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 이한(李翰) 시조 이한(李翰)은 덕망이 높고 문장이 탁월하여 신라 문성왕때 사공(司空) 벼슬을 지냈으며 그후 대대로 신라시대에 벼슬을 해왔다. 18세손되는 이안사(李安社)는 대대로 전주에 살아온 호족이었는데 새로 부임한 지주의 탐학을 규탄하자 지주가 군사를 휘둘러 보복하려하여 그를 피해 강원도 삼척으로 피했다가 다시 함경도를 거처 원나라 간동으로가 그곳에서 다루가치 벼슬을 지냈고 증손자 되는 이자춘(李子春)이 고려시대에 공을 세워 사복경(司僕卿)에 이르렀다. 이자춘의 아들, 즉 시조의 22세손 이성계(李成桂)에 이르러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고 배극렴(裵克廉)등 52명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 조선왕조를 창건, 전주이씨의 종시조가 되었다.
▣ 인물
전주이씨는 조선 500년을 이끌어온 왕가이므로 가문의 번성기를 따로 기술할 필요가 없다. 전주이씨의 1백여 파중 으뜸가는 명가는 밀성군(密城君. 침=세종의 아들)파로써 6명의 정승과 3대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했으며,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정종의 아들)파가 부자 대제학등 3명의 대제학과 영의정(領議政) 1명을 내어 밀성군파에 버금간다. 덕천군파 다음으로는 3명의 정승을 배출한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정승 2명을 배출한 선성군파(宣城君派), 정승 1명과 숱한 문신과 무신을 배출한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등이 빼어나다.
전주이씨는 오리정승(梧里政丞)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인조때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흥선대원군(興宣大元君) 이하응,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장군등 역사의 한획을 그었던 거목들을 배출하였다. 1585년(선조 18년) 이수광은 별시문과(別詩文科)에 급제, 1627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여러차례 사신으로 명나라에 왕래, 당시 명나라에 와있던 이탈리아 신부에게서 "천주실의(天主實義)" "중우론(重友論)"을 얻어와 1614년(광해군 6년) "지봉유설(芝峰類說)"을 간행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와 서양 문물을 소개함으로써 실학발전의 선구자가 되었고 시문에도 능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본관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 전주(全州)는 전라북도 중앙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 마한(馬韓)의 원산성(圓山成)에서 유래하며, 백제시대에 완산(完山) 또는 비사벌(比斯伐)·비자화(比自火) 등으로 불렸다가, 555년(위덕왕 2)에 완산주(完山州)로 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완(完)을 의역(意譯)하여 전주(全州)로 고쳤고, 900년(효공왕 4)에 견훤(甄萱)이 무주(武州: 光州)로부터 이곳으로 후백제의 도읍을 옮겨 백제 부흥의 노력을 하였다. 936년(고려 태조 19)에 후백제가 망하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가 설치되었다가 940년에 다시 전주로 회복되었다. 983년(성종 2)에 12목 가운데의 하나인 전주목이 설치되었으며, 993년에 승화(承化)로 개칭하고 절도안무사(節度安撫使)를 두었다. 995년에는 강남도(江南道) 관하의 전주순의군절도사(全州順義軍節度使)가 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 다시 안남대도호부로 승격되고, 1022년에 전주목으로 개칭되어 1곳의 속군과 11곳의 속현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 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전주로 강등되고, 1355년(공민왕 4)에는 부곡으로 강등되었다가 이듬해에 완산부(完山府)로 복구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전주이씨의 본향지라 하여 완산부유수(完山府留守)로 승격되었으며, 1403년(태종 3)에 전주부(全州府)로 개칭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전주부 전주군이 되었고, 1896년 전라북도 전주군으로 개편된 이래 1935년 전주면이 부로 승격하여 독립하고 1949년 전주시로 개칭되었다.
▣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주이씨는 1985년에는 총 558,019가구 2,379,537명, 2000년에는 총 808,511가구 2,609,890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종친회 같은 단체에 문의하면 더 좋을 듯....
혈연적 유대가 강했던 전통사회에서는 부계(父系) 친족집단이 모임을 통해 자체의 상징적 자산을 계승하고 상호간의 협력을 추구했는데 그러한 모임이 바로 종친회이다. 여기에는 동성동본집단 전체의 조직에 의한 대종회(大宗會), 성과 본을 같이하면서 파만 달리하는 친족조직의 파종회(派宗會), 자연촌락 중심의 친족조직인 종친회 또는 문회(門會) 등이 있다. 종친회의 기능으로서는 ① 족보 편찬, ② 제사와 조선(祖先)을 기리는 사업의 수행, ③ 동성불혼제(同姓不婚制)의 실시, ④ 친족집단에 대한 통제 및 공동의 복리추구 등이 있다. 오늘날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전통사회체제의 해체로 하위친족단위의 조직인 종친회가 쇠퇴하면서 파종회·대종회 등이 강화되고 있는데 이는 전통적인 친족제도가 새로운 사회적 환경에 적응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사람이 태어나면 가장 먼저 얻는 것이 성씨이다. 성씨는 그 자체가 혈연관계를 나타내는 성(姓)과 지연을 나타내는 씨(氏)의 이중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는 부계 위주의 사회이므로 태어남과 동시에 부(父)의 성과 씨를 이어받으면서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르는 일본이나 서구와는 달리 평생 사용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통용되고 있는 성(姓)은 모두 한자로 되어 있다. 한자 성을 사용하는 나라는 중국과 한국, 일본 및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로 알려져 있으나 본래 한국에도 고유의 성(姓)은 있었다. 다만 중국 한자성(中國 漢字姓)의 전래로 우리 고유의 성(姓)이 전해지지 않아 본래의 모습을 알기 어렵게 됐다.
고유의 성(姓)은 원래 고래(古來)의 단순한 씨족 명칭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후 청동기의 수입과 농경의 발달로 잉여 생산물에 대한 정복 전쟁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정복자와 피정복민 간에 복속 관계가 형성됐다. 복속 관계가 형성됐을 때 정복민과 피정복민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씨족 명칭이 사용됐다. 그 후 계급 내에서 정치적, 경제적 차별이 생겨나면서 또 다시 계급 분화가 진행되어 소수의 상층 계급은 다른 부류들과 구분 할 명칭, 다시 말해 고유의 성을 사용하게 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따르면 건국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했기 때문에 고(高)씨라 하고, 주몽은 충신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를 사성(賜姓)했다”한다. 그러나 중국 한서에 나타나 있는 인명의 기록에는 ‘주몽’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나. 장수태왕시대에 장수태왕 이름을 고연(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했으며, 장수태왕이 사신으로 보낸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이름에도 모두 성을 사용했다 한다.
백제는 온조(溫祚)가 부여계통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扶餘)씨라고 했으나 중국의 후한서, 삼국지 등의 진서에는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 되어 있다. 진서, 송서 등의 기록에는 근초고 대왕(13대) 부터 위덕 대왕(27대)까지는 여(餘)씨로 표시하다가 무 대왕(29대)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했다고 전한다.
신라는 박(朴), 석(昔), 김(金) 삼성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 9년(32)에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 배(裵), 설(薛)씨의 성을 사성했다고 하는데,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7세기 이전에 건립된 “신라 진흥왕의 네 곳의 순수비”와 “신라 진지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 진평왕 시대에 건립된 경주 남산의 신성비” 등의 비문에는 인명에 소속부명(촌명)과 이름만 쓰여져 있어 선조들은 성보다 본(촌명)을 먼저 썼다고 볼 수 있다.
삼국 시대의 고구려는 장수태왕 시대(413~490)부터“고(高), 을(乙), 예(芮), 송(松), 목(穆), 간, 주(舟),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명림(明臨), 을지(乙支),” 백제는 근초고대왕 시대(346~375)부터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 국, 왕, 장, 사마, 수미, 고이, 흑치,”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박, 석, 김 3성과 이, 최, 정, 손, 배, 설의 육부의 6성과 장, 비 등이 있고, 왕실의 성인 고(高), 여(餘), 김(金)씨 등의 성을 쓴 것으로 기록되어있다.(삼국유사, 삼국사기 인용)
또 발해 사회 지배계급의 주체는 예맥부여계 대씨 왕족과 고구려 귀족관료 출신인 고씨, 말갈 각 부족 추장, 일부 지주들이었다. 중국 학자가 쓴 발해국지장편(渤海國誌長編)엔 발해 지배계급은 모두 317명이었는데 대씨 90명, 고씨 56명, 장씨 30명, 왕씨 22명, 리씨 18명 등으로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고구려와 속말말갈이 주축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 드물게 눈에 띄는 박씨와 최씨도 신라계나 고구려계일 가능성이 있다.
성씨의 특권은 계급의 표시로서 초기에는 왕족은 물론 부족장에 기원을 둔 유력한 혈연 집단이 우선하여 성을 사용했다. 이후 왕권 다툼에서 밀려나 낙향한 진골이나 지방관으로 파견된 관리들, 원래 지방에 터를 잡고 있던 세력가들이 호족으로 득세하면서 기존의 성을 고수하거나 새로운 성으로 바꾸고, 타국과의 교류 과정에서 들은 저명성을 차용, 혹은 스스로 성을 만들면서 성의 분화를 촉진시켰다.
특히, 신라 말에는 유학생·유학승·무장·무역상 등의 왕래가 빈번해져 당나라식 성의 사용에 익숙해졌다. 그리하여 9세기 이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게 됐을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 가운데에서도 이들의 성을 모방하여 사용하는 자가 늘어나게 되어 성의 사용이 보편화되어 갔다. 이와 반대로 중죄인 또는 반역한 무리에게 박탈을 의미하는 거성 혹은 변성을 명한 예도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성씨(姓氏)가 확대 되면서 같은 성씨라도 계통(系統)이 달라 그 근본과 동족(同族) 여부를 가리기 위해 등장하게 된 것이 본관(本貫)이다. 본관(本貫)의 체계가 확정된 시기는 고려 초기로서, 그 이전에는 출신지가 신분의 표시로서 성의 구실을 해왔다. 본관은 시조의 출신지 또는 씨족이 대대로 살아온 고장을 가리키며, 이것은 다른 종족의 같은 성과 구별하기 위해 쓰이기도 했다. 本貫은 관향(貫鄕), 관적(貫籍) 또는 관(貫)이라고도 하며, 원래 관은 돈을 말하는 것으로서 돈을 한 줄 꿰어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이 친족이란 서로 관련성이 있다는 뜻으로서 더 나아가 본적(本籍)이란 뜻으로도 사용됐다.
2000년 인구조사 기준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씨는 286개로서, 본 관수는 김씨(金氏) 349본(本), 이씨(李氏) 276본, 박씨(朴氏) 159본, 정씨(鄭氏) 136본, 최씨(崔氏) 159본, 강(姜氏) 33본, 서(徐氏)씨 57본이 있으며 총 본 관수는 4,300여개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각 성씨별 비율을 보면 “김(金)씨는 21.6%인 992만, 이(李)씨는 14.8%로 679만, 박(朴)씨는 8.5%로 389만, 최(崔)씨는 4.72%, 정(鄭)씨4.37%, 강(姜) 2.씨27%, 조(趙) 2씨.14%, 윤(尹)씨2.06%, 장(張)2.00%, 임(林)씨1.66%, 오(吳)씨 1.54%, 한(韓)씨1.53%, 신(申)씨1.52%, 서(徐)씨 1.51%, 권(權)씨 1.42%, 황(黃)씨 1.40%, 안(安)씨 1.39%, 송(宋)씨1.38%, 유(柳)씨 1.31%, 홍(洪)씨 1.13%, 전(全)씨1.07%, 고(高씨) 0.95%, 문(文)씨 0.93%, 손(孫) 0.90%, 양(梁) 씨0.85%, 배(裵)씨 0.81%, 조(曺)씨 0.79%, 백(白)씨 0.76%, 허(許)씨 0.65%, 남(南)씨 0.56%를 차지하고 있다. 위에 기술한 이들이 한국 1위부터 30위 성씨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같은 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동성동본(同性同本)의 집성촌락을 이루어 가문(家門)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자치적으로 상호 협동하여 집안 일을 해결해 나가는 특이한 사회조직의 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개인의 업적이나 명예가 결국은 가문(家門)에 귀착, 개인의 사회적 성공이나 출세는 그 가문 구성원 모두의 사회적 신분을 높여 줬다.
중국이나 일본의 성씨는 1위부터 2, 3위의 분포가 비교적 고르게 나타나 특정 성씨로 지나치게 몰리는 경우가 없는 반면, 한국의 경우만 1, 2, 3위가 이상할 정도로 특별히 많다. 이는 1900년대 초에 처음 호적법이 시행될 때 “양반이 되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빚어진 기형적인 현상으로 분석된다.
일본 메이지 유신 때에 “전 국민 성씨 가지기” 정책을 시행, 전 국민으로 하여금 성씨를 만들어 가지도록 했다. 이 때 대부분의 국민들은 각자 자기 집의 위치나 동네의 특징을 살린 성씨들을 다양하게 창씨, 8만여 성씨가 존재케 됐다. 그러나 민족의 역사를 논할 때 성씨에 대한 자존감은 별로 따지지 않을 뿐 아니라, 성씨에 대한 애착 또한 강하지 않다. 중국이나 한국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일본은 한일합방이후 계급을 타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 국민으로 하여금 성씨를 만들어 가지도록 했으나 결과는 일본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국민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던 “돌쇠, 밤쇠, 바우, 개똥이, 향단이, 삼월이, 오월이” 등은 일본처럼 새로이 성씨를 만들지 않고, 이들 대부분이 그 동네 지주나 양반들에게 부탁, 성씨를 얻어 와서는 관청에 신고했다. 이때에 김(金) 씨나 이(李), 박(朴)씨가 갑자기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특정 성씨가 총 인구의 20%를 넘어 가는 경우는 없는데, 양반 대우를 받고 싶은 사람이 많았던 우리나라에서 나타난 대단히 특이한 현상이다. 이후 우리나라는 결과적으로 전 국민의 양반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예전에 많던 “방자, 향단이, 마당쇠, 개똥이, 바우, 밤쇠”의 자손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게 됐다. 게다가 누구나 “정승, 판서의 몇 대 손”이 되어 양반의 후손만이 존재하는 나라로 변했다.
참고로 왕씨는 졸본부여 고구려 때에도 존재했던 성씨입니다. 양귀비로 유명한 당나라 현종을 임금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재상 왕모중입니다. 왕모중은 고구려가 망한 후 당나라에 끌려온 왕구루 장군의 아들입니다. 재상이 된 왕모중은 당나라를 뒤엎으려다 실패했고 그 후 고구려 후예 이정기(본명 : 이회옥) 장군이 산동을 기반으로 제나라를 세워 당나라와 맞섰죠.
“고구려인 노예, 당나라서 쿠데타”
‘현종 집권’ 이뤄낸 경호 노비 왕모중… 군사·재정 확충해 병권 잡은 뒤 정권 탈취 기도
연세대 사학과 지배선 교수 주장
“노예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이 당나라 병권을 장악, 황제에 대항해 쿠데타를 기도했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연세대학교 사학과 지배선 교수는 ‘고구려인 왕모중의 발자취’란 논문에서 이같이 주장하면서 “드러나지 않은 이 인물은 조국 패망 후 당나라로 끌려가 노비로 살았던 고구려 장수 왕구루(王求婁)의 아들 왕모중(王毛仲)”이라고 말했다. 지 교수는 “왕모중은 당시 ‘임치왕(臨淄王)’으로 봉해져 있던 이융기의 호위 노예였다”며 “발군의 능력으로 이융기의 정권 탈취를 도와 그를 황제로 옹립한 뒤, 그 공로로 ‘3공(三公)’의 지위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말했다. 이융기는 당나라 현종(玄宗)의 본명이다.
지 교수는 또 “왕모중은 CEO로서의 능력도 뛰어나 군사력과 재정을 확충, 현종 통치하의 태평성대를 일컫는 ‘개원지치(開元之治)’의 기반을 다지기도 했다”며 “당나라의 병권(兵權)을 장악한 그는 훗날 정권 탈취를 기도, 스스로 황제가 되려 했다”고 주장했다.
▲ 왕모중의 보필을 받아 당나라 최고의 황금기인 '개원의 치'를 이뤘던 당현종 이융기의 모습, 이 그림은 디지털 복원 전문가 박진호씨가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재현한 것이다
고구려 유민사를 연구하며 ‘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선지 평전’을 쓰기도 한 지배선 교수는 “고구려인에 의한 당 황실 전복 쿠데타는 이것이 유일한 기록”이라며 “제나라를 세우고 765~819년까지 산동지역을 다스린 이정기·이납 부자가 당나라 전복을 꾀한 바 있지만, 이것은 쿠데타라기보다 국가 대 국가의 전쟁(주간조선 2003년 2월 6~13일자 보도)으로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왕모중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그런 인물이 당나라 실세로 존재했었다”는 사실만 알려져 왔을 뿐으로, 그의 출신과 행적에 관한 연구 논문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의 지원으로 이뤄진 이 논문은 신·구당서, 자치통감 등의 사료를 바탕으로 연구된 것으로 내년 초에 출간될 예정이다.
현종과 함께 쿠데타… 대장군에 올라
668년 고구려를 무너뜨린 당은 장정 20만명을 잡아가 노예로 삼았다. 장수였던 왕모중의 부친 왕구루도 이때 끌려가 관노가 됐다. 왕모중이 태어난 시기는 고구려가 패망한 지 10여년 뒤인 681~683년. 노비의 신분을 이어받은 왕모중은 나이가 비슷한 ‘임치왕’ 이융기(685년생)의 수행 노예가 됐다.
이융기는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사냥을 즐겼던 그는 용맹한 사람을 만나면 돈과 음식을 하사해 자신의 사람으로 삼았다. 총명하고 깨달음이 빨랐으며 고구려인답게 기마와 궁술에 능했던 왕모중은 이 과정에 적극 개입, 세력을 규합해 이융기의 절대적 신임을 얻게 된다.
이융기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710년이었다. 황제 중종이 황후 위씨(韋后)와 딸 안락(安樂)공주에 의해 독살된 것이다. 중종의 조카였던 이융기는 “위후 일파를 제거해 나라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거사를 일으켰다. 왕모중은 이 과정에서 황궁 수비대를 사전 장악, 거사의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이융기 군사는 왕모중의 활약에 힘입어 황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위후와 안락공주를 살해, 중종 시해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거사를 이뤄낸 임치왕 이융기는 ‘평왕(平王)’으로 왕호를 높여받은 뒤, 문무 주요 관직에 자신의 측근들을 심었다. 위후를 살해한 종소경(鐘紹京)은 ‘중서령’으로, 위후 제거 후 조칙을 쓴 유유구(劉幽求)는 ‘중서사인’으로 임명해 정사를 관장하게 했다. 또 거사에서 무공을 세운 설숭간(薛崇簡), 마사종(麻嗣宗), 갈복순(葛福順) 등과 임치왕 경호를 맡았던 이의덕(李宜德) 등을 장군으로 임명했다. 왕모중도 이때 장군으로 파격 제수됐다.
지배선 교수는 “이융기를 가장 가까이서 보필한 사람이 한족이 아닌 고구려인이란 사실에 의미를 두고 싶다”며 “이 사실로 미뤄 당시 중국 사회에서 고구려인들이 다양한 활약을 벌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당나라를 장악한 이융기의 남은 과제는 황제가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주변의 눈’을 의식한 이융기는 명분을 쌓기 위해 중종의 동생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예종’을 황제로 옹립한다.
▲ 당나라 상류층들이 즐겨던 격구 장면, 이 그림은 디지털 복원 전문가 박진호씨가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재현한 것이다.
실권을 쥔 이융기는 예종의 장남이자 자신의 맏형 이성기를 제치고 황태자가 됐다. 그가 착수한 작업은 쿠데타의 주축이었던 좌우영(左右營)을 격상시키는 일이었다. 이융기는 좌우영의 이름을 ‘용무군(龍武軍)’으로 바꾼 뒤 최고의 대접을 해줬다.
당서(唐書) ‘왕모중전(王毛仲傳)’은 용무군에 관해 흥미로운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당시 양가 자제들은 군역과 요역을 회피했다. 하지만 용무군만은 예외였다. 앞다퉈 들어가려 뇌물을 바칠 정도였기 때문에 (1000명이었던) 부대 규모가 수천명으로 늘었다. 용무군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는 것이다. 쿠데타가 일어나고 예종이 즉위한 ‘격변의 해’ 710년 하반기, 왕모중은 3품의 품계를 받고 대장군의 지위에 오른다. 그리고 야심가 이융기는 712년 자신의 뜻을 달성, 천자의 자리에 등극한다. 그가 훗날 ‘개원의 치’를 이룬 황제 현종이다.
노예 출신의 ‘대장군’ 왕모중은 713년 다시 한 번 부각된다. 7명의 재상 중 5명을 장악, 권력을 휘두르던 예종의 누이 태평공주가 ‘현종 폐위 음모’를 꾸민 것이다. “태평공주측에서 병사를 동원, 7월 4일 침입해 올 것”이란 극비정보를 입수한 현종은 역공을 취했다. D데이를 하루 앞둔 7월 3일, 왕모중과 그의 병사 300명을 동원해 공주 일행을 주살해 버린 것이다. 현종의 분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재상 숙지충을 비롯한 태평공주 측근 전원을 죽이고, 자신과 고종사촌인 공주의 아들들까지 모조리 주살한 뒤, 이미 세상을 뜬 공주 망부(亡夫)의 시체를 꺼내 부관참시했다.
병력·재정 확충해 ‘개원의 치’ 틀 마련
사태를 신속하게 ‘정리’한 사람은 왕모중이었다. 그 공로로 그는 7일 뒤인 713년 7월 10일, 보국대장군·좌무위대장군·검교내외한구 겸 지감목사로 임명되면서 국공(國公)의 작위와 함께 장안의 저택과 식읍 500호를 받았다. 황족을 제외하면 진압에 공을 세운 인물 중 최고의 포상이었다.
지 교수는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당시 군사력의 핵심이었던 말(馬)을 관리하는 직책인 검교내외한구”라며 “이것은 현종 이융기가 임치왕에서 평왕으로 봉해질 때 함께 받았던 관직이자, 훗날(754년) 현종의 양아들로 총애받았던 안록산이 받기도 했던 요직”이라고 말했다. “황실과 군사 양쪽에 말을 공급하는 핵심임무를 독점함으로써 왕모중이 물자 수송과 병력관리의 맥을 쥘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왕모중은 검소했다. 황제로부터 호화저택을 하사받았음에도 ‘병마양성’을 위해 변방의 처소에서 사병과 함께 생활했으며, 사심없이 공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게다가 CEO로서의 경영능력도 뛰어났다. 목동 1000여명을 모집해 그들에게 방목을 맡기는 현대적 개념의 ‘전문가 아웃소싱’을 단행하기도 했다. 그 결과 왕모중은 24만마리이던 병마의 수를 43만마리로, 3만5000두였던 소를 5만두로, 1만2000마리였던 양을 28만6000마리로 늘렸다. 그는 죽은 짐승도 버리지 않았다. 가죽을 팔아 비단 8만필을 구입했고, 동맥·목숙 등의 사료를 준비해 겨울을 대비했다.
사욕을 부리며 재물을 축적하던 다른 관리들과 달리 왕모중은 이익을 재투자, 매년 수만석의 잉여 물자를 확보해 황제에게 추가로 바쳤다. 현종은 왕모중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노예 출신인 그를) 연회석에서 황제의 형제·자식들과 나란히 앉게 해 ‘왕’에 준하는 대우를 해 줬다”는 당시의 기록은 그에 대한 현종의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당서(唐書) 기록에 따르면 “현종은 연회 때 왕모중이 보이지 않으면 근심하는 표정을 지었으며, 그와 밤새워 대화를 나누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밤을 새고 난 뒤에도 그 다음날이 저물도록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전쟁에선 기병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말은 최고의 군사자원이었다. 왕모중은 빠르고 멀리 달릴 수 있는 병마를 단시일 내에 확보하고 재정적 확충을 이룸으로써 당이 ‘세계국가’로 뻗어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현종의 정치적 안정을 일컬었던 ‘개원의 치’는 왕모중이 닦아 놓은 재정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황제의 총애는 멈추지 않았다. 현종은 왕모중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감목송(監牧頌)’을 지어 부르게 했으며, ‘이씨’라는 여인을 부인으로 하사했고, 그녀에게 ‘국부인(國夫人)’의 칭호를 내렸다. 또 왕모중의 어린 아들에게는 5품 벼슬을 제수하고 황태자와 함께 놀 수 있는 특권을 내렸다. 왕모중은 상승을 거듭, 721년 당나라 북부의 병력을 총괄하는 ‘지절충삭방도방어토격대사(持節充朔方道防禦討擊大使)’로 임명돼 중국 북부의 군권을 장악했고, 4년 뒤인 725년엔 1품 고관인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임명돼 ‘3공(三公)’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파격적인 황제의 총애는 환관들의 질시를 불러왔다.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물욕·권력욕이 유달리 강했던 환관들과 강직한 성품의 왕모중은 애초에 맞는 궁합이 아니었다. 왕모중은 드러내놓고 환관들에게 모욕을 주곤 했다. 그러자 환관들은 은밀하게 왕모중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여기서 주축이 된 사람이 훗날 현종에게 양귀비를 소개하는 환관 고력사(高力士)다.
“당나라 황제를 노려라” 또 다시 쿠데타
환관들의 ‘작업’은 은밀하고 집요하게 진행됐다. 틈을 노리던 그들에게 기회가 왔다. 729년 6월, 황제 호위를 담당하는 ‘용무군’ 대장 갈복순의 아들과 왕모중의 딸이 결혼을 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도가들은 혼인을 통해 세력 결속을 꾀한다. 권력자의 입장에선 이것이 달가운 일만은 아니다. 현종의 경우엔 특히 그랬다. 당나라의 병권이 ‘한 집안’으로 집중됐기 때문이었다.
“장군들이 왕모중을 따르는 상황에서, 그가 황실 경비대장 갈복순과 인척관계를 맺은 것은 좋지 못한 일입니다. 게다가 왕모중은 소인배인지라 총애가 지나치시면 나쁜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현종은 탁월한 전략가였다. “짐은 그대들의 충정을 알겠노라.” 산전수전 다 겪은 그는 한눈에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지 않아도 이상적으로 비대해진 왕모중의 권력이 거슬리던 판이었다. 현종은 “간언 내용을 극비에 부칠 것”을 명했다. 만에 하나 왕모중 제거 의사가 새나갈 경우 역공을 당할 우려도 있었기 때문이다. 태평공주를 제거할 때, 왕모중과 함께 역공을 폈던 현종이다. 그는 은밀하게 작전을 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갈등이 표출된 것은 730년이었다. 왕모중이 황제에게 ‘병부상서’ 자리를 달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한 것이다. 병부상서는 당의 군사력 전체를 총괄하는 요직이었다. 왕모중을 제거하려 마음먹은 황제가 그 요구를 들어줄 리 없었다. 현종은 드러내놓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왕모중도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왕모중의 행위는 당 지배질서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었다. 이의덕(李宜德), 당지문(唐地文), 왕경요(王景燿), 고광제(高廣濟) 등 당대의 무장 수십 명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독자적 군사력을 키워온 왕모중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황제에 대한 도전은 황실을 전복시키겠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었다. 게다가 왕모중에겐 힘이 있었다. 그가 더이상 황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현종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왕모중은 자신의 군사력을 중심으로 현종에게 대항할 뜻을 굳혔다. 그는 더 많은 장군들을 포섭, 세력기반을 확고하게 다져갔다. 현종도 자위 수단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왕모중과 대립관계에 있는 환관들을 동원해 정보수집에 착수, 왕모중의 비리를 철저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종의 권한이 강화될수록 환관들의 권한도 그에 비례해 커지는 묘한 현상이 나타났다.
왕모중은 흥분했다. 그는 현종의 조서를 갖고 온 환관들에게 노골적으로 모욕을 줬다. 조서를 받드는 환관에겐 황제에 버금가는 예를 갖추는 것이 당시 신하의 본분이었다. 왕모중은 더이상 현종의 신하가 아니었다.
먼저 칼을 뽑은 것은 황제였다. 왕모중이 극비리에 병기를 수집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황제는 측근 엄정지(嚴挺之)를 등주자사·태원소윤에 임명, 왕모중의 군사기반인 북방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했다. 왕모중도 당시 최대의 군수기지였던 태원·삭방·유주 등지에서 군량과 병마·무기를 사들이며 쿠데타 계획을 진행시켰다.
때는 731년 정월. 현종은 왕모중을 따르는 장군들과 왕모중의 아들들을 강등시켜 변방 한직으로 내모는 신년인사를 전격 단행했다. 그리고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왕모중 세력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양대 세력은 충돌했다. 하지만 ‘두 세력이 어디서 어떻게 부딪쳤는가’에 관한 사실을 기록한 문헌은 전해지지 않는다. 단지 “왕모중이 패하여 죽자, 황제는 엄정지의 충성을 평가해 그를 형부시랑으로 불러들이고, 이후 고위직인 ‘태부경(太府卿)’에 임명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지배선 교수는 “왕모중의 사망에 대해 구당서(舊唐書)는 ‘현종이 왕모중을 죽이도록 조서를 내려, 영릉(零陵)에서 목매달아 죽였다’고 적고 있다”며 “이 두 가지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전투에서 패한 왕모중이 (장안에서 직선거리로 800㎞ 떨어진) 호남성 서남쪽 영주(永州)로 귀양을 가, 그곳에서 죽음을 당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지 교수는 “훗날 현종이 애첩 양귀비를 죽일 때도 목을 매달아 죽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뤄, 당시 조정에서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을 처형할 땐 목을 매는 것이 하나의 관습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이범진 주간조선 기자(bomb@chosun.com)
발해의 서쪽 강역문제는 요동의 지배여부와 집결된다. 이하 당나라의 요동지배는 중국 측 기록에 따른다하더라도 발해가 성립된 지 6년만인 714년 요서지방으로 완전 철수하였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 그 이전에도 실제로 장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하 간단히 이에 관계된 자료들을 간추려 본다.
1. 안동도호부는 발해 건국 이후 요동에서 사라졌다.
1) 686년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을 조선군왕으로 봉해 안동도호부의 옛 주민(舊戶)을 맡겨 통치(統攝)하려 하였으나 끝내 실행하지 못했다.(구당서 고려전) ---- 이 때 발해가 성립된다.
2) 699년 또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를 안동도독에 제수하여 본번(本蕃)을 통솔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안동(도호부)에 있는 고구려의 옛 주민이 점차 줄어들어 돌궐, 말갈 등으로 흩어지 자 고씨의 군장은 마침내 끊기고 만다.(구당서 고려전) ---- 발해가 성립된 후 형식적으로나마 안동도호부를 유지하려했으나 실패한 기록이다. 여기서 말갈 땅으로 간 고구려인들은 바로 발해에 흡수된 것을 말하며 적어도 이때부터는 요동반도가 발해 땅이 된 것이다.
3) 714년 - 당나라, 요서지방 평주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한다.
2. 732∼733 발해의 등주 공격 때 요동에는 당의 세력이 없었다.
732년 9월 발해 장군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 원정군은 바다길로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여 등주자사 위준을 살해한다. 만일 가탐의 도리기에 나오듯이 압록강 하구에서 130리쯤 올라간 박작성이 국경선이라면 당나라를 침략할 대부대가 압록강 하구를 지키는 당나라군부터 무찔러야 했을 것이다. 발해 군이 현재 산동성인 등주를 공격하려면 반드시 압록강 입구를 떠나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다 요동반도 끝에서 고군산 열도를 지나가야 한다. 만일 당나라가 요동반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면 발해군의 대선단이 아무런 저항없이 등주를 공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요동반도 에 당나라 세력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발해가 요동반도를 치지 않고 등주를 친 것도 요동반도를 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요동반도에 당나라 세력이 있으면 그곳부 터 쳤을 것이다. 발해는 해군의 출병과 거의 같은 시기에 육로로 요서지방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당나라는 문제를 일으켰던 대문예를 유주에 보내 군사를 모아 싸우게 하고, 유주 절도사가 [하북채방처치사를 겸임하도록 해 상주, 낙주, 패주, 기주, 위주 등 총 16개 주와 안동도호부(평주)의 병력까지도 통솔하게 하였다 (자치통감 권 213 당기 현종 개원 20년) 한편 당나라는 당나라에 와 있던 신라 왕족 김사란을 신라에 보내 남쪽으로부터 발해를 침공하도록 한다(삼국사기 권 8, 신라본기 성덕왕 32년 7월).
3. 요사 지리지에 반영된 요동반도의 발해 영토
요동반도가 확실한 것만 몇 곳 간추린다(요사 권 38 지제8, 지리지 2, 동경도).
동경 요양부(東京 遼陽府) - 본래 조선(필자 주 : 단군조선)의 땅이다(本朝鮮之地). ……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를 세웠는데 후에 발해 대씨의 소유가 되었다(唐高宗平高麗 於此置安東都護府, 後爲渤海大氏所有)
진주(辰州) 봉국군 절도 - 본래 고구려 개모성, 당 태종이 이세적을 만나 개모성을 격파 했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발해가 개주(蓋州)로 바꾸었다.
노주(盧州) 현덕군 자사 - 본래 발해 삼노군이다. 옛날 5개 현으로 산양, 삼노, 한양, 백 암, 상암이었는데 모두 폐지했다. 철주(鐵州)는 본래 한나라 안시현이었는데 고구려 때 안시성이 되었다. 당 태종이 쳐들어 갔을 때 항복하지 않자 설인귀가 흰옷을 입고 성을 올라간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발해 때 주를 두었는데 본래 위성, 하단, 창산 용진의 4개 현이다.
암주(巖州) 백암군 하 자사 - 본래 발해 백암성, 태종이 빼앗아 심주에 속하게 했다.
발해의 당 공격은 해상과 육로를 이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상 루트로는 압록강 하구에서 출발해 등주를 공격했고,육로로는 영주로 가는 길을 통해 거란과 가까운 마도산(馬都山)으로 내달아 당을 공격했다. 발해의 당 공격은 무왕 시기에 이미 요동반도가 발해 영역이지 않고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발해 역사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의미가 크다.
발해는 건국에서 멸망(698~926)에 이르기까지 228년간 15대를 이은 중앙집권적 왕조로서 독자적인 국가운영체제를 갖춘 독립국가였다. 1대인 고왕 대조영이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뒤, 2대 무왕은 그 이름에 걸맞게 정복활동을 벌여 영토를 크게 넓혔으며, 그의 뒤를 이은 문왕은 발해 전체 역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57년간이나 나라를 다스리면서 내치에 힘을 모아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그후 4대부터 9대까지 25년 동안 6명의 왕이 교체되는 일시적 내분기를 겪고나서는 10대 선왕에 이르러 다시 왕권이 강화되고 대외정복활동을 마무리하여 9세기 전반에 최대의 판도를 확보하여 다시 중흥을 맞이하였다.
발해의 건국과 영토확장 및 중흥의 주요 역군은 건국초기부터 고구려의 상무기풍을 물러받은 40만 강군이다. 이것은 8세기 전반 49만을 헤아리는 당나라의 군사력과 막상막하였다. ‘발해인 셋이면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해낸다.’ ‘풍속에 말타기와 사냥을 즐긴다’라는 사적의 기록은 무예를 숭상하는 발해인들의 용감한 기상을 전해준다.
발해와 당이 전쟁을 하게 된 계기는 당이 흑수말갈을 통해 발해를 견제하려 했던 사건에서 비롯한다. 대문예는 다음과 같이 당나라 공격을 반대하였다. "흑수가 당의 벼슬을 청하였다 하여 그를 바로 치고자 한다면 이것은 당을 저버리는 것이다. 당은 사람의 많음과 군사의 강함이 우리의 몇 배나 되는데,하루 아침에 원수를 맺는다면 다만 스스로 멸망을 부를 뿐이다. 지난날 고구려가 강병 30여만으로 당과 맞서 복종하지 않다가,당병이 한번 덮치매 땅을 쓴 듯이 다 멸망하였다. 오늘날 발해의 인구가 고구려의 몇 분의 일도 못되는데,그런데도 당을 저버리려 하니,이 일은 결단코 옳지 못하다."고 대문예는 만류하였다. 그러나 무왕은 듣지 않았다. 참고로 발해 건국 초기의 인구는 78만명에 불과했으나 고구려 유민을 지속적으로 흡수하고 거란족과 말갈(=여진)족을 직접 통치하게 됨에 따라 전성기 시절 인구는 330여만명으로 늘어났다.
위의 기록을 통해 발해의 인구와 군사력이 330여만명-40만 강군이라면, 멸망시의 고구려는 발해의 인구와 군사력의 몇 배나 되는 대제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말기의 인구를 최소한 발해의 2배로 잡는다 하더라도 660여만명이라 볼 수 있고 그렇다면 고구려 전성기에는 1000여만 이상의 인구를 가진 대국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무왕은 결국 당나라를 응징하기 위해 732년에 그의 장수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등주(登州,현 山東省 蓬萊)를 공격하면서 양국은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에 당 현종은 대문예를 유주(幽州)에 파견해 군사를 징발하여 발해군을 치게 하였다. 또 당나라에 묶고 있던 신라 김사란(金思蘭)에게도 신라 군사를 내어 발해의 남쪽 국경을 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신라는 "마침 산이 험하고 날씨가 추운데다 눈이 한길이나 내려서 병사들이 태반이나 얼어 죽어 전공(戰功)을 거두지 못한 채 돌아 왔다."고 전한다.
무왕은 몰래 동도(東都)에 사신을 보내 자객을 사서 천진교(天津橋) 남쪽에서 문예를 찔러 죽이려 했다. 하지만 실패하고 자객들은 모두 잡혀 죽었다고 한다. 무왕이 당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에 대한 깊은 원한과 주변의 돌궐과 거란도 당과 대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발해 무왕의 당나라에 대한 응징 의지가 결정적이었다.
발해의 당 공격은 해상과 육로를 이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상 루트로는 압록강 하구에서 출발해 등주를 공격했고,육로로는 영주로 가는 길을 통해 거란과 가까운 마도산(馬都山)으로 내달아 당을 공격했다. 발해의 당 공격은 무왕 시기에 이미 요동반도가 발해 영역이지 않고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발해 역사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의미가 크다.
이렇게 정연한 국가체제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발해는 시종 당나라와는 나라 대 나라의 국가관계 차원에서 영활한 화전 양면의 전략전술로 응수해나갔다. 발해는 건국초기부터 당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거란 등 가까운 나라들과 동맹을 맺고, 전대인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원교근공’(遠交近攻: 먼데와 교섭하여 가까운 데를 치다) 정책의 일환으로 멀리 서천한 돌궐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이에 위압당한 당나라 중종은 705년 특사를 보내 과거 고구려와 그 유민들에 대한 잘못을 사과하고 발해의 건국을 축하하는 한편 수교를 제안한다.
<신당서>가 전하는 바와 같이 발해는 자신들의 연호를 줄곧 사용했으며, 시호도 스스로 만들어 썼다.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무덤에서 발견된 묘지명에는 왕을 ‘황상(皇上)’이라고 부를 정도로 발해는 당나라와 동격의 황제국이었다. 중국 지린성에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고, 황제국을 지향했음을 알려주는 발해 황후의 무덤이 발굴됐다. 최근 중국사회과학원이 발간한 ‘고고(考古)’(2009년 제6기)에 실린 ‘발해왕실묘장 발굴 간보’에 따르면 2004~2005년 지린성 허룽시 룽하이 마을 룽터우산 고분군에 있는 발해왕실무덤에서 고구려 조우관(鳥羽冠)의 전통을 계승한 금제관식이 발굴된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발해국 3대 문왕(재위 737~793년)의 황후 효의왕후와 9대 간왕(재위 817~818년)의 황후 순목황후의 묘지(墓誌)가 출토됐다. 그런데 순목황후의 묘지에는 “발해국 순목황후는 간왕의 황후 태(泰)씨이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출토된 금제관식은 고구려 조우관(새 깃털모양 관)의 전통을 잇고 있다”면서 “새 날개의 이미지를 세 가닥의 식물 이파리처럼 도안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는 당나라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순수한 발해산이며 고구려 조우관”이라면서 “여백을 끌로 쪼아 문양을 드러내는 ‘물고기알모양(魚字文)’을 활용하면서 발해 특유의 역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절정의 금속공예 문화 수준을 보여준다”고 극찬했다.
송기호 서울대 교수는 “발해가 고구려의 전통을 이으면서 황제국의 위상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봐야 한다”며 “이는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에 불과했다는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를 뒤엎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참고로 당나라는 허구의 종족 짱골라의 왕조가 아닌 흉노계 선비족 왕조다.
당나라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발해를 ‘해동성국’, 즉 바다 동쪽의 융성한 독립강국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융성은 14대까지 이어오다가 15대에 와서 거란의 내침으로 마감되고 만다. 그러나 요동반도에 끌려간 발해유민들은 ‘후발해국’이니 ‘대발해국’이니 하는 이름의 후계국들을 세워 부흥운동을 근 2백년 동안이나 벌인다.
신라와의 관계에 신경을 쓰던 일본은 발해의 동태를알아보기 위해 720년에 자진해 사신을 파견한다. 발해는 아랑곳하지 않다가 당과 흑수말갈, 신라간의 밀착이 엿보이자 군사적 동맹 여부를 타진하기 위해 7년 후에 무관 출신의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는다. 그 후 양국관계는 신속하게 발전하는데, 전기에는 주로 군사외교이나, 후기에 와서는 경제문화교류가 주류를 이루면서 일본에 대한 발해의 문화적 영향이 커진다.
<속일본기>를 비롯한 일본 사적의 기록과 일본에서 발견된 ‘발해사 목간’이나 ‘견(遣)고려사 목간’ 등 유물이 증언하다시피 두 나라간에는 11회의 사신교환이 있었으며, 문물교류도 상당히 빈번하였다. 871년 일본에 간 발해사신들이 첫날 관무역에서 얻은 이익만도 일본화폐로 40만 냥,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6억 6천만엔이나 된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발해사신들은 일본 문인들과 작시를 주고받는데, 오늘까지 남아있는 발해 한시 10수 중 ‘밤에 다듬이 소리를 들으며’같은 9수는 이들 발해사신들이 지은 것이다. 발해악이 일본 궁중음악의 하나로 된 것도 이무렵이다.
발해문화는 당문화를 비롯한 여러 문화를 받아들어 융화시킨 독특한 복합문화다. 무덤양식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돌무지 무덤이 위주이지만 당의 벽돌무덤이나 말갈의 흙무덤도 받아들였다. 당삼채를 본받아 삼채도기를 구워냈으며, 금 알갱이를 촘촘히 박는 서역의 누금기법으로 정교한 금속장식품들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발해 고유의 문화상도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몇 사람의 뒤를 따라 여러 명이 빙빙 돌면서 노래하고 춤추는 답추(踏鎚) 춤이나, 연꽃잎 무늬에서 3국은 8개 잎을 기본으로 하는데 비해 6개 잎으로 꾸미는 기법을 쓴 것이 그런 사례다. 또 여러 명을 합장하고 그 무덤 위에 건물을 짓는 건축술 등도 발해만의 문화현상이다.
발해의 유물 중에는 몇가지 주목되는 것이 있다. 연해주의 옛 발해성인 노브고르데예프성 밖 취락지에서 은화 한 점이 발견되었는데, 앞면에 왕관과 함께 ‘부하라의 군주 짜르’란 소그드 문자가 새겨져있는 점으로 미루어 중앙아시아의 소그드 은화임이 확실하다. 교역수단인 이 은화는 북방 실크로드의 초원로와 연결되는 거란도(일명 ‘담비의 길’)를 따라 발해까지 유입된 것으로서 수만리 떨어진 두 지역간에 교역이 진행되었음을 시사한다.
또 한가지 신기한 것은 불교와 고대 동방기독교간의 융합모습을 보여주는 유물들의 발견이다. 발해의 솔빈부 아브리코스 절터에서 십자가가 발견되고, 동경용원부(현 훈춘)에서는 삼존불의 왼쪽 협시보살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있는 상이 출토되었다. 그밖에 발해의 서변에 자리한 우순(撫順) 지역에서도 수백점의 십자가가 발견되었다. 그런가 하면 신라의 경주에서도 석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7세기 중엽 중국에 들어와 약 250년 동안 성행한 고대 동방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경교)가 9세기 전반 탄압을 받고 축출될 때, 발해 땅에 파급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도 경교는 불교와 습합하는 방법으로 전파를 시도하였으니, 그 맥락에서 보면 발해에서 두 종교간의 융합관계는 이해가 될 것이다. 배타가 아닌 어울림의 문화를 꽃피운 발해인들의 슬기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렇게 발해는 완비된 국가체제와 주권국가로서의 확고한 국제성을 지니고 사통팔달한 국제교통망을 통해 세계와 교류하고 문화를 주고받은 대제국이었다. 이러한 발해를 아예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지방정권 운운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용서못할 거역이고 오만이며, 우러 겨레에 대한 야멸찬 멸시에 다름아니다고 정수일 교수는 말한다.
또 홍콩의 발해사 학자인 김광석(金光錫.62) 홍콩 능인(能仁)서원 한국학과 교수는 중국의 발해사 편입 시도는 중화 패권주의에 다름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교수는 지난 91년 홍콩에서 `발해족의 형성과 그 사회형태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해외 학계에서 처음 발해사 연구로 인정받은 한국학자다.
김 교수는 "`말갈(靺鞨)'이라는 부족명은 중국이 이민족을 경시해 붙여준 명칭"이라며 사실은 고대 한민족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말갈족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었던 예맥계 속말말갈이 발해 건국에 기여했는데 속말수(粟末水.지금의 제2쑹화강)에서 유래된 속말말갈은 부여 계통으로 고구려와 혈연, 지역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우수한 철기문화를 자랑했다. 삼국시대에도 고구려는 오히려 말갈부족과 연합해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는 일이 잦았다. 고구려 멸망후엔 고구려 유민들이 속말말갈 사회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발전의 계기를 맞았다. 속말말갈 외에 동옥저, 남옥저의 후예인 백산(白山) 말갈도 역시 예맥계로 발해 건국에 참여했다.
697년 대조영은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스스로진국왕(震國王)이 됐으며 713년엔 발해로 개칭했다. 발해는 당시 나라명에 `국(國)'을 사용했다. 이는 자주독립 공동체였다는 의미이다. 당시 발해문자에 능통해 발해 외교문서의 번역을 맡기도 했던 시선(詩仙) 이백(李白)도 발해를 고려(고구려의 의미)나 백제로 부르며 외국으로 취급했다는 기록이 이백의 시문집 옥록총담(玉록<鹿+土>叢談)에 기록돼 있다. 이백의 혁만서(하<口+赫>蠻書)에선 또 당나라 사람들이 발해를 습관적으로 고려, 백제로 칭했다는 말이 나온다.
10세기초 발해는 귀족 권력투쟁과 국정 불안으로 사회모순이 커지면서 925년 거란의 야율 아보기(耶律 阿保機)의 침략을 초래한다. 1년만에 홀한성(忽汗城)이 함락되고 애왕(哀王)이 투항함으로써 발해는 229년만에 역사에 종언을 고했다. 고구려계인 고영창(高永昌) 등에 의한 발해 부흥운동이 세차례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아보기는 그러나 곧바로 발해국 영토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태자를 인황왕(仁皇王)으로 앉히며 발해국 계승을 선언했다.
당시 발해 유민 300여만명중 190만명은 동단국에서 거란의 직접 통치를 받았고 나머지 110만명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중 10만여명은 고려로 넘어갔고 60만명은 여진으로 도피했으며 1만명은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왕족 2명, 귀족 25명을 포함 발해 유민이 대거 고려로 들어오자 고려는 이들을 후대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는 본래 우리의 친척 국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동단국은 이후 동거란으로 국명을 바꾸면서도 발해의 행정체제와 규모를 그대로 유지했다"며 사실상 동단국은 발해국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흑수말갈이 합류한 여진의 금나라는 당시 동북지구에서 최고 문명을 자랑하던 발해를 대거 포섭해 끌어들였다. 금나라의 역대 황제 가운데 발해족을 생모로 둔 황제는 해릉왕, 세종, 위소왕 등 3명에 이른다.
현재 북한 평양에 발굴 터와 건물 유구 일부가 보존돼 있는 8만6천여평 규모의 고구려 최대 정궁인 안학궁(安鶴宮)
안학궁은 427년 장수 태왕이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긴 뒤 축조한 성으로 그 중심이 안학궁이었다. 안학궁은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뒤를 이은 장수태왕의 국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궁궐로, 우리나라 정궁 역사상 최대 규모다. 근세조선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높이가 34m인데 비해 안학궁의 정전인 중궁은 87m에 이른다. 이곳에서는 높이 2m가 넘는 치미(기와장식품)가 발굴되기도 했다. 안학궁은 흉노계 선비족 왕조 당나라 최대 왕궁인 대명궁 함원전 67.5m보다 규모가 컸고, 건립시기도 200년이나 앞선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 명(明)·청(淸) 시대의 궁전인 자금성 태화전은 60m에 불과하다.
자금성 태화전은 동서 60m, 남북 33m / 경복궁 근정전은 앞면 30m,·옆면 21m / 고구려 안학궁 - 남궁은 앞면 62m & 중궁은 앞면 87m, 옆면 27m
자금성(원래 9999칸이었고, 현재 8800여 칸)은 둘레가 3.52km이다. 반면 경복궁(원래 7481칸이었지만 현재 700여 칸이다. 경복궁의 일부가 일제에 의해 허물어졌고 현재는 10분의 1정도가 남아있다)은 둘레가 3.26km이다.
자금성 안에 나무가 없는 것은 자객이 나무에 숨어 성 안의 사람을 공격할까 봐서이고 또 다른 이유는 궁 안의 나무가 황제의 위엄을 가린다고 생각해서이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나무 없는 자금성은 바람이 쌩쌩~ 불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자금성의 황제들은 겨울궁전을 따로 만들어 겨울에는 자금성을 떠나 겨울궁전에서 생활하며 집무를 보았다고 한다.
참고로 경복궁 근정전 내부가 신하들이 옥좌 앞에 도열해서 국사를 논하기에는 너무 좁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자금성 태화전 역시 신하들이 도열할 내부공간은 별로 없었다. 태화전은 가로로 길게 건설되어 배치되어있고 그 직각 방향으로 문이 있어서 옥좌가 그 방향으로 되어있으니까말이다. 웅장한 태화전도 옥좌 앞에서 출입문까지 별로 공간이 없었다. 둘다 조회나 의식에 쓰였고 신하들은 광장에 도열했던 거였다.
정치·문화적으로 볼 때 중원을 압도하며 동북아시아 최강국의 면모와 증거를 안학궁에서 깊게 엿볼 수 있다. 고구려 문화는 당시,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 역사 전체의 중심문명이었다. 당나라의 왕릉, 궁성 유적에도 고구려의 영향은 드러난다. 역사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선문대 이형구 교수는 원인을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이 당나라에 유입되면서 문화선진국이던 고구려의 문화가 전파되었다고 말한다.
부여-고구려-백제가 비슷한 의복을 입고, 비슷한 음식에 비슷한 언어를 갖고 있었다는 기록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으며 백제토기와 신라의 황금장식도 고구려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또 발해의 상경성은 고구려와 당나라의 영향을 골고루 받았다. 당나라 장안성의 주작대로와 발해의 주작대로는 어디에서 영향을 받았을까?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도 엿볼 수 있는 사신도? 어쨌든 발해는 건축구조에서 온돌을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도 고구려의 문화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발해는 고구려語 썼던 황제국” 동북아역사재단 ‘발해의 역사와 문화’ 펴내
발해사에 대한 국내외 학계의 최근 연구성과를 집대성하고 있는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이 최근 발간한 ‘발해의 역사와 문화’는 발해가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諡號)를 사용하고 스스로를 황상(皇上)으로 칭하는 ‘황제국’이었음을 밝혔다. 한마디로, 발해가 자주적 왕조였음을 학술적으로 규명한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연구위원 등 22명의 관련 분야 전문가를 비롯, 중국·일본·러시아의 학자까지 참여한 책은 발해의 각종 제도 및 외교관계, 사회, 문화에 대해 전반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책의 주요 논지를 소개한다.
◆ 발해는 자주적 왕조국가였다 = 특히 발해가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를 사용했음을 중국의 정사(正史)인 ‘신(新)당서’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신당서는 이같은 발해의 움직임에 대해 ‘사사로이’ 한 것이라며 불쾌감을 표시하는 한편 발해의 자주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발해는 황상을 자칭하는 황제국이었으며, 대외적으로도 일본에서 스스로를 부여의 풍속이 남아 있는 ‘고려국’이었음을 자칭했다.
◆ 발해는 고구려어를 사용했다 = 발해가 국제 교류에서 고구려어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됐다.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기록에 의하면 서기 739년 발해 사신 이진몽(已珍夢) 일행이 일본에 당도, 이듬해 정월 조회에 참석했는데 발해 사신과 함께 ‘신라학어(新羅學語)’라는 통역사가 나란히 서 있었다고 한다. 신라학어란 언어를 배우고자 신라로부터 일본에 파견된 학생으로 발해 사신의 통역을 담당하기 위해 배석한 인사였을 것이다. 이는 발해 사신과 신라학어의 언어가 서로 소통 가능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로서, 발해 사신이 신라어와 통하는 고구려어를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발해 - 통일신라사이에는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정신적 흐름이 분명히 발견된다. 통일신라(統一新羅)는 발해를 북조(北朝), 또는 북국(北國)이라고 명백히 지칭하고 있다(『삼국사기』권 10 「신라본기」; 권37 지리지). 이 당시에도 상당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통일신라가 발해에 대하여 북조(北朝)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우리가 한반도 북쪽을 북한(北韓)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즉 통일신라는 발해와 현재는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은 통일이 되어야할 동족(同族) 전체의 일부라는 의식이 있었다.
참고로 인구학적으로 범위를 최대로 좁혀서 따진다면 남한은 신라의 후예라기 보다는 부여의 후예가 더 정확할 것입니다. 고구려와 백제 및 발해는 모두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들이죠. 뿐만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의 국명은 코리아로 불립니다. 이 역시 거슬러 올라가자면 고구려에서 유래된 말이죠. 인구 비율로 따져도 신라의 인구보다는 고구려와 백제 계통의 인구가 훨씬 더 우세했습니다. 실제로 삼국시대 신라의 인구는 백제의 인구 절반도 채 안 되었습니다. 다만 당나라의 개입으로 반도를 차지할 수 있어서 그렇지. 당나라의 개입이 없었다면 신라는 오히려 고구려-백제 연맹에게 복속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남북국시대 신라의 인구에서 신라계는 적었습니다. 오히려 신라에 병합된 한반도 이북과 이남에 있던 고구려-백제계 백성들이 훨씬 더 많았죠. 이것이 나중에 중세고려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 발해의 국제교역로 = 발해가 ‘일본도(道)’ ‘신라도’ ‘등주도’ ‘영주도’ ‘거란도’ 등 다섯 개 교통로를 국제교역로로 이용했음을 사료를 통해 밝혀냈다. 특히 윤재운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발해는 선박의 규모가 최대 300t에 이르는 해상무역의 강국이었다”며 “당나라에 120여 회, 일본에 34회의 공식 외교사절단을 파견했을 정도로 해외 교역도 활발했다”고 말했다. 참고로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는 150t의 카라크선(carrack 船)이다.
이외에도 임석규 조계종 연구원은 발해의 토기와 자기가 고구려의 것으로부터 시작해 당의 영향을 받았음을 규명했고, 전현실 박사는 발해의 주거문화가 고구려의 온돌 형식을 발전시킨 것임을 밝혔다.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발해 - 통일신라사이에는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정신적 흐름이 분명히 발견된다. 통일신라(統一新羅)는 발해를 북조(北朝), 또는 북국(北國)이라고 명백히 지칭하고 있다(『삼국사기』권 10 「신라본기」; 권37 지리지). 이 당시에도 상당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통일신라가 발해에 대하여 북조(北朝)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우리가 한반도 북쪽을 북한(北韓)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즉 통일신라는 발해와 현재는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은 통일이 되어야할 동족(同族) 전체의 일부라는 의식이 있었다.
참고로 인구학적으로 범위를 최대로 좁혀서 따진다면 남한은 신라의 후예라기 보다는 부여의 후예가 더 정확할 것입니다. 고구려와 백제 및 발해는 모두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들이죠. 뿐만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의 국명은 코리아로 불립니다. 이 역시 거슬러 올라가자면 고구려에서 유래된 말이죠. 인구 비율로 따져도 신라의 인구보다는 고구려와 백제 계통의 인구가 훨씬 더 우세했습니다. 실제로 삼국시대 신라의 인구는 백제의 인구 절반도 채 안 되었습니다. 다만 당나라의 개입으로 반도를 차지할 수 있어서 그렇지. 당나라의 개입이 없었다면 신라는 오히려 고구려-백제 연맹에게 복속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남북국시대 신라의 인구에서 신라계는 적었습니다. 오히려 신라에 병합된 한반도 이북과 이남에 있던 고구려-백제계 백성들이 훨씬 더 많았죠. 이것이 나중에 중세고려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13억 중국인 가운데 92%를 차지하고 있다는 한족(漢族)이 실제 조사 결과 '유전학적으론 현존하지 않는 제3의 혈통'으로 나타났다. '한족은 혈통 개념이 아니라 문화적인 개념'이라는 통설이 학술연구로 밝혀졌다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중국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대학 생명과학학원 셰샤오둥(謝小東) 교수는 "순수한 혈통의 한족은 현재 없다"는 연구 결과를 최근 발표했다고 중국 언론들이 15일 보도했다. 그의 연구 결과는 중국 서북지역의 소수민족 DNA 연구 등을 통해 나온 것이다. 셰 교수는 "DNA 조사 결과 현대 중국인은 다양한 민족의 특질이 고루 합쳐진 것으로 어떤 특정 민족의 특질이 도드라지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다'고 생각돼 왔으나 이는 특정 시기의 한족을 주변의 다른 종족과 구별하기 위해 만든 지역적 구분일 뿐"이라면서 "이젠 한족을 그렇게 지역적으로 따져 정의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춘추전국시대 현재의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 세워진 진(秦)은 소수민족인 '서융(西戎:서쪽 오랑캐)'이 주류였다는 것이다. 또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주로 현재의 산시(山西) 남부와 장쑤(江蘇)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서북부 등의 소수 지방을 포함한 허난(河南)성 일대였으나, 이곳에 거주한 사람들을 한족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중국인들은 또 자신들이 "염제(炎帝)와 황제(黃帝)의 자손(炎黃子孫)"이라고 주장하지만 연구 결과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도 중국인들이 오랑캐로 치부해 왔던 '북적(北狄)' 지역이었던 것으로 연구 결과 드러났다.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는 모두 현재의 간쑤성과 산시(陝西)성에 걸쳐 있는 황토 고원지역으로 이 두 곳 모두 한족의 본거지가 아닌 것은 물론 주요 거주지역도 아니라는 얘기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오히려 중국 북부에서 남부로 이주한 소수민족 객가족(客家族)이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밝혀졌다"면서 "이들의 고어(古語), 풍속 및 습관에서 나타나는 역사의 흔적을 보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중원인"이라고 강조했다.
민족(民族),민권(民權),민생(民生)의 삼민주의(三民主義)는 쑨원(孫文, 1866~1925)이 제창한 쥐나 근대 혁명과 건국의 기본 정치 이념입니다. 그것이 공표된 것은 1905년 일본에서 쥐나혁명동맹회(中國革沒盟會)를 결성했을 때입니다. 동맹회는 창립 선언에서 ‘만주족 축출(?虜驅除), 중화의 회복(中華恢復), 공화국 건립(民國建立), 토지 소유의 균등(地權平均)’의 4대 강령을 발표하였고 동맹회가 발간한 <민보(民報)>의 발간사에서 이 4대 강령을 3대 주의로 통합해 이론 체계를 확립하였으며, 1906년부터 3대 주의를 삼민주의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멸만흥한(滅滿興漢), 곧 만주족의 청(淸) 왕조를 타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고, 민권주의는 유럽식의 공화정의 확립, 민생주의는 지주의 불로 소득을 억제하는 것을 과제로 했습니다.
다른 소수민족으로는 어떨까... 쥐나공산국이 탄생할때 모택동이 약속한게 바로 소수민족독립이었습니다. 국민당과 전쟁중에는 쥐나가 한개성 단위로 쪼개져도 좋다고 말한 사람이 바로 모택동입니다. 그래서 쥐나공의 성립후 자치구가 등장하죠. 쥐나에 55개 이상의 민족들이 있습니다. 쥐나정부가 크게 나눈 민족이 55개이고, 자잘한 민족은 훨씬 많습니다. 쥐나인민공화국 탄생시 짱골라 한족 비율은 50% 미만이었습니다. 50년만에 나머지 소수민족들 4~50%가 우주로 이민갔습니까? 아니죠. 무늬만 한족입니다. 짱골라 한족은 어떨까? 후진타오가 공식석상에서 이런 말을 했죠. " 현재 삼민주의가 대세니 뭐니하고, 자치권을 요구하는 무리가 많다. 이런 분열주의를 조심해야 한다. " 삼민주의, 자치권을 소수민족만이 부르짖을까? 아니죠. 저기 상해, 절강성같은 잘 사는 연해 동네에서도 부르짖는 겁니다. 자신들을 상해인이니 홍콩인이니 하면서 타지역과 다르다고 주장하죠~ 순수 짱골라들도 이러는 판국입니다. 쥐나가 제일 처음 분열하는 곳은 소수민족자치구가 아니라 홍콩, 상해, 심천, 광주 같은 잘사는 지역부터 떨어져 나간다고 하죠.
짱골라들이 원나라, 청나라 때부터 티벳을 차지했다고 새빨간 저짓말을 하는데 정말 어이 없습니다. 원나라는 흉노계 몽골족의 역사이고, 금나라와 청나라(후금)은 고구려발해 후예 예맥-부여계 말갈(=여진=만주)족의 역사입니다.
하나로 통제된 쥐나의 신화가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쥐나가 추구하는 조화로운 사회의 저류에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심각한 민족 갈등이 내재하고 있죠. 최근 신장 위구르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낳은 소요 사태가 쥐나의 위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류를 형성하는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쥐나는 문화적 지리적 언어적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죠. 현재 명목적으로, 한족으로 분류되는 남부의 광둥(廣東)과 푸젠(福建)성, 하카(客家)족을 위시해 쥐나는 최근 들어 소수계들의 인종과 문화가 부각되고 있으며 정치적 환경과 경기침체로 분열이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2009년 6월 광둥의 장난감 공장에서 두 명의 위구르 노동자가 사망한 것을 계기로 조성된 신장 위구르의 불안은 7월 5일 156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하는 최악의 소요 사태로 확대됐죠. 쥐나 당국은 무슬림계를 비롯, 소수 민족이 외부의 지원을 받아 분리되는 소위 ‘코소보 효과’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쥐나의 민족갈등은 ‘공식적인’ 소수민족들만이 아닌 문제로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죠. 쓰촨(四川)성과 광둥성, 상하이, 후난(湖南)성 사람들이 문화적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중앙정부의 통제에 반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주류 언론들은 요즘 쥐나의 분열 양상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2009년 7월 뉴욕타임스는 1면에 신장 위구르 소요 사태로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한족 부부의 사진을 싣고 쥐나 정부가 정책적으로 이 지역에 이주시킨 한족의 비율이 지난 수십 년간 40%대가 됐다며 토박이 위구르인들과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월 스트리트 저널(WSJ)은 ‘쥐나의 인종 분열’이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실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구소련이 인종적 민족적 차이로 인해 분리됐듯이 쥐나도 같은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G8정상회의 도중 급거 귀국한데서 드러났듯 이번 충돌로 인해 쥐나 공산당은 오는 2009년 10월 야심차게 준비한 60년의 ‘조화로운 리더십’ 행사가 차질을 빚는 것은 물론, 향후 민족 분열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죠. 2000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쥐나의 55개 소수민족은 총 1억400만 명으로 전체의 9%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92%의 점유율을 보이는 한(漢)족은 베이징 북쪽 일대부터 남쪽의 광둥성에 이르는 지역에 대부분 거주합니다. 사실 92% 한족이란 것도 실제로는 허구라는 것이 유전분석으로 밝혀졌죠. 쥐나는 그동안 중앙정부 차원에서 겉으로는 소수계의 문화와 경제 개발을 지원해 왔습니다. 청나라 말기인 1911년 국민당 지도자 쑨원(孫文)은 쥐나가 국가적 민족으로 통합되지 않아 강성대국이 되지 않았다면서 ‘삼민주의’를 주창했죠. 그는 한족과 만주족, 몽골족, 티베트족, 그리고 위구르와 카자흐가 포함된 후이족 등 이른바 ‘중국의 다섯 사람들’을 내세웠습니다. 쥐나는 역사적으로 남북으로 나뉘어 통치됐고 5개의 왕국으로 분리됐습니다. 몽골과 돌궐, 티베트는 쥐나 한족의 마지막 왕조인 명나라가 멸망한 1644년만 해도 지금보다 영토가 3배나 넓었습니다. 강력한 중앙정부가 소수계들의 언어적, 경제적, 정치적 통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같은 민족인 허구의 한족만 해도 만다린과 우, 웨, 시앙, 하카, 간, 남부 민, 북부 민 등 8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습니다. 가령 웨(越)족 사람들의 대화를 광둥 사람들은 극히 일부만 이해할 수 있고 광저우와 창저우, 샤먼 방언끼리는 대화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쥐나 언어학자인 Y.R. 차오 씨는 “광둥어와 만다린어는 영어와 화란어 혹은 불어와 이탈리아어만큼 다르다”고 비유했습니다.
만다린어는 20세기 초에 쥐나의 표준어 지위를 획득했고 국제어 대접을 받지만 아프리카의 스와힐리어처럼 쥐나 내 학교에서 만다린어 교육을 시켜야 하고 아직도 많은 지역에서 다른 언어들이 쓰이고 있죠. 쥐나의 소수계는 인구 비율은 낮지만 영토 비율은 근 60%에 이르며 소수계 인구의 90% 이상이 신장과 티베트, 내몽고, 윈난(雲南) 성 지역에 몰려 있습니다. 신장은 쥐나의 6분의 1에 달하고 티베트는 다음으로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한족을 이주시키는 정책에 따라 이들 지역의 한족 비율은 1982년 10%(6700만 명)에서 불과 8년 만에 35%(9100만 명)로 높아졌습니다. 3개의 자치구를 갖고 있지만 한족의 소수계로 편입시킨 만주족은 같은 기간 430만 명에서 128% 증가한 980만 명이 됐습니다. 구이저우(貴州)성의 거라오족은 8년 만에 714%라는 믿기 힘든 증가율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높은 출산율 외에도 출신 민족을 한족에서 바꾼 결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다른 종족 간 결혼을 할 경우 이들 자녀의 등록민족 신고는 만 18세에 결정할 수 있죠. 이 같은 증가는 형식상일 지라도 소수계에 대한 상대적인 특혜 덕분이라 할 수도 있겠죠(?). 쥐나 당국이 인구 억제를 위해 강력 추진한 한 자녀 정책을 소수계는 도시 지역을 제외하면 적용받지 않고 세제 혜택과 이중언어 사용을 통한 공직 기회의 확대, 토착 종교, 문화 활동 보장 등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형식적이라 할 지라도... 이런 이유로 쥐나에서 몽골족의 양고기 스프와 무슬림의 국수, 조선족의 바비큐가 쥐나 어느 도시에서나 맛볼 수 있을 만큼 퍼져 있죠. 또한 소수계의 의복과 문화 예술이 쥐나 일반 가정에까지 확산되고 있?니다. 현재 베이징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식당 중의 하나는 티베트식 체인점 ‘마케-아미’죠. 이곳에 가면 부유층이 티베트의 전통 음악과 공연을 감상하면서 미모의 여종업원의 시중을 받으며 양고기 바비큐인 ‘야크 카봅’을 즐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상하이를 중심으로 경제 발전을 이룬 남부 사람들은 문화적 정치적 차별성을 내세우고 있죠. 코미디언들은 상하이 말투와 스타일로 교양과 사업 안목이 부족한 북부 사람들을 조롱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베이징 사람이 상하이에서 물건을 살 때 만다린어로 말하면 값을 깎기도 어려울 뿐더러 바가지를 쓰기 일쑤입니다. 날로 높아지는 광둥성 사람들의 자각은 하카족과 남부 푸젠민, 산터우 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 지역의 경제 발전과 북쪽 사람들로부터 당한 오랜 구속에 대한 반감은 공통적인 현상이죠.
이들 남부 사람들은 자신들을 전통적으로 한족이 아니라 남부를 기반으로 한 당나라(A.D. 618~907)의 후예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북미와 유럽, 동남아시아의 차이나타운 대부분은 바로 이들 남부 출신 이민자들이 세운 것들이죠. 전문가들은 향후 10년 내에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남부의 ‘당 민족주의’가 북부의 ‘허구의 한족 민족주의’에 대항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국영 미디어들이 신장 자치구의 소요를 일방적인 시각으로 전달하고 티베트의 뉴스들을 은폐하는 것이 ‘허구의 짱골라 한족 민족주의’를 내세우기 위한 의도로 파악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쥐나의 경제적 역동성은 소수민족의 인종적 언어적 분화를 자극하고 있습니다. 특히 남부와 항구 등 중부와 북서부보다 경제발전이 앞선 지역들에서는 이 같은 경향이 더욱 확대되고 있죠. 지속적으로 탈중심화하는 쥐나는 내부 갈등과 인플레이션, 경제 발전의 불평등이 문화적 언어적 분화를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그 위협은 과거 중원 왕조를 종식시킨 적도 있는 남부 지방 사람들로부터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우월하고 외국에서 교육받았으며 화교의 지원을 받는 그들이....
현재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힙니다. 현재 쥐나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이죠. 민족차별에 의한 압력이 사회에 암묵적으로 만연되어 있죠.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쥐나 소장파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쥐나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허구의 한족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습니다.
우리 나라의 이씨는 한국 자생(自生)의 이씨와 외국에서 귀화한 외래(外來)의 이씨로 나눌 수가 있다. 우리 나라는 처음에 성이 없다가 통치자 곧 귀족부터 성이 있게 되었는데, 문자가 없었으므로 자연 중국 한자(漢字)로 표기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이씨는 본관이 237본이나 된다. 이 중에서 역사가 제일 오랜 성은 경주이씨이고, 중국에서 귀화한 대표적인 이씨는 연안이씨(延安李氏)이며, 월남에서 귀화한 화산이씨(花山李氏)도 있다. 그러면 우리 전주리씨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 중국(中國)에서의 귀화설(歸化說)
작자 연대 미상의 완산실록(完山實錄)에는 우리 시조에 대하여 이렇게 씌어 있다.
`야사(野史) 실록(實錄)을 참고해 보면 우리 시조 사공공의 휘는 한(翰)이요, 자는 견성(甄城)이시다. 공은 본디 중원(中原 : 中國)에 살았는데, 태어나실 때부터 거룩하여, 총명이 과인하시고 재질이 특이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시었다. 공의 나이 15세에 한림원에 입학하시고,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납고 악했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모시었다. 그래서 그 때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서 반드시 왕기가 나타나리라.' 하더니,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함을 받아 공이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로 오니, 그 때 나이 18세였다. 나이 약관도 되지 않아 문장이 비범하고 도덕이 탁월하여 인자한 기풍을 크게 떨쳤다. 불과 수년에 사람들의 칭송하는 소리가 조정까지 들려 신라의 문성왕(文聖王)이 불러 사공 벼슬에 임명하였고, 1년 남짓 다스리매 국정이 공평하여 모든 관원들이 교화되고 만백성들이 즐겼다. 그래서 태종(太宗)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가 사위를 삼았다.' 곧 사공공은 본디 중국인으로 배씨의 모함을 받아 신라로 와 사공 벼슬에 올라 김씨를 아내로 맞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출처 미상의 이씨 득성의 유래(李氏得姓之由來)란 글에서는 중국 이씨의 역사를 약술하고서 끝 부분에 `우리 전주리씨가 본래 중국 당(唐)나라 황실의 후예라 하나, 그 파계와 원류를 밝힐 분명한 근거가 없고, 우리 시조 휘 한(翰)으로부터 대대로 완산인이 되었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