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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조선국 고 자헌대부 의정부우참찬 겸 지춘추관사 이공 행장 有明朝鮮國故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知春秋館事李公行狀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고려(高麗) 때 가정(稼亭) 문효공(文孝公) 휘(諱) 곡(穀)과 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 휘 색(穡) 부자(父子)가 연이어 원(元)나라 조정에 들어가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이 천하에 알려지면서 드디어 대대로 문헌으로 이름난 가문이 되었다.
목은의 둘째 아들 휘 종학(種學)은 첨서밀직사(簽書密直事)를 지냈는데, 고려조에 절의(節義)를 다하다 바뀐 사직(社稷)에서 목숨을 마쳤다. 밀직공(密直公)이 휘 숙묘(叔畝)를 낳았는데, 형조 판서로 있을 적에는 심리(審理)를 깔끔하게 하여 원통해하는 경우가 없었고, 집안에는 남아도는 물건이 없었다.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지내다 생을 마쳤다. 시호는 양도(良度)이다. 양도가 휘 형증(亨增)을 낳았는데,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지냈다. 몸가짐이 청렴하여 작은 것 하나라도 남에게 주거나 받지 않았다. 첨지공(僉知公)이 휘 예견(禮堅)을 낳았는데,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다. 가는 곳마다 청렴하고 신중하다는 명성을 얻었고, 자제(子弟)를 교육할 때에는 몸가짐을 단속하고 겉으로 보이는 것에 치중하지 않도록 하였다. 선산 김씨(善山金氏) 종사랑(從仕郞) 김관안(金寬安)의 집안으로 장가들어 성화(成化) 경자년(1480, 성종11)에 서울에서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자(耔)이고, 자는 차야(次野)이다. 세상에서는 음애(陰崖) 선생이라 칭했다. 공은 어려서부터 의젓한 모습이 성인(成人) 같았고 함부로 장난을 치지 않아 주위 사람들이 범상한 아이가 아님을 알았다. 겨우 7, 8세 되던 무렵에 대간공(大諫公)이 처음으로 글을 가르쳤는데, 신경을 많이 쓰지 않았어도 1년 만에 구두를 떼고, 다시 1년 후에는 대의(大義)를 환히 알았다. 조금 더 자라서는 학문에 더욱 힘써서 방에 물러나 지냈는데, 마치 마음으로 깨달은 바가 있는 것 같았다.
계축년(1493)에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있던 아버지를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는데, 마침내 두타산(頭陀山) 중대사(中臺寺)에 올라가 《송사(宋史)》를 읽다가 개연히 스스로 의분(義奮)이 일어 만언서(萬言書)를 지어서 스스로 바치고자 하였으나 대간공이 경계하여 말렸다. 어떤 학식이 깊은 분이 있었는데, 계율을 상당히 엄격히 지키고 말에도 도리가 있자 또 그를 좋아하여 함께하려고 하였다. 절 앞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서 있고 쌓인 눈이 서로 비추어 주었는데, 그곳에서 향 피우고 등을 달아 놓고 밤을 지새우며 천고(千古)의 역사를 두고 격앙하였다. 서울로 돌아올 때가 되자 공은 실망스러워 기뻐하지 않아 때로 깊이 걱정하며 길게 탄식하였고, 심지어는 간관(諫官)이 되어 당세의 일을 극언(極言)하고자 하였다.
홍치(弘治) 신유년(1501, 연산군7)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는데, 함께 급제한 김안국(金安國), 정충량(鄭忠樑), 성세창(成世昌), 유운(柳雲)이 다들 공과 뜻을 같이하는 친구였다. 성균관에 유학할 적에 남들과 특출하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모두 그가 덕망 있는 인물이 될 거라 기대하였다. 이장곤(李長坤), 심정(沈貞), 이공중(李公仲), 이효언(李孝彦), 김희수(金希壽), 송호의(宋好義), 송호례(宋好禮), 송호지(宋好智) 등과 함께 지내며 학문을 갈고 닦았다. 그러나 늘 전에 기대했던 데서 열에 여덟아홉은 이미 망가진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갑자년(1504)에 문과 제1등으로 뽑혀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고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충원되었다. 돌아와서는 이조 좌랑에 천거되어 임명되었다. 당시는 연산(燕山)의 정치가 어지러운 상황이라 애써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오직 술만 마시며 스스로를 더럽혔다. 대간공이 임금의 뜻을 거슬러 처음에는 용궁(龍宮)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있다 성주(星州)로 이배(移配)되었다. 공은 문소(聞韶)로 부임하기를 청하였는데, 백성들을 다스리고 인재를 양성하는 일 모두에 최선의 방법을 다하여, 공이 떠난 뒤에 사람들이 그를 매우 그리워하였다.
정덕(正德 명 무종(武宗)의 연호) 병인년(1506, 중종1)에 정국(靖國)하자 대간공이 조정에 돌아오게 되었다. 공은 또 양천(陽川)에 부임하기를 청하였는데, 부임하기도 전에 공의 문학(文學)이 고문(顧問)에 대비할 만하다고 말한 자가 있어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었다.
경오년(1510) 겨울에 대간공의 상(喪)을 당하였다. 이듬해 봄에 용인(龍仁)의 기곡리(器谷里)에서 여묘하면서 예에 따라 장사 지내고 제사 지내니, 향리 사람들이 감화되었다. 상기(喪期)가 끝나고 나서 선산 아래 남쪽 시내 바위틈에 단풍 숲이 끼어 자라는 것을 보고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에 스스로 풍림거사(楓林居士)라 호를 지었다.
계유년(1513) 봄에 부교리, 부응교, 사간으로 승진하였다. 갑술년(1514) 8월에 대부인(大夫人)의 상을 당하였는데, 슬픔으로 몸이 상할 지경인데도 더욱 몹시 슬퍼하였고 상기를 마치고 돌아가면서는 종의 손을 잡고서 “너를 여기에 남겨 혼자 지키게 하니, 의리가 형제와 똑같다.”라고 하고는 오열해 마지않았다.
병자년(1516) 9월에는 직롱(直壟) 남쪽에 한 칸짜리 집을 짓고 처마를 올리고 담장을 둘러 재숙(齋宿)하는 장소로 삼았는데, 사암(思庵)이라고 이름하였다. 기문(記文)을 지어 그 뜻을 밝혀서 판(板)에 쓰면서 “나의 허물을 징계한다.”라고 하고 또 규계(規戒)로 삼아 걸어 두었으니, 그 뜻이 종신토록 갈 것 같았다.
그해 겨울에 다시 응교(應敎)에 제수되었고 곧이어 전한(典翰),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으며, 정축년(1517) 여름에는 부제학으로 승진하였다가 승정원 우부승지로 이임(移任)되었다.
무인년(1518) 5월에 조정에서 종계변무(宗系辨誣)에 대해 주청(奏請)할 일을 의논하자 상께서 사자(使者)를 폭넓게 선발할 것을 명하였다. 전조(銓曹)에서 적임자를 구하기가 어려워 시종신(侍從臣)으로 임명한 명을 거두기를 청하고 부사(副使)로 천거하여 의망(擬望)하였다. 그러자 상께서 특별히 직질(職秩)을 더해 주었고 한사코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드디어 명(明)나라에 들어가 나아가 아뢰고 다시 예부(禮部)에 등서(謄書)하여 종백(宗伯)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제본(題本)이 오르자 이내 유음(兪音)이 내렸고, 이에 칙서(勅書)를 받들어 압록강을 건너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등급을 건너뛰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하고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하게 하면서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였다.
그해 3월에는 형조 판서로 옮겨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임하였고, 얼마 있다 의정부 우참찬이 되어 지춘추관사를 겸임하였다.
기묘년(1519)에 사화(士禍)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음성(陰城)에 살면서 처음으로 스스로 음애(陰崖)라고 호를 지었다. 모든 관계를 끊고 두문불출하면서 허물을 반성하고 몸가짐을 조촐하게 하였는데, 식량이 자주 떨어져도 태연하였다. 오직 좌우에 있는 도서에 정신을 모으고 주목하여 가동(家僮)조차 그의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였다. 시간이 나면 학자 몇 명을 데리고 문암(門巖)의 시냇가를 배회하였는데, 샘물을 터서 못으로 끌어들이기도 하고 띠를 베어 정자(亭子)에 얹기도 하고, 시(詩)를 읊으며 회포를 풀기도 하고, 때로 술이 생기면 실컷 마시고 가슴속에 쌓인 응어리를 풀어내기도 하였다. 또 글을 짓기를 좋아하여 늘 붓 가는 대로 표현하며 스스로 즐기고는 하였다.
기축년(1529)에는 다시금 깊이 은거할 계획으로 충주(忠州) 달천(獺川) 상류에 있는 토계(兔溪)로 거처를 옮겨 정하였다. 작은 정사(精舍)를 지어 몽암(夢庵)이라 이름을 지었고, 스스로 몽옹(夢翁)이란 호를 짓기도 하였다.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 물이 더욱 맑았고, 인적이 싹 사라져 마을에서 밥 짓는 연기 보기도 어려워 물가의 새들과 숲의 짐승들이 놀랄 일 없이 왕래하였다. 전(前) 교리(校理) 탄수(灘叟) 선생 이연경(李延慶) 공과 사는 곳이 멀지 않았다. 이어 스스로 계옹(溪翁)이라 호를 지었다. 맑은 바람이 불고 밝은 달이 뜨는 날에는 문득 노를 저어 찾아가 도의에 대해 끝까지 연구했는데 가슴속 생각을 다 털어놓고 즐거워하며 근심을 잊은 것이 일기(一紀 12년) 남짓이었다.
계사년(1533) 12월 15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54세였다. 선영(先塋) 곁에 장사 지냈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뛰어나 겉모습은 편안하여 너그럽고 속마음도 시원스러웠으며, 바탕이 넓고 두텁고 도량은 크고 밝았다. 남을 대할 때는 온화하면서도 엄하였고, 일을 처리할 때는 간결하게 하면서도 찬찬히 하였다. 부모를 섬길 적에는 효성과 공경을 극진히 했고, 형제간에는 공순함과 사랑을 다하였다. 또 제향(祭享)에 정성을 쏟았고 다스릴 적에는 엄중한 태도로 임하였다. 집안에서는 질서가 엄격하여 아무리 나이 어린아이들이라 해도 문지방을 넘을 수 없었다. 늘 손님을 대하듯 몸가짐을 단정히 하였고 긍지를 지니고 게으른 모습이 없었다. 성세창, 정충량 두 공(公)이 그와 종유(從遊)하였는데, 승려의 방석을 빌려 치열하게 수행하는 것을 가만히 사모하고 본받으면서 “이런 사람은 습관이 쌓여 자연스럽게 된 것이니, 어찌 배워서 되겠는가.”라고 감탄하였다.
조정에 있을 적에는 음성과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아 당시 사람들이 그에게 의지하며 존중하였다. 조정에 출입한 십수 년 동안 누차 임금의 칭찬을 받아 은우(恩遇)를 가장 많이 입었는데, 날마다 목숨을 바쳐 은혜에 보답할 길을 생각하였다.
당시 국가는 법이 오래되면서 폐단이 생기고 또 어지러운 정사를 겪어, 개혁을 해야 했던 원우(元祐) 연간 정도일 뿐이 아니었다. 이에 제현(諸賢)이 일어나 건명(建明)한 바가 많았다. 나이가 젊고 기상이 날카로운 사람들이 앞다투어 탄핵하고 위험을 무릅쓰다 보니 여론이 크게 어그러져 있었고, 산직(散職)에 있는 자는 원망이 뼈에 사무쳐 종적을 감춘 채 곁에서 상황을 엿보고 있었다. 공과 신상(申鏛) 공, 조광조(趙光祖) 공, 권벌(權橃) 공은 두 세력을 적절히 조절하여 파국에 이르지 않게 하고자 하였으나 한두 공이 안 된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더 이상 어쩔 수 없게 되어 북문(北門)에 비바람이 불게 된 것이었다.
공이 연경(燕京)에 있을 때 상사(上使)인 남곤(南衮)이 병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는데, 공이 약을 구하기 위해 고생하였다. 그러자 서장관(書狀官)이 귓속말로 “이자는 필시 사류(士類)를 해칠 것입니다.” 하니, 공은 정색하면서 “이 사람은 우리와 함께 온 사신이오. 그대 말은 틀렸소.” 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이 사행(使行)에서 어떤 문제도 없었던 것은 공의 힘이라고 하였다.
공의 동서인 김안로(金安老)가 간교하고 시기 질투가 많아 이래저래 조화를 이루지 못하였으나 공이 더욱 후하게 대하고 한껏 성의를 베푸니, 그도 감히 말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평소에는 담담히 세상을 잊고 사는 듯하다가도 시정(時政)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온종일 탄식하였다.
한번은 누구를 가르치다가 진동(陳東)을 죽인 일에 이르자 몇 줄 읽기도 전에 목이 메어 소리를 내지 못하고 비통한 기색이 얼굴에 가득하며 슬픔의 눈물이 눈에 고이니, 배우는 자들이 가만히 바라보다가 놀라서 서둘러 물러갔다. 늘 스스로 말하기를 “영남에 조금이나마 터전이 있으니 떠나더라도 충분히 끼니를 때울 수 있지만 용인(龍仁)에서 더 멀어지니 내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맏형인 이운(李耘)을 공경하고 챙겨 주는 태도가 마치 사마 온공(司馬溫公)이 백강(伯康)에게 했던 것과 같아, 함께 선산(先山)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슬퍼하며 북쪽을 바라보며 난간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곤 하였다. 일찍이 그와 함께 성묘를 가기로 약속하였는데 맏형이 먼저 도착하였고 고을 현령 성림(成霖)이 찾아왔다. 성림은 형 성운(成雲)의 세력을 믿고서 팔을 걷어붙이고 기세등등하여 맑은 무리를 원수 보듯 하고 방약무인(傍若無人)하였다. 그런데도 공이 야윈 말을 타고 누추한 차림으로 들어가 앉자 성림은 저도 모르게 풀이 죽어 달아나다가 억지로 나와 절을 하였는데, 숨을 죽이고 땀을 흘리면서 밖으로 나와 말하기를 “저절로 경외심(敬畏心)이 들었다.” 하였다.
내가 몇 밤을 모시고 지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보니 독서를 하고 난 여가에는 반드시 술을 서너 잔 마시거나 시를 짓거나 어떤 일을 기록하셨다. 그러고 다시 단정히 앉아서 책을 펼치면 글을 읽는 소리가 문밖까지 들릴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밤을 지새우고 하루 해를 보냈는데 온화하고 윤기 있는 안색과 굳세고 진중한 기운이 어디가 끝인지를 가늠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문장 짓는 일은 애당초 달갑게 여기지 않아 중년에는 힘을 쏟지 않다가 노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힘썼는데, 말을 맑고 평범하게 하였고 꾸미거나 외설스러운 것에는 관심도 갖지 않았다. 〈즉사(卽事)〉라는 시에,
연못이 평평함은 분수 지킬 줄 아는 것이고 池平知守分
물이 흘러듦은 웅덩이가 차기를 기다림이네 水注待盈科
구름 그림자는 본디 자취가 없고 雲影本無迹
하늘 모습은 영원히 치우침이 없어라 天容長不頗
술 깨면 정신이 개운하게 맑아지고 酒醒神散朗
시 지으면 좌중이 너울너울 춤을 추네 詩就坐婆娑
이것이 사람 사는 세상 풍경이니 此是人中景
그런대로 온갖 병을 씻어 낸다네 聊焉滌百痾
하였는데, 입으로 불러 지은 것들도 대부분 이런 종류였다.
〈회암어록고해후(晦庵語錄考解後)〉를 쓴 것은 가장 순정(醇正)하다. 《음애집(陰崖集)》이 있는데, 작품이 거의 다 흩어져 사라져서 겨우 시(詩) 3656수(首)와 명(銘), 표(表), 부(賦), 사(辭), 전(傳), 기(記), 서(序), 설(說) 총 74편(篇)을 얻었을 뿐이다. 식자(識者)들이 이를 보배로 여기고 있다.
공은 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는데, 집 안에서는 책상자를 열고 논저(論著)를 지으면서도 밖에 나가서는 반드시 아는 것을 꼭꼭 감춰 두어 사람들이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또 태사(太史) 범조우(范祖禹)의 《당감(唐鑑)》을 모방하여 《사평(史評)》을 저술하는 데 정력을 다 쏟았으나 완성을 보지는 못하였다. 돌아가실 무렵에 소회(所懷)를 남긴 말이 없을까 봐 염려하여 〈몽암관화유문(夢庵觀化遺文)〉을 지어 자질들에게 보였는데, 대체로 삶과 죽음의 근원에 통달한 내용과 선산에서 떨어져 있음을 슬퍼하는 내용이었다. 또 “상례와 장례를 치르는 일들은 모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거행하되, 염(殮)할 때는 시복(時服)을 쓰고 제사 때는 가찬(家饌)을 쓰라. 선부군(先府君)이 유밀과(油蜜果)를 쓰지 말도록 경계하시어 감히 어길 수 없어 내내 1첩(貼)만 진설하였으나, 내 생각에는 1첩도 진설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상제(喪祭)에는 고기를 쓰지 않는 것이 우리 집의 오래된 가풍이니, 삭망(朔望)에만 육포와 식혜를 간략히 진설하도록 하라. 《가례》 가운데 행할 수 없는 것은 뒤에 나열해 놓았다.”라고 하였다.
공의 학문은 쇄소응대(灑掃應對)를 단계로 삼고 궁신지화(窮神知化)를 궁극으로 삼아, 도리를 갖추어 수양하였고 체용(體用)이 모두 완비되었다. 그러나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고, 또한 남에게 함부로 말하지도 않았으며, 실없는 말을 좋아하지 않고 오직 실제에 맞게 착실히 해 나가는 데에만 힘썼다. 만년에 참되게 쌓아 가며 오래도록 노력하여 의(義)가 정밀해지고 인(仁)이 무르익어 동정어묵(動靜語默)이 경우에 맞았다. 비록 그가 얻은 바를 듣지는 못했지만 그가 도달한 경지는 이미 극에 달하였다. 호걸(豪傑)의 재주를 지니지 않았다면 어찌 이처럼 해낼 수가 있었겠는가.
아, 나라에 충성하는 간절한 그 마음이 오래도록 시골구석에 묻혀 있느라 펴지지 못하였고, 당당히 나서서 세상을 구제하려던 뜻이 대번에 지하에 묻히고 말았다. 참으로 이른바 “이 사람에게 복(福)이 없다면 천하도 복이 없을 것이다.”라는 경우이니, 천하를 생각할 때 애통해할 만하다.
당시의 만사(輓詞)에 심언광(沈彦光)이 지은 작품 한 편이 있다.
재능 있는 젊은 시절 높이 품은 뜻 노성한 이와 비길 만했고 英妙高懷擬老成
일세를 경장하니 세상이 놀랐네 更張一世世曾驚
그저 처음 먹은 뜻대로 시와 예를 닦을 것을 聊將詩禮修初服
어찌하여 세상 다스리겠다며 반평생을 그르쳤을까 豈意經綸誤半生
벼슬하느냐 마느냐는 하늘에 달려 기뻐하거나 서운해할 것 없으나 仕已在天無喜慍
참담한지 편안한지는 땅에 달려 쇠퇴하거나 번영함이 있네 慘舒隨地有枯榮
궁한 처지에선 지조를 바꾸는 것이 일반적인데 窮途易節尋常事
십 년간 촌에 살아 오히려 좋은 명성을 얻었네 十載林泉尙令名
이 글이 비록 도를 지닌 자의 기상을 형용한 것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며 전송되고 있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되던 해에 중종이 기묘년(1519, 중종14)의 일에 대해 크게 깨닫고는 살아남아 있는 노성인(老成人)을 모두 수용하였는데, 사림이 기운을 차리며 서로 매우 애석해하면서 “하늘이 우리 동방(東方)을 평안히 다스려 주지 않으려나 보다.”라고 하였으니, 특히나 슬프도다.
공은 처음에 남씨(南氏)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사(後嗣)를 두지 못했고, 뒤에 인천 채씨(仁川蔡氏) 사헌부 대사헌 채수(蔡壽)의 집안에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 추(秋)는 문학(文學)에 뛰어났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가 아들 배(培)를 낳았는데, 아내를 두었으나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공의 맏딸은 사족(士族)인 이효백(李孝伯)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박응성(朴應星)에게 시집갔고, 막내 딸은 종실(宗室)인 봉릉부 수(鳳陵副守 이만년(李萬年))에게 시집갔다.
有明朝鮮國故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知春秋館事李公行狀。
韓山李氏。在高麗。自稼亭文孝公諱穀牧隱文靖公諱穡。父子相繼。入元朝中制科。文章德業聞天下。遂爲文獻世家。牧隱仲子諱種學。簽書密直事。盡節先朝。畢命改社。密直生諱淑畝。爲刑曹判書。淑問無冤。家無長物。終知敦寧府事。諡良度。良度生諱亨增。僉知中樞院事。操身淸苦。一介不取予於人。僉知生諱禮堅。司諫院大司諫。所在以淸謹名。敎子弟檢勅無外慕。聘善山金氏從仕郞寬安之門。以成化庚子。生公於漢都。諱耔。字次野世。稱陰崖生。自幼嶷嶷然成人。不妄嬉戱。人知非凡常兒。年甫七八。大諫公始授之書。不煩指誨。一年。離口讀。又一年。通大義。稍長。學益力。退處一室。若有心會。癸丑。趨庭于三陟府治。遂上頭陀山中臺寺。讀宋史。慨然自奮。作萬言書欲自獻。大諫公戒止之。有一老宿。持戒頗嚴。發言有道理。又喜之欲參焉。寺前絶壁巉立。積雪交映。香燈永夜。激昂千古。及還都下。忽忽不樂。或時深憂永歎。至欲作諫官。極言當世事。弘治辛酉。中司馬試。同榜若金安國,鄭忠樑,成世昌,柳雲。皆執友也。間遊國庠。不崖異於人。而莫不期以德器。李長坤,沈貞,李公仲,李孝彦,金希壽,宋好義,好禮,好智。俱與之同處磨礱。然每以向時所期待。已十損八九爲恨。甲子。擢文科第一名。授司憲府監察。充千秋書狀。比還。薦拜吏曹佐郞。時燕山政亂。黽勉從仕。惟用酒自汚。大諫公忤旨。初謫龍宮。尋移星州。公便丐聞韶。理民作人。咸盡其方。大有去後思。正德丙寅。靖國。大諫公還朝。公又請爲陽川。未赴。有以公文學可備顧問爲言者。乃授弘文館修撰。庚午冬。丁大諫公憂。明年春。廬于龍仁器谷里。葬祭以禮。鄕里化之。旣除喪。見先壠下南溪巖隙。有楓林側生。心愛之。自號楓林居士。癸酉春。陞副校理,副應敎,司諫。甲戌八月。居大夫人喪。哀毁愈劇。制畢將歸。握奴手曰。留汝獨守。義同兄弟。烏邑不能已。丙子九月。直壠南崦之陽。構屋一間。翼以簷楹。繚以垣墻。爲齋宿之所。命曰思庵。作記以明其義。書諸板。乃曰。以懲吾過。且以爲規而揭之。蓋其意若將終身者也。冬。復授應敎。陞典翰直提學。丁丑夏。陞副提學。移承政院右副承旨。戊寅五月。朝廷議奏請辨誣。上命博遴使者。銓曹難其人。請輟侍臣薦擬副使。上特與增秩。固。讓不允。遂入京進奏。復謄書禮部。見稱宗伯。題本一上。
兪音旋降。乃奉勅回江。超拜漢城判尹兼同知經筵事。賜土田臧穫。三月。遷刑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尋爲議政府右參贊兼知春秋館事。己卯禍起。坐累退居陰城。始自號陰崖。謝絶閉社。省愆守拙。至屢空。晏如也。惟左右圖書。凝神注目。家僮罕見其面。以其暇則引學者數人。徘佪于門巖溪上。或疏泉引沼。誅茅架亭。嘯咏舒放。時得酒痛飮。以澆胸中磊塊。又好文字。每發於信筆以自娛。歲己丑。更謀深閟。乃移卜忠州獺川上游之兔溪。築小精舍。名以夢庵。或自號夢翁。其山高邃而水益淸。人跡如掃。村煙自稀。渚禽林獸。還往不驚。與前校理李灘叟先生延慶公。居不遠。仍自號溪翁。淸風朗月。輒一棹相就。窮硏道義。 暢敍襟懷。樂而忘憂。餘一紀矣。癸巳十二月十五日。易簀。春秋五十有四。葬于先塋之側。公天分甚高。休休乎其外。恢恢乎其中。根基廣厚。宇量虛明。接人和而嚴。處事簡而詳。事父母。極其孝敬。在兄弟。盡其恭愛。篤於享祀。莊於臨莅。閨門之內。斬斬有序。雖小兒子。不得踰閾。常如對賓客。矜持無惰容。成鄭二公從之遊。借僧氈攻苦。竊慕效之。歎曰。若人積習成自然。焉可學也。及其立朝。不動聲色。爲時倚以爲重。出入十數年。累蒙天奬。最承恩遇。日思糜身報效。時國家法久而獘。又經亂政。不啻若元祐之當改。於是。諸賢起而多所建。明年。少氣銳。競事彈劾。觸冒阻險。而物情大乖。居散地者。怨次于骨。匿迹旁伺矣。公與申公鏛趙公光祖權公橃。欲調適兩間。不至敗闕。則一二公執不可。已無如之何。而北門風雨作焉。當在燕都。上使南衮。得疾幾殊。公辛勤藥餌。書狀官耳語以這漢必赤士類。公正色曰。此同使也。君言誤矣。世傳此行無甚悖亂。公之力也。公之婭金安老。奸黠媢嫉。展轉枘鑿。然公待之加厚。誠意靄然。彼亦不敢以慢語加之。平居。澹然若忘世。及聞時政缺失。嘆咜彌日。嘗訓人。至殺陳東。未數行。哽咽不能出聲。慘色滿容。哀淚承睫。學者竊視之。矍然徑退。常自言嶺表有薄業。去之足以具饘粥。龍駒益遠。吾不忍也。敬撫其伯耘。如溫公之於伯康。以不得同歸宰下爲戚。北向瞻盱。橫涕闌干。嘗約共省掃。伯公先至。主宰成霖訪之。挾兄雲勢。攘臂使氣。佐視淸流。傍若無人。公瘦馬麄衣入坐。霖不覺沮喪而走。强之。乃進拜。屛息流汗而出曰。自爾有敬畏之心。守愼得侍數夜。見讀書之餘。必引三四觥。或聯句。或記事。復端坐展策。吾伊之聲。徹於戶外。如是者窮宵竟晷。而溫潤之色。毅重之氣。有不可得而窺其渥涘者。其於詞藻。初不屑意。中不致力。老而始從事焉。出語淸淳平實。不涉雕餙猥褻。如卽事曰。池平知守分。水注待盈科。雲影本無迹。天容長不頗。酒醒神散朗。詩就坐婆娑。此是人中景。聊焉 滌百痾。凡口占多類此。若書晦庵語錄考解後。最爲醇正。有陰崖集。散逸殆盡。只得詩三千六百五十六。銘表賦辭傳記序說合七十四。識者寶之。公平生手不釋卷。入則開篋論著。出必封識甚固。人莫知其所爲。又放范太史唐鑑。著史評。極費精力。未及斷手。臨歿。念無以留。語所懷。作夢庵觀化遺文。以示子姪輩。蓋達死生之原。悼松楸之隔。且曰。喪葬諸事。一依朱禮。斂用時服。祭用家饌。先府君戒勿用油蜜果。故不敢踰。始終只設一貼。如我意。一貼不設可也。喪祭不用肉。我家舊風。惟朔望。略設脯醢。家禮中有不得行者。書列于後云。公之學。以灑掃應對爲階梯。窮神知化爲歸宿。充養有道。體用皆備。但不求人知。亦不輕以語人。不喜空言。惟務踏着實地。晩而眞積力久。義精仁熟。動靜語默。隨處而中。雖其所受未聞。顧其所到已極。非有豪傑之才。焉能猶興若是。嗚呼。其惓惓忠愛之心。久鬱畎畝。堂堂經濟之志。遽埋泉壤。信所謂斯人無福。天下也無福。其可爲天下慟者哉。當時挽詞有沈彦光一篇曰。英妙高懷擬老成。更張一世世曾驚。聊將詩禮修初服。豈意經綸誤半生。仕已在天無喜慍。慘舒隨地有枯榮。窮途易節尋常事。十載林泉尙令名。雖不解形容有道者氣像。亦爲膾炙傳誦之。公歿之六年。中廟大悟己卯之事。盡收憖遺之老。士林增氣。相與痛惜曰。天之未欲平治我東也。尤可慟哉。公先聘南氏無后。後聘仁川蔡氏都憲壽之門。生一男三女。男曰秋富。文學蚤世。生男培。有室無后而夭。女長適士族李孝伯。次適朴應星。次適宗室鳳陵副守。
[주1] 제과(制科) : 시(詩), 부(賦), 송(頌), 책(策)으로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를 말한다.
[주2] 종계변무(宗系辨誣) : 종계(宗系)에 관한 무함을 밝힌 것을 가리킨다. 명나라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의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되어 있어, 국초 이래 이를 정정해 줄 것을 누차 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1584년(선조17)에야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 황정욱(黃廷彧)이 가서 바로잡았다. 《國朝寶鑑 宣祖朝 17年》 《燃藜室記述 卷17 宗系辨誣》
[주3] 원우(元祐) :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이다. 이때 왕안석(王安石)이 정치를 개혁하고자 신법(新法)을 제창하여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주4] 북문(北門)에 …… 것 : 남곤과 심정(沈貞)이 밤에 신무문(神武門)으로 들어가 조광조 등의 죄를 청하여, 청류(淸流)로 일컬어지던 사람들이 죽거나 귀양 가서 남김없이 화를 당한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가리킨다.
[주5] 서장관(書狀官) : 한충(韓忠, 1486~1521)을 가리킨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서경(恕卿), 호는 송재(松齋)이다. 1519년 가을에 승지로 물러나 충청 수사(忠淸水使)가 되었다가 사화가 일어나자 거제(巨濟)로 귀양 갔는데, 얼마 안 되어 견책을 입고 끌려와 옥중에서 매를 맞고 죽었다. 《海東雜錄3 本朝3 韓忠》
[주6] 진동(陳東)을 죽인 일 : 진동은 송(宋)나라 단양(丹陽) 사람이다. 송 고종(宋高宗)이 남경(南京) 응천부(應天府)에서 즉위한 직후에 금(金)과의 항전을 주장하던 재상 이강(李綱)이 파직되자, 태학생(太學生) 진동과 숭인(崇仁) 고을의 선비 구양철(歐陽澈)이 상소하여 이강을 복직시키고 주화파(主和派)인 황잠선(黃潛善)과 왕백언(汪伯彦)을 파직하며 사기를 진작하여 동경(東京)으로 회군(回軍)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황잠선이 진동과 구양철을 무함하여 죽였는데, 몇 년 뒤에 고종이 무고하게 죽인 것을 후회하여 벼슬을 추증함으로써 민심을 무마하였다. 《宋史 陳東列傳, 歐陽澈列傳》
[주7] 이운(李耘) : 1469~1535.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야(仲野)이다. 1501년(연산군7)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07년 이조 좌랑이 된 후 청주 목사(淸州牧使), 강릉 부사(江陵府使), 제주 목사(濟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주8] 사마 …… 것 : 사마 온공은 그의 형 백강과 우애가 매우 두터워 백강의 나이가 80이었을 때 엄한 아버지 받들 듯 어린아이 보호하듯 대하였다고 전한다. 《宋名臣言行錄 後集 卷7 司馬光》 사마 온공은 사마광(司馬光)이고 백강은 사마단(司馬旦)이다.
[주9] 성림(成霖) :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택보(澤父)이다. 1504년 식년시(式年試)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호조 좌랑과 용인 현령(龍仁縣令)을 지냈다.
[주10] 성운(成雲) : ?~1528. 본관은 창녕, 자는 치원(致遠), 시호는 경숙(景肅)이다. 1504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06년 주서(注書)가 되었으나 왕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기묘사화 때는 병조 참지로 있으면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제거에 앞장선 공으로 우승지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1527년 병조 판서로 군권을 장악하였으나 심광언(沈光彦)에게 붕당을 이룬다는 탄핵을 받고 경상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주11] 범조우(范祖禹) : 1041~1098. 자는 순부(淳夫)ㆍ순보(純甫)ㆍ몽득(夢得), 호는 화양선생(華陽先生),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사마광(司馬光)을 따라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수하였다.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죽은 뒤에는 그 틈을 타서 소인배들이 득세할까 봐 염려하여 철종(哲宗)에게 여러 차례 간언(諫言)을 올렸다. 그 뒤 장돈(章惇)을 재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내용으로 극언하였다가 외직으로 쫓겨나 있던 중 사망하였다. 《宋史 范祖禹列傳》
[주12] 심언광(沈彦光) : 1487~1540. 본관은 삼척(三陟), 자는 사형(士浻), 호는 어촌(漁村)이다. 1513년(중종8) 문과에 급제한 뒤 청요직을 두루 지냈으며, 언관을 역임하면서 심정을 비롯한 권간들의 횡포를 탄핵하였다. 1530년 대사간이 되어 김안로의 등용을 적극 주장하여 실현하였으나, 김안로가 실권을 장악하여 붕당을 조직하고 사림들을 모함하자 그의 비행을 비판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여 대윤(大尹) 윤임(尹任) 일파가 집권하면서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주13] 남씨(南氏) : 《음애집》 〈연보(年譜)〉에는 의령 남씨(宜寧南氏)로 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