送信송신 / 신동집(1924-2003)
바람은 한로의
음절을 밟고 지나간다.
귀뚜리는 나를 보아도
이젠 두려워하지 않는다.
차운 돌에 수염을 착 붙이고
멀리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다.
어디선가 받아 읽는 가을의 사람은
일손을 놓고
한동안 멍하니 잠기고 있다.
귀뚜리의 송신도 이내 끝나면
하늘은 할 수 없는
청자의 심연이다.
무덥던 여름도 寒露한로 앞에서 제 몸을 식히며 돌아가는 계절이다. “타버린 눈으로 시인은 어차피 자기의 주변을 더듬어 노래해야 한다.”고 하는 <행인의 시학>을 통해 “머물러 지키는 일도 중요하지만 떠나며 꽃피우는 일 또한 시인의 본질적인 운명이라”고 역설한 시인의 사유가 깊은 가을이다.
평자들은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주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시를 통해 인간과 자연에 대한 근원적인 의미탐구에 천착한 시인이라 말하고 있다. 눈이 안탄 시인은 ‘허세’이거나 ‘객기’의 탓이라고 하는 만큼 시인이 직시하는 光源광원을 통해 쓴 <秋日有情추일유정>의 세 번째 시 「송신」을 통해 그 육신의 비의秘儀를 살펴본다.
“후조의 나래깃”으로 「한로」를 노래하고, “돌 속에”서 「가을의 얼굴」을 캐고자 하는 시인은 “귀뚜리”를 통해 “음절을 밟고 지나간” 한로의 바람 앞에서 가을의 전언을 타전하고자 한다. 귀를 기울여 잘 들어야 들을 수 있는 “이내 끝나”는 “귀뚜리의 송신”에 그저 깊어지는 가을 하늘은 “청자의 심연”이 되고 만다.
우리는 자연의 소리를 잃어버리고 살아간다. 인간은 그렇게 문명화되었다. 시인은 마침내 눈이 타버리고 음성만 남는 육성을 「송신」을 통해 하늘도 파랗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가을 앞에 인간을 세워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