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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은 여호야김 왕 시대의 사람입니다. 즉, 바벨론이 처음으로 유다를 침공하고 포로들을 사로잡아 간 시대의 사람입니다. 다니엘서는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그것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간 것이죠?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책이 바로 다니엘서입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을 비롯한 유다의 포로들을 잘 대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박애정신의 소유자라서가 아니라, 포로들을 통해서 제국을 잘 통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왕자와 귀족들로 이루어진 포로들은 피정복국으로 하여금 반란을 도모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한 나라를 이끌어 나가는 부류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가... 할 때, 결국 왕족들과 귀족들이거든요. 그들의 자제들이 포로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반란을 꾀하기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한 가지는 여러 피정복국으로 이루어진 제국이 하나의 공동체가 되도록 하는 효과를 노렸는데, 이 말은 그들이 미래를 도모할 수 없도록 만듦으로서죠? 즉, 왕자나 귀족의 자제들은 나라의 미래였습니다. 그들을 잘 먹이고 교육시켜서 바벨론의 문화에 완전히 녹아들도록 만든다면, 그래서 그들의 통솔력으로 각자의 민족을 바벨론 문화라는 큰 용광로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바벨론이라는 제국은 비록 여러 민족과 나라와 종교로 이루어졌지만,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각 나라와 민족들이 만에 하나 봉기를 시도 할 때 그래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 민족의 전투 방법이나 성향, 문화를 알고 있는 왕족과 귀족들은 귀한 정보원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전화나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 더 넓은 제국을 통치하고 굳건히 세워나가는 데에 있어서 그러한 전략은 그 시대에 최적화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왕의 의도를 간파하고, 국가가 나아가려는 방향을 이해하고, 잘 따라가는 것이죠? 그렇게 시류에 맞추어서 자신의 삶을 운행해갈 때, 부귀영화라는 트로피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임금의 의지에 맞게 삶으로서 이 땅에서 보다 좋은 것, 귀한 것, 맛있는 것을 누리며 살기 보다는 하늘 임금의 뜻을 이해하여 그 뜻에 맞게 살려고 하였습니다. 비록 그것이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세상 임금의 뜻에 반하며 산다는 것은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세상 임금인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뜻대로, 그가 가고자 하는 방향대로, 이 세상이 움직여 가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하나님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의 시간도, 어느 한 움큼의 땅도, 우리 주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 임금의 뜻보다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뜻에 맞게 살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잘 살고 출세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맞게 살아야 한다.
대지는,
첫째, 하나님의 뜻은 성도가 세상과 구별되는 것이다(8-9절)
둘째, 하나님의 뜻은 성도가 세상을 이겨내는 것이다(10-16절)
이 순서로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뜻은 성도가 세상과 구별되는 것이다(8-9절)
먼저 살펴볼 것은 성도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여기서 뜻을 정했다는 말은 다니엘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즉, 다니엘은 개인적인 생각과 철학에 따라 이렇게 살아야 겠구나.... 다짐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인생을 맡겼다는 뜻입니다. 당시에 두 나라가, 두 임금이, 두 명령이 충돌하고 있었죠? 즉, 하나님 나라와 바벨론이 충돌하고 있었고, 하늘 임금이신 하나님과 땅의 임금 느부갓네살이 충돌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뜻과 느부갓네살의 뜻이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다니엘은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던 것입니다. 쉬운 길이 있었고, 성공하고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금수저였습니다. 왕의 후손으로 태어났고, 귀족의 자제들과 어울리며 살았습니다. 때문에 포로지에서 조차도 모든 특권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일반 평민들이 먹는 음식이 아니라, 왕의 진미를 먹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고, 일반 공립학교가 아니라, 귀족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 길은 자연스레 출세와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는데, 큰 말썽만 부리지 않고, 그 앞에 놓여진 길을 가기만 하면 왕 바로 옆에서 섬길 수 있는, 즉,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길이 보장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지만, 5절이죠?
또 왕이 지정하여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 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그 후에 그들은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
그런데 다니엘은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8절,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그것은 느부갓네살의 뜻이 비록 다니엘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느부갓네살의 목적은 제국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반란이 없고, 문화와 인종에 따라서 나누어지는 법이 없이, 마치 처음부터 한 나라였던 것과 같이, 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고 자란 것과 같이, 단단한 운명공동체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가 영원하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라는 하나님나라입니다. 가깝게는 이스라엘의 회복이고, 멀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질 교회가 영원히 서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느부갓네살의 뜻대로 유다민족이 바벨론나라로 흡수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바벨론 나라가 강해 져서 영원히 서 있기를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을 위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말씀입니다. 하늘나라의 법령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갖추어야 살아야 할 법도입니다. 그것을 잃게 될 때, 즉, 말씀을 잃게 될 때, 하나님은 그 백성들 가운데 잊혀질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방나라에 동화되어서 사라질 것이며, 결국 교회도 없어질 것입니다. 교회가 믿음으로 세워진다고 할 때,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죠? 메시야 또한 오실 수 없겠죠? 메시야는 믿음의 후손을 통해 오실 것인데, 믿음이 사라지고 혈통만 남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다니엘이 뜻을 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느부갓네살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이 바벨론에 동화되기를 바란 것이고, 하나님은 다니엘이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를, 그래서 그곳에서 하늘나라를 세우기를 바란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율법에 따라 다스림 받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먹는 음식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맞을 리가 없었던 것이죠? 하나님은 레위기 11장에서 음식에 대한 정결법을 주셨습니다. 어떤 것을 먹을 수 있고, 어떤 것을 먹을 수 없는지를 상세하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은 그에 대해 무지하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바벨론은 돼지고기를 별 거리낌 없이 먹던 민족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었죠? 물고기도 비늘 없는 생선은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즉, 다니엘에게 주어질 왕의 진미라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과 대립되는 것이었고, 다니엘은 왕의 진미를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택한 것입니다.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는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당시 바벨론 문화에서 왕이 먹는 음식이라는 것은 먼저 바벨론의 신들에게 드려진 것들입니다. 즉, 제사장이 신들에게 제사 의식을 행하고 그 음식들이 왕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다니엘이 만약 그것을 먹는다면, 간접적으로 바벨론의 신전의식에 참여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음식을 먹지 않았던 것이죠? 그러한 다짐은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느부갓네살은 나름대로 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장 좋은 것으로 접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신의 몸을 더럽힐 뿐이라고 다니엘이 말할 때, 그것은 왕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왕을 모욕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손님을 접대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는 그 손님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최상의 것을 내 놓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손님이, "당신이 내 놓은 음식은 더럽습니다!" 그것은 손님의 상태를 알지 못한 내 잘못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손님이 무례한 것입니다.
하물며 왕에게 그랬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포로로 잡혀온 어린놈이 말입니다. 죽고 싶다는 말이죠? 분명 죽어 마땅한 일이지만, 그 때 하나님의 개입이 일어납니다. 9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이 말은 환관장이 그래 알았다. 니 뜻대로 해 주께..그랬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중에 10절을 살펴볼 것인데, 환관장은 다니엘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다니엘이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었다는 말은 환관장이 다니엘의 무례한 말을 듣고도 왕에게 보고 하거나 하는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환관장은 지난주에 살펴보았지만, 다니엘과 그 친구들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 이름을 다 바꾼 사람이 환관장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즉, 그들의 이름이 원래는 하나님은 재판장이시다, 하나님의 은혜.. 이런 뜻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이름을 아쿠는 대장이시다. 바알은 나의 보호자시다...이런 식으로, 모욕적으로 바꿀 정도로 환관장은 배려라는 것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다니엘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니엘의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것이죠? 생명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놈이 잘 해 줬더니 은혜를 모르네? 그래서 가장 비천한 자리로 보내 버릴 수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상황에서 은혜를 얻도록 하신 것입니다. 즉, 환관장이 다니엘의 그 말을 듣고도 화를 내거나 분노를 품거나, 요놈 봐라... 하거나 하지 않고, 은혜와 긍휼을...에고... 어린 아이가 타국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을까...어린 아이가 무엇을 몰라도 너무 모르네...세상을 너무 모르네...저러다 죽을 수도 있는데 말이지...그런 식으로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서 비록 다니엘의 그 구하는 것이 무모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해가 임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환관장 사이에 특별하게 개입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그 보호 아래 있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구별된다는 것은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끼리 뭔가 특별한 것처럼, 선택되었으니까, 선민사상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며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구별되는 것은 내가 특권의식을 가지고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구별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말씀을 따라 살 때, 말씀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과 구별되며, 죄로부터 구별되며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문명은 분명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금지된 음식을 먹는 것이라든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은 그것을 분명하게 해 줍니다. 그 보다, 우리는 먹는다는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하는데, 결국 레위기 11장에서 밝히고 있는 음식에 관한 규례는 음식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과 사귀는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욥바 시몬의 집에서 낮잠을 잘 때,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고, 그 보자기 속에 큰 그릇이 있는 것을 보게 되죠? 그 그릇에는 무엇이 들었습니까? 레위기 11장에서 규정하고 있는 온갖 부정한 짐승들이,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어서는 안 될 음식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항변하죠? 저는 어려서 부터 부정한 것을 입에 댄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뜻을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을 먹으라! 그 환상을 세 번 연거푸 보여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상했지만 그것을 마음에 담아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를 찾아온 것입니다. 고넬료는 이방인 백부장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세례 받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교회의 회원이 되기 위해서. 당시만 해도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거든요. 이방인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고넬료가 찾아오고, 회원이 되고 싶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사건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아하! 부정한 음식을 먹으라는 뜻이 이방인과 교제하라는 뜻이구나! 이방인에게도 세례를 주고,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이구나! 그래서 교회 회의가 예루살렘에서 열리는데, 그 때 가결된 것이, 이방인에게도 세례를 주라, 교회 회원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행10-15장의 내용입니다. 이 사건 이후로 바울과 바나바가 최초로 이방인 선교를 위해 안디옥으로 파송되잖아요.
즉, 먹는다는 말은 교제한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친구 먹는다 정도가 아니라, 성도로서 연합한다는 뜻입니다. 다니엘이 먹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느부갓네살이 주는 음식은 하나님의 율법으로 금한 것들입니다. 그 보다 앞서, 그것은, 즉,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바벨론과 연합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금하시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살지만, 바벨론과 연합하지 말고, 구별되어 살라는 뜻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즉, 여기서 방점은 교제에 있습니다. 우리가 불신자들과 어느 범위까지 교제할 수 있느냐입니다.
분명한 것은 원수처럼 지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이 불신자든, 이교도든, 즉, 다른 우상을 섬기고 있든, 그들은 이웃입니다. 친구로 지내고, 될 수 있으면 평화하도록 해야 합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18)
평화를 위해서라면 수고하는 것도 감수하고 손해 보는 것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연합은 다른 문제입니다. 연합이라는 말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 불신자와의 연합은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친구를 사귀는 문제에 있어서 좋은 친구가 되어 줄 수는 있지만, 그로부터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 사귐은 괜찮은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나쁜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한다면, 그 사귐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그 친구와 함께 있으면 이성을 가까이 하게 되고,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문화가 있는 장소로 가게 되고, 죄 짓는 것이 아무 문제 안 되는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된다고 하면, 그 관계는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성이 타락한 사람들입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죄 짓는 것이 더 편합니다. 원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기 위해 만들어 졌지만,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가깝기는커녕,
죄와 더 가까운 것입니다. 따라서 죄와 동떨어지는 것이 상책입니다. 우리 본성은 죄와 가까울 때, 더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이성 친구는 말할 것도 없죠? 결혼하는 문제에 있어서 불신자와의 결혼은 엄격히 금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 다닌다고 해도 그 신앙을 현격하게 떨어뜨리는 사람이라면 결혼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에 도움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교인이라고 해도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사귐은 깊이 고려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직장 동료간의 문제도 결국 연합할 수 있느냐...이 문제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같이 일을 할 수는 있겠지만, 깊은 것을 나눌 관계는 가질 수 없는 것이죠? 그 사람이 나에게 나쁜 영향, 말씀을 멀리 하도록 영향을 미친다고 할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고립되라는 말이 아니라, 교제는 하되, 영향을 받지 말라는 말입니다.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앞으로 계속 살펴볼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뜻은 성도가 세상을 주관하는 것이다(10-16절)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하나님의 뜻은 성도가 세상을 주관하며 사는 것이다..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시면,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희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같은 또래의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가 보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때문에 내 머리가왕 앞에서 위태롭게 되리라 하니라
환관장의 우려는 지당한 것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니엘이 바벨론의 그늘아래에서 은혜를 맛보고,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바벨론에 충성 봉사하는 모범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느부갓네살의 은혜를 뼛속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한낱 포로 신분의 소년일 뿐인 그에게 최상의 거처와 음식과 학업을 제공하는 느부갓네살의 은혜에 탄복해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도록 임무를 부여 받은 환관장이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소년들의 몸이 축난다? 그러면 느부갓네살의 은혜를 논할 수도 없고 오히려 학대한 것이 아닐까...은혜에 감사하기는커녕, 원망하는 마음만 커진 것 아닌가...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왕의 뜻에 완전히 반하는 행동입니다. 느부갓네살은 그러한 행동을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즉, 환관장은 다니엘의 종교적 신념이 자신의 생명까지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거절당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이방나라의 포로로 잡혀 왔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는 하지만, 그곳에 동화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환관장이 감독자로 세운 사람에게 찾아갑니다. 11절,
환관장이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자에게 다니엘이 말하되
어찌 환관장만 두렵고 무서웠겠습니까? 다니엘이라고 한들, 내적인 갈등이 없었을까요? 다니엘도 무서웠을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포기를 하지 않죠? 환관장이 안된다고..그것은 너무나 위험한 시도라고 하였지만, 다니엘은 환관장의 부하에게 다시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물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겠지만,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 운명이라 생각하면서 시류의 흐름에 따라 적당히 타협하며 흘러흘러 가겠지만, 그래도 믿음이 있는 사람, 말씀에 따라 살고 싶은 사람은 한 번쯤 시도해 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책임자를 찾아가서,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섬기는 교회, 내가 믿는 바는 이러이러 하니까, 신앙생활 잘 할 수 있게 좀 도와주십시오. 다른 부분에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오케이! 알겠어. 그렇게 하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을 때가 더 많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쉽게 포기하게 되는 것이죠? 물론 월급이 달려 있고, 직급이 달려 있는 직장과 목숨을 내 걸고 있는 다니엘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다니엘은 어떻게 보면 목숨을 걸고서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보기에는...그렇지만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삶에서 가장 큰 가치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돈이 자기 삶에서 가장 큰 가치다..그러면 돈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신앙을 포기하죠? 직장이 가장 큰 가치다...그러면 직장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목숨이 가장 큰 가치다...그러면 목숨을 포기해 가면서 까지 신앙생활 할 필요가 있겠나? 생각하겠죠? 다니엘은 목숨보다 신앙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숨을 내 던질 각오로 찾아가고,
또 찾아가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독자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다니엘이 잘 설득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설득을 시도하지만, 그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12절,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이어서 13절을 보시면,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당신이 보는 대로 종들에게 행하소서 하매
상식적으로 사람이 채소와 물만 먹어서는 건강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소도 아니고, 사람이 어떻게 채소만 먹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감독자로서는 그들의 부탁을 들어줄 수가 없는 것이죠? 잘못해서 몸이 상하기라도 한다면, 그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로 돌아올 테니까 말이죠?
다니엘은 그래서 지혜롭게 접근하는 것입니다. 10일 동안만 시험해 보아라. 10일 동안 채소만 먹어서 건강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면 그러면 내가 굴복하겠다. 율법에서 금한 부정한 음식이든, 우상에게 드려진 더러운 것이든 먹겠다. 그 감독자가 해볼만한 제안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때 그 감독자의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 감독자는 다니엘이 제안한 대로 열흘 동안 채식만 주었습니다. 14절,
그가 그들의 말을 따라 열흘 동안 시험하더니
채식만 먹었지만, 다니엘과 친구들의 얼굴은 왕의 진미를 먹은 소년들에 비해 더욱 아름다웠고, 살이 윤택하게 되었습니다. 15절,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결국 무엇을 보여줍니까?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포로로 잡혔고, 그들의 그늘에 목숨을 의탁하고 있지만, 결국 누가 그들을 먹여 살립니까? 하나님이 먹여 살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하는 것을 다니엘과 그 세친구가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그렇게 살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순종을 통해 그런 귀한 교훈을 전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앙, 부정한 음식을 먹지 말라는 말씀을 지킬 수 있었고,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명령, 비록 이방인들의 무지로 말미암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먹음으로서 간접적으로 범할 수도 있었던 죄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16절,
그리하여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지정된 음식과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느냐? 믿음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죠? 처음 한 번은 시험 삼아 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좌절될 때, 일반적으로 쉽게 굴복한다는 말입니다. 비상식적인 결과를 기대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도박하듯이 내놓기는 쉽지 않은 것입니다. 즉, 쉽게 시류에 굴복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극복하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끄는대로, 그것이 신앙을 헤치는 것이든,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을 하든, 상관없는 듯이 따라 가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말씀으로 이끌라는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보존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보존에서 정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현상유지된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다스려 나가야 합니다. 세상 임금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이 상황에서 쉽지 않아 보이죠?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참된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시간의 어느 한 순간도, 땅의 어느 한 자락도 주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소유입니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말씀을 붙잡고, 기도의 능력으로 정복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교제도 그것을 위해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인정받아야 하고, 매력적이어야 합니다. "저 사람 하고는 상종하지 말자!" 그런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됩니다. 저 사람하고 친해 지고 싶다. 잘 지내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들도록 우리의 행실을 바르고 정직하게 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고백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그것이잖아요?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까? 우리가 대통령이 되면 됩니까? 어떤 여배우처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요~ 그러면 영광을 받으십니까?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방식은 그것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증거되고, 바벨론이라는 큰 제국의 주인일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드러나고 그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잖아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도 똑 같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은 결국 신앙생활이라고 했잖아요.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를 보십시오. 결국 이들이 한 것이라고는 말씀을 떠올리고 말씀에 순종하고자 한 것 뿐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얻게 하시고, 지혜를 주시고, 나중에는 나라의 둘째 치리자가 되는데, 누가 그렇게 해 주십니까? 하나님께서 해 주시잖아요.
내 개인이 행복하게 살라고, 출세하고 명성을 얻으라고 그렇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 하시며 이김을 주십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말씀이죠? 그 말씀이 가르쳐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에서는 레위기11장이었지만, 그것은 세상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구별되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고 세상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정복하고 다스리는 사명을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