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송시열(宋時烈)]
우리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 노선생께서 학문이 성취되고 도덕이 높아 한 시대 유학의 종주가 되었는데, 그의 아들로서 적통을 어어받은 이로 신독재 선생(愼獨齋先生)이 있다. 선생은 어린 시절에 이미 재주와 기량이 드러나 노선생이 늘 바탕은 대현(大賢)도 될 만하다고 칭찬하셨다. 그 이후로 놀고 먹고 자는 것을 그 교훈의 범주를 떠나지 않았고, 안팎으로 완전하여 모난 점이 없었다. 나이 18세에 진사(進仕)에 입격하고 37세에 천거로 재랑(齋郞)에 제수됐으나,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광해(光海)의 난정으로 인륜 질서가 무너지자 드디어 노선생을 모시고 향리로 돌아왔다. 노선생은 동남 일원의 대표적 지도자로서 그 문하에서 배우는 이들이 매우 많았는데, 선생이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몸가짐을 예로 하는 것을 보고는 모두 감화되어 본받았다.
인조(仁祖)가 반정하여 노선생이 맨 먼저 부름에 응하자 선생도 따라서 서울로 갔었는데, 선생을 대헌(臺憲)에 두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이가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애써 지방 고을을 택해 부여(扶餘)로 갔다가 한 해 남짓되어 치적을 남겼고, 이어 임피 현령(臨陂縣令)에 제수됐는데 얼마 안 되어 버리고 돌아왔다. 연이어 익위사 위솔(翊衛司衛率),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노선생이 돌아가시어 복을 마친 후에는 누차에 걸쳐 사헌부의 지평(持平)ㆍ장령(掌令)ㆍ집의(執義) 등에 제수되고 사이사이 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제수받기도 했으나, 다 나아가지 않았다.
건주(建州)의 오랑캐가 쳐들어와 상이 파월(播越)했다는 소식을 선생이 듣고 행장을 챙겨 분문(奔問)길에 나섰다가 길이 막혀 가지 못하고, 적이 물러간 뒤에 도성에 들어와 위로를 드리고 돌아갔다. 다시 집의가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서동생인 김고(金杲)가 남에게 무고를 당해 사건이 예측할 수 없는 지경이었는데, 선생이 궐에 나아가 아우 참판공 김반(金槃)과 대명(待命)하고 있었다. 이에 상이 말하기를, “김고(金杲)가 망언을 했지만 그의 부형이 다 현자들이므로 특별히 용서하는 것이다.” 하였다. 돌아온 뒤에 다시 소명이 있어 선생은 억지로 나아가 사은하였다. 승지(承旨)로 올려 임명한 것을 굳이 사양했으나 허락하지 않아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정일 집중(精一執中)에 관해 논했는데, 상은 그 강론을 경청하였다. 조금 후 병을 고하자 상은 의원을 보내 문병하고 드디어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그 후로도 누차에 걸쳐 승지,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 공조 참의(工曹參議) 등을 제수했는데, 그때마다 사양하였다.
금상(今上)이 세자로 있을 때 대신들이 말하기를, “김모는 일생을 경훈(經訓)에 종사한 사람이므로 그로 하여금 시강(侍講)하게 하면 틀림없이 많은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도 그리 말하여, 드디어 유지를 내려 여러 번 불렀지만 선생은 끝내 가지 않았다. 이웃 고을에 도둑이 발생하였는데, 그 도둑들끼리도 서로 말하기를, “김 승지 집은 지나가서는 안 된다.” 하였다. 상이 그 소식을 듣고는 이르기를, “흉한 무리들도 무서워하고 존경할 줄을 안다.”고 하였다. 인조(仁祖)가 승하하자 금상께서 특명으로 불렀으므로, 마침내 선생이 명을 받고 들어왔다. 이에 늠식(廩食)을 대 주도록 명하고 예조 참판으로 특별히 승진시키고는 이르기를, “이 직책은 학문이 깊은 사람에게 맞는 직책이다.” 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굳이 사양하고 담당 아문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말하여, 공조(工曹)로 옮겼다.
상례(喪禮)의 다르고 같은 점 및 시무(時務) 7개 조항을 올렸는데, 상이 매우 가탄(嘉歎)하면서 그 상소문을 항상 곁에다 두었고 또 《소학》과 《중용》의 구두를 바로잡아서 올리도록 명하기도 했다. 사헌부 대사헌을 제수받았을 때 대행 대왕의 시호 문제로 임금의 뜻에 거슬린 자들이 많았었는데, 선생이 소를 올려 직임을 사양하고, 이어 마음을 비우고 간언을 받아들이라는 충언을 하였는데 세 번이나 소를 올린 끝에 겨우 체직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안 가서 또 소대(召對)하였는데, 선생은 이에 학문하는 법과 정치하는 도리를 말하고 또 상중에라도 신료들을 자주 접견하여 기무(機務)를 강구할 것을 청하였다.
대사헌에 다시 제수되었을 때 김 문정공이 조정에 있으면서 득실을 말하자, 혹 그를 얕보고 업신여기는 조신(朝臣)들이 있었다. 이에 선생이 상소하여 그 문제를 논하고 또 면직을 더 강력하게 바라서 다시 공조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때가 바로 전왕의 발인 시기였다. 그리하여 부득이 나아갔다가 졸곡(卒哭)을 마치고는 곧 돌아가려 했으나, 상이 의자(衣資)를 내리고 간곡히 만류하여 다시 소를 올려 사양하고 사례하였다. 또 대사헌으로 입시했을 때 《중용》을 강하게 되어 그 기회에 폐습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몸소 절검을 행해야 한다고 청하고, 이어서 분묘 수축을 위해 휴가를 청하여 상의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대신 이하 옥당(玉堂) 그리고 태학의 유생들이 너도나도 만류할 것을 청했고, 김 문정공은 자기 자제를 보내 만류하면서 이르기를, “옛날 사마공은 병들었을 때 나랏일을 여회숙(呂晦叔)에게 맡기면 된다고 하였지만 지금 공은 나랏일을 누구에게 맡기고 가려고 하는가.” 하고, 드디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보기에는 김모는 유가의 명망 높은 사람으로서 사림들 모두가 우러러보는 처지입니다. 신은 그를 그대로 가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두 번이나 근시를 보내고 또 수찰(手札)을 내리기도 했으나, 선생은 이미 교외로 나간 뒤였다. 그때 선생의 조카 김익희(金益煕)가 승지였는데, 상이 침전으로 불러들여 정성에서 우러나온 뜻을 친히 전하시며 가서 유시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선생이 돌아왔다. 상은 내사(內使)를 보내 기거를 묻고 연이어 약이(藥餌)를 내리며 하교하기를, “떠날 생각을 조금만 접어 둔다면 국가에도 많은 도움이 되고 사림들에게도 얼마나 본보기가 되겠는가.” 하고, 특별히 헌장(憲長)으로 임명하고 규례에 따라 경연에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이조 판서로 승진 임명하여, 세 번 소를 올리고 사유를 고하자, 상이 유시하기를, “천위(天位)와 천직(天職)을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왕공(王公)으로서 현자를 존대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였다. 선생은 그에 감격하여 나아와서는 드디어 입대하여 시대의 긴요한 일들을 극론하였다.
병으로 오래도록 공사(供仕)하지 못하자 상이 염려되어 계속 의원을 보내 문질하였다. 선생이 인재의 전형을 맡았을 때, 목적은 인재 발굴이었지만 역시 법도에 어긋나게도 하지 않아 모두가 만족해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상신(相臣)과 뜻이 맞지 않아 소를 올려 자신을 탄핵하고 즉시 강 밖으로 나왔다. 상이 수찰을 두 번이나 내렸으나 기어코 떠나니, 또다시 근시(近侍)를 보내 중로까지 뒤쫓아가서 다시 들어오도록 하였지만 선생은 다시 자신의 충정을 아뢰었다. 상은 다시 돌아오게 하지 못할 것을 알고 말을 주어 호송하도록 했는데, 그때 그 일로 나라 전체가 매우 놀라서 상은 그 상신을 특별 면직을 시킴으로써 물의에 답하였다.
그 전에 대사간 김경여(金慶餘)와 집의 송준길(宋浚吉) 등이 김자점(金自點)의 죄상을 논하면서 그 당여까지 탄핵한 일이 있었는데, 김자점 등이 그 후 음모를 꾸미면서 암암리에 북인(北人)들을 끌어들여 김 문정공과 선생이 우두머리가 되어 모사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북사(北使) 6인이 한꺼번에 나오면서 국경 지대에 병력을 집결하고 위압을 가했으므로 온 나라가 소란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태연히 말하기를, “직신(直臣)으로 알려진 한(漢) 나라의 이응(李膺)과 두밀(杜密)처럼 유명해진다면야 죽은들 무슨 한이겠느냐.” 하였다. 상이 직접 나서서 수습하고 다른 제공들도 힘을 다해 주선함으로써 일이 해결되었으나, 그 후 김자점의 모사가 발각되어 복주(伏誅)되고 나서야 그 사건 전모가 다 드러났다.
인조(仁祖)의 연제(練祭) 때 들어왔다가 돌아가려 하면서 소를 올려 모든 겸직을 해직해 주도록 청했고, 상이 인견하려고 했을 때는 선생은 이미 떠나버린 뒤였다. 그 후로 연거푸 헌장(憲長)으로 불렀으나 모두 소를 올려 사양하고 이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휘호(徽號)에 관하여 망론을 했었고 또 유계(兪棨)가 쓸 만하다고도 말했었는데, 지금 유계가 휘호 문제로 인하여 무겁게 처벌을 당한 마당에 신 혼자 면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위유하고 이르기를, “세상이 이럴수록 노성(老成)한 이가 생각난다.” 하였다.
얼마 후 연신(筵臣)의 제청으로 우로전(優老典)을 적용하여 작질을 올려 이조 판서를 제배하고 미두(米豆)까지 내렸다. 그때 선생은 나이가 제도상으로 1세가 모자란다 하여 굳이 사양하였다. 그러자 일단 명을 거두었다가 얼마 있지 않아서 다시 하교하기를, “김모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먹을 것은 다시 내리라.” 하였는데, 선생이 사양하면서 사례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내 경의 나이와 덕을 존모하면서도 조석으로 덕음(德音)을 들을 수가 없는 것이 한스럽다.” 하였다. 형조(刑曹)에 큰 사건이 있자 상이 특별히 낭관을 보내 수의(收議)하였다.
이듬해에 지난번의 명에 따라 정헌(正憲)으로 자급을 올렸으며, 대신의 제청이 있어 드디어 숭정(崇政)으로 초자(超資)하여 의정부 좌참찬에 임명하고 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제수했는데, 모두 사양하고 또 치사(致仕)를 청하였다. 선생이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내 생각에 세상에 살아 있을 날이 많지 않을 것 같아 여러 묘소에 하직 인사를 올리고 싶다.” 하였는데,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병으로 누웠고, 숭정(崇禎) 병신년에 향년 83세로 서거하여 천호산(天護山) 고운승사(孤雲僧舍) 북쪽에 장례를 지냈다. 부음을 듣고 상이 이르기를, “김모는 유림의 영수이고 조정의 중한 명망을 지니고 있으니, 특별히 예장(禮葬)을 내리라.” 하고 근시를 보내 치제했으며, 뒤에 시호를 문경(文敬)이라 하였다. 이에 진신(搢紳)ㆍ장보(章甫)들이 서로 눈물을 흘리며 조의를 표했고, 장례 때는 사방에서 많은 이들이 와서 곡하고 전(奠)을 올리면서 ‘사문(斯文)이 망했다.’고 하였다.
선생은 자품이 뛰어나 청백하면서도 과격하지 않고 곧으면서 휘어지지 않았다. 충신효제(忠信孝悌)를 입신(立身)의 기본으로 삼고 궁리(窮理)와 거경(居敬)이 학문하는 기반이었기 때문에, 덕이 쌓이고 사업이 닦아지는 것이 순서가 있었고 마음가짐과 몸가짐이 매우 발랐다. 어버이가 살아 계신 50년 동안에는 오직 노선생만을 본받았고, 노선생이 세상을 뜬 뒤에도 그 길을 그대로 걸었다. 그리고 노선생이 혹 못다 하신 일은 선생이 뒤를 이어 구의(舊儀)를 가감하기도 하고 유편(遺編)을 손질하기도 하였는데, 모두 빈틈이 없었다. 중년에 봉양을 위하여 잠시 이사(吏事)를 하기도 했고 금상(今上) 초기에는 그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속에 쌓인 것을 펴보일 생각도 했었으나, 흉한 무리들이 장난질을 하여 나라가 화를 당할 뻔한 일을 겪고서는 더욱 세상에 뜻이 없어 날마다 문인 제자들과 함께 학문에 몰두하면서 세상을 마쳤다. 그러나 그 대개는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상례(喪禮)가 잘못된 것들이 많다 하여 주자(朱子)의 설을 상고하여 한 책자를 만들어 올림으로써 천고의 누습을 일소하였고, 나라의 폐단과 병든 백성들을 조용히 진압해야지 사단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했으며, 경연에서 강설할 때는, 임금의 마음 하나가 일만 가지 일의 근원이 되므로 언제나 이(理)와 욕(欲)을 털끝 사이라도 정밀하게 살펴야 한다고 권하면서 요堯, 순舜, 우禹, 탕湯의 도가 다 그 범주 안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마음은 경(敬)으로 다스리고 정사는 성실이 제일이라는 등, 모두가 노성하고 실질적이면서도 절실하고 간결하여 빈말이라고는 없었다.
남과 대화할 때면 아무리 창졸간이라도 자상하고 단아했으며, 상신(相臣)의 뜻을 거슬러 돌아갈 때도 상신은 매우 과격한 말을 했지만 선생은 그저 말하기를, “송(宋)의 한기(韓琦)와 범중엄(范仲淹)은 전상(殿上)에서는 굳이 의견을 같이하지는 않았어도 일단 내려오면 얼굴을 붉힌 일이 없었다. 군자는 화합(和合)하고 뇌동(雷同)하지 않는 것인데, 말 한마디 서로 맞지 않았다 하여 불평으로 대해서야 되겠는가.”라고만 했을 뿐이다. 선생은 그야말로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는다는 안토낙천(安土樂天)의 경지에 가까운 분이라고 할 것이다.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색욕에 있어서는 매우 담박한 편이어서, 누가 혹시 색으로 몸을 망친 자가 있으면 내가 더럽혀지기라도 할 듯이 비루하게 느껴진다.” 할 정도였으므로, 학문을 논함에 있어서도 언행(言行)이 일치하고 유현(幽顯)이 일치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혼자 갈 때 그림자에 부끄러울 것 없고 혼자 잘 때 이불에도 부끄러울 것 없다.[獨行不愧影 獨寢不愧衾]”고 한 진서산(眞西山)의 말을 매우 좋아했는데, 자호를 ‘신독(愼獨)’이라고 한 것도 대개 본인이 실제 그렇게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세상의 학자들이 자과자대(自誇自大)하는 것을 병폐로 여겨 늘 경계하기를, “차라리 낮을지언정 높지 말고 차라리 옹졸할지언정 공교하지 말라. 정자ㆍ주자 이후로 도리(道理)가 크게 밝아졌으므로 그것을 그대로 지키고 그대로 실천하면 그뿐인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늘그막에 충양(充養)이 완숙하여 정밀하고도 명랑한 기운이 면목에 나타났고, 평화로운 기색과 안정된 정신, 그리고 공순한 예모에다 동정과 수작이 단정하고 단아해서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법도에 맞았으므로, 누구나 그 말을 들으면 들뜬 마음과 들뜬 기운이 저절로 가라앉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일찍이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았지만 사람을 훈증(薰蒸)시키고 계도(啓導)한 공훈은 이루 셀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율곡 선생이 석담(石潭)에서 도를 강하다가 세상에 나와서는 임금과 백성을 모두 자신의 책임으로 삼고 공자와 정자ㆍ주자의 도를 세상에 크게 밝혔고, 노선생은 거기에서 질박하고 실질적인 공부를 하여 그 정통을 얻었던 것인데, 선생은 또 그 법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니, 문로(門路)가 매우 바르므로 이대로 폐단 없이 잘 전해지리라고 믿는 바이다.
선생의 휘는 집(集), 자는 사강(士剛)이다. 김씨들이 광주(光州)를 관향으로 삼은 것은 신라의 왕자 김흥광(金興光)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여러 대를 두고 크게 현달하여 드디어 우리나라의 명문 집안이 되었다. 고조의 휘는 종윤(宗胤)으로 군수였고, 증조의 휘는 호(鎬)로 현감이며, 조부의 휘는 계휘(繼輝)로 관직은 참판이고 선묘조(宣廟朝)의 명신이었다. 사계 선생은 휘가 장생(長生)이고 배위는 창녕 조씨(昌寧曺氏)이다. 선생은 좌의정 유홍(兪泓)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치매를 앓았고, 율곡 선생의 서녀가 교양이 있어서 집안 살림을 대신 맡았다. 아들 둘은 김익형(金益炯)ㆍ김익련(金益煉)인데 생원이고, 두 딸은 생원 김태립(金泰立) 및 정광원(鄭廣源)에게 시집갔다. 김익형은 6남을 두었는데 김만리(金萬里)ㆍ김만규(金萬圭)ㆍ김만질(金萬耋)ㆍ김만량(金萬量)ㆍ김만봉(金萬封)ㆍ김만당(金萬堂)이고, 세 딸은 송세걸(宋世傑)ㆍ김석보(金碩輔)에게 시집가고 하나는 요사했다. 김익련은 4남을 두었는데 김만성(金萬城)ㆍ김만제(金萬堤)ㆍ김만방(金萬坊)ㆍ김만용(金萬墉)이고, 딸 하나는 어리다. 김태립은 3남을 두었는데 김정원(金鼎元)ㆍ김정창(金鼎昌)ㆍ김정중(金鼎重)이고, 두 딸은 송세웅(宋世雄)ㆍ이연명(李然明)에게 시집갔다. 정광원의 1남은 정덕창(鄭德昌)으로 진사이고, 딸 셋은 백홍량(白弘亮)ㆍ최육(崔淯)ㆍ정하익(丁夏益)에게 시집갔다. 그 밖의 손자 증손자가 안팎으로 약간 명 있다.
나 시열(時烈)은 소년 시절 노선생을 섬기다가 또 선생과 종유한 지도 꽤 오래되었다. 일찍이 노선생의 행장을 찬하라고 명하면서 선생이 이르기를, “조금이라도 지나친 표현이 있으면 사승(師承)의 의리상 매우 성실하지 못한 것이 된다.” 하여 시열이 황공한 마음으로 그 명을 따랐었다. 지금 이 묘도(墓道)의 글을 쓰면서 차라리 사실보다 부족한 표현이 있을지언정 감히 보탬이 없는 것은 역시 그날의 교훈을 잊지 못해서이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저기 저 석담은 維彼石潭
도학의 원천이었다 道學之源
그 적통을 누가 받았던가 誰嫡其傳
문원 바로 그분이었네 曰維文元
그리고 그 훌륭한 계통을 有卓其緖
선생이 이으셨소 先生是承
자품이 순수하고 교양이 바르기에 資純養正
그 도가 응축되었던 것이지요 其道以凝
총명하고 재주 있고 말 잘하면 聰明才辯
세상에서는 그를 능력자라고 世蓋爲能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匪無可述
그래도 인이라 말할 수는 없지요 而仁不稱
그런데 선생께서는 참으로 允矣先生
오직 실질적인 면에 힘쓰셨지요 惟實之務
학문은 전일하게 행실은 독실하게 學專行篤
인과 효 공손과 우애였지요 仁孝悌友
백발로 어버이를 모셨는데 華髮趨庭
두 분 다 종장이셨기에 兩世宗匠
태산은 비록 무너졌어도 泰山雖頹
의지할 대들보는 있었지요 梁木可放
구고(九臯)에서 학이 울고 鶴鳴于皐
예물 갖추어 맞이하셨기에 玉帛交走
주상 앞에서 다스리는 법 말하면서 陳謨上前
순과 우가 전수한 심법(心法) 아뢰고 舜禹授受
성상이 자리에 올라서는 聖上登位
누구보다 먼저 소명에 응하여 首膺命書
모든 일에 자문을 구하니 乃詢乃諮
처음부터 밝은 지혜를 드렸지요 貽哲于初
사람들은 다 선생을 두고서 人曰先生
진실로 의롭고 또 어질기에 允義且仁
앞으로 왕실을 도와 將輔王室
이 세상 사람들 맑히리라 했더니 以淑斯人
일이 크게 어긋나서 事乃大謬
다 걷어치우고 돌아올 때 乃卷而歸
하인 천인배도 눈물짓고 廝臺涕咨
유생들도 모두 한탄했다오 章甫戲欷
산림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旣反初服
공손하고 삼가는 마음으로 我心慺慺
쉴 새 없이 조심하고 두려워하기를 淵氷乾惕
늙었다 하여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不以老休
조예가 깊고 수양이 익어 造養旣熟
한도 끝도 보이지 않았지요 莫見縫界
청렴하면서도 너무 심하지 않고 廉不至劌
화기 속에도 절제가 있었지요 和亦有制
의견이 어찌 다 같았겠습니까만 豈無異同
끝까지 헐뜯은 일 없었습니다 卒莫與疵
왜 백 년토록 사시어 胡不百年
우리 후생들 돌봐주지 않는지요 惠我後生
천호의 산에는 天護之山
바위 굴이 우뚝 높아 巖峀高擎
억년 만년을 두고 彌億萬年
영원히 그 무덤의 표지가 되리다 永表其塋
문인인 은진 송시열이 짓다.
神道碑銘 幷序 [宋時烈]
惟我文元公沙溪老先生。學成道尊。爲一代儒宗。有爲其子而得其傳者。曰愼獨齋先生。先生幼端序則見。老先生每稱其資可爲大賢。旣而。游居食息。不離訓典。內外完好。無有圭角。年十八。中進士。三十七。薦授齋郞。旣而。光海政亂。彝倫斁塞。遂奉老先生歸鄕里。老先生倡道東南。游其門者甚衆。見先生事親孝謹。持身以禮。皆觀感而取法焉。仁祖反正。老先生首膺徵命。先生隨往京師。有言先生可置臺憲。先生力求外縣。遂爲扶餘。歲餘政成。旣遞旋拜臨陂縣令。未幾棄歸。連拜翊衛司衛率,全羅道都事不赴。老先生歿。制除。屢拜司憲府持平掌令執義。間授繕工僉正宗親府典籤軍資監正。皆不就。建奴入寇。先生聞上播越。俶裝奔問。路阻不果進。寇退入都。進慰而歸。復爲執義辭。庶弟杲被人誣告。事將不測。先生詣闕。與弟參判公槃待命。上曰。杲固妄言。其父兄皆賢者。故特原之。旣歸。復有召命。先生黽勉赴謝。陞拜承旨。累辭不許。入侍經筵。講論精一執中之道。上傾聽。已而病告。上遣醫問之。遂許其歸。後屢拜承旨,元孫輔養宮,工曹參議。皆辭。今上爲世子。大臣言某一生沈潛經訓。使之侍講。則必有薰陶之益。淸陰金文正公。亦以爲言。遂下旨屢召。先生終不起。有盜發旁縣。相謂曰。金承旨廬不可過。上聞之曰。兇徒亦知畏敬矣。仁祖薨。今上特旨以召。先生遂承命入臨。命繼廩食。特陞禮曹參判。而曰。稽古讀書。實合此職。先生力辭。該曹亦言其非例。遂移工曹。上喪禮異同及時務七條。上深加嘉歎。常以其疏置左右。命校正小學中庸句讀以進。除司憲府大司憲。時以大行議諡。多忤旨者。先生上疏辭職。仍戒虛心受言。疏三上乃遞。已而召對。先生進爲學爲治之道。又請諒闇之中。頻接臣僚。講究機務。復拜大司憲。時金文正在朝言得失。朝臣或有侵侮者。先生疏論之。又祈免益力。復移工曹。時廞衛已戒。遂出謝。卒哭訖。卽乞歸。上勉留甚懇。賜以衣資。上疏辭謝。又以大司憲。入侍講中庸。因請躬行儉德。以革弊習。已而。乞假修墓。上許之。於是大臣玉堂館學諸生。交章請留。金文正遣子弟挽之曰。昔司馬公病。謂國事付呂晦叔。今公欲去。國事將誰付耶。遂上箚曰。臣伏見金某儒門宿望。士林莫不嚮仰。臣以爲不宜苟循。其去不留。自忇也。上乃再遣近侍。又下手札。則先生已出郊外。時從子益煕爲承旨。上引入寢殿。親宣切切。使之往諭。先生乃還。上遣內使問起居。連賜藥餌。敎曰。少停遐思。則國家之補益。士林之矜式。爲如何哉。特命以憲長例入經筵。陞拜吏曹判書。三疏三告。上諭之曰。不與之共天位,治天職。則非王公之尊賢者也。先生感激出謝。遂入對。極論時務。有疾久未供仕。上念之。醫問相及。先生銓選。要在得人。而亦不戾於法。物情洽然。已而忤相臣。陳疏自劾。卽出江外。上再下手札不留。再遣近侍。追至中路。諭令還入。先生更陳情悃。上知其不可回。命給馬護送。時中外甚駭。上特免相臣以謝物議。先是。大司諫金慶餘,執義宋浚吉等。論自點罪狀。幷劾其黨與。自點等陰謀不軌。而潛構於北人。謂金文正與先生爲首。於是北使六人幷出。又以兵壓境。擧國震懼。先生怡然曰。李,杜齊名。死亦何恨。上親爲彌縫。諸公又竭力周旋。遂得解。後自點謀覺伏誅。其事遂盡發。仁祖練祭入赴。將還。上疏乞解兼帶。上將引見。而先生已行矣。連以憲長召。皆上章辭。仍曰。臣嘗妄論徽號。又言兪棨之可用矣。今棨以議諡重被行遣。臣不宜獨免。上慰諭。且曰。世道至此。思用老成。俄以筵臣言用優老典。陞秩拜吏曹判書。且給米豆。時先生據格少一歲堅辭。遂反汗。旣而敎曰。某餘日無幾。其復給食物。先生辭謝。御批慕卿齒德。恨不能朝夕得聆德音爾。刑曹有大讞。上特遣郞官收議。翌年。申前命陞正憲。有大臣言。遂超崇政資。拜議政府左參贊。又爲判中樞府事。皆力辭。又乞致仕。先生謂子弟曰。吾自量生世無多。欲永辭諸墓。未幾寢疾。崇禎丙申年八十三而卒。葬天護山孤雲僧舍之北。訃聞。上曰。金集儒林領袖。朝廷重望。特賜禮葬。近侍致祭。後諡文敬。於是搢紳章甫出涕相弔。及窆。四方爭來哭奠曰。斯文喪矣。先生資稟絶異。淸而不激。介而不矯。以忠信孝悌爲立身之本。以窮理居敬爲進學之基。故其進修有序。操履甚正。觀志五十年。唯老先生是儀是則。老先生歿。一遵先行。蓋老先生有所未遑者。先生能繼能述。損益乎舊儀。梳洗乎遺編。皆可置水而不漏焉。中年爲養。暫爲吏事。逮今上初。感激知遇。期展所蘊。而兇徒媒孼。幾禍宗國。則益無當世意。日與門人子弟。溫繹舊學。以沒其世。然其大槪則可見矣。謂本朝喪禮。多所杜撰。詳考朱子議。作一書以進。庶幾一洗千古之陋。謂國弊民殘。當靜以鎭之。以作起事端爲戒。至其經筵講說。則以人主一心爲萬化之原。每勸其精察於理欲毫釐之間。而謂堯舜禹湯之道。皆不外是。又以爲治心須用敬。而爲政在誠實。皆老成質愨。精切簡約。不爲空言。與人言。雖當倉卒。未嘗不詳雅。其忤相臣而歸也。相臣之言甚激。先生只曰。宋之韓,范。上殿未嘗苟同。下殿未嘗失色。君子和而不同。何嘗一言不合。而便以不平相待哉。其所謂安土樂天。不怨不尤者。先生庶幾焉。嘗曰。吾於色欲。分數甚寡。或有以敗身者。則鄙之若將浼焉。故其論爲學。要在言行相顧。幽顯一
致。甚愛西山獨行不愧影。獨寢不愧衾之語。其自號愼獨者。蓋其用力之實地也。病世之學者夸毗自大。嘗戒以寧卑毋高。寧拙毋巧。程朱以後。道理大明。只當謹守勉行而已。先生晩世。充養純完。精明之氣。達於面目。色夷氣和。神定禮恭。動靜酬酢。端詳閑雅。自然之中。成法井井。聽其言者。放心浮氣。自然消釋。雖不以師道自居。而其薰蒸啓迪之功。蓋不可數計矣。蓋自栗谷先生講道石潭。出則以君民自任。洙泗洛建之道。大明於世。老先生專於朴實頭用功。以得其宗。而先生又承其旨訣。門路甚正。庶幾傳之無弊云。先生諱集。字士剛。金氏籍光州者。實自新羅王子興光。累世大顯。遂爲我東右族。高祖諱宗胤。郡守。曾祖諱鎬。縣監。祖諱繼輝。參判。爲宣廟朝名臣。沙溪先生諱長生。配昌寧曺氏。先生娶左議政兪泓女。病癡。栗谷先生庶女。有敎實攝內治。其二男。益炯,益煉。生員。二女。適生員金泰立,鄭廣源。益炯六男。萬里,萬圭,萬耋,萬量,萬封,萬堂。三女。適宋世傑,金碩輔。一夭。益煉四男。萬城,萬堤,萬坊,萬墉。一女幼。金泰立三男。鼎元,鼎昌,鼎重。二女。適宋世雄,李然明。鄭廣源一男。德昌進士。三女。適白弘亮,崔淯,丁夏益。內外孫曾。凡若干人。時烈少事老先生。復從先生游甚久。嘗以命撰老先生狀文。先生曰。有些溢辭。師承之義。何敢不誠如此。時烈惶恐受命。今於墓道之文。寧劣於實而不敢有加者。蓋不忘當日之敎云爾。銘曰。維彼石潭。道學之源。誰嫡其傳。曰維文元。有卓其緖。先生是承。資純養正。其道以凝。聰明才辯。世蓋爲能。匪無可述。而仁不稱。允矣先生。唯實之務。學專行篤。仁孝悌友。華髮趨庭。兩世宗匠。泰山雖頹。梁木可放。鶴鳴于皐。玉帛交走。陳謨上前。舜禹授受。聖上登位。首膺命書。乃詢乃諮。貽哲于初。人曰先生。允義且仁。將輔王室。以淑斯人。事乃大謬。乃卷而歸。廝臺涕咨。章甫歔欷。旣反初服。我心慺慺。淵氷乾惕。不以老休。造養旣熟。莫見縫界。廉不至劌。和亦有制。豈無異同。卒莫與疵。胡不百年。惠我後生。天護之山。巖岫高擎。彌億萬年。永表其塋。門人恩津宋時烈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