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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조선국 순충동덕보조찬화공신(純忠同德輔祚贊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 시호 문도(文度) 민공(閔公) 묘지명(墓誌銘) 병서
공의 성은 민씨(閔氏), 휘는 제(霽), 자는 중회(仲晦), 호는 어은(漁隱)이니, 여흥(驪興)의 대족(大族)이다. 증조 휘 종유(宗儒)는 고려 의왕(毅王)에게 벼슬하여 도첨의 시랑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로서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충순공이 조부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휘 적(頔)을 낳았는데 시호는 문순(文順)이고, 문순공이 부친 대광(大匡) 여흥군(驪興君) 휘 변(抃)을 낳았는데, 선수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宣授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 중대광(重大匡)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 시호 문정(文正) 허공(許公) 휘 백(伯)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때부터 총명이 남달라서 여러 서책을 한 번 보기만 하면 기억하고, 사학(史學)에 더욱 뛰어났다. 지정(至正) 정유년(1357, 공민왕 6)에 나이 19세로 과거에 급제하여 국자 직학(國子直學)에 제수되고, 임인년(1362, 공민왕 11)에 예문관(藝文館)에 뽑혀 들어갔고, 이듬해에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가 되고, 병오년(1366, 공민왕 15)에 전리사 좌랑(典理司佐郞)으로 옮겼다. 홍무(洪武) 신해년(1371, 공민왕 20)에 예부 직랑(禮部直郞)에 승진하고, 임자년(1372, 공민왕 21)에 전리사정랑 지제교(典理司正郞知製敎)로 옮기고, 계축년(1373, 공민왕 22)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뽑히고, 을묘년(1375, 우왕 1)에 전의시 총랑(典儀寺摠郞)으로 옮기고, 이듬해 군부사(軍簿司)로 옮겼다. 병진년(1376, 우왕 2)에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임명되고, 임술년(1382, 우왕 8)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정묘년(1387, 우왕 13)에 춘주(春州) 수령으로 나가서 은혜로운 정사가 있었다. 이듬해 판소부시사 예문관제학(判小府寺事藝文館提學)이 되고 품계는 봉익대부(奉翊大夫)였으며, 8월에는 전공사 판서(典工司判書)로 옮기고, 이윽고 예의사판서 동지춘추관사 상호군(禮儀司判書同知春秋館事上護軍)으로 옮겼다. 기사년(1389, 창왕 2) 여름에 판도사(版圖司)로 옮기고, 7월에 또 전리사(典理司)로 옮기고, 9월에는 개성윤 상의밀직사사 겸 예의사판서(開城尹商議密直司事兼禮儀司判書)로 승진했다. 다음해에 첨서밀직사사 겸 도평의사사(簽書密直司事兼都評議使司)로 옮겼는데 품계와 겸직은 옛날과 같았고, 또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을 겸했다. 임신년(1392, 공양왕 4)에 한양 윤(漢陽尹)으로 나가고, 7월에 우리 태조가 개국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 예문 춘추관 태학사(藝文春秋館太學士)에 임명되었다. 갑술년(1394, 태조 3)에 정당문학 동판도평의사사 수문전학사(政堂文學同判都評議使司修文殿學士)로 옮기고, 겨울에 하정사(賀正使)로 명 나라 서울에 갔다가 돌아와, 삼사우복야 보문각대제학(三司右僕射寶文閣大提學)에 임명되었다. 무인년(1398, 태조 7) 가을에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가자(加資)되고,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여흥백(驪興伯) 영예조사 겸 판봉상사농시사수문전태학사(領禮曹事兼判奉常司農寺事修文殿太學士)로 옮겼다. 공은 젊었을 때부터 예법을 잘 아는 것으로 이름이 있었으므로 중추부(中樞府)에 올라 숭록대부에 이르기까지 역시 예조의 일을 겸임했던 것이었다. 건문(建文) 기묘년(1399, 정종 1)에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그해 겨울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경진년(1400, 정종 2) 2월에 우리 태종이 세자가 되고,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가 정빈(貞嬪)에 봉해졌는데, 3월에 수충보조공신(輸忠輔祚功臣)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문하우정승판도평의사사병조사 겸 판상서사사보문각태학사감예문춘추관사영경연사(門下右政丞判都評議使司兵曹事兼判尙瑞司事寶文閣太學士監藝文春秋館事領經筵事) 여흥백(驪興伯)으로 승진 임명되고, 4월에 동덕좌명(同德佐命)이라고 공신호를 고쳐 주고 또 녹군국중사(錄軍國重事)를 겸하였다. 9월에 좌정승에 전임되고, 11월에 태종이 즉위하여 원경(元敬)을 정비(靜妃)로 봉하고 공에게 순충(純忠)의 공신호를 더 내리고 여흥백에 봉했다. 신사년(1401, 태종 1)에 순충동덕보조찬화공신(純忠同德輔祚贊化功臣)의 호를 내리고 부원군(府院君)에 봉했다.
영락(永樂) 무자년(1408, 태종 8) 9월에 공이 병을 얻어 누웠다. 공의 병이 위독해지자 우리 태종이 그 집에 행차하여 병세를 살폈는데, 공이 의관을 정돈하고 거의 평상시와 같이 말을 하였다. 그후 3일 만에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70세이다. 부음을 듣고 태종이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중지하고 친히 임하여 치제(致祭)했으며,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를 문도(文度)라고 정했다. 그해 11월에 유사(有司)가 의식을 갖추어 해풍군(海豐郡) 중련리(中連里)에 장사 지냈다.
공은 천품이 온화하고 인자하며 청아하고 소탈하였고, 경사(經史)에 마음을 두고 집안 살림에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사치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음사(淫祀)를 미워하여, 화공(畫工)에게 노예가 몽둥이를 휘둘러 개를 시켜서 중과 무당을 쫓는 모양 및 약과 음식으로 사람이나 짐승을 살리는 형상을 벽에 그리게 하여 보았다. 우리 태조가 사전(私田)을 혁파할 때에 과전(科田)의 제도를 맡았고, 개국(開國)한 뒤에는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수찬(修撰)했으니, 무릇 국가의 대소 예법을 모두 상정(詳定)하고, 신구 도영(都營)과 문묘(文廟)의 제도를 공이 모두 감독했다.
공은 존귀함과 영화로움이 극도에 달했으나 부귀한 티를 조금도 내는 법이 없었고, 날마다 바둑과 장기로써 스스로 즐기고 시평(詩評)을 잘하여 소연(蕭然)히 속진을 벗어난 정취가 있었다. 늘 아들 무구(無咎)ㆍ무질(無疾) 등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교만함이 가득한데,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낭패를 당할 것이다.” 했으니, 공은 자기 아들을 잘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부인 송씨(宋氏)는 여산(礪山)의 세가(世家)로서 정헌대부(正憲大夫) 군부사 판서(軍簿司判書) 휘 염(琰)의 증손이요, 광정원윤(匡正元尹) 휘 운(惲)의 손자요, 중대광(重大匡) 여량군(礪良君) 휘 선(璿)의 따님이다. 너그럽고 인자하며 근면하고 검소하여 집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다. 홍무(洪武) 무인년(1398, 태조 7)에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에 봉해졌고, 영락 을유년(1405, 태종 5)에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졌다. 갑진년(1424, 세종 6) 6월에 병으로 돌아가시니, 향년이 83세이다. 부음이 전해지자 임금이 소복으로 상차(喪次)에 나가서 백관을 거느리고 애도하는 예를 행하시고, 6일 후에 친히 임하여 사람을 시켜 치전(致奠)하게 했다. 이해 8월에 중련리(中連里)에 합장했다.
대부인(大夫人)이 4남 3녀를 낳았는데, 우리 원경왕태후가 둘째 따님이다. 대부인의 맏아들은 무구(無咎), 다음은 무질(無疾), 다음은 무휼(無恤), 다음은 무회(無悔)인데 모두 죄를 얻어 대부인보다 먼저 귀양지에서 죽었다. 장녀는 조박(趙璞)에게 출가하고, 막내는 노한(盧閈)에게 출가했다.
무구는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 권현(權鉉)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추(麤)를 낳았다. 무질은 전 한성 윤(漢城尹) 한상환(韓尙桓)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촉(矗)ㆍ삼(森)ㆍ분(犇)이고, 장녀는 전 승(丞) 김영륜(金永輪)에게 출가하여 1남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고, 차녀는 유학(幼學) 이긴(李緊)에게 출가하여 1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고, 막내는 유학 홍우명(洪禹明)에게 출가했다. 무휼은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유학 송준
)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유학 김양중(金養中)에게 출가하여 2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무회는 우부대언(右副代言) 김익달(金益達)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뇌(磊)는 어리고 딸은 유학 김치(金錙)에게 출가했다. 조박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신언(愼言)은 방간(芳幹)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눌(訥)과 묵(黙)인데 어리고, 딸은 유학 박사현(朴斯絢)에게 출가했다. 노한은 1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 물재(勿才)는 심온(沈溫)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고, 장녀는 이종인(李種仁)에게 출가하여 2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고, 막내는 인수부 승(仁壽府丞) 최후(崔厚)에게 출가하여 3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아, 공과 대부인의 내외손이 빛나 함께 일국의 망족(望族)이 되었으며, 선을 쌓고 경사를 길러 우리 원경(元敬)을 낳아 지존(至尊)을 짝하여 국모로서 삼한(三韓)을 기르고 곧 성자(聖子)를 낳아 능히 대업을 이어서 억만년토록 끝이 없는 아름다움을 열었으니, 아, 성대하도다. 이 어찌 신처럼 문사(文詞)가 거칠고 보잘것없는 자가 묘지명을 지어 그 만분의 일이라도 형용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다만 직책이 사관(史官)을 겸했으므로 공경히 주상의 명을 받들고 감히 문사가 보잘것없다고 하여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그 세계(世系)와 관직을 역임한 일의 전말을 추려서 적고 명(銘)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공의 조상이 維公之先
능히 그 근원을 맑게 하여 克濬其源
대대로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世濟厥美
후손에게 넉넉하게 끼쳤는데 裕于後昆
문도공은 維文度公
더욱 그 문호를 넓혔네 益大其門
아름다운 부인이여 懿懿夫人
부녀의 모범이 있어 惟婦之則
선을 쌓은 경사가 積善之慶
맑은 덕에 모였으니 鍾于淑德
임금의 배필 되어 儷尊宸極
일국의 국모 자리에 임하여 母儀一國
성철을 낳으셨으니 篤生聖哲
전인의 공렬을 더욱 빛냈도다 增光前烈
공과 부인의 상에 임금이 친히 임하시니 前後親臨
영화를 누가 감히 짝하리 榮孰與伍
저 중련리를 보니 相彼中連
산이 얽히고 기운이 모였어라 山密氣聚
왕께서 이르기를 문도공은 王曰文度
황비의 부친인지라 皇妃之父
사신이 명을 지어 史臣銘之
그 유택을 빛내라고 하셨네 賁其幽堂
신이 절하고 글을 지어 臣拜撰詞
돌에 새겨 무덤에 묻으니 石刻以藏
천만년이 지나도록 更千萬歲
길이 무궁한 후세에 보이리라 永示無疆
有明朝鮮國純忠同德輔祚贊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驪興府院君。修文殿大提學。諡文度閔公墓誌銘。幷序
公姓閔氏。諱霽。字仲晦。號漁隱。驪興大族也。曾祖諱宗儒。相高麗毅王。位都僉儀侍郞贊成事。諡忠順。忠順生祖判密直司事諱頔。諡文順。文順生考大匡驪興君諱抃。娶宣授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重大匡都僉議贊成事諡文正許公諱伯之女。生公。公自幼聰明絶人。於諸書。一覽輒記。尤長於史學。至正丁酉。年十九。中第授國子直學。壬寅。選入藝文館。明年。
拜通禮門祗候。丙午。遷典理佐郞。洪武辛亥。陞禮部直郞。壬子。移典理正郞知製敎。癸丑。擢成均司藝。乙卯。轉典儀摠郞。明年。移軍簿。丙辰。拜成均司成。壬戌。判典校寺事。丁卯。出守春州。有惠政。明年。判小府寺事藝文舘提學階奉翊。八月。遷典工判書。俄改禮儀判書同知春秋舘事上護軍。己巳夏。移版圖。七月。又遷典理。九月。陞開城尹商議密直寺事。兼禮儀判書。明年。轉簽書密直司事。兼都評議使司。階兼如故。又兼世子左賓客。壬申。出尹漢陽。七月。我太祖開國。拜資憲大夫藝文春秋舘太學士。甲戌。遷政堂文學同判都評議使司修文殿學士。冬。以賀正使如京師。還拜三司右僕射寶文閣大提學。戊寅秋。加正憲尋遷特進輔國崇祿大夫驪興伯銓禮曹事。兼判奉常司農寺事修文殿太學士。公自少以知禮聞。故其陞樞府以至崇祿。亦兼禮曹。建文己卯。知貢擧。其冬。判三司事。庚辰二月。我太宗爲世子。元敬王太后封貞嬪。三月。進拜輸忠輔祚功臣。特進輔國崇祿大夫門下右政丞判都評議使司兵曹事。兼判尙瑞司事寶文閣太學士監藝文春秋舘事領經筵事驪興伯。四月。改賜同德佐命之號。且兼錄軍國重事。九月。轉左政丞。十一月。太宗卽位。元敬封靜妃。加賜純忠之號。封驪興伯。辛巳。賜純忠同德輔祚贊化功臣之號。封府院君。永樂戊子九月。公寢疾。及公疾篤。我太宗幸其第視疾。公整衣冠。言辭稍似平時。越三日卒。享年七十。訃聞。太宗震悼輟朝。親臨致祭。奉常諡文度。以其年十一月。有司具儀衛。葬于海豊郡中連里。公天資溫仁淸簡。留心經史。不事家產。不喜華侈。闢異端而惡淫祀。使工圖僕隷制挺嗾犬。逐僧巫及以藥餌濟人若物之狀於壁上以觀之。當我太祖革私田之時。掌科田之制。及開國。修撰經濟六典。凡國家大小禮度。皆所詳定。新舊都營文廟之制。公皆監之。至其尊榮已極。略無富貴之相。日以碁局自娛。善評詩。蕭然有出塵之趣。常謂子無咎無疾等曰。汝等驕盈。不悛必敗。公之知子。可謂明矣。夫人宋氏。礪山世家。正憲大夫軍簿判書諱琰之曾孫。匡正元尹諱渾之孫。重大匡礪良君諱璿之女也。寬慈勤儉。治家有法。洪武戊寅。封卞韓國大夫人。永樂乙酉。封三韓國大夫人。甲辰六月。病卒。年八十三。訃聞。上素服出次。卛百官擧哀。越六日親臨。遣使致奠。以是年八月。合葬于中連里。大夫人生四男三女。我元敬王太后。於次居二。大夫人男長無咎。次無恤。次無悔。皆以罪。先大夫人歿于貶所。女長適趙璞。季適盧閈。無咎娶檢校贊成事權鉉之女。生一男麤。無疾娶前漢城尹韓尙桓之女。生三男三女。男矗,森,犇。女長適前丞金永輪。生一男。幼。次適幼學李緊。生一男二女。皆幼。季適幼學洪禹明。無恤娶星山府院君李稷之女。生四女。長適幼學宋 。次適幼學金養中。生二女。幼。無悔娶右副代言金益達之女。生一男一女。男磊。幼。女適幼學金錙。趙璞生一男一女。男愼言。娶芳幹之女。生二男一女。男訥默。幼。女適幼學朴斯絢。盧閈生一男二女。男勿才娶沈溫之女。生二男。皆幼。二女。長適李種仁。生二男二女。皆幼。季適仁壽府丞崔厚。生三男一女。皆幼。嗚呼。公及大夫人之內外赫然。俱爲一國望族。而積善毓慶。誕我元敬。伉儷至尊。母育三韓。乃誕聖子。克纘大業。以開億萬年無疆之休。吁其盛矣哉。是豈文詞蕪拙如臣者。得秉幽堂之筆。以形容其萬一也哉。第以職兼史官。祗承上命。不敢以文拙辭。謹撮其世系歷官事顚末而爲之銘。銘曰。
維公之先。克濬其源。世濟厥美。裕于後昆。維文度公。益大其門。懿懿夫人。惟婦之則。積善之慶。鍾于淑德。儷尊宸極。母儀一國。篤生聖哲。增光前烈。前後親臨。榮孰與伍。相彼中連。山密氣聚。王曰文度。皇妃之父。史臣銘之。賁其幽堂。臣拜撰詞。石刻以藏。更千萬歲。永示無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