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그리고 여백이 있는 곳]
당신 멋져
“당신 멋져”
타인으로부터 이 말을 듣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아마 가슴이 벅차오르고 두근거릴 것이다. 하지만, 아무나 들을 수 있는 말도 아니고 또 누구에게나 함부로 해줄 수 있는 말도 아니다. 아무나 듣는다면 신선함도 없을 것이며 그저 말장난이라 생각해 불쾌해 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날 참으로 멋진 이 말을 들었다. 지난해 12월 말, 어느 모임에서 아쉬움 많았던 한 해를 뒤돌아보고 다가올 새해를 활기차게 맞이하자는 뜻에서 조촐한 송년회가 있었다. 이 모임에서 나온 건배제의 구호가 ‘당신 멋져’였다.
당 : 당당하게 살자
신 : 신나게 살자
멋 : 멋있게 살자
져 : 져주면서 살자.
당당하게, 신나게, 멋있게, 져주면서 사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나는 모든 면에서 당당하게, 신나게, 멋있게 살지 못했다. 더구나 져주면서 사는 짓은 더욱 못했다. 지난 세월 내 삶은 당당하기는 고사하고 위축된, 안으로 오그라든 고민, 그 자체였다. 그러자니 자연 신나게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고 멋있게는 물 건너간 상황이었다. 져주면서 사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어떻게든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는 마음이 꿈틀거렸고 그 허망함을 쫓는 내 마음은 늘 허전하기만 했었다.
어떻게 하면 당당하게 살 수 있을까? 나에게는 사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맑은 눈이 없었을까. 모든 사람은 나보다 더 잘나고, 위대해보이며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수완도 탁월할 것이란 선입감이 나를 억눌렀다. 나 자신을 낮추는 일이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로 인해 나 자신은 밑으로 가라앉기만 했다.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을 부러워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사람들을 괜찮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거짓이라면 묵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어차피 그 사람이 남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 거짓말이란 자신을 당당하게 포장하는 용기가 될 수 있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 세상에 거짓과 위선이 통한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물론 발붙이게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결국,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고 땅에 떨어진 신용을 만회하려면 위선과 허상으로 살아온 날들 보다 더 많은 시간과 땀을 투자해야 하는 아픔이 뒤따르게 되어 있다.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본다. 나에게는 신나는 삶이 없었다. 더구나 지난해의 삶은 더더욱 그랬다. 오후 1시에 출근해서 밤 10시까지 근무하는 생활이니 신바람이 날 리 만무하다.
마음 같아서는 때로는 동해의 푸른 바닷물을 바라보며 머리도 식히고 한라산의 설원 속에서 자연을 만끽하는 멋있는 생활도 동경했지만, 현실은 나를 외면했다.
져주는 삶, 사람이란 자존심이 있게 마련이고 오기라는 게 있는데 져주면서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누가 나에게 하는 소리가 조금이라도 귀에 거슬리면 머리끝이 쭈뼛 서는 못된 소갈머리는 좀체 고쳐지지 않으니 나 자신 수양이 덜 된 탓이리라. 세월은 변하는데 내 고약한 버릇은 좀체 고쳐지지 않았으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세월에 순종해야 마땅한 일이다.
이제 새해가 밝았다. 다시 사는 기쁨의 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좀 더 알차고 보람되게 보내려고 다짐해 본다. 올해에는 남에게 읽히는 글도 많이 쓰고 발표해서 독자들로부터 사랑도 받고 싶다.
정년퇴직을 한 사람이 일자리를 탐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나 사회가 나를 필요로 하는 이상 열심히 일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다. 이제는 내가 맡은 일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일할 생각이다. 더구나 일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즐겁고 신나는 일인가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자연히 사물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긍정적으로 변해 갈 것이고 신나는 일도 많이 생길 것이다.
없는 시간이나마 쪼개어 멋진 일도 만들어보고 싶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가족과 함께 여행도 즐기고 싶다. 끝없이 뻗어나간 능선, 허물어진 성곽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그런 멋도 부려보고 싶다.
나 보다 못한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마는 누가 뭐라고 해도, 혹 듣기 거북한 말을 해와도 끝까지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싶다. 이제는 남을 먼저 배려하는 방법도 배워나가야겠다.
아직도 지난해 외치던 건배 구호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당신 멋져”
그래! 당당하게, 신나게, 멋있게, 져주는 삶을 살자.
수필가 박순철
Profile
충북 괴산출생. 월간 『수필문학』 등단(1994년)
한국문협· 충북수필회원.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현)
충북수필문학상. 제30회 수필문학상 수상 외 다수
수필집 『달팽이의 외출』 외 3권
이메일: tlatks102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