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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발표에 의하면 사인은 지병인 뇌일혈인데, 전조 증상이 분명한 뇌일혈에 비해 고종은 사망한 당일까지 건강 상태가 매우 양호하였다.
고종 사후 염습(殮襲, 시신을 깨끗한 여러 옷으로 감싸 봉인하는 일)한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1~2일 만에 시신이 바지를 찢어야 할 정도로 부풀고 썩기 시작하며 이가 빠지고 혀가 닳기 시작했으며, 3일 만에 완전히 부패하여 이가 빠지고 살점이 뚝뚝 떨어졌는데, 이는 조선 시대에 독약으로 자주 사용된 비상(砒傷; 비소 화합물)의 비소 성분으로 사망 시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다.[48] 고종의 사망일은 양력 1월 21일, 한 겨울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경우라면 3일 만에 부패하는 경우는 당연히 있을 수 없다.
그의 승하가 기록된 《고종실록》 및 《순종실록》이 일제에 의해 편찬된 점으로 보아 미심쩍은 구석도 있었다. 《순종실록》 부록에선 1919년 1월 20일 고종의 와병 기록이 있고, 여기선 정확한 병명에 대한 언급 없이 도쿄에 있는 이왕세자 영친왕에게 전보를 쳐서 알렸고, 이완용(李完鎔)과 이기용이 숙직했다는 기록이 전부다. 또한 사망일 역시 《고종실록》의 1월 21일인지, 《순종실록》의 1월 20일인지 불분명한 경우도 있다.
조선총독부가 칙령 9호로 이태왕 승하에 따라 3일간 가무음곡을 중지한다고 결정했는데, 1주 뒤에 칙령을 내린 점도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49]
데라우치 마사타케 당시 총리대신을 비롯한 고위층에서 이 무렵에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기록도 존재하는데, 이를 고종 암살설과 연계시킬 수도 있다.[50]
정확한 사인을 알 수는 없지만 살해당했다면 보통 이완용과 이기용[51]이 배후일 거라고 지목되고 있었다.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고종 독살설의 배후로 이왕직 장시국장을 지낸 한창수 남작과 시종관 한상학을 꼽는 이들도 있는데, 이증복은 1958년 12월 16~19일자 <연합신문>에서 1918년 12월 19일에 두 한씨가 고종에게 독이 든 식혜를 올려서 독살케 했다고 기록했고, 구양근 성신여자대학교 교수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찾아낸 국민대회 성명서에서도 "그들(이완용 등 친일파)은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윤덕영과 한상학을 시켜서 식사와 기미 당번을 하는 두 궁녀로 하여금 밤참에 독약을 타서 올려서 살해했다"는 대목이 있다고 설명했다. 우당 이회영의 며느리이자 고종의 생질(외조카)인 조계진도 고종 승하 닷새 뒤 운현궁에 다녀와서 시부에게 이러한 사실을 전한 일화도 있었으며, 독립운동가 송상도가 쓴 <기려수필>의 유신영 편에서 "역신 한상학, 윤덕영, 이완용이 고종을 독살했다"는 기록도 있다.
1919년 1월 손병희가 발표한 ‘고(告)국민대회’ 포고문에 언급된 바에 따르면 파리 강화 회의에 일제가 마련한 ‘한국 민족은 일본의 어진 통치에 순종해 독립을 원치 않는다’는 각계각층의 대표자 명의로 된 조작증명서 서명에 고종이 크게 진노하자 일제는 친일파인 윤덕영·한상학을 사주하여 독살을 꾀해 고종의 식사를 받드는 두 명의 궁녀를 매수하여 야참 식혜에 독약을 넣어 시해했다고 한다.
고종의 죽음에 대한 논의와 평가는 1910년대의 혁명적 환경을 외면하고, 3.1운동의 발생을 고종의 죽음이라는 우연한 사건에 종속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게재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전국적인 추모 분위기와 함께 일어난 3.1운동을 살펴보면 당시 조선인들이 고종을 민족의 대표자로 인식하지는 않았더라도 국가의 상징적 존재로는 인식하고 있었다. 비록 고종 자신이 장기간 일본에 시달리면서 유의미한 반격은 거의 못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죽음이 도화선이 된 3.1 운동으로 최초이자 최후로 일본에 큰 유효타를 먹이는 데에 성공한다.[52]
2009년, 한국사학자 이태진과 이승엽은 '고종 독살설'에 대해 심도 깊은 논쟁을 벌인 바 있다. 이태진은 창부용삼랑일기(倉富勇三郞日記)에 대한 분석을 통해 고종독살설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는데, 같은 자료를 분석한 이승엽은 오독의 가능성을 제기한 뒤, 고종 독살설은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조선인의 불만과 영친왕이 일본인 여성과의 혼인에 대한 반감에서 야기된 소문의 확대 재생산에 불과하며, 사실임을 증명할 만한 근거는 전무하다고 반박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고종 사망 직후 보도된 한국과 일본의 자료를 검토하고 재구성하여 고종의 사인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1월 20일부터 고종의 사망까지 각 보도 자료 내용을 종합하여 시간 순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오전 11시 - 고종 기상, 안상호 촉탁의 배진, 아침식사 (매일신보 1919.1.22.)
오후 3시 - 고종 가미온담탕 진어 (매일신보 1919.1.22.)
오후 가미오카 대표 촉탁의 2회 배진 (경성일보 1919.1.24.)
오후 6시 도가와 촉탁의 배진 진맥 (경성일보 1919.1.24.)
오후 10시 저녁식사(평소 저녁식사 11시) (매일신보 1919.1.27.)
여기서 뇌일혈 증세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21일 오전 1시 30분경 왼쪽 손에 마비가 와서 고통에 시달렸다는 오사카매일신문과 고종의 평상시 생활습관이 평소 새벽 3시에 잠들어 오전 11시에 일어나고 오후 3시에 아침을 먹고 저녁식사를 11시에서 12시에 했다는 경성일보하고 1914년 12월 31일에 측정된 체중 기록에서 고종의 체격이 키 153cm[A]에 몸무게 70[A]~73[55]kg이라는 비만체형이라는 것에서도[56] 충분히 발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다만 독에 중독될 시에도 인체에 마비가 일어나는 게 이상하지 않으므로 이것으로 독살설을 반박하기는 어렵기도 하다.
한편 독살설의 근거로 제시되는 자료는 김명길 상궁이 고종의 시신을 염(殮)할 때 시체에서 피와 살이 묻어나 독살의 의문을 표했던 것, 윤치호일기에 고종의 팔다리가 엄청나게 부어오르고 이가 모두 빠져있고 혀가 없어지고 다리가 붓고, 목 가슴 복부 등의 상위 부분에서 일직선 모양의 검은색 선이 목에서 복부까지 눈에 띄게 나타나 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하여 검은색 부패는 보통 10일 이상을 넘겨야 발생하므로 정상적인 사후 부패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있다. 그러나 보통 시신은 사망 후 하루 안에 바로 염을 하는데 고종의 시신은 4일 정도 따뜻한 온돌방에서 아무 조치를 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순종 황제가 아닌 도쿄에 유학 중인 황태자가 오길 기다렸기 때문이다. 다만 4일 동안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방치해 놓은 것도 심히 의심스러운 부분이다.[57]
사망 후 시신은 바로 부패가 일어나 급격히 붓기 시작하는데, 건강한 사람의 경우 평소 장내에는 약 1kg의 세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고종은 뇌일혈을 일으키며 다소 체온이 상승하고 밤 10시에 저녁식사를 하여 다소 열이 있었으며, 따뜻한 실내에서 시신을 안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패가 심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오전 6시 경에 사망했으나 사망 발표는 그 다음날인 1월 22일 오전 8시에 이뤄졌으며 사망일자도 1월 21일 오전 6시가 아닌 1월 22일 오전 6시로 하루 늦춰졌다. 고종의 사망일과 사망 소식 발표가 하루 늦어진 이유는 당시 불과 4일 뒤인 1919년 1월 25일에 영친왕과 마사코 여왕의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 이왕직 장관 민병석, 이왕직 차관 고쿠부 쇼타로(國分象太郎), 찬시(贊侍) 윤덕영, 조민희,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이완용, 조선귀족 송병준, 윤택영 등 대부분의 고위고관들이 결혼식 준비를 위해 동경(東京)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 총독부와 이왕직의 주요 수뇌부가 부재한데 고종이 사망하는 극히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겨우 입장을 정리한 이왕직은 1월 21일 오후 1시 경에 고종이 중태에 빠졌다고 발표했다. 한편 고종의 사망 소식을 일본에서 접한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일본 궁내청과 상의하여 영친왕의 결혼식을 연기하기로 결정하고 일본에 있던 고관들은 모두 귀국을 시작했다. 그리고 1월 22일 오전 8시, 이왕직은 고종이 1월 22일 오전 6시에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왕가의 혈통을 끊으려한다는 소문이 있는 상황에서 혼례를 거행할 때, 소요 사태가 분명 일어날 것이라고 하여 혼례를 연기하고 이후 고종의 소식을 늦게나마 알리게 된 것이다. 김윤식의 <속음청사>에서도 고종의 급서로 아들들(순종, 의친왕, 영친왕 등)이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종의 장례는 일본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의 장례를 기준으로 하여 장의괘장에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郎), 제관장에 일본 궁내청 식부차장(式部次長) 이토 히로쿠니(伊藤博邦)[58] 등을 각각 지명했다. 기존 전통식 국장과는 다르게 대여와 신연을 분리해 훈련원과 종로로 각각 향했다. 3월 3일에는 훈련원에서 '국장식'이라는 별도의 식을 열어 두 행렬이 동대문 밖에서 만났고, 청량리에서 노제를 치르고 현재의 남양주가 있는 홍유릉 구역으로 향했다.
2010년에는 일본이 일부러 고종을 독살할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는 주장이 국내 연구자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고종이 사망한 1919년은 경술국치 이후 9년이 지난 시기로, 이 시기의 고종은 이미 아무런 권력이 없는 허수아비였고, 같은 시기 일본에 머물고 있던 영친왕과 이방자의 혼례가 불과 4일 뒤에 있을 상황에서, '내선일체'(內鮮一体)의 이데올로기를 홍보할 좋은 기회를 맞이했던 일본이 일부러 신랑의 아버지인 고종을 제거해 굳이 가만히 놔두어도 죽을 인간을 암살하여 긁어 부스럼을 일으킬 근거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고종 망명설을 부정하거나 사전에 막아 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입장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망국의 군주, 고종 황제의 장례식은 일본의 강요로 전통식이 아닌 일본식으로 치러졌다. 여기서 말하는 '전통식(傳統式)'은 일본식으로 치르는 장례식과는 다르게 사후 몇 개월이 지나서 장례를 치르는 것이 조선과 대한제국의 전통이자 관습이었는데, 고종은 일제강점기 이왕가의 '덕수궁 이태왕' 신분으로 승하했기 때문에 돌아간지 얼마 안돼서 바로 짧게(1~2개월 만에) 장례를 치른 것이다. 일본은 혼례를 앞두고 고종을 죽일 이유가 없었는 시각에서는, 뉴욕 타임즈에서는 고종이 자살하였다고 잘못 기재, 보도한 것도 그 연장선으로 본다. #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록 일제가 모양 좋게 가는 걸 원했다고 하더라도 고종이 헤이그 특사로 강제 퇴위되자 전국적 저항이 일어났던 것처럼 고종은 여전히 당시 한민족의 정신적 구심점이었기에 한민족의 정체성 제거를 원하던 일제 입장에선 경우에 따라 제거할 동기도 충분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대한독립의군부 및 신한혁명단 등 독립운동 단체가 고종을 구심점으로 결성되었고 우당 이회영에 의한 고종 망명이 추진되는 등 고종을 둘러싼 독립운동 움직임에 일제의 경계심이 높았던 상황이다. 한편 일본 궁내성 제실회계심사국 장관 구라토미 유자부로의 일기에는, 민족자결주의가 부각된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고종이 병합의 부당함을 호소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 데라우치가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통해 고종에게 을사늑약이 유효했음을 확인하는 문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해 독살했다는 일본 정계의 풍문이 기록되는 등 당시부터 지금까지 독살설이 대두되는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생긴 의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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