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의정 한수재 권 선생 신도비명 병서左議政寒水齋權先生神道碑銘 幷序
숙종대왕(肅宗大王)이 재위한 지 43년째 되던 해에 성상의 몸에 병환이 있어 목욕을 위해 온양(溫陽)의 온천에 거둥하였다. 이때에 한수재 권 선생이 새로 이공(貳公 찬성)에 제수되는 교지를 받았으므로 감히 사가(私家)에 물러나 있을 수가 없어서 괴산(槐山)의 촌사(村舍)에 나아가 머무르며 소(疏)를 올리고 대죄하였다. 그러자 성상이 후한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고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선생과 함께 돌아오도록 하였다. 성상이 반드시 선생을 불러들이고자 하여 직명을 체차하도록 윤허해서 포의(布衣) 차림으로 입현(入見)하게 하였으니, 이는 은혜와 예우가 특별한 것이었다.
이에 선생이 어쩔 수 없이 행궁에서 호가(扈駕)하는 의리에 준하여 군복 차림으로 입대하니, 성상이 매우 기뻐하여 앞으로 나아오게 하고 간곡하게 머물러 있기를 권면하면서 치안(治安)의 방도에 대해 자문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천하의 일은 어느 한 가지라도 인주(人主)의 마음에 근본을 두지 않는 것이 없는데,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은 또 ‘직(直)’ 자 한 글자에 근본을 둡니다. 신의 스승 송시열(宋時烈)이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에도 이것을 들며 문인들을 훈계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우암(尤菴 송시열) 선생이 주장한 《춘추(春秋)》의 대의(大義)에 관해 아뢰고 성상에게 효종(孝宗)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도록 권면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춘추가 많으시다는 이유로 큰일을 도모하려는 뜻을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옛날 위 무공(衛武公)은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억계(抑戒)를 지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성상이 의용(儀容)을 가다듬고 이를 가납하였다.
선생은 얼마 뒤에 상소문을 남기고 곧장 돌아가서, 우의정에 제수되고 좌의정에 승진되어도 힘껏 사양하고 숙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숙종은 특별히 대우하는 것을 시종 변치 않고 자주 사람을 보내어 물품을 하사하고 안부를 물었으며, 선생을 참소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그의 죄를 묻고 배척하였다.
경종(景宗) 원년인 신축년(1721) 8월 29일에 선생이 별세하니, 관학(館學)의 유생이 모두 달려와 자리를 만들어 곡하였고 문인(門人) 중에도 가마(加麻)한 자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숙종이 승하한 뒤에 흉악한 무리가 다시 정권을 잡았는데, 평소에 숙종에게 원망을 품었던 터라 숙종의 처분을 일체 뒤집었다. 그러고는 역모를 꾀하다 주벌당한 자의 손자인 신치운(申致雲)을 시켜 선생을 무함하여 관직을 추탈하게 하였다. 그 후에 금상(今上 영조)이 즉위하여 선생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제사를 지내주었으며, 또 시장(諡狀)을 올리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특별히 ‘문순(文純)’이라는 시호를 하사하고 서원을 세워 제향하는 것을 윤허하였다.
선생은 휘가 상하(尙夏)이고 자가 치도(致道)이며, 세계(世系)는 안동(安東)에서 나왔으니, 고려(高麗) 때의 태사 행(幸)의 후손이다. 이후로 대대로 벼슬이 이어지다가 본조에 들어와서는 참판 극화(克和)와 참찬 양평공(襄平公) 감(瑊)이 모두 현달하였다. 그러다가 오수 찰방(獒樹察訪) 휘 주(霔), 선산 부사(善山府使) 휘 성원(聖源), 사헌부 집의 휘 격(格)에 이르렀으니, 이분들이 선생의 3대 선조이다. 집의공 역시 곧은 도로써 이름이 났는데, 도정 이초로(李楚老)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숭정(崇禎) 신사년(1641, 인조19)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빼어나 어려서부터 이미 대인의 기국과 도량이 있었으니, 시남(市南) 유공(兪公 유계(兪棨))의 칭찬을 받았다. 21세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선생은 일찍부터 우암과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두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친상(親喪)을 당한 뒤로는 마침내 세상의 분분한 벼슬길에 발길을 끊고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하는 데에 전심하였다. 상기(喪期)를 마친 뒤에는 화양동(華陽洞)에서 우암을 모시며 사서(四書) 및 《계몽(啓蒙)》, 〈계사(繫辭)〉, 《홍범내편(洪範內篇)》을 강학하였다. 을묘년(1675, 숙종1)에 우암이 북쪽으로 유배되자 문인들과 함께 상소하여 변론하였으며, 가솔을 모두 데리고 청풍(淸風)의 골짜기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조용히 지내면서 잠심(潛心)하고 완미하며 글을 읽고 사색하면서 생을 마칠 때까지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경신년(1680, 숙종6)에 우암이 해도(海島)에서 돌아오자, 선생이 찾아가 문안하였다. 이후로 십 년의 절반을 화양(華陽 송시열)의 문하에서 지내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서적을 놓고서 토론하고 질정하였다. 우암은 오도(吾道)가 인재를 얻은 것을 매우 기뻐하여 선생이 지내는 방에 ‘수암(遂菴)’이라는 이름을 써주었으니, 이는 설 문청(薛文淸)의 말에서 취한 것이었다. 또 서재의 이름을 ‘한수재(寒水齋)’라고 지어주었는데, 이는 주자의 〈감흥(感興)〉 시의 말을 인용하여 심법(心法)을 전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었다.
이를 통해 우암이 선생에게 부탁했던 것이 막중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젊어서부터 이미 대의(大義)로써 자임하였으니, 출처(出處)는 비록 우암과 다소 달랐으나 그 도(道)는 똑같았다. 아마 우암도 효종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틀림없이 출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갑술년(1694, 숙종20) 이후에는 윤증(尹拯)의 무리가 총애받는 정승을 등에 업고 일어나서 적신 윤휴(尹鑴)를 조술(祖述)하고 또 장희재(張希載)를 비호하여 그의 흉역한 행태를 조장하였다. 선생은 세도(世道)가 날로 길고 긴 암흑 속으로 흘러들어 가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지조를 지킬 뜻을 견고히 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그 은미한 뜻을 남에게 내비친 적이 없었으므로 선생의 뜻을 아는 자가 드물었다.
선생은 처음에 공릉 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고 또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으며, 의금부 도사, 상의원 주부, 공조 정랑으로 옮겨 갔다. 발탁되어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가 장령, 집의, 성균관 사업, 세자시강원 진선, 종부시 정으로 옮겨 갔다. 무인년(1698, 숙종24)에 특별히 호조 참의에 승진되었다가 이조 참의로 옮겨 가고 찬선, 좨주를 겸하였다. 계미년(1703, 숙종29)에 또 호조 참판에 오르고 대사헌,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임진년(1712, 숙종38)에 특별히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제수되었다가 이조 판서로 옮겨 갔다. 이상은 모두 선생이 전후로 제수되었던 관작으로, 힘껏 사양하여 받아들이지 않은 것들이다.
우암이 화를 당하게 되었을 때에 선생은 우암이 올라오는 길로 찾아가 우암을 만나 뵈었다. 후명(後命)이 이르자 선생이 들어가서 작별인사를 하였는데, 우암이 선생의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내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라는 말처럼 되기를 소망했는데, 지금 끝내 듣지 못하고 죽게 되었으니, 이후의 일은 오직 치도 자네만 믿겠네. 학문은 응당 주자를 주장하고 사업은 응당 효종의 대의를 주장해야 할 것이네.”라고 하였다. 또 예전에 작별하면서 ‘직(直)’ 자를 써주었던 의미를 들어 거듭 일러 주었다. 우암이 간곡하게 사도(斯道)를 부탁한 내용들이 모두 유문(儒門)의 요결(要訣)이었으니, 전수함이 정녕하기가 이와 같았다.
성상이 노릉(魯陵)과 신비(愼妃)의 위호를 회복시키고자 하여 백관에게 논의하게 하고 또 선생에게 자문하였는데, 선생이 논의하여 대략 아뢰기를, “정난(靖難) 때에 노산군(魯山君)이 덕 있는 분에게 양보하여 왕위를 선양하고 존귀하게 상왕(上王)이 되셨으니, 애초에 폐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마지막에 내려진 처분도 역시 세조(世祖)의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위호를 회복시킨다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모두 유감이 없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비는 중종(中宗)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의 원비(元妃)로, 죄 없이 폐출당하였으니, 그 당시로서는 김정(金淨)과 박상(朴祥)이 복위를 청했던 논의가 실로 정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이 논의가 폐기되어 책봉하는 전례를 행하지 못한 이상 신비는 선왕의 폐비(廢妃)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만약 추숭하신다면 자사(子思)의 가르침에 어긋나게 될까 염려됩니다.”라고 하니, 성상이 마침내 노산군만 복위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박세당(朴世堂)이 주자의 사서(四書) 주(註)를 비방하고 이상 경석(李相景奭)의 비문을 지으면서 우암을 무함하고 욕보인 일이 있더니, 이상(李相)의 손자가 또 거듭하여 우암을 무함하고 욕보였다. 이에 선생이 상소하여 변론하고, 이어서 박세당이 경서를 비방한 일을 논척하였다.
우암은 일찍이 ‘우리 동국(東國)은 신종(神宗)과 의종(毅宗) 두 황제의 은혜와 의리를 모두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여겨 사당을 세워 제향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 이에 탐라(耽羅)에 있을 때에 이 일을 선생에게 부탁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이를 이루게 되었다. 이를 두고 사류(士類)들은 혹 의기(義起)의 예(禮)라는 의심을 버리지 못하였고, 화(禍)를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또 반대하며 버텼다. 그러나 선생은 존주(尊周)의 대의와 관계된 일이라고 하여 조금도 여기에 흔들리지 않고 화양동에 사당을 세워 의종황제가 순국한 해의 1월에 맞추어 처음으로 제사를 올렸다.
성상이 또 도성 안에 사당을 세워 제향하기를 원하여 선생에게 자문하니, 선생이 이를 힘껏 도왔다. 그러자 조정의 논의가 분분하게 일어났는데, 성상은 뜻을 바꾸지 않고 마침내 단을 쌓고 제사를 올렸다. 지금의 대보단(大報壇)이 바로 이때에 지은 것이다. 성상이 일찍이 강연(講筵)하는 자리에 나아가 선생의 아우 상유(尙游)에게 선생을 만나보기를 원한다는 뜻을 조용히 전하였으니, 성상이 선생을 돌보고 의지한 것이 이처럼 지극하였다.
처음에 선생은 윤증과 함께 우암을 섬겼는데, 윤증은 그의 부친이 적신 윤휴에게 붙은 것을 계기로 스승을 배신하였고, 묘갈명 사건으로 틈이 더욱 벌어진 뒤로는 점점 패려한 짓을 자행하였다. 이에 선생이 그를 미워하여 교유를 끊어버렸는데, 을미년(1715, 숙종41)에 《가례원류(家禮源流)》 사건이 발생하면서 윤증의 심사와 행적이 여지없이 모두 드러나게 되었다. 《가례원류》는 시남이 찬집(纂輯)한 예서(禮書)로, 시남이 윤증을 시켜 수정하고 정리하게 한 것인데, 뒤에 시남의 손자 유상기(兪相基)가 이를 간행하려고 하자 윤증이 핑계를 대며 거절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 책을 편찬할 때에 윤증의 부친 역시 일조한 바가 있었으니, 윤증이 핑계 대며 거절한 것은 고의(故意)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에는 조정의 명령으로 간행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유상기가 깨끗한 판본을 구하였으나 윤증이 그의 아들 윤행교(尹行敎)와 함께 이 책을 숨기고 내놓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집안의 책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유상기가 처음의 책으로 판각하고 선생에게 서문을 써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선생이 윤증의 죄를 매우 엄중하게 성토하여 말하기를, “아버지로 섬기던 분에게 소진(蘇秦)과 장의(張儀)의 술수를 썼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형칠(邢七)의 낭패(狼狽)한 정도가 본래 그의 기량이다.”라고 하였다.
정공 호(鄭公澔) 역시 그 아래에 발문(跋文)을 쓰면서 선생과 똑같이 윤증의 죄를 비난하였는데, 이 책을 어람(御覽)하도록 올리자 성상이 노하여 특명으로 정공을 파직하였다. 그러자 지방의 유생이 성상의 뜻을 엿보고 상소하여 선생을 비난하니, 선생이 글을 올려 견책을 청하며 아뢰기를, “윤증이 유계의 제문(祭文)을 지으면서 ‘선생은 나를 아들처럼 보았고, 나는 선생을 아버지처럼 섬겼다.’라고 하였으니, 은의(恩義)가 돈독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계가 살아있을 때에 부탁했던 것을 죽은 이후에 배신하여 들어주지 않았으니, 신이 ‘소진과 장의의 술수를 썼다.’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윤증이 사십 년을 모신 스승을 무함하고 비방하며 배척해 끊어버려서 마치 원수와 같이 보더니, 지금 유계에게도 똑같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신이 ‘형칠의 낭패한 정도’라고 한 것을 이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성상이 오랫동안 답을 하지 않았는데, 비답이 내리고 보니 크게 온당치 못하다고 여기는 뜻이 있었다. 그러자 정언 조상건(趙尙健)이 이에 대해 힘써 간쟁하다가 찬배되었는데, 적신 이진유(李眞儒)가 또 이 기회를 틈타 허언을 올려서 성상에게 장려와 가납(嘉納)을 입었다. 또 적신 유봉휘(柳鳳輝)와 그의 무리 정식(鄭栻)이 옥당의 차자를 더럽혀가며 선생을 무함하니, 성상이 선생을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얼마 뒤에 윤증의 무리인 최석문(崔錫文) 등이 윤증이 신유년(1681, 숙종7)에 우암에게 보내려고 했던 서찰을 내놓고서 선생에게까지 비방과 모욕을 가하였다. 그러자 관학의 유생들이 차례로 상소하여 논변하면서 혹은 윤선거(尹宣擧)의 묘갈명을 써서 올리기도 하고 혹은 윤증이 우암에게 보내려고 했던 서찰에 대해 논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상이 이를 일체 물리치니, 성상의 마음이 이 문제에 있어서 처음에는 미혹됨이 없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갑론을박함에 따라 사실이 절로 명백해지자 성상이 점차 깨닫는 바가 있게 되었다. 이에 얼마 뒤에 사특한 무리들을 쫓아내고 윤증이 우암에게 보내려고 했던 서찰과 윤선거의 묘갈명을 찾아 들이게 하고는 특별히 선생을 서용(敍用)하였다.
적신 오명윤(吳命尹) 등이 성균관 유생으로서 윤증을 두둔하는 소(疏)를 올렸는데, 성상이 바로 처벌하고 하교하기를, “전년의 하교는 윤선거의 묘갈명과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내려고 했던 서찰을 보기 전에 내렸던 것이니, 이를 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오늘날의 처분이 있게 되었다. 내 마음이 한번 깨닫자 시비가 절로 분명해졌으니, 후세에 떳떳하게 할 말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비와의 관계와 스승과의 관계 중에서 경중(輕重)을 따지는 말은 이제 다시 거론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전지를 내려 윤증을 추죄(追罪)하고, 별도로 글을 지어 공안(公案)을 만들어서 후대의 왕이 바꾸지 못하도록 하였다.
숙종은 영명(英明)한 자질을 지니고서 세상의 변고를 두루 겪었으니, 비록 한때에 잘못된 조처를 내리기는 하였으나, 의리상 옳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잘못을 고치는 데에 시각을 지체하지 않기를 마치 우레가 진동하고 바람이 일어나는 것처럼 하였다. 대성인(大聖人)이 행하는 바를 어찌 보통사람의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아, 위대하다.
선생의 묘는 충주(忠州) 속곡(束谷)에 있는데, 부인 이씨(李氏)와 합장하였다. 부인은 군수 중휘(重輝)의 딸로, 부덕(婦德)을 두루 갖추어 군자의 배필이 되기에 합당하였다. 아들 부사 욱(煜)을 두었는데, 욱(煜)은 2남 2녀를 낳았다. 그중 양성(養性), 정성(定性)은 모두 군수이고, 딸들은 각각 사인(士人) 이사휘(李思徽), 관찰사 황재(黃梓)의 아내가 되었다. 제응(濟應), 진응(震應)은 두 군수의 소생이다. 선생은 또 첩실에게 자녀를 두었으나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선생은 용모가 걸출하고 도량이 넓었는데, 나이가 많아지고 학문이 성취됨에 미쳐서는 덕의(德義)가 심후해지고 기상(氣象)이 엄중해졌다. 행동으로 말하면, 한 번도 날이 서거나 모가 나게 한 적이 없었으나 법도를 어기지 않았고, 언사로 말하면, 한 번도 남의 잘못을 들추거나 과격한 말을 한 적이 없었으나 시비를 가리는 말은 반드시 확고하게 하였다. 전후로 거상(居喪)할 때에는 살려는 뜻이 없을 정도로 애통해하여 검은 머리가 하얗게 세기까지 하였다. 두 아우와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고 집안의 어른들을 극진하게 섬겼으며, 규문 안에 있어서도 윤리와 은애(恩愛)가 모두 유감이 없었다. 이는 바로 집안에서의 행실이 근본이 된 것이다.
선생의 학문을 논하자면, 일찍이 〈이기호발변(理氣互發辨)〉을 지었고, 또 초목(草木)과 금수(禽獸)도 모두 오상(五常)을 갖추고 있다는 설을 배척하였으며, 음양(陰陽)이 오르고 내린다는 설에 대해 변론하였다. 이는 선생의 문집에 갖추어져 실려 있으니, 후학(後學)들이 모두 여기에서 바름을 취하여 상고하고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의리(義理)를 강명함에 있어 두루 포괄하여 빠뜨린 것이 없었으며, 만년에는 더욱 조예가 깊어져서 이전 사람들이 궁구하지 못한 것을 궁구한 것이 또한 많았다. 경륜(經綸)하는 자질로 말하면, 실로 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었다. 지혜와 사려가 넓은 데에다 경술(經術)까지 겸비하여 위로는 천고(千古)를 거슬러 올라가고 아래로는 당세(當世)에 미쳤다. 요컨대 끝내 절로 한 활국(活局)이 있었으니, 고루한 세상의 유자(儒者)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송 선생의 학문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에게서 터득하고 고정(考亭 주자)을 끝까지 궁구한 것이었는데, 선생이 그 정도(正道)를 계승하여 그 깊은 의미를 더욱 궁구하였고 이루어진 법도를 지키면서도 절로 절도(節度)에 들어맞아 마침내 스승의 도(道)와 함께 굴신(屈伸)을 함께 하였다. 그러니 비록 화(禍)를 당한 일에는 경중(輕重)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편벽된 말을 막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겨 세도(世道)가 이로써 힘을 얻게 하고 사문(斯文)이 이로써 더욱 엄중해지게 한 점에 있어서는 송 선생과 대략 똑같으니, 조금이라도 차이가 있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아, 훌륭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에 있는 대도를 天有大道
오직 사람이 본받으니 惟人則之
옛날부터 이러하였네 終古如斯
마침내 훌륭한 사내가 태어나게 함으로써 乃生偉男
우리 동국에 은혜를 베풀어 惠我東隅
세상에 내려주어 모범이 되게 하였네 與世作模
덕업이 높고 넓으며 德業崇廣
경륜이 드넓어 經緯浩博
범위가 이에 확장되었네 範圍斯廓
깊이 생각하고 실천하여 潛思實踐
조금도 실수하지 않으니 弗失尺寸
쌓은 것이 두터워서 발하는 것이 원대하였네 積厚發遠
누차 상나라 군주의 초빙을 사양하여 屢辭商聘
욕심 없는 마음을 바꾸지 않으니 不改囂囂
사람들이 높은 지취를 우러렀네 人仰高標
출처의 의리를 出處之義
내가 전수받은 것이 있으니 吾有所受
어찌 벼슬길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리오 夫豈屑就
파계의 한 굽이는 巴溪一曲
강수 한수와 같고 가을 햇볕과 같으니 江漢秋陽
덕음을 잊을 수 없네 德音不忘
처음으로 두 황제를 제사하여 刱祀二皇
대의를 밝게 빛내니 大義昭煥
선생이 도운 바가 있네 先生攸贊
두 번이나 간악한 이산(尼山)을 배척하고 再斥尼奸
스승의 도를 힘써 높여서 力抗師道
인도함을 바로잡았네 克正嚮導
아 거룩하다 대안이여 猗歟大案
후왕에게 바꾸지 말도록 俾後勿撓
특별히 가르침을 내리셨네 特降訓敎
꿈속에서도 현인을 그리워하여 懷賢發夢
행여 와서 만나기를 바라였으니 庶幾來覲
은혜와 예우가 지극하였네 恩禮殫盡
온천의 행차에서 溫泉之幸
마침내 대인을 만나봄이 이롭게 되니 爰遂利見
손을 잡고 다정하게 대하였네 握手繾綣
와신상담의 유한이 있는데 薪膽遺恨
갑자기 승하하여 弓劍遽捐
이 의리가 어두워졌네 此義黯然
옛날 위 무공이 昔衛武公
아흔의 나이에 억시(抑詩)를 지었으니 九十抑抑
마땅히 더욱 경계하라 하였네 宜益警飭
성상이 그 충심을 가상히 여겨 上尙其忠
삼공으로 발탁하니 擢之三事
백료들이 다시 보았네 百僚改視
평생을 개괄해 보면 摡厥平生
훌륭한 기운을 받고 태어났으니 寔稟間氣
본말이 환하게 빛났네 本末有煒
사칠의 논변과 四七之辨
음양의 설을 陰陽之說
거듭 분석하고 낱낱이 나열하였네 申析縷列
전인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함에 發前未發
그 뜻이 치밀하고 은미하니 其旨密微
나그네가 돌아갈 곳을 얻은 것과 같네 如旅得歸
내가 사관에게 고하노니 我諗良史
누가 유림전을 지어서 誰述儒林
현세와 후세에 남길런가 以垂來今
향초(香草) 덮인 언덕이 엄숙한데 蘂丘肅肅
골짜기가 깨끗하고 그윽하니 有谷淸幽
남은 향기가 길이 머물리라 遺芬永留
左議政寒水齋權先生神道碑銘 幷序
肅宗御世之四十三年。上有疾。臨浴溫陽之溫泉。寒水齋權先生新承貳公除旨。不敢退處私次。進住槐山村舍。上章待罪。上優批慰諭。命史官偕來。上必欲致先生。許遞職名。以布衣入見。恩禮出常。先生不得已準行宮扈駕義。戎服入對。上喜甚。使之前。勉留勤懇。問治安之術。先生對曰。天下事無一不本於人主一心。治心之法。又本於一直字。臣師宋時烈臨命。亦以此訓門人。仍陳尤菴先生所秉春秋大義。勉上繼述孝廟志事。又言殿下勿以聖筭晩暮。懈有爲之志。昔衛武公九十。猶作抑戒。上動容嘉納。亡何。留疏徑歸。晉右揆陞左。亦力辭不拜。肅廟眷遇終始不替。數遣人餽問。有讒惎者。亟加罪斥。景宗元年辛丑八月二十九日考終。館學儒生。皆走位哭。門人加麻者數百人。肅宗旣上賓。兇黨復用事。素有怨毒於肅廟。一反肅廟處分。使謀逆誅死人之孫致雲誣毁先生。削其職名。今上卽位。復官致祭。不用狀。特諡文純。聽建院祀享。先生諱尙夏。字致道。系出安東。高麗太師幸之後。簪組蟬嫣。入我朝。參判克和,參贊襄平公瑊俱顯。至獒樹察訪諱霔,善山府使諱聖源,司憲府執義諱格。先生之三世也。執義公亦以直道顯。娶都正李楚老女。以崇禎辛巳生先生。天稟卓異。自幼已有鉅人器量。市南兪公賞之。二十一。中進士。先生蚤游尤菴,同春兩先生門。及遭艱。遂永絶世紛。專意爲己學。憂吉。從尤菴華陽。講四書啓蒙繫辭洪範內篇。乙卯。尤菴北謫。偕諸門人疏辨。盡室入淸風峽中。靜居潛翫。俯讀仰思。終身不復出。庚申。尤菴自海島還。先生往省之。自此十年强半。在華陽門下。商訂程朱書。尤菴深喜爲吾道得人。題先生居室曰遂菴。取薛文淸語也。又命之曰寒水齋。盖用朱子感興詩語。以示心法相傳之意。其托付之重。可見矣。先生自少。已以大義自任。出處雖與尤菴差異。其道則一。盖尤菴不遇孝廟。則亦必不起也。且甲戌後。尹拯之黨。挾幸相而起。祖述鑴賊。又庇護希載。長其兇逆。先生見世道日入長夜。遂冞堅介石之志。而未嘗以微意示人。故人鮮有知之者矣。先生始除恭陵參奉。又除順陵。轉義禁府都事,尙衣院主簿,工曹正郞。擢拜司憲府持平。轉掌令,執義,成均館司業,侍講院進善,宗簿寺正。戊寅。特陞戶曹參議。移吏曹參議。兼贊善,祭酒。癸未。又陞戶曹參判。拜大憲吏參。壬辰。特除判尹。移長天官。此皆先生前後除授之官爵而力辭不受者也。當尤菴之受禍也。先生往迎中路。後命至。先生入就訣。尤菴握先生手曰。吾嘗以朝聞夕死爲期。今終無聞而死。此後惟恃致道矣。學問當主朱子。事業當主孝廟大義。又擧前日告訣。書直字義申告之。其所眷眷托以斯道者。皆法門要訣。授受之丁寧如此。上欲復魯陵及愼妃位號。令百官議。又問先生。先生議略曰。靖難之際。魯山讓德傳位。尊爲上王。初非放廢。而末後處置。亦非世祖本意也。今若追復位號。可得無憾於神人。又曰。愼妃以中廟潛邸時元妃。無罪見廢。在當時則金淨,朴祥請復之論。實爲正當。旣終廢棄。未行封典。則此爲先王廢妃。今若追配。恐違子思所訓。上遂命只復魯山。先是朴世堂毁朱子四書註。撰李相景奭碑。誣辱。李相之孫又申加誣辱。先生疏辨。因斥世堂毁經事。尤菴嘗以我東於神毅二皇恩義。俱不可忘。有意祠享。在耽羅。以此托先生。至是卒成之。士類或不能無疑於義起。樂禍者又持之。先生以爲義關尊周。不少撓。就華陽立祠。以毅皇殉國歲正月始祀。上又欲廟祀國中。以問先生。先生力贊之。朝議多不一。上意未已。竟築壇祀之。今大報壇是也。上嘗御講筵。從容語先生弟尙游以願見先生意。上心之傾嚮至矣。初先生與尹拯同事華陽。拯自其父附賊鑴。貳於師。旣以墓文事構隙。轉肆誣悖。先生惡而絶之。至乙未源流事作。拯之心跡。敗露無餘。源流者。市南所纂輯禮書也。市南使拯修整之。後市南孫相基欲入梓。拯推托不許。盖是書編纂。拯父亦嘗助之。拯之推托。故有意也。末乃以朝令刊行。相基索淨本。拯與其子行敎匿其書不出曰。此吾家書也。相基以初本刻之。求序於先生。先生聲罪拯甚嚴。至曰父事之地。用此蘇張手段。又曰。邢七狼狽。本來伎倆。鄭公澔亦跋其下罪拯。亦同書進御。上怒特罷鄭公。鄕儒覘上意。疏詆先生。先生拜章請譴曰。拯祭兪棨文。謂先生子視拯。拯父事之。恩義之篤可知。生前受托。死後相背。臣謂蘇張手段者此也。拯於四十年服事之師。誣毁斥絶。視若讐人。今於棨亦然。臣謂邢七狼狽者此也。上久不報。及賜批。大有未安意。正言趙尙健力諫被竄。賊臣眞儒乘機進窾言。被奬納。賊臣鳳輝與其黨鄭栻玷玉堂箚。誣先生。上命罷先生職。已拯徒崔錫文等發拯辛酉擬與尤菴書。詆辱及於先生。館學儒生次第疏卞。或書進尹宣擧墓文。或論卞擬書。上一切拒之。盖聖心於此始不能無惑。及至甲乙爭論。事實自白。漸有開悟。亡何。屛黜邪黨。索入拯擬書宣擧墓文。特命收叙先生。賊臣命尹等稱泮儒。上右拯疏。亟罪之。敎曰。昔年下敎。在墓文擬書未見之前。旣見。乃有今日處分。予心一悟。是非自明。雖謂之有辭後世可也。父師輕重之說。今不當更提。下旨追罪拯別作文字。著爲公案。使後王勿撓。肅廟以英明之姿。閱歷世故。雖不免一時過擧。苟見義理是當。改之不淹時刻。雷厲風發。大聖人所作爲。夫豈常情所可測哉。嗚呼偉矣。先生墓在忠州束谷。與夫人李氏合窆。夫人郡守重輝女。婦德咸備。宜爲君子之配。有子煜府使。煜生二子二女。養性,定性俱郡守。女爲士人李思徽,觀察使黃梓妻。而濟應,震應。二郡守出也。先生又有旁出子女而不並錄。先生狀貌魁杰。宇量宏大。及至年尊學成。德義深厚。氣象嚴重。制行未嘗有斬截崖岸而防限不違。言議未嘗有激訐峻隘而剖判必確。前後居憂。哀慟不欲生。至於鬒變。友兩弟甚至。事傍尊克篤。以至閨門之內。倫理恩愛兩無所憾。此則內行爲之本也。若其論學則嘗著理氣互發辨。又斥草木禽獸皆具五常之說。且辨陰陽升降之說。具載文集。後學皆可取正而考信焉。先生講明義理。該括靡遺。晩更深造。亦多究前人所未究者。至若經綸之資。實出天得。智慮旣周。濟以經術。上泝千古。下及當世。要其終自有一部活局。不可與世儒固滯者比論矣。宋先生之學。得自栗谷。究極考亭。而先生承正矱。益窮其蘊奧。守成軌。自合夫節度。遂與師道同其屈伸。雖禍事有輕重。而其以拒詖闢異爲己任。使世道有賴。斯文增重。盖與宋先生略同。殆難以差殊觀矣。嗚呼盛哉。銘曰。天有大道。惟人則之。終古如斯。乃生偉男。惠我東隅。與世作模。德業崇廣。經緯浩博。範圍斯廓。潛思實踐。弗失尺寸。積厚發遠。屢辭商聘。不改囂囂。人仰高標。出處之義。吾有所受。夫豈屑就。巴溪一曲。江漢秋陽。德音不忘。刱祀二皇。大義昭煥。先生攸贊。再斥尼奸。力抗師道。克正嚮導。猗歟大案。俾後勿撓。特降訓敎。懷賢發夢。庶幾來覲。恩禮殫盡。溫泉之幸。爰遂利見。握手繾綣。薪膽遺恨。弓劍遽捐。此義黯然。昔衛武公。九十抑抑。宜益警飭。上尙其忠。擢之三事。百僚改視。摡厥平生。寔稟間氣。本末有煒。四七之辨。陰陽之說。申析縷列。發前未發。其旨密微。如旅得歸。我諗良史。誰述儒林。以垂來今。蘂丘肅肅。有谷淸幽。遺芬永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