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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策問
묻노라.
《논어(論語)》를 읽을 때에는 언제나 여러 제자들이 물은 것을 자신이 직접 묻는 것처럼 하고, 부자(夫子 공자(孔子))의 말을 오늘날 귀로 듣는 것처럼 여겨야 한다. 또 사서(史書)를 읽을 때에는, 그 임금과 신하의 관계와 어떤 일의 기회(機會)에 대해, 자신의 몸이 그런 경우에 있는 듯이 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옳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를 판단한 뒤에야 보탬이 있을 것이니, 선유(仙儒)들도 대개 이러한 말을 하였다.
또 번지(樊遲)가 농포(農圃) 배우기를 청한 것이나 자장(子張)이 간록(干祿) 배우기를 청한 것이나, 계로(季路)가 귀신 섬기는 것을 물은 것이나, 안연(顔淵)이 나라 다스림을 물은 것 같은 것들은 역시 각각 자기들의 포부를 말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제생(諸生)들이 만약 부자(夫子)의 문하에 있었다면, 물어서 배우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관중(管仲)은 소백(小白)을 섬기고 호언(狐偃)은 중이(重耳)를 섬겼는데 그들이 비록 인(仁)을 핑계로 세력을 부리고 음모로 승리를 취하였으나, 모두 이적(夷狄)을 물리치고 왕실(王室)을 높였다. 그러나 끝내 관중은 공렬(功烈)이 보잘것없다는 기롱을 들었고 호언은 간휼(奸譎)하여 바르지 못하다는 비방을 들었으니, 이도 잘한 일이라 할 수 없다.
숙손통(叔孫通)이 고조(高祖)를 위하여 예의(禮儀)를 제정하지 않았다면, 술에 취해 부르짖으며 칼로 기둥을 치는 행패가 반란에 이르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선왕(先王)의 예의를 잃은 것은 숙손통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조조(鼂錯)가 경제(景帝)를 위하여 제후(諸侯)의 땅을 줄이지 않았더라도 얼마 되지 않아 어찌 난이 일어나지 않았을까마는, 7국(國)의 군사가 일어난 것은 조조가 재촉한 것이다.
제생들이 만약에 관중과 호언의 소임을 맡았다면 허물은 없이 공을 세울 수 있었겠는가? 또 숙손통과 조조의 시대를 만났다면 책망을 받지 않고 그 폐단을 없앨 수 있었겠는가? 과장도 겸손도 하지 말고 사실대로 진술하기를 바라노라.
묻노라.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하후씨(夏后氏)는 50묘에서 공세(貢稅)를 받고, 은인(殷人)은 70묘에서 조세(助稅)를 받고, 주인(周人)은 1백 묘(畝)의 철세(徹稅)를 받았으니, 그 실상은 모두 10분의 1이다.”
하고, 또,
“어진 정치는 반드시 경계(經界)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경계가 공정하지 않으면 토지의 구획이 고르지 못하고 곡록(穀祿)이 평등하지 못하며, 경계가 공정하면 토지를 분배하고 녹을 정하는 것은 앉아서도 제정할 수 있다.”
하였다.
이처럼 경계(經界)ㆍ정전(井田)ㆍ십일(什一)의 세법은 천하 국가를 경영하는 데 의당 먼저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상앙(商鞅)이 정전법(井田法)을 폐지하고 천맥법(阡陌法)을 마련함으로부터 진(秦) 나라가 날로 부강해져서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였으니, 천맥법을 마련한 그 이익이 정전법보다 나은 것 같다.
맹자의 말이 과연 옳다면, 한 고조(漢高祖)가 관중(關中)에 들어가 진(秦) 나라를 대신해서 그 가혹한 법을 없애고 민심을 수습하려 할 때, 어째서 정전법의 복구는 의논하지 않았으며, 그 후 효문제(孝文帝)처럼 백성을 사랑하고 효무제(孝武帝)처럼 옛것을 좋아하는 임금이 있었는데도 어째서 가의(賈誼)와 동중서(董仲舒)가 역시 정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리 조종(朝宗)이 나라를 세우고 지켜온 지 지금까지 4백 년이라,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와 백성에게 세를 받아들이는 제도가 대략 옛날 제도와 부합되고 후세에 전할 만하다. 이른바 내외 족반(內外足半)의 군정ㆍ전록지위(轉祿之位)의 역분(役分)ㆍ구분(口分)ㆍ가급(加給)ㆍ보급(補給)의 명칭과 조세의 후박(厚薄)을 9등급으로 나누고 5종(種)으로 나누는 제도가 있으며 그 밖의 부(負)니 결(結)이니 하는 것은 토지를 측량하는 것이며, 두(斗)니 석(石)이니 하는 것은 곡식을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옛날에 경계(經界)ㆍ정전(井田)ㆍ십일(什一)의 법과 같은 것인가, 같지 않은 것인가?
법제가 이미 4백 년 동안이나 오래 시행되었으니 폐단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대로 두는 것이 좋은가, 혹은 고치는 것이 좋은가?
근래에 와서 공신록권(功臣祿券)의 사패전(賜牌田), 불사(佛寺)에 판정(判定)으로 시주해서 바치는 토지, 행성이문소(行省理問所)의 순군(巡軍)ㆍ홀적(忽赤)ㆍ내승(內乘)ㆍ응방(鷹坊)에 하사한 토지, 권호(權豪)들이 겸병한 것, 교활한 무리가 빼돌린 것 등이 백성들에게 해독을 입히고 나라를 좀먹어 그 폐단이 분분히 일어나서, 국고에 들어오는 것은 강화도(江華都)에서 난을 겪을 때에 비교하여도 10분의 2~3도 되지 못하니 만약에 3년이나 5년의 수재와 한재가 있게 되면 어떻게 그 급함을 구제할 수 있으며, 천백 명의 군량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
작년에 전 정승 왕탈환(王脫歡)과 좌정승 김나해(金那海)가 중국에 들어갔을 때에 돌아가서 토지를 정리하게 하라는 천자의 명이 있었다. 두 정승이 돌아와서는 정리도감(整理都監)을 설치하였는데, 사송(詞訟)과 분쟁이 수없이 일어나고 체포와 심문이 끝없이 잇달았으므로, 교활한 무리들이 자못 두려워할 줄은 알게 되었으나 비방과 원망을 막을 수 없었다. 한갓 기삼만(奇三萬)이란 자의 죽음으로 이미 조정의 힐책을 받아 그 형세가 다시 떨치지 못할 것 같으니, 앞에서 이른바 백성에게 피해를 입히고 나라를 좀먹게 하던 자들이 어찌 거리낌없이 마음대로 하지 않겠는가? 대개 천자의 명을 받들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세상에 드문 혜택을 아랫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면, 조정의 의논이나 천하의 공론에 어떠하겠는가?
남북(南北)의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동방(東方)에다 하나의 성(省)을 세워 그 고장의 풍속을 변화시키자고 청하였으나, 다행하게도 조정에서 ‘우리는 의리를 생각하여 근왕(勤王)한 공이 있고, 세조황제로부터 우휼(優恤)하라는 조서가 있었다.’ 하는 글을 올려, 이에 힘입어 여러 번 물리쳐 시행이 되지 못하였다. 이제 혹시라도 기회를 틈타 성(省)을 세우자는 말을 하지 않을까? 대개 하기 어려운 때에 무엇인가를 이룩하는 것이 어려운 일을 능히 한다는 것이다. 제생(諸生)들은 모두 국가의 일에 마음이 있을 것이니, 그 할 수 있는 것으로 말해주기 바란다.
묻노라.
제왕의 계통은 사철이 서로 교대하는 것과 같아서 문란할 수가 없으며 천명과 인심의 돌아감을 또한 속일 수 없다. 삼황 오제(三皇五帝)의 이전은 아득히 멀어서 비록 사적에는 실려 있으나 상고하여 증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서경(書經)》을 산정(刪定)할 때 당우(唐虞) 시대부터 주(周) 나라까지만을 끊어서 적었다. 주 나라가 쇠미한 뒤에 동서(東西 동주(東周)ㆍ서주(西周)를 가리킨다)로 나누어졌다가, 조룡(祖龍 진 시황(秦始皇)을 가리킨다)이 드디어 천하를 통일하게 되었고, 이세(二世)에 이르러 한(漢) 나라가 대신하였다가, 12대에 거군(巨君 왕망(王莽)의 자)이 찬탈하였으니, 조룡과 거군은 분명 정당한 정통의 왕위가 아니라고 하겠다. 그런데 자장(子長 사마천(司馬遷)의 자)이 진(秦) 나라를 제기(帝紀)로 찬술하고 온공(溫公 사마광(司馬光)의 존칭)이 신(新) 나라를 천자의 기년(紀年)으로 포함하여 엮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동한(東漢)이 나뉘어 삼국(三國)이 되었다가 후에 서진(西晉)이 어지러워지자 오호(五胡) 시대가 되었다. 이때에 탁발씨(拓跋氏)ㆍ고씨(高氏)ㆍ우문씨(宇文氏)ㆍ하륙혼씨(賀六渾氏)ㆍ유씨(劉氏)ㆍ이소씨(二蕭氏)ㆍ진씨(陳氏)가 남북으로 버티고 서서, 서로 색로(索虜)니 도이(島夷)니 하며 시비가 벌떼처럼 일어났으니, 이른바 제왕은 사시(四時)가 서로 교대하는 것같이 운수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은 과연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수당(隋唐)이 천하를 통일하였으나 오계(五季)에 이르러서 환란이 극도에 이르렀고, 거란이 이미 북쪽을 차지하고 있어서 송(宋) 나라 강토는 백구(白溝)에 그치고 말았으며, 강왕(康王)이 비록 남쪽으로 파천하였으나 금(金) 나라 군사가 장강(長江)을 건너지 못하였으니, 이때에 인심과 천명의 돌아감이 또한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 모두가 분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치(漢雉 치(雉)는 여후(呂后)를 가리킨다)ㆍ당조(唐曌 조(曌)는 측천무후(則天武后)를 말한다)를 제기(帝紀)에 나열하였으니, 맹견(孟堅 반고(班固)의 자)ㆍ영숙(永叔 구양수(歐陽脩)의 자)의 사필(史筆)이 과연 춘추필법(春秋筆法)을 얻었다 하겠는가? 정이천(程伊川)은 무씨(武氏)를 여와씨(女媧氏)에 비교하여 비상한 변통이라 하고는 여씨(呂氏)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또한 할 말이 있는가? 공손신(公孫臣)의 무리들의 종시오덕론(終始五德論)이 또한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인가?
내 이제 제생들에게 묻는 것은 또한 스스로가 그 의심되는 것을 질의하고자 할 뿐이다.
묻노라.
《논어(論語)》에,
“이미 사람이 많으면 부(富)하게 할 것이며, 부하게 되었으면 가르칠 것이니라.”
하고, 또,
“선인(善人)이 백성을 가르친 지 7년 만이면 그들로 하여금 전쟁에도 나가게 할 수 있다.”
하고, 또,
“선인이 1백 년 동안 국가를 다스리면 악한 사람을 교화시켜서 사람 죽이는 일을 없앨 수 있다.”
하고, 또,
“정치로 선도하고 형벌로 다스리게 되면 백성들이 죄에 빠지는 것이야 면하지만 부끄러움을 모르고, 덕으로 선도하고 예로 다스리게 되면 부끄러움도 알고 또 올바르게 된다.”
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성인의 말로 학자들이 마땅히 깊이 체득해야 할 바이다.
국가에서 원(元) 나라를 섬기고 나서 중외(中外)가 걱정이 없고 여염이 즐비하며 행인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백성은 날로 은부(殷富)해지고 들판은 날로 개간되어, 염분이 많은 땅은 논을 만들고 황무지는 화전으로 경작하니, 그 어찌 백성이 많게 된 것이 아니랴. 그러나 명전(名田)을 받아 부역을 바치는 자가 1백분의 2~3이 되지 않아도 호부한 집은 그릇을 금과 옥으로 만들고 장사치의 아내들도 비단옷을 입고 다니니, 어찌 부하다 하지 않으랴. 그러나 의식(衣食)이 떨어지고 이식(利息)을 갚느라 헐벗고 굶주린 자가 10에 8~9는 되었다.
다행하게도 성대(聖代)를 만나 천하가 같은 문자(文字)를 쓰게 되어 집집마다 정주(程朱)의 책이 있고 사람마다 성리(性理)의 학문을 알고 있으니, 그 교화하는 방법이 또한 어지간하다. 그러나 가난한 선비로서 학문을 넓히고 행실을 독실히 하는 자가 과연 누구이며, 벼슬아치로서 덕을 이루고 나라의 재목이 될 만한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선비로도 오히려 이런데 백성에게야 어찌 허물하랴.
전에 이미 권신(權臣)을 소탕하고 개성에 다시 도읍하였다. 충경(忠敬)ㆍ충렬(忠烈)이 먼저 일어나고, 충선(忠宣)ㆍ충숙(忠肅)이 그 뒤를 이었는데, 중책(重責)을 맡길 만한 신하들이 많이 나와 능히 그 악(惡)을 바루고 임금의 아름다운 뜻을 이루어 오늘날까지 아름다운 정치를 이룩하였으니, 대개 백성을 교화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오래라 하겠다.
그런데 벌떼처럼 일어나는 왜적들이 배를 이끌고 와 강토를 침범할 때에는 그들을 쫓아내고 잡는다는 모사가 결국 가난한 백성을 짜내서 그 비용과 식량을 충당하고, 농부들을 몰아다가 군사와 마필을 보충하되, 법으로 금지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한갓 결망(觖望)의 헛소문만 듣게 되니, 어찌 이른바 전쟁에 나가게 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또 얻은 것을 잃을까 걱정하는 비부(鄙夫)와 불평을 품은 무리들이 감히 내란을 꾸며 기시(棄市)되는 것을 자초(自招)하였으니, 어찌 이른바 악한 자를 교화시켜서 죽이는 일을 없앤다 하겠는가.
합좌(合坐)가 있어 큰 일을 계획하고 정방(政房)이 있어 출척(黜陟)을 단행하며, 감찰(監察)을 맡은 관리는 죄를 다스리고 잘못을 바루며, 법(法)을 맡은 관리들은 의문을 밝히고 옥사를 판정하는가 하면,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어질고 검소하여 풍류나 사냥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성색(聲色)을 멀리하고 기로(耆老)들을 방문하며, 대신들을 예우하여 전에 없던 예문(禮文)을 닦고, 종묘(宗廟)에 친히 제사를 올리니, 그 덕의와 예절로써 인도하고 다스렸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조정에는 덕으로 양보하는 풍속이 없고 민간에는 태평한 기상이 없으며, 시비가 분분하고 도둑이 일어나고 있으니, 오히려 요행으로 면하는 것도 얻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하물며 그 부끄러움을 알고 감화되기를 바라겠는가? 무릇 이렇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제생들은 기탄없이 말할 수 있는 조정을 만났고 잘 다스리기를 원하는 임금을 만났으니, 마땅히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원대히 하여 이와 같은 폐단이 생기게 된 이유를 추구하고, 이 백성을 새롭게 할 방도를 진술하라. 유사자(有司者)가 장차 우리 임금에게 올려서 국가에 실시하게 하도록 한다면, 이 어찌 작은 도움이라 하겠는가.
* 책문 : 정치(政治)에 관(關)한 계책(計策)을 물어서 답(答)하게 하던 과거(科擧) 과목(科目).
[주1] 숙손통(叔孫通) : 처음에는 진(秦) 나라에 벼슬하다가 한(漢) 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당시 한(漢)의 공신들이 난폭하게 칼로 대궐 기둥을 치며 공을 다투므로, 그를 억제하기 위한 예의(禮儀)를 제정하였다.
[주2] 조조(鼂錯) : 한 경제(漢景帝)를 위하여 제후(諸侯)의 봉지(封地)를 줄이라고 제의하다가 오(吳)ㆍ초(楚) 등 7국이 조조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조조는 동시(東市)에서 참형을 당하였다.
[주3] 내외 족반(內外足半) : 족반은 족정(足丁)과 반족정(半足丁)을 말한다. 고려 시대에 병역(兵役)에 보충되는 자를 위하여 분배되는 토지의 단위로서 족정은 17결(結), 반족정은 7~8결이다. 혹은 20~60세의 남정(男丁)을 족정, 16~20세의 미성년 남정을 반족정이라 하기도 하여 정설(定說)이 없다.
[주4] 전록지위(轉祿之位) : 전시과(田柴科)를 말함인데, 전시과는 고려 때 벼슬아치에게 그 관급(官級)에 따라 토지와 땔나무를 댈 임야(林野)를 반급하던 제도. 원칙으로 세습(世襲)이 아니었으나 공신(功臣)에게 주던 공음전시(功蔭田柴)와 관청에 급전(給田)으로 주는 공해전시(公廨田柴)는 대를 물리게 하였다.
[주5] 역분(役分) : 공신(功臣)에게 그 공의 차등에 따라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주는 역분전(役分田)을 말한다.
[주6] 구분(口分) : 자손이 없이 죽은 관원의 아내, 부모가 모두 죽은 출가 전의 딸이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자손이 없이 죽은 군인의 아내에게 그 등분에 따라 주던 토지를 구분전(口分田)이라 한다.
[주7] 왕탈환(王脫歡)과 …… 김나해(金那海) : 《동서강목》 등에는 왕후(王煦)와 좌정승 김영돈(金永旽)으로 되어 있다. 탈환과 나해는 이들의 원 나라식 이름인 듯하나 미상.
[주8] 종시오덕론(終始五德論) : 오행(五行)의 덕(德)으로 상승하는 논리. 제왕(帝王)이 바뀔 때 금(金)ㆍ목(木)ㆍ수(水)ㆍ화(火)ㆍ토(土)의 덕으로 서로 전승함을 이름인데, 한 문제(漢文帝) 때 공손신(公孫臣)이 오덕(五德)의 제정에 따라 정삭(正朔)ㆍ의복(衣服)ㆍ제도(制度)를 개정하자는 의론을 임금에게 진술하였다. 《漢書 文帝記》
[入孔門則願學者何事而代仲偃通錯則何以處之]
問。讀論語。每以諸弟子所問作己問。而以夫子之言。作今日耳聞。其讀史。亦於君臣之際。事機之會。以身處之。知何而可。如何而不可。然後方有所益。先儒蓋有此論矣。且如樊遲請學爲農圃。子張學干祿。季路則問事鬼神。顏淵則問爲邦。亦各言其志也已矣。諸生若及夫子之門。其所問而願學者何事。管仲事小白。狐偃事重耳。雖其以力假仁。陰謀取勝。皆所以攘夷狄尊王室也。仲也致功烈其卑之譏。偃也貽譎而不正之誚。斯亦未爲得也。叔孫通不爲高祖制禮儀。則醉號擊柱。孰謂其不至於叛。而先王之禮之喪。通使之也。朝錯不爲景帝削諸侯。則僭禮踰制。幾何其不至於亂。而七國之兵之起。錯促之也。諸生若當仲,偃之任。能樹其功而無其過歟。遇通,錯之時。能救其弊而免其責乎。勿夸勿詘。請以實陳。
[田制]
問。孟子曰。夏后氏五十而貢。殷人七十而助。周人百畝而徹。其實皆什一也。又曰。仁政必自經界始。經界不正。井地不均。穀祿不平。經界旣正。分田制祿。可坐而定也。然則經界井田什一者。爲天下國家所宜先務也。自商鞅廢井田開阡陌。秦日以富強。卒幷天下。阡陌之爲利。似愈於井田也。孟子之言果是。漢高祖入關伐秦。除其苛法。以收民心。不議井田之復。其後孝文之愛民。孝武之好古。而賈誼,董仲舒亦未嘗一言及此。何也。我祖宗垂統守成。四百年於此矣。經國之謨。取民之制。要皆合於古。而可傳於後也。所謂內外足半之丁。轉祿之位。役分,口分,加給,補給之名。租稅之數。肥饒磽薄九等之品。五種之宜。與夫曰負曰結。所以量地者。曰斗曰石。所以量穀者。其與古者經界井田什一之法。有同不同乎。法制之行。已踰四百年。旣久矣。不能無所弊。或仍或改。有可不可乎。近世來。功臣祿券賜牌之田。佛寺判定施納之田。行省理問所巡軍忽赤內乘鷹坊受賜之田。權豪之兼幷。姦猾之匿挾。所以毒於民而病於國者。紛然而作。倉廩 之入。比之江都攻守危急之時。什不能二三焉。萬分一有三五年水旱之災。何以周其急。千百軍餽饗之費。何以共其用乎。去歲。前政丞王脫歡,左政丞金邦海入朝上國。天子有命。使之歸而整理之。二政丞旣歸。置都監。號以整理。於是辭頌忿諍。多於麻粟。逮繫訊鞠。疾於風雨。豪猾頗亦知懼。而謗讟不可遏止。一奇三萬之死而已致朝廷之詰。而勢若不復振焉。向所謂毒民病國者。豈不益肆而無所憚哉。夫奉天子之命。理一國之政。使希世之恩不下究。在朝廷之議天下之論如何哉。南北喜事之士。上書都堂。請立省東方。變其土俗。幸賴朝廷以我慕義勤玉 之功。世皇優恤之詔。閣而不行者屢矣。今無乃乘其幾而欲售其說乎。夫有爲於不可爲之時。然後爲難能也。諸生皆有志於國家。請言其可以有爲之說。
[王統替代]
問。帝王之統。若四時之相代。有不可紊。天命人心之所歸。又不可誣也。三五已前。遐哉邈乎。雖有載籍。莫考而徵。孔子删書。斷自唐虞。下訖于周。及其衰。東西而分。祖龍遂帝四海。二世而漢氏代。十二世而巨君簒。祖龍巨君。見謂紫色䵷聲。餘分閏位。而子長述秦之紀。溫公紀新之年。何也。東漢分而爲三國。西晉亂而爲五胡。拓跋氏,高氏,宇文氏,賀六渾氏,劉氏,二蕭氏,陳氏角立南北。索虜島夷。是非蜂起。所謂若四時之相代者。果安在哉。隋唐一天下。至于五季。禍亂極矣。契丹旣割據于北。宋地只限白溝。康王雖播越于南。金兵未逾長江。人心天命之歸。又安在哉。是皆不可不辨者也。漢雉,唐曌。列于帝紀。孟堅,永叔之筆。爲得春秋之法乎。程伊川以武氏比女媧。謂之非常之變。而不及呂氏。亦有說乎。公孫臣之流終始五德之論。又足據乎。今所以問於諸生。亦欲自質其疑而已。
[更張治道]
問。論語曰。旣庶矣。富之。旣富矣。敎之。又曰。善人敎民七年。可使卽戎。又曰。善人爲邦百年。亦可以勝殘去殺矣。又曰。道之以政。齊之以刑。民免而無恥。道之以德。齊之以禮。有恥且格。此皆聖人之言。而學者所宜服膺也。國家服事皇元。中外無虞。閭閻櫛比。行路如織。民日以殷。野日以闢。化斥鹵以水耕。刊薈蔚以火耘。豈非庶矣乎。而受名田供賦役者。百無二三焉。豪勢之家。器列金玉。商賈之婦。衣曳羅縠。豈非富矣乎。而罄衣食償利息者。十常八九焉。幸際休明。天下同文。家有程朱之書。人知性理之學。敎之之道亦庶幾矣。而韋布之博學篤行者果誰。搢紳之成德達林者能幾。爲士尙爾。於民何誅。往者旣族權臣。神邑再都。忠敬,忠烈作於前。忠宣,忠肅承其後。倚重之臣。責難之佐。宜有所謂善人焉。用能匡救將順。式至于今休。蓋敎民而爲邦也久矣。然而蜂起之倭。拏舟犯疆。謀所以逐捕之。未免浚編戶以充資糧。驅農夫以補卒乘。莫見令行而禁止。徒聞觖望以訛言。豈所謂可以卽戎乎。患失之夫。不逞之徒。敢爲蕭墻之憂。自速市朝之肆。豈所謂勝殘去殺乎。有合坐以謀謨。有政房以黜陟。監察之司。繩愆而格非。典法之吏。讞疑而斷獄。而我主上殿下仁厚慈儉。不喜遊畋。不邇聲色。延訪耆老。體貌大臣。修曠代之禮文。躬大享於宗廟。政刑德禮。以道以齊者。可謂云爾已矣。然而廷無德讓之風。野無時雍之俗。忿諍交騰。盜賊竊發。此猶幸免之恐不可得。況望其恥且格乎。凡此之故何也。諸生處不諱之朝。遇願理之君。宜盡意遠思。跡求馴致此弊之由。指陳作新斯民之術。有司者將獻吾君。而施于國家。夫豈小補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