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꽃
-김재연 목사님 은퇴식에 부쳐
정홍순
*
12월 우리는
그렇게 시작하였다
동방의 별 이끌고 엎드려 절하던
보배 합에 떨어뜨린 눈물
12월의 당신이
생명의 주인으로 찾아와
늙은 종을 보내던 아브라함처럼
저 나로도 뱃길 더듬어
창파에 띄워 보냈다
*
갈릴리여
갈릴리여
일곱 번 뒹굴어 떠오르는 백파
눈물의 바다여
어여쁜 두 딸 광주에 떼어놓고
새끼 잃은 소처럼 목메어 부르던
백양교회
조석으로 들이치는 갯바람에도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라
당신의 분부는 달콤했으니
모두 기뻐 만선의 깃발을 올렸다
*
아버지 고향
소나무 베어 도자기 굽던 칠량
마량이여
사해바다여
진펄위에 둥둥 떠오르는 소금
통한의 바다여
돌 치켜들고 달려들던 사람들
유령의 밤바다로 깨진 별들이
흐느끼며 출렁이던 교회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리라
한탄하던 만호성의 돌들
그러나 절망 가운데
구원의 닻줄 잡아매주던
희망교회
당신의 명령은 떨어지고
시위하던 바다는 물러나 어느덧
소원의 항구에 배는 닿았다
*
살타는 냄새를 아는가
뼈가 타 재가 되는
성스런 비밀을 아는가
눈물이 떨어져 얼룩지다 핀
꽃의 향기를 아는가
뿌리 없이 밀어올린
밤이면 더 지독하게 아프던
고독
말씀이 목말라 몸부림칠 때마다
석이처럼 피던 꽃
눈물에만 풀어지고
눈물에만 피었다 지는 꽃
*
다시 12월
첨산 아래 허리 굽혀 오신 당신과
강산 한번 바꾸느라 허리 굽은
늙은 종이 무릎 꿇고
감꽃으로 노랗게 물들여 놓은
하나님의 보상
대곡교회
익었다
익었다
익어야 떨어지고 딸 수 있는
불타는 가을과 순종한 종의 길에
12월은 다시 왔느니
사랑하는 아내와
조용히 물러나 두 사람이 합수한
눈물의 꽃을
여기에 두고
지척에서
날마다 그 사랑 밥 먹으며
모리아산처럼
호렙산처럼
갈멜산처럼
골고다처럼
눈물꽃 한 아름 꺾어 바치오리다
(2019년 12월 29일)
<표사>
부르심에 함께하고 싶은 목자의 글
김재연 목사는 은퇴 없는 신앙인이다. 현직에 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밤늦도록 책상에 앉아 씨름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제는 그만하고 쉴 만도 한데 오히려 더 열심히 읽고 쓰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이유가 있다면 ‘아쉬움’일 것이다. 날마다 속기하는 바둑기사처럼 되짚어보고 고치는 것이 일이다. 현장을 떠나 홀가분하게 아쉬움을 살뜰히 챙겨 보내며, 오래 사랑하고자 하는 자애로움이 있어서다. 또 하나는 퇴수하는 수행자의 모습이다. 한걸음 물러서서 훈수하는 사람처럼 친절한 고수의 한 마디로 설득하고 싶어서다. 이렇게 김재연 목사의『동행』은 따뜻하면서도 한 수가 들어있는 수상집으로 엮어놓았다. 도란도란 생각하며 들을 수 있는, 발랄한 기치가 숨어있는 이야기들로 친근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내가 무슨 글을 내놓겠는가.’ 많이 부끄러워했는데 순박하고 그윽한 한 편의 명화를 보는 듯하다. 무엇을 어떻게 함께 하고 싶어 하는지, 책을 펼치는 사람들은 알게 될 것이다. 심지 끝을 맞추어 그을음 없이 타고 싶었던 목자의 진심을 보게 될 테니 말이다.
—정홍순(시인)
<책 속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사람들
자신의 과거를 간증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내가 기도하는 데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셔서 이렇게 했다.”는 식의 표현을 많이 사용하곤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어떤 식으로 말씀하셨을까? 많이 궁금한 대목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음성이 들린 것인지, 마음이 움직인 것인지, 말씀을 보다가 확신을 얻은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서 많은 분들이 하는 말 가운데 “저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났습니다.” 혹은 “하나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주관화시켜서 전달하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 주관화된 내용을 듣는 사람들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마치 바보처럼 ‘나는 믿음이 없는 건가’하는 의심도 합니다.
계시의 주관화란 무엇입니까? 자기주장, 생각, 미혹이 담겨있지는 않을까요. 잘못된 주관화는 사단이 심어주는 자기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과 생활의 열매를 비추어 진위여부를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정말 성령님이 알게 해주신 뜻이면 마음에 확신, 기쁨, 평강, 자유가 넘치게 됩니다. 또 실제 삶에서 그대로 실현되어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직관마저 하나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믿음에 불균형을 이룰 수 있고, 심하면 신비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신앙행위는 반드시 말씀에 비추어 객관화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을 본 적도 음성을 들은 적도 없지만 믿음을 가져온 것은 말씀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원시 기독교 시대에 초자연적 대면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말씀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누구나 마땅히 수궁할 수 있는 객관화 된 말씀이겠지요. 이런 말씀으로 인하여 관계는 형성되고 소통이 가능한 생활 속에서 만남을 이루며 사는 사회가 이루어지는 데 그런 만남을 인격적인 만남이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어떤 방식이 되었든 상호간에 무엇인가를 주고받기 위해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전혀 다른 점이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그분이 먼저 찾아오셔서 만나주셔야 만남이 성사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초청하시는 예수님’이라 말합니다. 초청받은 사람은 믿음을 갖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바꾸어 주시는 만남인 변화의 만남(Encounter)입니다.
성경 베드로전서 1장 9절에 “믿음의 결국은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가르쳐주셨습니다. 결국이라 한 믿음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사람에게 있으며 구원의 확신 갖고, 변화 속에서 성숙되어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만나는 방식은 점진적인 과정이지 단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각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것, 다른 사람과 동일한 방식, 시기, 경험이라면 도리어 예수님과의 만남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독교에서는 구원의 서정을 3단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죄의 형벌에서 면제되는 칭의(稱義)를 말합니다. 이 칭의는 신분상의 변화로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나면 다시 되풀이로 거듭나는 일이 없다는 뜻에서 일회적입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성화(聖化)입니다. 이는 칭의와 달리 완성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계속 자라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성화입니다. 셋째는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변모되는 영화(榮華)입니다. 이 셋 중에서 인격적인 만남이란 칭의 구원, 즉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은 후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크게 변화, 성숙되지 않았다고 해서 인격적인 만남이 없었다고는 절대 단정 짓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죄를 멀리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으면 이미 성화의 과정 중에 있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성화에서 완성되는 사람은 없는 것이지요. 문제는 예수님을 얼마나 많이 닮아 가느냐의 싸움일 뿐입니다.
날마다 죽노라 했던 바울을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나 나를 죽이고 살아가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돌이켜보세요.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이뤄졌다는 확실한 검증 기준으로 말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무엇보다도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없이는 구원 없음을 절감합니다. 이때 하나님 앞에 완전히 엎드려 은혜와 긍휼만 바라봅니다. 바로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의 주인으로 영접하게 되고 옛사람으로부터 돌이키는 회심이 따르게 되지요.
인격적 만남이 있고난 다음은 어찌해야 할까요. 인격적 만남은 평생에 걸친 진행형이기에 여전히 미성숙한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려고 마음만 먹었지 구체적으로 전혀 실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지금 죄에 지고 있어도, 그것이 죄인 줄 알면서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있어도, 진정으로 마음 깊숙이 애통하며 어떻게 하든 빨리 회개하고 말씀대로 살아야겠다는 일말의 소원이 있다면 여전히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며, 울림이 있는 사람이며, 번뇌의 사람으로 성화의 과정을 이루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하는 방향과 지속성의 문제이지, 매순간의 도덕적이거나 종교적 혹은 영적 업적을 뜻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