 싶네
300만 년쯤 저쪽
두 손 이마에 대고 올려다보면
이마와 주둥이가 튀어나온, 엉거주춤 두 발로 서기 시작한,
130cm쯤 키의 유인원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아파란시스
고인류학자들이
최초의 homo속屬**으로 분류한
그들 속에 돌아가 서고 싶네
학력, 경력 다 버리고
그들 따라 엉거주춤 서서
첫 세상, 산 너머를 다시 바라보고 싶네.
안 보이던 세상 산등성이로
새로 뜨는
첫 무지개를 보고 싶네
실라캔스*** 몇 마리 데불고
까마득, 유인원 세상으로
나, 가고 싶네
그리운,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아파란시스
*초기 영장류 중의 하나. 한 개체의 화석에서 골편 40% 정도가 수습되어 발굴 영장류의 대표성이 있음.
**homo屬. 현생인류와 그 직계 조상을 포함하는 분류 속.
***3억 6천만 년에서 6천 5백만 년의 지층에서 화석으로 발견되는 육지척추동물의 조상 물고기. 1938년 이후 살아 있는 실물이 발견되어 충격을 주고 있음.
실라캔스를 찾아서
실라캔스는 원시 척추동물의 먼 조상으로 추정되는 물고기. 3억 6천만 년에서 6천5백만 년 사이의 퇴적암 속에서 화석으로만 그 모습이 발견되었을 뿐, 오래전에 멸종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화석 물고기가 1938년 12월 22일 남아연방 어느 바닷가에서 어부의 그물에 잡혀 올라왔다. 진화의 대세를 부정하면서 6천5백만 년을 물속에서 견뎌온 실라캔스, 그 부정과 저항의 정신에 이 시를 바친다.
화석연구가들이
6천5백만 년 이전의 퇴적암에서
원시 물고기 화석을 찾았다
짐승의 이빨과 다리 흔적까지 지닌
물고기 화석이었다.
고생물고고학은 이 화석물고기가
3억 6천만 년부터
6천5백만 년 전까지 살았던
육지척추동물의 조상 물고기라고 적었다.
해와 달과 바람
눈 시린 파도 가고 오던
지구별에 너무 일찍 와
하염없었던,
진화의 대세를 따라
모든 동물들이 떠나갔는데도
육지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물속을 찾아간
육지척추동물의 조상
진화를 거부하고
지질 속에 화석만 남긴 채 사라진
숨어버린, 진화를 거부한,
짐승의 이빨과 네 다리, 폐肺의 흔적까지 지닌 채
6천5백만 년을 물속에서 숨어 견딘,
살아서 그물에 잡혀 올라온 물고기
숨어서 자신을 지킨
부정과 저항,
푸드기는 푸른 정신…
*실라캔스: 육지 척추동물의 조상 물고기
드르니 계곡에서
누억 년 시간이 쌓여
돌이 되어 있다.
20억 년쯤의 시간 위에
다른 시간이 쌓여 퇴적암을 이루고
시간의 퇴적 위에 10억 년 전쯤의
어느 햇살 밝은 날이 다시 쌓이고
배고파 벼랑 밑에 잠들었을 초식 공룡도 한 마리
화석으로 남았거니
순담 계곡에서 드르니 계곡 쪽으로
3.1km 잔도棧道를 따라 걸으며
지나간 시간이 첩첩이 쌓인
누억 년 바위 벼랑을 바라보느니
켜켜이 쌓인 바윗돌 속
지나간 영겁의 시간이 건네는
연둣빛 안녕 소리를 나는 듣느니
오호라, 오늘은 한탄강 지질공원
드르니 계곡길이나 걸을거나
우뚝우뚝 벼랑을 이룬 누억 년 시간,
언젠가,
나도 가 묻힐 저 벼랑의 시간
드르니 계곡 길을 걸으며
눈짓 인사 나누러 갈까.
*드르니 계곡: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 소재 한탄강 지질공원의 일부. 한탄강 3.1km 잔도 길의 한쪽 입구.
미토콘드리아
세상 70억 인구
최초의 어머니가
아프리카에 사셨다고 한다.
미토콘드리아 유전자의
유전 경로를 따라가 보면
그렇다는 것인데,
건강한 사람 세포 하나에는
10,000개쯤의
유전체가 들어있고
그중의 5%쯤인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를 헤쳐 보면
하나의 생명체가 겪게 될
생명정보까지를 미리 다
알 수도 있다고 한다.
20여만 년 전
탄자니아나 케냐 어느 샘터에
물 마시러 온 유인원 여자,
어머니에서 어머니에게로 이어지는
생명정보를 되밟아 가면
키 1.1m쯤의 여자가 거기 있다고 한다.
70억 지구인 최초의 엄마들이
거기 계셨던 것을.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e : 외할머니 – 어머니 - 딸로 이어지는 모계 유전자.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앞에서
오른쪽 다리를
왼 다리 위에 포개니
제각기 다른 쪽을 딛고 살던 두 다리가
하나의 몸이었음을,
세상 단풍 속을 흘러내리는 천 개 강들도
같은 물임을 알겠다.
이제야, 이제야
그걸 알겠다.
백발의 날
두물머리 강가에 와서 보니,
산들이 계곡을 만들고
산굽이를 만들어
다른 쪽의 강들을 불러 앉히며
다독이고 타일러
그냥 물새 우는 새벽 강을 만드는 것도
연꽃 밭으로 물닭들을 불러
젖은 풀들을 쌓게 하며
그 위에 몇 개 알을 낳게 하는 것도
물이며, 산이며, 단풍들이 하는 일인걸
알겠다, 알겠다,
서서히 상반신을 기울여
흐르는 강을 바라보고 있느니
물이며, 산이며 단풍들이 보인다.
그것들이 한 몸인 게
환하게 보인다.
이건청 |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실라캔스를 찾아서』 『곡마단 뒷마당엔 말이 한 마리 있었네』 『굴참나무 숲에서』 『반구대암각화 앞에서』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 등.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목월문학상, 김달진문학상, 고산문학대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