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나니
약 1장 12-18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약 1장 전반부의 결론입니다.
1장 2절에서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기라고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험은 인내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또 인내는 우리로
더 온전한 사람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또 1장 5절에서는
시험가운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1장 9절에서는
경제적인 시험을 받은 자들에게
경제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영적인 부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났을 때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그 결론으로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2절을 원문으로 보면
“복이 있도다”라는 말이
제일 먼저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팔복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실 때도
제일 먼저 나오는 단어가
“복이 있도다”는 단어입니다.
“복이 있도다 마음이 가난한 자여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복이 있도다 애통하는 자여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복이라는 말입니까?
시험 자체가 복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러면 시험을 참는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시험을 참는다는 말은
1장 3절에 인내라는 단어와 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성경적 인내란 어떤 것입니까?
인내란 “후포메노(υπομενω)”라는 말로서
“어디 아래 거하다”라는 말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적 인내란
시험을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니라
시험가운데서
주님 아래 거하여 있어야합니다.
만일 우리가 시험을 당했을 때
주님 아래 거하여 있지 않으면
그것은 시험을 참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을 참는다는 것은
시험 가운데
주님아래 더 깊숙이 거하여 있는 것입니다.
또 성경적 인내란
그냥 참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아래 거하여 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벧드로후서 1장 6절에 보면
“인내에 경건 즉 기도를 더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참기는 참는데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인내가 아닙니다.
성경적 인내란
인내하는 가운데
주님께 부르짖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또 성경적 인내란
그냥 참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가지고 참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3,4절에서는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브나르그”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내는 희망을 갖기 위한 기술이다.
인간은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한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견디고
용감하게 살아갈 수 있다.
신약성경을 보면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라고 적고 있다.
지금의 고난을 참고 이기는 것은
바로 마음 속에 품고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인내를 희망을 이루기 위한 기술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는 희망을 이루기 위한 그 기술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잘 견디어내는 사람은
항상 이기기 마련이다.
참아낼 줄 아는 사람이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여러분에게 고난이 있습니까?
시험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시험 가운데서라도
소망을 가지기기 바랍니다.
희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어떤 시험도 이길 수 있습니다.
또 성경적 인내란
그냥 참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경주하면서 참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11장에서는
“인내로서 경주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12:1절에서는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적 인내입니다.
그런데 옛날 성경에서는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왜냐하면)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라”는 말은
“시험을 참는 것에”
옳다고 인정함을 받은 후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내의 시험에 통과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면류관이란
우리가 종말에 받게 된 면류관을 말합니다.
그런데 인내의 시험에 통과한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도 면류관을 주십니다.
“약 5: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어떤 면류관입니까?
욥과 같이
우리 인생의 말년에
모든 것을 역전시켜주시는 면류관입니다.
우리가 고난 받은 것의
두 배나 되는 축복을 받는 면류관입니다.
여러분 이 땅의 삶은
초반이 중요합니까?
중반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마지막이 중요합니까?
예 모든 것이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의 마지막, 말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인생의 초반을 보내고,
또 중반을 보낸다하더라도
말년이 비참하다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저는 매일 기도할 때 마다
여러분들이
욥의 말년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욥의 말년처럼
그 전에 고난받은 것의 두배,
아니 더 이상 되는 축복을 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그 어떤 시험과 고난 가운데서도
잘 참으시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의 면류관과 함께
인생의 마지막이 더 잘 되는
축복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욥의 말년의 축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현재의 고난을 잘 참으시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참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참는 자가 승리하십니다“
오늘 본문 12절까지는
연단의 의미에서 시험이고,
13절부터 말하는 시험이란
유혹이라는 의미에서 시험입니다.
유혹으로서의 시험입니다.
그러면 연단과 유혹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연단으로서의 시험이란
반드시 그 이후에 축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혹으로서의 시험이란
그 뒤에 멸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신 후에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욥의 믿음을 시험하신 후에도
갑절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주신 후에
그 시험을 믿음으로 잘 이겨나가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13절부터 나오는 시험
유혹이라는 말은
쉽게 말하면 올무를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올무에 걸려서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올무를 놓는 시험은
절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절대 사람에게
올무를 놓는 시험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가 넘어져서 멸망하게 하는 시험을
절대 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연단으로서의 시험을 주실 때도
우리가 그 시험을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절대 그 시험을 허락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시험을 감당할만한 것을 아시고
우리에게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그 시험을 감당할 줄 아시고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욥도
그 시험을 잘 감당할 줄 아시고
그 시험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반드시 이 말씀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올무를 놓는 시험을
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가 넘어지게 하는 시험을
허락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만한 시험만을
허락하신다“.
혹 우리가 그 시험을
감당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는
하나님은 그 시험과 동시에
그 시험을 감당할만한 은혜와 함께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능히 그 시험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시험을 잘 감당하면
반드시 우리에게 그 시험보다
더 큰 은혜와 복을 내려주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올무를 놓는 시험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까?
17-18절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좋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좋으신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것들만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8절에
하나님께서 피조물 중에서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는 낳았다고 하는데,
여기서 첫 열매란 무슨 말이겠습니까?
축복의 첫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신 목적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인간이 제일 큰 축복을 받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시험을 받을 때
항상 무슨 생각을 합니까?
왜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시험하시는 것은
나를 넘어뜨리기 위하심이 아닌가?
결국 나는 이 시험에서 넘어지겠구나?
나는 이제 망하겠구나?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은 누구의 생각입니까?
마귀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16절에 보면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누구에게 속지 말라는 것입니까?
마귀에게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제적인 가난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적인 부자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약1:9).
또 왜 여러 가지 시험을 허락하십니까?
우리로 더 온전하고 구비하여
더 예수님을 닮는 사람이 되게 위함입니다(약1:4).
그리고 이 모든 시험을
인내로서 통과한 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육간의
온갖 좋은 은사와 선물들을
우리에게 내려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17).
약1:13.
사람이 시험(유혹)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유혹)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유혹)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유혹)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유혹)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