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루르드 Lourdes 벨라뎃다(Bernadette) 성녀 - 4월 16일 의 발자취를 따라 벨라뎃다 성녀의 삶을 소개합니다. 루르드는 프랑스 남부, 피레네산 기슭에 있는 인구 약 1만 7,000명의 마을이다. 1858년 2월 11일, 이곳 가브 강가에 있는 동굴에 성모 마리아가 발현하셨다. 벨라뎃다 수비르라는 한 가냘픈, 그러나 마음씨 곱고 효성스러우며 신앙심 깊은 소녀 앞에 비길 데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11일부터, 14일, 18일, 19일, 20일, 21일, 23일등 발현은 계속되었으며,열 한번 째 발현 때 이곳에 성당을 세우라는 말씀이 있었다. 25일에는 발현하신 자리에 샘이 솟았는데, 28일에 눈병을 앓던 남자가 그 샘물로 눈을 씻자, 당장에 깨끗이 나았다. 7월16일에 열여덟번째의 마지막 발현이 있었는데, 샘물이 잇달아 기적을 나타냈다. ■ 성모 발현 벨라뎃다가 11-12세 무렵 집안이 기울어 땔감을 구하러 개울을 건너려고 신발을 벗는데, 갑자기 심한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에 놀라 두리번거리자, 동굴 입구에 있는 찔레와 들풀이 크게 흔들리는 것 같더니, 동굴 속에서 황금빛 구름이 피어 오르면서, 젊고 아름다운 귀부인의 모습이 똑똑히 떠올랐다. 귀부인은 새하얗고 헐렁한 옷을 입고, 머리에서 어깨에 걸쳐서 흰 베일을 쓰고, 옥색 띠를 매고 있었다. 오른쪽 손목에는, 금빛사슬에, 커다란 흰 구슬이 꿰인 로사리오를 늘어뜨리고, 그녀에게 아름다운 미소를 던졌다. 벨라뎃다가 열심히 로사리오를 굴리며 기도를 하자, 귀부인도 로사리오를 하나씩 굴렸다. 로사리오의 기도를 외고 있을 때, 귀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 발현 기간 동안 성모 마리아는 매번 벨라뎃다에게 메시지를 전하셨다. 8일째인 2월 24일 수요일에 "회개하시오. 죄인을 위해 기도하시오. 죄인의 회개를 위한 상징으로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추시오"라는 메시지를 전하였고, 그 다음 날에는 손가락으로 샘물의 원천을 가리키며 그 물을 마시고 씻도록 하였다. 13일째인 3월 2일 화요일에는 "사제들에게 전해 이 곳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 오게 하고, 이곳에 성당을 짓게 하시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 이야기는 곧 여러 사람에게 알려져 이 '동굴의 여인'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기적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자 곧 사람들은 흩어져 갔다. 3월 25일 목요일 아침, 벨다뎃다가 다시 동굴로 갔을 때 성모 마리아를 볼 수 있었 는데, 그때까지 네 번에 걸쳐 반복된 질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던 이 성모마리아는 열 여섯 번째의 발현 때 그녀에게 고했다. (Immaculata Counceptio)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다." 라고 처음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벨라뎃다는 곧바로 마을의 주임 신부에게 보고하였다. 이 발현이 있기 4년 전인 1854년에 이미 당시의 교황 비오 9세는 동정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믿을 교리로 발표하였으나, 일반 신자 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로써 벨라뎃다는 전세계에 루드르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녀의 전령자가 된 것이다. 이후 그녀는 4월 7일 수요일과 7월 16일 금요일에 다시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볼 수 있었는데, 4월 7일에는 촛불이 벨라뎃다의 손가락에서 오랫동안 탔지만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기적이 있었고, 이 일은 7월 16일에 다시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 7월16일 발현에 대해서는 그녀가 자세하게 언급하기를 회피하여 아직까지 비밀로 되어있다. 이러한 그녀의 증언, 기도와 회개를 통해 1862년 1월 18일 발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로랑스 주교는 교구 신자들에게 '루드르 동굴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을 허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모 마리아의 소망에 응답하기 위한 성당을 동굴 위에 건립할 것을 발표하였다. 이로 인해 성직자를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벨라 뎃다와 동굴을 보기 위하여 루드르에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루르드에는 1868년 5월에 첫 번째 지하성당이, 이어서 제2, 제3의 성당이 차례로 세워졌다. 이때는 교황 비오 9세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반포한지 4년째 되는 해였는데,19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 사상의 팽배로 지식층이 교회의 가르침을 불신하고 속속 교회를 떠나는 경향이 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모 마리아는 흰옷에 푸른색 허리띠를 두르고 오른팔에 묵주를 늘어뜨리고 양손을 가슴에 모은 모습으로 발현하셨는데 성모님은 자신을 ’원죄 없는 잉태된 자’(Immaculata Conceptio) 라고 밝히면서 '기도와 보속, 회개'를 촉구하셨으며 특히 묵주 기도를 권하셨습니다. 그 후 매년 수백만 명의 순례자가 루르드를 방문하였고 기적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성모님께서 벨라뎃다 성녀에게 땅을 파 보라고 했던 자리에서는 기적수가 나와 그것이 시내물을 이루어 많은 이가 영적, 육체적 치유를 받았다. 가난하고, 소박한 방아간의 딸로, 문자도 모르는 소박한 시골 소녀인 벨라뎃다 성녀는 연약하면서도 강인하고, 고통을 겪으면서도 유머에 넘쳤고, 겸손하면서도 당당했던 삶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1858년 2월 11일 성모님의 첫 발현을 목격하고 1862년 1월 18일 발현을 인정받고, 느베 애덕 자매회에서 13년의 수도회 삶을 살았다. 어린시절 빈곤한 삶으로 인해 건강이 나빴던 벨라뎃다 성녀는 1879년 4월 16일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평범한 일상 속에서 기도와 침묵으로 보속, 회개, 그리고 그녀가 특별히 불림을 받았던 청빈이라는 메시지의 삶을 살았으며 1933년 12월 8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 프랑스의 루르드, 벨라뎃다 성녀의 발자취를 다시 따라가본다. 성녀가 선종한 후 묘지를 옮기려고 관을 열었을 때 전혀 부패되지 않고 보존된 성녀의 시신. 오늘날까지 성녀의 시신은 수도생활을 하던 성당에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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