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평대군의 벼루에 대한 기문〔安平硯記〕
안평대군 청지(淸之)는 왕자의 고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인데 글씨 쓰는 재주가 우리나라에서 으뜸으로 송설(松雪 조맹부(趙孟頫))에 비견되기까지 한다. 지금도 사람들이 그의 글씨가 있는 작은 종이 조각이라도 얻으면 너 나 할 것 없이 커다란 옥 같은 진귀한 보배로 여긴다. 그가 평소에 모았던 법첩(法帖)과 명화(名畵), 서적 중에는 몰수되었다가 세상에 흘러나온 것 또한 적지 않은데, 모두 인장이 있어 알아볼 수 있다. 내가 젊었을 적에, 세상에 돌아다니는 시축 가운데 성근보(成謹甫 성삼문(成三問))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지은 시가 있으며, 안평대군이 첫머리에 시를 쓰고 장난삼아 붉은 먹으로 매화와 대나무 한 가지씩을 그려놓은 것을 보았다. 그의 시에,
한 가지 매화와 대나무는 그리워 보낸 편지요 一枝梅竹相思信
천리 강남땅에 멀리 떨어져있는 사람의 마음이라 千里江南兩地心
하는 구절이 있었다. 그 필획이 정밀하고 광채가 나서 사람을 환하게 비추니 공경할 만하였다.
나는 예전에 안평대군이 표제를 쓴 책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가 선물로 준 것이었는데, 하나는 일본 종이로 만든 《창려집(昌黎集)》에 안평대군이 직접 점을 찍어 구두를 끊은 것이고, 하나는 동서당(東書堂) 묵각(墨刻)의 난정서(蘭亭序) 서축(書軸)인데, 그 안에 〈유상도(流觴圖)〉 및 정무본(定武本)과 저등선본(楮登善本)의 기문이 모두 실려 있었다. 축의 위아랫면에는 모두 안평대군이 손수 쓴 절구가 있었으니, 책과 축이 모두 희귀한 보물이라 하기에 충분하였다. 하지만 묵각은 빌려 주었다가 돌려받지 못했고, 《창려집》은 난리통에 잃어버렸기에 지금도 마음에 잊지 못하고 있다. 난리가 끝난 뒤에 겨우 비해당첩(匪懈堂帖)을 얻었으나 부끄럽게도 아직 장황(粧䌙)하지 못하였다.
안평대군이 유난히 좋아한 것은 서화와 서적이었는데, 세련되고 아름답지 않으면 소장하지 않았다. 그의 문방사우 역시 지극히 이름난 물건으로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옛사람이 이른바 “진랑(秦郞)의 백 가지 기호품은 모두 제일가는 것이라네〔秦郞百好俱第一〕”라는 말도 그에게 비하면 조금 부족할 것이다.
안평대군의 별장이 덕수(德水)에 있었는데, 몇 해 전 농부가 옛터에서 밭을 갈면서 쟁기질을 하다가 쟁기 끝에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서 마침내 오래된 벼루를 찾게 되었다. 지평 민유경(閔有慶)의 소유가 되었다가 그가 대언(代言 승지(承旨)) 박열지(朴說之 박동열(朴東說))에게 주었다.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서 보자고 하니, 박군이 꺼내서 내게 보여주었다.
그 벼루는 검푸른 빛인데 아래는 넓고 위로 갈수록 점점 줄어드는 모양이었다. 아래에서 반 자쯤 떨어진 곳에 좌우 양쪽을 깎아내어 마치 거문고의 머리 모양처럼 겉이 움푹 파인 반원형으로 만들었다. 위에 매우 넓은 묵지(墨池)가 있는데, 벼루의 길이는 주척(周尺)으로 한 자 세 치, 두께는 한 치 남짓 되었다.
그 뒷면을 파서 조금 움푹하게 만들고 양쪽 머리를 뾰족하게 만들어 다리 모양을 이루었다. 윗면의 아랫부분에는 가로로 턱을 만들었는데, 연적을 놓으려는 것이었다. 출토될 때 쟁기에 부딪쳐 떨어져 나간 묵지의 일부는 같은 색깔의 돌로 때웠다.
이 벼루는 체제가 기이하고 예스러우며 색깔 또한 우리나라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결코 보통 사람이 갖고 있던 물건이 아니다. 게다가 별장의 옛터에서 얻었으니, 안평대군이 가지고 있던 옛 물건이 분명하다.
내가 예전에 《격고요론(格古要論)》에서 벼루의 등급을 논한 것을 보았는데, 광동(廣東) 조경부(肇慶府) 단계(端溪)에 있는 하암(下巖)의 오래된 구덩이에서 나온 돌로 만든 벼루가 제일이고 색깔도 검푸르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 벼루의 모습이다. 아마도 안평대군이 중국에서 사온 것이거나 일본에서 얻어와 자기 생각대로 만들어낸 것이리라.
아, 안평대군이 세상을 떠난 지 백여 년이 넘었다. 그의 후손은 남아 있지 않으니 그의 집터에서 밭 갈고 씨 뿌리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이미 해마다 그렇게 하고 있었는데 벼루가 나온 것은 바로 근래의 일이고 또 박군의 소유가 되었다. 박군은 한창 문필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며 날마다 글씨 쓰기를 일삼고 있으니, 벼루가 박군에게 간 것은 제자리를 찾았다고 하겠다. 그 사이에 운명이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박군이 보물로 간직하여 영원히 반남 박씨 집안에서 대대로 지키는 가보로 삼더라도 안 될 것이 있겠는가.
나는 이로 인해 느낀 바가 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사람은 굳이 귀한 물건을 가질 필요 없으니 人生尤物不必有
어쩌다 한 번 보기만 해도 늙은 마음 놀라네 時一過目驚老醜
하였는데, 이는 귀한 물건을 보기가 쉽지 않고, 요행히 보게 되더라도 필시 수십 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일 터이니, 젊은 사람이 이미 노쇠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죽을 나이가 지나서야 이것을 보게 되었으니, 훗날 이처럼 기이한 보물을 다시 감상할 기약이 있겠는가. 인간 세상을 돌아보노라니 감개가 뒤따른다. 마침내 느낀 바를 써서 박군에게 증거삼아 준다.
安平硯記
安平淸之以王子貴。而臨池之技。冠絶東土。至追配松雪。至今人得一赫蹏。爭自珍玩。視若拱壁。其居平所蓄法書名畫及竹素之帙。沒入之餘。流落世間者。亦復不少。皆有印章可認也。記余少時。嘗見道行詩軸中。有成謹甫諸賢之作。而安平題其首。以朱筆戲寫梅竹各一枝。其詩有一枝梅竹相思信。千里江南兩地心之句。其筆畫精光。奕奕射人可敬也。余曾有友人所餉安平書標題。倭紙昌黎集。親自點絶者▦東書堂墨刻蘭亭軸。其中流觴圖及記之定武本楮登善本皆在焉。軸上下面。俱有安平手題絶句。冊若軸足稱絶寶。而墨刻緣傳看不還。昌黎集則於亂離失之。至今往來于心。亂後僅得匪懈堂帖而尙未粧䌙以爲愧。夫以安平之嗜好。特在於書畫緗帙。而非精好不蓄。其文房四友。亦必極其名品而不苟率也。古所謂秦卽百好俱第一者。視此當內遜矣。安平別業在德水。數年前農夫耕田於舊基。鋤犁所及。鏗然觸發。遂得古硯。爲閔持平有慶所有。而餉之代言朴君說之。余聞而請見。朴君出示余。其硯靑黑色。豐其下而漸殺其上。離下半咫許。刳去其左右兩傍。爲外凹半圓如琴首狀。上有墨池甚闊。硯長計可周尺之尺有三寸。厚一寸餘。刳其後面而稍窪之。凸其兩頭成足形。上面之底橫作企。蓋欲硯子安置者也。墨池於出地時被鐵器觸傷而缺。以同色別石補之。此硯體制奇古。色品又非出於我國者。決非尋常人所蓄。而又得之於別業舊基。其爲安平之古物明矣。余嘗攷格古要論論硯品。廣東肇慶府端溪下巖舊坑硯石。第一而色靑黑。正狀此硯。抑安平購之中國。或不然則必得之於日本而自以己意創造者矣。噫。安平之卽世餘百年。而其後無存。其耕種於舊基。誰得以禁之。蓋年年已然而玆硯之出。乃在近年。而又爲朴君所得。朴君方擅操觚業。赫然負當世稱。而日事筆硯間。硯之托於朴君。亦爲得其所矣。不謂之有數存乎其間者乎。朴君其寶藏之。永爲潘南世守之靑氈。奚而不可也。余因此而有所感矣。古人云人生尤物不必有。時一過目驚老醜。此謂尤物之未易得見。幸而得見。則必問數十年之久。而壯者已成衰老之謂也。余則墓木已拱而乃得見此。後日之再玩此等奇寶。寧有期乎。俯仰人世。感慨係之。遂書所感而求證於朴君云爾。
[주1] 안평대군(安平大君)의 …… 기문 : 이 글은 안평대군(1418~1453)이 소장했던 벼루에 대한 기문이다. 안평대군은 세종(世宗)의 삼남으로 이름은 용(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매죽당(梅竹堂)이다. 이 벼루는 안평대군의 집터에서 발견되어 박동열(朴東說, 1564~1622)의 소유가 되었다. 본문에 박동열을 승지라고 하였는데, 박동열은 1606년(선조39) 동부승지가 되었으므로 이 글은 이 무렵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宣祖實錄 39年 8月 25日》
[주2] 진랑(秦郞)의 …… 것이라네 : 송(宋)나라 진사도(陳師道)의 〈고묵행(古墨行)〉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後山集 卷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