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梅月堂) 영당(影堂) 권연문(勸緣文)
옛날 우중(虞仲)은 머리를 깎고 문신(文身)을 한 채 만이(蠻夷)에 거처하였고, 백이(伯夷)는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서 굶어 죽었는데, 공자가 백이에 대해서는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고 허여하고, 우중에 대해서는 ‘청(淸)에 맞았고 권(權)에 맞았다.’고 칭찬하였다. 이 두 분은 모두 인륜의 지극한 변고를 만나고 천하의 극심한 어려움에 처해 마음속으로 잘 헤아려 각각 편안한 바대로 행하고 세속의 이목을 놀라게 하는 것을 돌아보지 않은 분들이다. 혹 백이의 마음을 가지고 우중의 행동을 하여 인(仁)을 얻은 데다 청과 권에 맞아 두 분의 극치를 하나로 합할 것 같으면 세상에 무엇이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청한자(淸寒子)로 말하면, 태어난 지 다섯 살에 신동으로 세종(世宗)에게 인정을 받았다. 세조(世祖)가 즉위함에 미쳐 홀로 세상에 뜻이 없어 산속으로 도망가 절에 은둔하여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으니, 청한자야말로 이른바 백이의 마음을 가지고 우중의 행동을 한 분이 아니겠는가.
일찍이 논해 보건대, 길 주서(吉注書 길재(吉再) )는 고려(高麗)에 대한 절개를 지켜 본조(本朝)에 벼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이제(夷齊)의 지조에 견주고 있다. 그러나 그 우뚝하고 빼어난 행실과 문채 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말하면 청한자보다 오히려 조금 못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길 주서를 남달리 표장(表章)하고 그의 사당을 크게 지어서 금오산(金烏山)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예를 표하는데, 더구나 청한자와 같은 분은 참으로 옛날의 이른바 “특립독행(特立獨行)하여 천지를 다하고 만고에 뻗치도록 돌아보지 않을 사람”임에 있어서이겠는가. 그 유풍(遺風)과 여열(餘烈)이 지금까지도 쇠퇴하지 아니하여 여자나 어린아이, 어리석은 하인들조차도 그 사실을 다 알고 있다. 그런데 도리어 200여 년 동안 적적하여 그분을 표장하여 특별히 대우한 일이 있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으니, 시대가 먼 사람에 대해서는 잘 알고 시대가 가까운 사람은 소홀히 여기는 것인가, 아니면 혹 꺼리는 점이 있어 돌아볼 겨를이 없어서란 말인가. 앞의 말대로라면 아, 반드시 이럴 리가 없고, 뒤의 말대로라면 세조(世祖)와 태조(太祖)는 천명에 순응하고 민심에 순응한 것이 똑같으니, 두 분이 스스로 자신의 지조를 깨끗이 한 것이 또 두 임금의 성덕(盛德)에 무슨 해가 되기에 꺼린단 말인가. 더구나 이미 앞사람에 대해서는 꺼리지 않았으면서 유독 뒷사람에 대해서만 꺼린단 말인가. 청한자가 세속을 떠나 은거하였을 당시 세조가 맞이하여 불렀고, 측간에 빠져 도망치자 마침내 내버려 두고 묻지 않았다. 이는 거짓으로 미치고 병을 핑계하여 세상을 조롱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한 태도가 진실로 이미 세조의 큰 도량 속에 포용을 받은 것인데, 오늘날에 와서 꺼릴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선생은 만년에 홍산현(鴻山縣) 무량사(無量寺)에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선생이 손수 그린 진영(眞影)이 아직까지 절에 있었다. 근래에야 비로소 현청(縣廳) 곁에 영당(影堂)을 세우고 절에서 옮겨 와 이곳에 봉안(奉安)하였다. 이에 조금이나마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할 만하고 앞서 몹시 개탄하며 아쉬워하던 점이 거의 풀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무량사는 곧 선생이 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인데 마침내 유상(遺像)을 이곳에서 옮겨 갔으니, 그 자취가 없어지고 말았다. 따라서 유인(幽人) 일사(逸士)가 이 산속에 오면 선생의 모습을 볼 수 없어 후세 사람으로서 사모하는 정성을 드릴 수 없을 것이니, 깊이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생이 처음 수락산(水落山)에 은거하였을 때 매월당(梅月堂)을 세우고 거처하였는데, 동봉자(東峯子)라고 자호(自號)한 것이 역시 이 때문이며, 혹 서산(西山) 채미(採薇)의 유풍에 은미한 뜻을 깊이 담은 것일 수도 있다. 당(堂)이 무너진 지는 이미 오래이며 당을 세웠던 터만 아직까지 깎아지른 벼랑 사이에 남아 있는데, 돌을 포개 섬돌을 만들어 견고하기가 어제 쌓은 듯하고, 늙은 등나무와 우거진 가시나무가 그 위에 덮여 있으니, 그곳을 찾는 자들은 모두 감개와 슬픔을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곳이 몹시 험하기 때문에 벽곡(辟穀)하면서 고행(苦行)할 사람이 아니라면 실로 살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후대에 그 옛 모습을 복원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정절(靖節 도잠(陶潛) )은 일세(一世)의 고사(高士)요, 혜원(惠遠)은 방외(方外)의 일인(逸人)이다. 그러나 서로 형해(形骸)를 벗어난 교유를 하였으니, 그 경모(傾慕)한 뜻이 치의(緇衣)와 소의(素衣)라고 해서 혹시라도 틈이 있지 않았다. 하물며 빈도(貧道)는 선생보다 수백 년 늦게 태어났지만 옷 색깔도 다르지 않고 성정(性情) 또한 같다. 비록 선생의 취향은 문제 삼을 점이 있겠으나, 선생이 지킨 천지의 떳떳한 도리는 끝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선생을 보면 그 풍모에 감동하여 망연자실할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이 때문에 앙모해 마지않은 나머지 이 일에 힘을 다할 것을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방외를 유람하여 이 산에 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유석(儒釋)에 상관없이 모두 배회하고 우러러보면서 만분의 일이나마 선생의 맑은 기상을 얻어 나약한 사람은 이를 통해 뜻을 세우고 완악한 사람은 이를 통해 청렴해질 수 있도록 하는 바이다. 장차 산의 서쪽 기슭에 작은 영당(影堂)을 세우고 홍산(鴻山)의 진영(眞影)을 전사(傳寫)하여 그 속에 봉안하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거의 선생의 유풍이 영원토록 이 산에서 끝끝내 사라지지 아니하여, 유람차 이곳에 오는 유인 일사들이 무량사의 경우처럼 사모하는 정성을 드릴 곳이 없어 서글퍼하며 어찌할 줄 모르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성품이 비루하고 재력이 부족하여 주머니를 돌아봐도 씻은 듯 비었으며 사람을 감동시킬 기개마저 없는 터라, 끝내 미천한 뜻을 이루지 못할까 두렵다. 그렇다고 현혹하고 우롱하여 어리석은 중생들을 유혹함으로써 구차하게 이 일을 이루고자 한다면 이는 선생에게 수치만 끼칠 것이요, 또한 빈도가 달가워하는 일이 아니다. 이에 번다함을 꺼리지 않고 이처럼 정중하게 말씀을 드리는 바이다.
삼가 상하 식자(識者) 여러분들은 주선하는 사람이 비루하다 해서 그 의리마저 하찮게 보지 말고 돈이나 곡식을 출연(出捐)하되,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한결같이 재량껏 도와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 준다면 날아갈 듯한 당우(堂宇)가 불일간에 완성되어 그 엄연하고 단아한 모습에 보는 이들이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될 것이요, 억만년 후대까지 청풍(淸風)을 떨치고 덕을 좋아하는 한 가지 일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매우 바라 마지않는 바이다.
[주1] 우중(虞仲)은 …… 칭찬하였다 : 우중은 곧 태백(泰伯)과 함께 형만(荊蠻)으로 도망한 중옹(仲雍)을 말한다. 오(吳)나라에서 머리를 깎고 문신을 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살았는데, 공자(孔子)가 평하기를, “숨어 살면서 말을 함부로 하였으나, 몸은 깨끗함에 맞았고 벼슬하지 않음은 권도(權道)에 맞았다.” 하였다. 《論語 微子》 백이는 고죽군(孤竹君)의 아들로,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멸망시키자 주나라의 녹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주나라를 떠나 수양산에 숨어 살다가 끝내 굶어 죽었다. 자공(子貢)이 “백이와 숙제(叔齊)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옛날의 현인이시다.” 하였다. 자공이 “후회하였습니까?” 하자,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어찌 후회하였겠는가.”라고 하였다. 《論語 述而》
[주2] 특립독행(特立獨行)하여 …… 사람 : 한유(韓愈)의 백이송(伯夷頌)에 “백이로 말하면 우뚝이 서고 홀로 행하여〔特立獨行〕 천지를 다하고 만고에 뻗치도록 그르다 할지라도 돌아보지 않을 자이다.”라고 한 말이 보인다.
[주3] 서산(西山) 채미(採薇) : 서산은 수양산을 가리키고, 채미는 백이 숙제가 수양산에 은둔하여 고사리를 캐 먹을 당시 지었다고 하는 ‘채미가(採薇歌)’를 말한다. 《史記 卷61 伯夷列傳》
[주4] 치의(緇衣)와 소의(素衣) : 치의는 검은 옷으로 승복(僧服)을 말하고, 소의는 흰옷으로 속인의 복장을 말하는데, 혜원은 승려이고 도잠은 속인이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5] 나약한 …… 바이다 :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백이는 성인(聖人)의 맑은〔淸〕 자이다.” 하였고, 또 “백이의 이러한 풍도를 들으면 완악한 자는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는 입지(立志)를 갖게 된다.” 하였다.
梅月堂影堂勸緣文
昔虞仲斷髮文身。以居蠻夷。伯夷不食周粟。餓死首陽。仲尼與其求仁得仁。稱其中淸中權。此二子者。皆遇人倫之至變。處天下之甚難。能內忖於心。各得其所自安。不顧夫駭世驚俗者也。其或以伯夷之心而蹈虞仲之跡。旣得其仁。又中淸權。合二子之極致而一之者。則世孰得以加之哉。若淸寒子者。生五期而以神章受知世宗。洎于世祖龍飛。乃獨無意淸時。逃遁山藪。隱跡䕺林。至死不返。彼所謂以伯夷之心而蹈虞仲之跡者非歟。竊嘗論之。吉注書。爲前代 抗節。不屈本朝。世所比方於孤竹之操者。然其卓絶奇偉之行。炳蔚瓖麗之文。視夫子猶有少遜焉。乃今之表章顯異。照映耳目。金烏之下。過者必式。況如淸寒。眞古所謂特立獨行窮天地亘萬世而不顧者也。其遺風餘烈。至今未衰。婦人孺子。愚隷蚩氓。尙能誦而傳之。顧乃寂寥二百餘載。未聞有所以表而異之者。將獨明於遠而忽於近耶。抑或有所忌而不暇也乎。若夫如上之云。則嘻必無是矣。其或如下所云。世祖之與太祖。其應乎天而順乎人則同也。二子之自潔其志。又何損於二祖之盛德。乃有所忌焉。況已不忌於前矣而獨忌於後乎。方淸寒子之高蹈物表也。世祖嘗迎而致之。及其陷溷廁而逃之。竟捨而不問。彼其陽狂託疾輕世肆志之態。固已包容乎大度之中矣。又何必至于今而顧有所忌也哉。夫子晩居于鴻山縣之無量寺以終。其手自寫眞。猶在寺中。近始建影堂于縣傍。移自寺中以奉之。於是焉稍以慰夫人之心。而向所爲咨嗟慨恨而不足焉者。庶可以有所釋矣。然無量者。乃夫子之所託化也。而遺像遂遷焉。則其跡泯然。幽人逸士之或至山中者。將無所彷彿。而寄慕於千載之下。得不爲深悵也哉。夫子始隱于水落。作梅月堂以居。其自號東峯子者。亦以此故。而或者深託微意於西山採薇之風。堂毀已久。所築遺址。尙在絶崖之間。累石爲砌。堅牢如昨。老藤叢棘。蒙絡其上。至其所者。無不感慨悲吒而不能自已。獨其所在絶險。非絶粒苦行。實不堪焉。故莫有能追復其舊者。夫靖節。一世之高士。惠遠。方外之逸人。而尙能相與於形骸之外。其傾慕之意。不以緇素而或間。而況貧道。後夫子數百年而生。服不異而性亦同。雖其所存之趣。或有可論。若夫天地常經。知不可以終廢矣。觀於夫子。寧獨無爽然以自失者。所 以向仰之不已而思有所致力。俾遊覽方外。得至此山者。無分儒釋。皆有以徘徊瞻望。得其氣像於萬分之一。而懦者以之立。頑者以之廉。蓋將創數楹之屋於山之西麓。傳寫鴻山之眞。以安于中。庶幾夫子之遺風。永永萬代終不泯絶于玆山。而幽人逸士之遊而至焉者。不至悵悒失圖。無所寄其慕。如無量比也。而但所懼者。性地陋賤。資力單簿。自顧囊鉢而如洗。又無氣槩之動人。卒無以獲究微志。若夫眩幻鼓弄。誑誘愚俗。苟以圖就其事而已。則適足爲夫子羞。而亦非貧道之所甘心者。玆敢鄭重其說。不憚煩絮。伏乞上下有識列位僉尊。勿以其人之賤而遂視其義之薄。出捐錢粟。若少若多。一以稱可量賜補助。卽見暈飛之宇不日以成。儼雅之容。觀者起敬。足以振淸風於億載。明好德之一端。不勝大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