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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장 19-26절. 살든지 죽든지
바울 사도가 이 빌립보서를 쓸 때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였습니다.
이 당시는 네로 황제가 로마 제국을 통치하던 때였습니다.
아직 네로 황제가 본격적으로 정신착란을 일으켜서 기독교를 박해하던 때는 아니었으나, 네로의 심경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던 때였습니다.
사실, 지방 각처에서는 총독들이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이 빌립보서를 쓴 다음 해인 AD 64년에 네로 황제는 로마시에 불을 질러놓고 기독교인들이 불을 질렀다고 뒤집어 씌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 기독교인을 감옥에 가두고 죽이는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때는 AD 63년으로서, 바울은 아직 미결수로서 빨리 재판을 받고, 풀려나지 않으면, 다음 해에 곧 죽게 될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내게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한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울의 심경대로 “살든지 죽든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9절.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I know that this will turn out for my deliverance through your prayers and the provision of the Spirit of Jesus Christ,
οἶδα γὰρ ὅτι τοῦτό μοι ἀποβήσεται εἰς σωτηρίαν διὰ τῆς ὑμῶν δεήσεως καὶ ἐπιχορηγίας τοῦ Πνεύματο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I have known for that this for me will turn out to deliverance through the your prayer and provision of the Spirit Jesus Christ
직역하면 ‘왜냐하면 너희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이것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내가 알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이르게 할’(ἀποβήσεται)은 미래형이고(will turn out) 원형(ἀποβαίνω)은 ‘이르게 하다, 되다, 일어나다’(go or come out of, disembark, turn out, result, become, happen)는 뜻입니다.
‘내가 알다’(οἶδα)는 완료형이므로(I have known)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1. 여기서 ‘구원’(σωτηρία)이란 ‘석방, 해방’(deliverance)이란 뜻으로서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석방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여기서 ‘내가 안다’(οἶδα)고 한 것은 경험적으로 아는 것(γινώσκω)을 가리키지 않고, 기도 중에 계시로 자신이 로마 감옥에서 석방된 것을 안다고 말한 것입니다.
2. 본절은 ‘왜냐하면’(γὰρ, for)으로 시작하여, 바울이 기뻐한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란 로마 감옥에서도 황제 시위대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현재 감옥으로부터의 석방과 미래의 영원한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소망하는 것은 로마 감옥에서 석방되어 ‘빌립보 교인들과 함께 거할 것을 확신한다’(빌립보서 1:25)고 했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23절)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이러한 구원은 두 가지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성도의 기도를 통해서, 둘째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하나입니다.
즉, 성도의 기도의 효력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1) 성도들의 간구를 통해서 바울의 구원이 이루어짐 -
믿음의 기도가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성도들이 기도할 때, 천사가 베드로를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해방시켜주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도(행 16장),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바울과 실라가 찬송하고 기도하니, 감옥문이 다 열린 기적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또한 감옥에서 풀려나서 믿음으로 승리할 것을 위해서 기도해달라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 -
성도들이 기도할 때, 실제로 도와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여기서 성령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라고 표현한 것이 특이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성령님을 하나님의 영, 혹은 예수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구원자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심 같이, 성령님께서 예수님과 같은 보혜사로서, 성도들을 환난에서 구원하시고 천국 갈 때까지 보호자가 되심을 말씀합니다.
20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ccording to my earnest expectation and hope, that I will not be put to shame in anything, but that with all boldness, Christ will even now, as always, be exalted in my body, whether by life or by death.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κατὰ τὴν ἀποκαραδοκίαν καὶ ἐλπίδα μου ὅτι ἐν οὐδενὶ αἰσχυνθήσομαι,
according to the earnest expectation and hope of me that in nothing I will be ashamed
직역하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도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는 뜻입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다’에서 동사(αἰσχυνθήσομαι)는 미래 수동태입니다(I will be ashamed).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ἀλλ’ ἐν πάσῃ παρρησίᾳ, ὡς πάντοτε καὶ νῦν, μεγαλυνθήσεται Χριστὸς ἐν τῷ σώματί μου,
but in all boldness, as always also now, will be magnified Christ in the body of me
직역하면 ‘그러나 온전히 담대하여 언제나처럼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될 것이다’는 뜻입니다.
‘존귀하게 될 것이다’( μεγαλυνθήσεται)는 미래 수동태입니다(will be magnified ).
살든지 죽든지
εἴτε διὰ ζωῆς εἴτε διὰ θανάτου.
whether by life or by death
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자기가 살든지 죽든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오직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왔고, 자신을 위해서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든지, 그러다가 죽더라도 부끄럽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즉 바울은 재판의 결과가 어떠하든지, 석방이든 순교이든, 날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사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매일 성령님을 온전히 따라 살아가는 바울의 모습은 모든 성도들이 소원하는 모범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2.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
지금까지 주님을 위해서 살아왔듯이, 감옥에 갇혀 있는 지금도 앞으로 사형판결을 받든지 아니면 석방을 받든지,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항상 충성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이 가이사랴 총독 재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 것 같이, 로마 황제의 재판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감옥에서 풀려나거나 죽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로마 황제의 재판정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생의 철학은 자신의 생명과 명예와 평안과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어느 환경에서도 주님을 증거하기 위한 일편단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21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Ἐμοὶ γὰρ τὸ ζῆν Χριστὸς καὶ τὸ ἀποθανεῖν κέρδος.
to me for the to live (is) Christ and the to die (is) gain
직역하면 ‘왜냐하면 나에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이니, 죽는 것도 유익하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사는 것이’에서 동사(ζῆν)는 현재 부정사형이고(to live), ‘죽는 것도’에서 동사(ἀποθανεῖν)는 부정과거 부정사형이므로(to die), 단호하고 담대하게 죽는 것을 가리킵니다.
1.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란 말씀은 그리스도가 바울의 삶의 동기요, 목적이요, 수단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삶의 목적이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한 것이고, 바울의 삶의 수단은 그리스도가 힘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기 때문에 사는 것이고, 바울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빼버리는 아무런 삶의 동기가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말씀은 바울이 죽더라도 영생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이고, 바울은 무조건 장수를 구하거나 삶을 비관하는 염세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2.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한 말씀은 갈라디아서에서 더욱 확실하게 표현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씀은 바울의 삶에서 바울 안에는 실제로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는 것이고, 바울이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고, 바울이 날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말씀은 바울이 육체를 떠나 죽게 되면, 그 때는 그리스도와 절대적으로 완전히 하나가 되는 천국의 삶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원하는 것은 차라리 육체를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또한 바울은 자신이 죽은 후에는 영광스런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3.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자신을 위한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십자가에 죽었고, 이제는 (그리스도에게 영원히 빚진 자로서) 오직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주장대로, 주님의 인도대로 절대적 순종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절대적 통치에 절대 복종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면, 언제든지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삶을 말합니다.
군대조직 속에서도 충성하는 부하는 지휘관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것은 바울 자신에게도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과 고통을 죽음으로써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유익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4. 여기서, ‘죽는 것’(ἀποθανεῖν)이란 단어가 원문에 ‘부정과거형’으로 쓰인 것은 이 당시 네로 황제의 심기가 불편하기 시작했고, 로마의 정치적 상황이 기독교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바울이 로마인에게 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22절.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if I am to live on in the flesh, this will mean fruitful labor for me; and I do not know which to choose.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εἰ δὲ τὸ ζῆν ἐν σαρκί, τοῦτό μοι καρπὸς ἔργου,
if however the to live in flesh, this for me fruit of labor
직역하면 ‘그러나 만일 육체 안에서 사는 것 이것이 나를 위한 일의 열매라면’이란 뜻입니다.
‘사는 것이’(ζῆν)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로서(to live) 현재 살아가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καὶ τί αἱρήσομαι, οὐ γνωρίζω.
and what shall I choose, not I know
‘택해야 할른지’(αἱρήσομαι)는 미래형 중간태로서 ‘나를 위해서 (무엇을) 택해야 할 것인지’를 뜻합니다.
‘나는 알지 못하노라’에서 동사(γνωρίζω)는 현재형입니다(I know).
1. ‘육신으로 사는 것이 내 일의 열매’라는 것은 바울이 육신을 가지고 살면, 복음 전도의 귀한 열매를 맺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무엇을 택해야 할지 나는 알지 못한다’는 것은 생사 앞에서 선택을 주저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생사 선택의 주저함이란 일생에 대한 비관이나 이생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이 생사 선택을 저주한 것은 죽음이 자신의 유익이지만, 이생에 대한 연민은 생명을 구원하는 놀라운 열매와 사랑의 기쁨이 있기 때문에 주저한 것입니다.
즉 죽음은 자신의 천국 행복이요, 삶은 많은 사람의 구원이라과 기쁨이라는 양자가 행복을 앞에둔 행복한 선택의 주저함입니다.
2. 지금 바울은 AD 63년 로마 황제 네로의 재판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란 바울이 로마 법정에서 풀려나서 전도의 열매를 맺는 삶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일’(ἔργον)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바울이 복음 전도 사역을 말할 때 많이 쓰였습니다(로마서 15:8, 고린도후서 10:11).
즉 바울은 자신이 로마 재판에서 풀려나게 되면, 복음 전도에 좋은 기회가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 있지만, 이 세상에 살아서 복음 전도의 귀한 열매들을 맺고자 하는 욕망이 크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3. 여기서 ‘내 일’이라고 할 때 ‘일’이라는 단어(ἔργον)는 바울 서신에서 주로 복음 전도 사역을 가리킵니다(빌립보서 2:30, 로마서 15:18, 고린도후서 10:11 등).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감옥에서 죽지 않고 풀려나서 다시 산다면, 복음 사역을 위한 열매를 맺는 삶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가릴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은 원어상 시제가 ‘미래형 중간태’(αἱρήσομαι, shall I choose:나 자신을 위해서 선택할 것이다)이기 때문에, 바울이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은 욕망도 있지만, 감옥에서 풀려나 다시 살아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 욕망도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I am hard-pressed from both directions, having the desire to depart and be with Christ, for that is very much better;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συνέχομαι δὲ ἐκ τῶν δύο,
I am pressed however between the two,
직역하면 ‘그러나 그 둘 사이에 내가 끼어있다’는 뜻입니다.
‘끼어 있으니’(συνέχομαι)는 현재 수동태이고(I am pressed), 원형(συνέχω)은 ‘함께 붙잡다, 굳게 붙잡다’(hold together, hold fast)이고, 수동태는 ‘붙잡히다, 고난당하다’( be seized, am afflicted with)는 뜻입니다.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그렇게 하고 싶으나
τὴν ἐπιθυμίαν ἔχων εἰς τὸ ἀναλῦσαι καὶ σὺν Χριστῷ εἶναι,
the desire having for (myself) the to depart and with Christ to be
‘떠나서’(ἀναλῦσ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depart) 단호하게 흔연히 떠나는 모습을 가리키고, ‘있을’(εἶναι)은 현재 부정서형 동사로서(to be) 항상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가진’(ἔχων)은 현재분사로서(having) ‘가지고 있는’이란 뜻입니다.
훨씬 더 좋은 일이라
πολλῷ γὰρ μᾶλλον κρεῖσσον·
very much for more better
직역하면 ‘왜냐하면 (이것이) 훨씬 더욱 좋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1. ‘이 둘’이란 로마 재판에서 풀려나서 빌립보 성도를 돌보고, 복음 전도하여 열매 맺는 것과 로마재판에서 처형을 당해서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끼어 있다’는 것은 재판의 결과를 기다리면서 내적으로 고심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는 것은 바울 개인에게는 복음 전도 사역을 감당할 때 모진 고난과 박해를 당하면서 고생하는 것 보다, 이 세상을 떠나서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 복락을 누리며 편히 쉬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훨씬 더욱 좋다는 뜻입니다.
‘떠난다’(ἀναλύω)는 동사는 ‘떠나기 위해서 천막의 밧줄을 푸는 것’(unloose for departure)을 가리키고, ‘떠나다, 되돌아가다’( depart, return)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 인간의 육체는 장막과 같고,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육신의 장막을 벗고, 천국에 들어가고, 부활의 새 몸을 입는 것을 가리킵니다.
고린도후서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바울이 육체를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 더욱 좋다는 것은 그가 병들과 연약한 육체를 벗어버리고, 죽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는 부활의 몸을 소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데살로가전서 4:13-14.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3. 바울 사도는 ‘두 사이’ 즉 살아서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욕망과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라는 욕망 사이의 갈등 속에서도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만큼 세상에서 너무도 많은 고난과 역경을 많이 당하고 살았습니다.
바울이 세상에서 그나마 살아가는 것은 시시때때로 주님이 위로해 주시는 위로가 다시 살고자 하는 소망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예 세상 고난이 전혀 없는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항상 위로와 사랑과 행복을 온전히 누리며 살기를 바랐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설립한 고린도교회에서도 거짓 사도니 도둑놈이니 하는 모욕도 당했습니다.
다만 빌립보 교회 성도들로부터는 많은 위로와 도움을 받았습니다.
바울 사도가 세상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기를 더욱 소망한다는 본심을 말할 때,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 사도에 대한 무한한 동정과 사랑의 마음이 복받쳐 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바울 사도는 25절에서 “내가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서 죽지 않고 살 것을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정말 바울 사도는 유대인의 반대와 다른 교회들에게서 받는 반대를 생각할 때면,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지만, 바울 사도를 아무런 의심 없이 순수하게 믿고 사랑하는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할 때면, 다시금 삶의 의욕을 갖게 되었습니다.
4. 성경에서 바울을 사도로 순수하게 존경하고 사랑했던 교회는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뿐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와 고린도 교회에서는 율법주의자들이 바울을 거짓 사도로 배척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데살로니가 교회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만,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2장 19절, 빌립보서 4장 1절).
1: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yet to remain on in the flesh is more necessary for your sake.
τὸ δὲ ἐπιμένειν τῇ σαρκὶ ἀναγκαιότερον δι’ ὑμᾶς.
the but to remain (in) the flesh (is) necessary for the sake of you
직역하면 ‘그러나 내가 육신으로 머무르는 것이 너희를 위해서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거하는’(ἐπιμένειν)은 현재 부정사형 동사이고(to remain), 원형(ἐπιμένω)은 ‘머무르다, 계속 머무르다’(remain, stay on)는 뜻입니다.
‘유익하다’(ἀναγκαιότερον)는 ‘필요하다, 중요하다, 옳다, 적절하다’(necessary, essential, right, proper)는 뜻입니다.
1. 바울이 로마 재판에서 무죄 석방되어 복음을 전하고, 빌립보 교회를 비롯해서 성도들을 돌보는 것이 필요하고, 적절하고, 유익하다는 뜻입니다.
만일 부모가 육신을 가지고 자녀를 돌보는 것이 힘들다고, 죽어버린다면, 자녀들에게 얼마나 큰 타격이 되고, 손해가 되겠습니까?
이처럼 바울 같은 훌륭한 전도자요 목회자가 자기 편하다고 세상을 떠나버린다면, 빌립보 교인들 같은 성도들은 영적인 은혜가 얼마나 아쉽고 영적인 손실이 크겠습니까?
그러므로 바울은 개인적인 안전과 평안 보다도 영적인 자녀들인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서 전도와 목회와 사랑 베푸는 길을 택한다고 했습니다.
참된 목자요 참된 영적 부모의 심정입니다.
2. 바울 사도의 인생철학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것 보다, ‘주님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먼저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 소망은 세상을 떠나는 것이지만, 아직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는 바울이 도움이 되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살아야 할 의미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갈라디아 교회나 고린도 교회 같은 교회만 있었더라면, 아마 바울은 더 이상 세상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나 살아야 할 의미를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음식과 옷과 집이 있을지라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살아갈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 사람이 살아갈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사람을 살게 하는 삶의 원동력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3. 어느 고아원에서 아무리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과 아늑한 환경을 만들어 주어도, 고아들이 죽어가기만 했답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아기들을 품에 안고 우유를 먹이고, 품에 안고 자면서, 사랑을 주고받기 시작하니까, 고아들이 살이 오르고 생기가 돋아서 건강해지더라고 합니다.
1: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Convinced of this, I know that I will remain and continue with you all for your progress and joy in the faith,
확실히
καὶ τοῦτο πεποιθὼς,
and this having convinced of,
직역하면 ‘내가 이것을 확신하고 있으며’라는 뜻입니다.
‘확신하고 있으며’(πεποιθὼς)는 완료분사로서(having convinced of) 현재 확신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아노니
οἶδα,
I have known
직역하면 ‘내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노니’(οἶδα)는 완료형으로서(I have known) 이미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살 것과--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ὅτι μενῶ καὶ παραμενῶ πᾶσιν ὑμῖν
that I will remain and will abide with all of you
직역하면 ‘내가 살아남을 것과 너희 모두와 함께 거할 것을’이란 뜻입니다.
‘살 것’(μενῶ)은 미래형으로서(I will remain)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이 땅에 머무를 것을 가리킵니다.
‘함께 거할’(πᾶσιν)도 미래형인데(will abide with)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과 함께 거주할 것을 가리킵니다.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εἰς τὴν ὑμῶν προκοπὴν καὶ χαρὰν τῆς πίστεως,
for the your progress and joy of the faith
1. 바울은 자신이 로마 재판에서 승소하여 석방되고 이 땅에 살아있을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 교회에 가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영적인 유익을 주고,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줄 것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아직 신앙 연조가 어린 신자들이었기 때문에, 바울이 로마 재판에서 석방되고 빌립보 교회에 가서 영적으로 도와줌으로써 빌립보 교인들이 믿음에 진보와 성장을 하고, 그래서 믿음 생활에 기쁨을 갖게 될 것을 바울은 이미 알고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2. 이처럼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의 진보와 영적 기쁨이 바울이 살아야 할 이유였습니다.
이런 빌립보 교인들의 영적 유익에 바울이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바울은 아마 살아야 할 이유나 원동력을 상실했을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들에게 도움과 필요가 없는 존재라면, 부모가 죽고 싶은 심정인 것과 같습니다.
각 지교회의 목회자들도 교인들에게 자신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결코 그 목회지에 있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3. 바울은 14-18절에서, 바울을 환영하는 전도자들과 배척하는 전도자들 사이에서 초연한 입장을 표현했고, 20-24절에서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초연한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이 세상 삶에 대해서 더 이상 미련이 없고, 모든 사람에 대한 애착심이 없이 인생을 포기한 사람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본절에서 드디어 삶에 대한 희망과 애정을 갖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살고자 하는 의욕과 삶의 희망을 갖게 만드는 것은 바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 때문이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혔어도, 바울을 범죄자로 여기지 않고, 오랜 감옥 생활에서 풀려나지 않고 있어도, 바울을 하나님이 버렸다고 하거나 거짓 사도라고 배척하지 않고, 변함없이 사랑했습니다.
에베소서 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찌어다.
빌립보 성도들은 심지어 바울을 위해서 선교헌금과 함께 에바브로디도를 보내서 바울의 감옥 생활을 돕게 했습니다.
이같은 빌립보 성도들이 애정이 바울로 하여금 생의 애착과 삶의 희망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3) 그렇습니다.
과거에 감옥 생활하신 분들의 수기를 읽어보면, 사랑하는 자녀와 가족이 있는 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 나오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죄수는 젊고 건강해도 곧 죽고 만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모두 감옥 같은 세상에서 여러 가지 죄와 형벌을 당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죄수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삶의 의지와 투지가 강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은 쉽게 절망하고 생을 포기해버리는 것을 봅니다.
4.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군가를 마음 깊이 사랑하시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오래 살 수 있게 하는 장수의 비결이 됩니다.
사랑은 삶의 원동력입니다.
사랑이 많은 가정은 건강하고 장수합니다.
사랑이 많은 교회는 건강하고 부흥합니다.
서구 교회가 사랑이 식으니까, 교회가 모두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지금 중국의 교회가 핍박 속에서도 사랑이 강하기 때문에 가장 힘 있게 부흥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건강하고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5. 믿음의 진보와 기쁨 -
바울은 밖에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하고, 교회 안에서도 거짓 사도라고 배척하는 무리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빌립보 교인들만은 바울을 진정한 하나님의 사도로 믿기 때문에, 바울의 설교 말씀을 통해서 빌립보 교인들은 은혜를 얻고 믿음의 진보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처럼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도움을 받고 믿음의 진보를 얻게 되고,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설교를 기뻐하는 것 때문에, 바울은 삶의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전도로 교회를 설립한 교회들에게서도 거짓 사도로, 도둑놈으로 배척을 받는 상황 속에서, 그래도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진정한 사도로 믿고 사랑하기 때문에, 바울은 삶의 의욕과 희망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이란 인정을 못 받으면, 살 의욕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일해야 합니다.
1: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so that your proud confidence in me may abound in Christ Jesus through my coming to you again.
ἵνα τὸ καύχημα ὑμῶν περισσεύῃ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ἐν ἐμοὶ διὰ τῆς ἐμῆς παρουσίας πάλιν πρὸς ὑμᾶς.
so that the boasting of you may abound in Christ Jesus in me through the my coming again to you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περισσεύῃ)는 현재 가정법 동사입니다(may abound).
1.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석방되어 빌립보 교인들과 함께 있으면,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석방을 자랑하게 될 것을 말한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자랑은 인간적이고 육체적인 자랑(고린도전서 3:21, 고린도후서 5:12, 11;18)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적인 자랑이고, 그리스도께서 석방시키셨다는 신앙적인 자랑이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63년에 석방되어, 4차 전도 여행을 소아시아와 마게도냐를 거쳐서 서쪽 끝인 서바나까지 가서 전도하다가 체포되어 2차 로마 옥중에서 디모데전서, 디도서, 디모데후서를 기록하고 순교했습니다.
2. 빌립보 성도들은 감옥살이를 밥 먹듯 하는 바울 사도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바울의 고난이 주님의 복음을 위한 자랑거리인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수많은 고난의 목록을 기록할 정도로 말할 수 없는 고난, 인간쓰레기와 같은 고난을 당했어도, 빌립보 교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고난을 비난한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참으로 바울은 자기를 알아주는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바칠 각오와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장 8절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2장 17절.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4장 1절에서는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장세동 씨는 전두환 씨에게 충성한 이유를 “그 분은 나를 알아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서로 교회에서 충성하는 교사들, 찬양대원들, 식당 봉사자들, 구역 직분자들, 남녀 전도회 임역원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의 헌신과 수고를 알아주고 인정해주시기 바랍니다!
<결론>
오늘 성경 말씀은 바울 사도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주님이 존귀히 되기를 원한다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을 위해서 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바울 사도는 세상 고난이 너무 막심하기 때문에 어서 세상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을 사랑하고 바울의 말씀 듣기를 원하므로, 빌립보 성도들 때문에 세상에 더 남아서 살아갈 희망과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부모들도 자녀를 돌보고 사랑할 때, 살아갈 의미와 욕망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사랑은 인간이 살아갈 의미와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들께서도 가족과 성도와 이웃을 사랑하여, 삶의 의욕과 희망과 기쁨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