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2016년도 10월 31일 토요일 '장로님'의 진두지휘하에 모악산 신뱅이 마을에 짐을 부렸다.
어려운 교회 살림살이에 보태고자 남원 장로권사님들이 주일예배를 앞두고 낡고 긴 트럭에게 구비구비 골목길은 한계상황이었다.
남원의 난장같은 자취생활을 돌파해서, 아마도 나의 삶이 정리될, 그리고 이후 전개될 삶에 단단하게 뿌리내릴 터전에 정착된 것이다.
목동에서 광명으로 이사가면서 남편과 주말부부로 지내면서 6년여에 걸쳐 살림을 접었었기 때문에 없는 것이 태반이고 있는 것은 낡아서 마치 새로이 신혼 살림 장만하듯하다.
아마도 평생 여기 모악산 치마 끝 자락에 기대어 생이 마쳐질 듯 싶다.
계속 공사하면서, 직장생활에, 공부에, 여간 산만한 삶이 아니었기에 오늘 드디어 '신뱅이'를 검색했다.
며칠동안 '신뱅이'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나의 친할머니께서 동네에서 부르던 이름이 '신뱅이떡 (댁)'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친정 동네에 친손년인 내가 깃든 것이다.
신뱅이 주소지를 정식 며칠 전에 등록했는데 그게 신뱅이 김치의 안명자여사님의 노고가 단연 눈에 띄어 옷깃을 여민다.
전주한옥마을내에 신뱅이김치로 맛을 낸 전주콩나물국밥도 한 다니 꼭 가서 먹어보고 인사도 드려야겠다.
임신했을 적에 서울에서 '콩나물국밥' 한 그릇 찾아 얼마나 헤메었던가?
결국 먹지 못했던 그 콩나물 국밥, 하늘나라 계신 신뱅이 할머니 우리 할머니 신뱅이길
아랫 글은 아마도 안명자님이 쓰신 글 같다.
'신전 부락' 아닌 신뱅이'라는 이름으로 주소지로 등록할 수있었던 까닭은 이 분들의 노력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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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sinbengi/4HFm/28?q=%BD%C5%B9%F0%C0%CC%20%BD%C5%C0%FC%20%B6%E6
내가 김치를 담는 이유가 분명하기에 신뱅이를 택한 이유도 분명합니다.
누군가가 우리가 그리고 또 내가 만들고 쓰지 않으면 잊혀질 것들~~~
내가 담는 김치 앞에 신뱅이를 붙이게 된 분명한 까닭입니다.
어떤이는 글로벌 시대에 맞지 않는다며 세련된 이름을 권하기도 하지만
우리것은 촌스럽고 내어놓기 부끄럽다면 김치담기 또한 부끄럽겠지요.
힘들고 냄새나고 돈도 되지않고~~~
그게 맞습니다. 맞지만 어쩝니까?
우린 그걸 먹으며 자랐고 없으면 안되겠는걸.
내가 하면 자랑이고 남의 걸 샀다면 창피한게 김치인것도 사실인데.
그래서 내가 하지 않았으면 누가 주었다고 둘러대는게 김치의 처지랍니다.
아! 김치이야기 끝없어요.
신뱅이,
완주군의 옛 지명을 설명하는 책자에 실린 내용은 실망입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왜곡된 설명으로 왠지 거리를 느끼게하고 말아요.
현재 완주군 구이면 항가리 신전마을은 5개 마을로 각기 고유한 옛이름을 가지고 있어요.
신전 1반은 고샅밭,
신전 2반은 아래뜸,
신전 3반은 웃뜸,
신전 4반은 당내,
신전 5반은 신뱅이.
고샅밭은 고샅+밭입니다.
고샅은 길가에 있는걸 뜻하고요 밭은 다아는 말, 길가 밭으로 형성된 마을이겠지요.
아래뜸은 아래+뜸입니다.
뜸은 아마 들이겠지요. 아래쪽 들에 모인 마을,
그럼 웃뜸은 자연히 윗쪽에 있는 마을 일테구요.
신전4반은 당내인데 내는 개울,당은 아마 낯설겠지만 서낭당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 할 수 있어요.
당골네,당집, 그렇게 쓰던 말이겠지요.
신전 1반에서 부터 5반까지가 길가에서 점점 산 위로 올라가며 마을이 형성되고 마지막 끝인 5반은 산끝에 달려 있어 옛날엔 없이 사는 사람이 살던 가난함의 상징이어요.
모악산 자락을 개간하여 손바닥만한 밭과 다랑논을 부치며 살았던 마을.
새로 만든 밭이지요.
아름다운 우리말 ! 배미. 새배미.
한문으로 새 신으로 되었거나 신바람으로 쓰이는 순수한 우리말이거나,
신뱅이의 신을 이해 할 수 있으며 배미가 뒤에 붙었겠지요.
아마 국어 시간에 배미가 뱅이가 되는 문법도 배웠을텐데~~~
전 국어문법을 들추려는건 아닙니다.
저희가 이곳에 이사왔을때 마을은 신전 부락이라고 불리고 있었습니다.
신전 부락의 신뱅이!
너무 아펐습니다.
교과서에서 아무리 가르치고 3.1절, 유관순 누나와 독립 기념관엘 아무리 다녀와도 그리 가슴에 닿지 않던 아픔이 이 마을에 살게 되면서 고름이 맺혔습니다.
고름이 살되지 않는다는 어른들 말씀이 이곳에서는 맞지 않았습니다.
아픈 상처가 곪아서 살이 되었는데 그게 그냥 내 살인양 두둑히 더께 앉혀 당연히 안고 살아가는 마을과 공무원.
큰 길가엔 비석까지 조각하여 신전부락이라니~~~
일본인 서기들이 우리말 그대로 기록하지 못하니 그 들의 식대로 고쳐 지었을 이름이 새배미.
1반에서 5반까지의 이름 중에 가장 쉽게 일본식으로 고치기 쉬웠을 이름입니다.
내 이름을 내어주고 내 주권을 내어주고도 오히려 당당히, 유식함을 자랑하듯 지금도 부락을 즐겨 사용하는 우리 마을 어른도 계십니다.
신전5반의 신뱅이는 써주는이가 없다면 없어 지겠지요.
일제 식민지의 잔재가 어떻다고, 청산할 어떤 것 운운하지만 내 마을 이름 찾아 지켜갈 의지가 없다면 김치는 어떻게 담아 지키겠나요?
우리 마을 신뱅이와 우리 김치는 똑 같은 처지 같습니다.
아니 신뱅이 이름은 개인으로 어쩔수 없는 상황이라면 김치는 우리 국민 스스로 포기하는거지요.
힘들고 귀찮고 냄새나고 배보다 배꼽이 더 커서 수입김치 사먹으면 된다는 생각.
그건 아니지요.
세계가 하나되어도 우리는 있어야지요.
그 귀찮고 냄새나고 힘드는 일이 왜 재미 있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모악산 아래 둥지틀고 살았기에 신뱅이의 아픔을 알았습니다.
우리 김치가 또 그렇게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난 그냥 신뱅이와 김치가 촌스러워도 같이 부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