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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당 내용 소개하는 공식 홈페이지
서울시 도보관광 - 코스소개 - 서울로 7017(한양에서 서울로)
http://korean.visitseoul.net/walking-tour/%20%20%20-7017-%20%20%20%20-%20%20%20_/21470?curPage=1
서울시 해당 페이지 내용
코스소개 : 성곽도시 한양에서 천만도시 서울까지 600년 시간 여행
사람중심 초록보행길로 재탄생 한 서울로7017을 걸으며 조선시대 한양에서 서울로 거듭나기까지의 도시의 변화를 만나 볼 수 있는 코스입니다. 한양의 관문이었던 숭례문과 한양도성을 따라 걸으며 근대도시의 관문을 넘어 세계도시의 관문이 될 서울역을 동시에 조망하고, 조선 600년부터 지금까지 진보와 퇴보를 거듭하며 걷기 좋은 도시 공간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도보코스 :
문화역서울284-서울로7017-세브란스빌딩-숭례문-한양도성-백범광장-안중근기념관-삼순이계단-
회현 시범아파트-남산육교-회현역 5번출구
소요시간 : 2시간30분
만남장소 : 서울역 2번출구 (1호선)
코스내 주요 관광 명소
1. 서울로 7017
서울로7017은 1970년에 지어진 고가도로를 사람길로 바꾸는 프로젝트입니다.
2015년 안전등급 D등급을 받고 철거의 위기에 놓였지만 시민들에게 편리한 보행길을 제공하는 서울로로 재탄생하게 되었습니다. 70년에 지어져 17년에 재탄생 했다는 의미로 7017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17에는 17개의 사람길이라는 뜻도 포함됩니다. 645개의 화분과 24,085 그루의 꽃과 나무로 가득 채워진 자연과 소통의 초록보행길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2. 문화역 서울 284
우리나라 철도역사와 근대문화가 공존한 문화역서울284는
1900년 서울 도심까지 철로가 연결되면서 1925년 경성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서양식으로 지어진 역사 내부는 매표소, 대합실 뿐만 아니라 커피와 서양음식을 접할 수 있는 장소로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1947년 ‘서울역’으로 이름이 변경되었으며 현재는 (구)서울역사로 사적 제284호로 지정되었으며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3. 숭례문
한양도성의 남쪽문이자 정문의 역할을 했던 숭례문은 서울에 남아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 된 건축물로 인정받아 1962년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08년에 화재로 2층 누각의 대부분과, 1층 누각의 일부가 소실되어 이후 약 5년간의 복원공사를 통해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 될 수 있었습니다.
4. 한양도성
한양도성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입니다. 태조 때 특별한 기술없디 돌을 쌓는 방식으로 처음 세워지고 이후 세종, 숙종, 순조를 거치며 기술이 발달하여 돌을 깍아 쌓게 되어 지금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성곽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후 코스에 대한 소개글이 없음.
* 동영상
서울로 7017-한양에서 서울로 -
역사코스,
사람중심의 초록보행길로 재탄생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변화된 서울
변화를 거듭한 도시공간
도심속 역사와 위인을 만나는 여행
골목마다 숨겨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서울로 역사탐방코스
2. 서울로 7017 관련광고
네이버로 서울로 7017로 검색하면 해당 광고 페이지가 뜬다.
찻길에서 사람길로
서울로 7017
서울역 고가의 안전성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추진된 '서울로 7017'
서울역 일대를 17개 보행길로 그물망처럼 연결한 '서울로 7017'
서울역 고가가 찻길에서 사람길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서울로 7017>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1) 노후화된 서울역 고가(1970년 완공)의 안전성문제
2006.12 정밀안전진단 안전성 평가 D 판정
2008.05 서울역 북부역세권과 연계 대체교량 설치
2009.12 서울역 고가는 북부역세권과 연계 철거 추진
2014.01 교량안전성 문제제기(바닥판 콘크리트 탈락)
2014.02 서울역 고가차도 조기 철거 검토
2) 서울역 주변지역의 쇠퇴와 고립
서울역 주변은
통행이 불편하고
지역이 쇠퇴하고 있으며
문화가 단절되어 있습니다.
3) 끊느니 보행길로 재활용
서울시는 서울역고가 차도 활용 방안을 검토하기 위해 수차례 시민 의견을 듣고, 세계의 도시들은 노후화된 시설 및 지역을 어떻게 개선하고 있는지 검토하였지요.
세계는 지금 도시재생과 사람 중심의 시대-도시재생과 보행우선으로의 변화
2009년 뉴욕, High Line Park
2.33km 고가 화물노선(도심철도)을 공원으로 재이용
면적 28,600 제곱미터
프랑스의 프롬나데 플랑떼(Promenade Plantee, 1993년)를 모델로 설계
공원이 조성되면서 유명건축가들의 빌딩과 휘트니 미술관이 들어서는 등 각종 문화시설이 유입
이로 인한 주변 부동산 개발 및 상권활성화
조성전(2003년)과 비교, 2013년 가치
도보 5분이내 가치증가 103%
일자리 창출 12,000천개
2011년 파리, Promenade du Paillon
니스 빠이용 강 상부 도로복개구간에 설치된 소규모 공연장과 시외버스 터미널 등을 철거하고
공원으로 재이용(1.2킬로미터, 120,600 제곱미터)
도시 주요시설(레저, 광장, 극장, 도서관 등)과 인접
시민들에게 편리한 이동통로와 도심속 거대 녹지공간을 제공
구도심과 신도심을 연계, 주변 재정비사업 시작점
마세나 광장 앞 분수대, 산책을 위한 숲, 어린이들의 놀이 공간 등 3구역으로 조성
조성전(2011년)과 비교, 2013년 가치증가 20%
2002년 일본 요코하마, 개항의 길
1911년 개통되어 1985년까지 사용된 철로를 재활용하여 해안선을 따라 걷는 산책로로 조성
사쿠라 기초역에서 야마시타 공원까지 약 3.2킬로미터의 보행전용 산책로
산책로변 공원조성 및 1911년에 건축된 창고를 쇼핑센터, 음식점 등으로 재개장
요코하마 항만 지역의 주요 관광명소 및 유적들을 연결
<서울로 7017>도 그러한 관점에서 준비되었습니다.
서울형 도심재생
'서울형 도심재싱'은 모두 헐고 새로 짓는 획일적 철거 및 재개발 방식에서 벗어나 맞춤형 정비를 지향하고,
단순히 건물이나 공간을 바꾸는 단기 물리적 성과보다는 지속성 있는 동력 형성에 주력하는 것입니다.
도시재생정책
예) 한양도성을 22개 성곽마을로 재생하는 것
세운상가 일대를 복원하여 종묘부터 남산까지 잇는 보행 중심축을 복원하는 것(2019년 예정)
: 북한산 종묘 세운상가 남산 용산공원 한강 잇는 길
보행 친화 도시
'보행친화도시'는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 인도를 정비하고, 보행 전용거리 및 보행자 우선도로 확대,
지난 해 선보인 '자꾸 걷고 싶은 거리 경의선 숲길' 등을 통해 사람이 걷기 좋은 도시를 구현하는 것이지요.
<서울로 7017>은
단순한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쇠퇴한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고,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서울로 7017은 서울역 7017 프로젝트의 새로운 이름
1970년에 만들어진 서울역 고가도로를 2017년 17개의 보행길로 연결
서울로는 서울을 대표하는 사람길이자, 서울로 향하는 이란 중의적 의미
서울로 7017의 디자인은 기분좋게 웃고 있는 곡선형 로고 안에 걷고 있는 사람의 발 모양을 형상화
누구에게나 쉽고 친근하게 다가가면서, 차량길에서 사람길로 변화하는 모습을 직관적으로 보여줌
서울로 7017을 통해
서울역 남대문시장 명동 남산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관광 코스가 조성되어 새로운 명소로 재탄생될 예정입니다.
17개의 사람길로 연결되는 도보관광 네트워크
서울역 주변 역사 문화 쇼핑을 연결하는 새로운 도보관광
A. 퇴계로 주변
1) 남대문 시장
2) 회현동
3) 남산
4) 힐튼호텔
5) 숭례문
B. 한강대로 주변
6) GS 빌딩
7) 연세빌딩
8) 서울스퀘어 빌딩
9) 지하철
10) 버스환승센터
C. 서울역광장
11) 서울역 광장
D. 북부역세권
12) 국제회의장
13) 공항터미널
16) 중림동
17) 서소문공원
E. 만리동
15) 만리동
F. 청파동 램프
14) 청파동
뿐만아니라, 서울시는 도시재생촉진을 위해 남대문 시장 및 퇴계로를 활성화하고, 대중교통 버스노선확충, 봉제 등 토착산업을 활성화하는 등 낙후지역의 도시재생안도 마련했습니다.
보행인구가 증가하고 주변상권이 재도약하며 새로운 녹지축이 될 서울로 7017
결국 서울로 7017은 단순히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쇠퇴한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고,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지요.
도시재생 촉진을 위한 지원사업
1) 남대문시장 종합발전 방안 수립
2) 퇴계로 활성화- 퇴계로 도로 다이어트
3) 대중교통 버스노선 확충
4) 낙후지역 도시재생(중림동 만리동 등)
5) 북부역세권 활성화 지원
차량길에서 사람길로 새로 태어난
섬처럼 고립되었던 서울역 일대를 총 17개의 보행길로 연결한 서울로 7017
(2017년 5월 20일
3. 코스 살펴보기
문화역 서울 284
1900년 경인선 개설
1905년 1월 1일 경부선 개통
1905년 남대문역 개설
1925년 경성역 신축건물 시대로
서양식으로 지어진 역사 내부
매표소, 대합실, 경양식집 -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집합소
1947년 ‘서울역’으로
(구)서울역사 : 사적 제284호로 지정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중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서울역 고가도로 개축이 무산되었다.
그 이유는 문화재 주변경관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개발 우선시대의 서울
김현옥 서울시장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서울시장
서울지하철과 강남개발등의 밑그림을 완성하다.
1970년 4월 8일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 - 이 사고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다
1967년 무허가 건물 136,650동에 대한 양성화 계획 발표
일부 보조금 지급, 나머지 9만가구에 대한 시민 아파트 건설계획 발표
시민아파트 건설 계획
1969~1971, 2000동 9만가구 건설목표
재정문제로 서울시는 골조 공사만 진행
나머지 내부 공사는 입주자가 직접하기로
1971년의 한국사
3월 유일한 선생 사망
8월 광주대단지 사건, (여기서 광주는 현재의 성남시가 되었다)
만리동 : 만리현, 최만리, 일본인 공동묘지
중림동 : 약현, 약현성당, 서소문 밖 장, 칠패시장
염창동 수제화 거리
봉래동
무작정 상경
알쓸신잡 2에서 서울을 소개하면서,
서울과 영자의 전성시대를 연결해서 이야기하였다.
즉 현재의 서울을 이주민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영화속 영자처럼 무작정 상경한 시골출신들이 서울에
첫걸음을 뗀 곳이 이곳 서울역이다.
서울로7017-
1970년에 지어진 고가도로를 사람길로 바꾸는 프로젝트다.
2015년 안전등급 D등급 - 철거예정
2017년 시빈들의 보행을 위한 서울로로 재탄생
17개의 사람길이라는 뜻도 포함
645개의 화분과 24,085 그루의 꽃과 나무
세브란스빌딩-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하면서 조선의 근대화 구상의 하나로 의료 근대화 계획
1884년 갑신정변 중 다친 민영환을 치료한 미국의 선교자이자 의사였던 알렌의 이야기
재동의 제중원 시절
1885년 음력 2월 29일 재동(현 헌법재판소 자리)에 광혜원 설립
1885년 음력 3월 12일 제중원으로 이름을 변경
1885년 6월 21일 알렌의 집에서 미국인 선교사들 중심의 종교활동이 시작되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도 이 그룹의 일원이었다.
후에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를 세우며 분리되었고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 조선에 입국
자신의 정동집에서 예배를 시작하다.
1887년 9월 27일 돈의문 안쪽에서 14명의 신자로 새문안교회를 설립하다
아펜젤러는 정동제일교회를 세우면 독립하였다.
1885년 4월 5일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조선에 입국
1885년 8월 3일 배재학당 개교
1885년 10월 11일 자신의 정동집에서 예배 시작
1887년 9월 예배용 건물 마련해서 사용 시작.
Bethel chapel 로 교회 역사 본격 시작
동현(구리개)의 제중원 시절
1886년 10월 ~11월 동현(구리개, 지금의 을지로)으로 제중원 이전
재동에서의 병원 영업이 너무 성황이어서 넓은 건물이 필요해서
조선 정부는 왕실 소유의 땅이었던 구리개의 땅을 주어 이전케 했다.
1894년 갑오개혁과 제중원
6월 갑오개혁으로 제중원을 위생국으로 흡수
7월 18일에는 내무아문으로 이관 관리했다.
그러나 관리들의 부패로 제대로 운영이 되지 않았다.
이에 미 선교사 들은 고종에 쇄신을 건의
고종은 제중원의 경영권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하였다.
1904년 도동(현재 연세빌딩 자리) 세브란스 병원의 시대
새 병원 설립, 공사 기간 : 1902~1904.9
미국인 세브란스의 후원으로 병원이 세워졌다.
1939년 일제에 의한 선교사 입국 금지령이전까지 지속적인 미국인 선교사들의 지원이 있었다
선교사 알렌(Allen,H.N., 安連)
헤론(Heron,J.W., 惠論) 부부
의사 스크랜턴(Scranton,W.B.)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Underwood,H.G., 元杜尤)
에비슨(Avison,O.R., 魚丕信)
세브란스(Severance,L.H.)
1904년 남대문 밖 교회라는 이름으로 함께 이전해오다
1910년 세브란스의 지원으로 새 교회 건물을 준공하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남대문 교회 사람들
이갑성(李甲成)- 33인중 1인
함태영(咸台永) 등
- 3년 이상의 옥고를 치렀다. 특히 이갑성은 청년대표로 33인에 참가하였다.
손병희(孫秉熙)·길선주(吉善宙)·이필주(李弼柱)·백용성(白龍城)·김완규(金完圭)·
김병조(金秉祚)·김창준(金昌俊)·권동진(權東鎭)·권병덕(權秉悳)·나용환(羅龍煥)·
나인협(羅仁協)·양전백(梁甸白)·양한묵(梁漢默)·유여대(劉如大)·이갑성(李甲成)·
이명룡(李明龍)·이승훈(李昇薰)·이종훈(李鍾勳)·이종일(李鍾一)·임예환(林禮煥)·
박준승(朴準承)·박희도(朴熙道)·박동완(朴東完)·신홍식(申洪植)·신석구(申錫九)·
오세창(吳世昌)·오화영(吳華英)·정춘수(鄭春洙)·최성모(崔聖模)·최린(崔麟)·
한용운(韓龍雲)·홍병기(洪秉箕)·홍기조(洪基兆)
[네이버 지식백과] 민족대표 33인 [民族代表三十三人] (한국근현대사사전, 2005. 9. 10., 가람기획) ---------------------- .
[네이버 지식백과] 이갑성 [李甲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886년 ~ 1981년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연당(硏堂). 경상북도 대구 출신.
1915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최연소자로 청년층을 대표하여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민족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의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태화관(泰和館)을 중심으로 한 민족대표의 서명운동과 전단 살포의 중책을 맡아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6년 YMCA의 이사를 맡아 청년들을 지도하였으며, 1931년 경성공업(京城工業)의 지배인을 지냈다. 같은 해 신간회사건(新幹會事件)으로 상해(上海)로 망명했다가, 귀국한 뒤 1940년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체포되어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 회장을 지냈으며, 1947년 김규식(金奎植) 등과 협력해 과도입법의원의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당선했고, 1952년 국민회(國民會)의 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1953년 자유당 최고위원에 임명되었고, 33인유족회장·국산부흥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위원을 지냈고, 1965년 광복회장, 이준열사기념사업회(李儁烈士記念事業會) 총재를 맡았다. 삼일동지회(三一同志會) 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80세 이후에는 민족대표 33인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해마다 거행되는 3·1기념행사에 참석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
남대문 교회 : 1924년 12월, 제3대 목사로 취임한 김익두(金益斗)는 유명한 부흥설교가로서 교회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나 이단시비로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또한 1934년에 취임한 김영주(金英珠)는 ‘창세기 모세 저작설 부인사건’을 일으켜 총회에서 이단여부를 조사받기도 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말기에 신사참배와 조선혁신교단의 설립으로 한국교회가 위기에 처하자, 혁신교단의 의장인 전필순(全弼淳)의 제명을 요구하는 등 강력히 저항하였다.
1944년에는 김치선(金致善)이 제6대 목사로 부임하여 1953년까지 시무하면서 ‘삼백만 부흥운동’을 전개하였고, 현 대한신학교의 전신인 야간신학원도 설립하였다. 6·25전쟁 때에는 교회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수복 후 재건되었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당시 집사이던 박태선(朴泰善)의 신앙노선에 문제가 제기되어 이단시비를 불러일으켰다.
1954년 9월에는 미국에서 독립운동과 한인교회활동을 벌이던 김태묵(金泰默)이 부임하여 교회당 건축에 힘을 기울였고, 1957년부터 1979년까지는 배명준(裵明俊)이 제8대 목사로 부임하여 교회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박정찬 이후 2013년 현재 손윤탁 목사에 이르기까지 13명의 한국인 목사들이 이끌어 온 이 교회는 교회의 대형화에 강조를 두기보다는 새 교회개척에 심혈을 기울여 공덕(孔德)·행화정(杏花亭)·삼판통·청량리중앙교회·해방촌교회를 세웠으며, 최근에는 맹인교회인 애능중앙교회를 설립하였다.
1979년에는 교회의 역사를 정리한 『남대문교회사』를 편찬하였고, 1987년에는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대문교회 [南大門敎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유일한 박사, 유한양행 주식 일부를 세브란스 병원에 기증하다
-- 세브란스 병원의 재정건전성 강화에 도움
숭례문-
일명 남대문
서울에 남아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 된 건축물로 인정받아
1962년 국보 제1호로 지정
2008년 화재로 2층 누각의 대부분과, 1층 누각의 일부가 소실
약 5년간 복원공사
1398년 2월 숭례문 문루 완성
1447년 개축공사
1479년 개축공사
2005년 5월 숭례문 광장 조성
2006년 3월 3일 숭례문 광장 일반에 개방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방화사건
복원 : 2010.2~2013.5.4
한양도성-
태조대의 한양도성
1395년 윤 9월 도성 축성을 결정하다
1396년 1월 9일 ~2월 28일, 1차 도성공사
59500척, 공사 실명 책임제, 97개 구간
공사인원 11만 8천여명
1396.8.6~9.24 2차 축성 공사
8.13 신덕왕후 강씨 사망, 태조는 공사에 거의 개입하지 못함.
1397.1 축성공사
1398.2 남대문 문루 완성
세종대의 한양도성
20여년의 기간동안 무너진 성곽을 수리하다.
토성을 석성으로 바꾸다
1421년 10월 13일 도성수축도감을 만들다
수리구간 약 28,000여척, 공사기간 40일, 인원 약 32만명
1422년 1월 14일 백악산신과 목멱산신에 제사
1422.1.15~2.23. 사망자 872명. 사망률 0.27%
성곽높이 16~23척
문종대의 수리 1451.2.25~3.17 - 기간에 대한 확인 필요.
세조 연산군 광해군 인조대에도 부분적인 성곽에 대한 수축 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대의 한양도성
양란 이후의 국방의식 강화를 목적으로.
1704.3월~1709년
군인들을 중심으로 공사를 진행. 약 5년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다.
돌은 정릉 근처 청수동에서 채석
사방 2척의 정방형 석재를 사용
순조대의 한양도성
일제강점기의 한양도성
1907년 숭례문이 폐쇄되다.
1975년의 한양도성복원
1968.1.21 북한 무장 공비 침투 사건 - 일명 김신조 사태
국방의식고취를 목적
백범광장-
원래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있던 곳
4·19혁명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허물었다.
1968년 8월 백범광장을 만들면서 김구 선생의 동상을 세웠다.
공원 내에는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의 기마상이 있고 이시영(李始榮) 선생 동상이 있다.
백범김구기념관 자료실[白凡金九紀念館資料室 ]
설립일 2002. 10. 22.
서울시 용산구 백범 김구기념관 자료실은
백범 김구 선생(1876.8.29 ~ 1949.6.26)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관한 문헌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도서관이다.
1949년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백범 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를 설립하였고,
1969년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과 백범 광장을 건립하였다.
1999년 백범기념관을 설립하기 위한 위원회가 발족되고 모금운동을 통해 2000년 6월 착공하여, 2002년 10월 준공하였다.
전체 시설 규모는 대지면적 1만 8,364㎡, 건축면적 9,683㎡로, 지상 2층 전시관 및 컨벤션센터를 갖춘 건물이다. 주요 내부시설로는 제1,2전시관, 컨벤션홀, 대회의실, 제1,2교육장, 백범광장, 백범 김구선생 묘소, 이봉창 의사 동상 등이 있다.
이곳 자료실의 소장 도서로는 백범 김구 선생과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다양한 자료들을 보유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범김구기념관 자료실 [白凡金九紀念館資料室]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 도서관, 굿모닝미디어)
1876년 출생
1890년 한학을 배우다
1893년 동학에 입교하다
1895년 동학농민운동을 하다 만주로 피신하여 의병이 되다
1896년 일본인 살해혐의로 고향 해주에서 체포되다
인천감옥에 수감, 사형 선고, 고종의 특사로 감형
1898년 탈옥, 마곡사의 승려가 되다
1899년 환속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재직중, 신민회에 가입하다
1911년 안악사건으로 체포, 15년형을 선고받다.
복역중 인천 항만 건설공사 노역을 하다
1915년 감형을 받아, 출옥하다
출옥후 농촌계몽운동에 나서다.
1919년 3.1운동후 상해로 망명
1928년 한국 독립당을 조직
1932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5년 한국 국민당 조직
1940년 한국독립당 조직 - 민족주의 진영
1944년 4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재 선임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안두희에게 암살
이시영[李始榮 ]
1869(고종 6)∼1953. 독립운동가·정치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흡(聖翕), 호는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 서울 출신.
아버지는 이조판서 이유승(李裕承)이며, 어머니는 동래정씨(東萊鄭氏)이다.
첫 부인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영의정 김홍집(金弘集)의 딸이며,
두 번째 부인 반남박씨(潘南朴氏)는 박승문(朴勝文)의 딸이다.
1885년(고종 22) 관직에 나아가 10여 년간 형조좌랑·홍문관교리·승정원부승지·궁내부수석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 관직을 물러난 뒤로는 중형 이회영(李會榮)·이상설(李相卨) 등과 근대학문탐구에 몰두하였다.
1905년 외부 교섭국장에 임명되었으나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을 계기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1906년 재차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되었고, 근대학교설립 및 애국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그 뒤 1907년 중추원칙임의관, 1908년 한성재판소장·법부 민사국장·고등법원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동녕(李東寧)·이회영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국권피탈 후 신민회의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에 의거하여 6형제의 가재(家財)를 재원으로 삼아, 1910년말서간도(西間島)유하현(柳河縣)삼원보(三源堡)추가가(鄒家街)로 가족을 거느리고 망명하였다.
1911년 4월 유하현 삼원보 대고산(大孤山)에서 노천군중대회를 개최하여, 교육진흥 및 독립군양성을 표방한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설립을 주도하였다.
경학사 초대사장에는 이상룡(李相龍)이, 신흥강습소 초대교장에는 이동녕이 추대되었다. 1912년 통화현 합니하(通化縣哈泥河)에 토지를 매입하여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확대 발전시켰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는 유하현 고산자로 이전하였고, 합니하의 교사는 분교역할을 하는 등 1910년대 서간도지역 독립군양성의 총본산이 되었다. 특히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 때까지 재만항일독립군의 핵심 간부로 양성된 독립군들은, 청산리대첩의 주역으로 활동하는 등 1920년대 국외독립전쟁의 골간으로 성장하였다.
1913년 9월 북경에서 위안스카이(袁世凱)정부와 한·중연합전선의 결성을 도모하였으나 위안스카이의 사망으로 중단되기도 하였다.
1919년 1월 고종황제의 죽음을 계기로 북경에서 이동녕·조성환(曺成煥)·이광(李光)·이회영 등과 국내 3·1운동에 호응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상해(上海)로부터 북경에 온 여운형(呂運亨)·현순(玄楯)과 논의하고, 이회영·이동녕·이광 등과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초대법무총장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9월 재무총장을 거쳐 1926년 무렵까지 임시정부국무위원으로 재임하였다.
그 뒤 1929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여, 감찰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31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거 때에는 미리 항저우[抗州]로 가서 임시정부요인들의 피신처를 마련하였다.
1933년 중엽 자싱(嘉興)에서 김구(金九)·이동녕·송병조(宋秉祚)·차리석(車利錫)·조완구(趙琬九)·김붕준(金朋濬) 등과 함께 임시정부 활동을 재건하고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었다. 1934년『감시만어(感時漫語)』를 저술하여 한국사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1935년 10월김구 등과 함께 임시정부 지원정당인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여 감사를 맡았다. 1938년 중일전쟁 발발로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동한 이후 임시정부 국무위원·재무부장·의정원의원 등을 역임하며, 광복 직전 임정활동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과 함께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자격으로 환국한 이래 1946년 봄 성균관총재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위원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종교(大倧敎) 활동에 진력하여 사교교질(司敎敎秩)·원로원장·사교(司敎)·도형(道兄) 등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또한, 환국 직후부터 신흥무관학교부활위원회를 조직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 계승과 인재양성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1947년 2월 재단법인 성재학원(省齋學園)을 설립하고, 이후 신흥전문학관(新興專門學館)으로 발전시켜 1·2회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 뒤 한국전쟁으로 일시 침체국면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계승되었다.
한편, 1947년 9월 공직사퇴 성명을 발표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직을 사퇴하였다. 그러나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전횡에 반대하여 1951년 5월 9일 국회에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국정혼란과 사회부패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대국민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승만정부를 떠났다.
이어 1952년 8월 5일 시행된 제2대 대통령선거 때에는 야당인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그 뒤 국민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다가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장례는 9일간의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서울 정릉묘소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수유리 현 묘소로 이장하였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시영 [李始榮]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남산공원 [Namsan Park, 南山公園] (두산백과)
남산(南山:262m)을 중심으로 꾸며진 공원이다.
총면적은 102만 9300㎡으로 서울특별시 공원 중에서 가장 넓다.
처음 세워진 공원은 1897년에 문을 연 왜성대공원(왜 ·倭城大公園)으로,
임진왜란 때 왜병의 주둔지인 것을 일본인들이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당시에 일본인들은 도로를 내고 벚나무 600그루를 심었다.
1908년에는 현재 남산3호터널 부근에 한양공원(漢陽公園)이 조성되었으며, 1910년에는 다시 시민공원으로 개장하였다.
현재 남산공원은 크게 장충지구와 예장지구·회현지구·한남지구로 나뉜다.
회현지구 :
과학교육원과 남산도서관 · 안중근의사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남산 팔각정과 서울타워가 있는 남산 정상까지를 포함하고 있어
남산의 여러 구역 중 가장 넓다.
과학교육원은 1970년 어린이회관 건물로 지어진 것이다.
남산 위에 우뚝 선 서울타워는
본래 종합전파탑이 있던 곳으로 1975년에 건립되었다.
5층의 회전 전망대는
해발 480m의 높이로 서울의 전경을 훤히 볼 수 있으며,
건물 안에 해양수족관과 지구촌민속박물관이 있다.
안중근기념관-
삼순이계단-
회현 시범아파트-
남산육교-
회현역 5번출구
남대문 시장 1608년 남창동 위치에 선혜청 설치 1911.3. 송병준, 조선농업주식회사 설립. 곡물 중심의 농산물을 주로 판매하던 시장 1922년 소유권이 일본인이 운영하는 중앙물산주식회사로 넘어가다. 한국인 점포들이 내쫓겨 나가 염천교 등으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해방이후 남대문 상인 연합회가 관리 하여싿. 한국전쟁으로 시장은 폐허가 되었다. 월남한 피난민들이 자리하였다. 미군 군용원조 물자 등을 판매하는 시장으로 성장하였다. 1958년 남대문 상인연합 번영회에서 시장 운영 1963년 남대문시장 주식회사가 공동출자로 설립되어 시장 운영 1968년 화재로 시장이 피해를 입다. 1975년에도 화재가 있었고 이후, 남대문 시장 현대화 계획을 세워지다. 현재는 의류 중심의 시장으로 운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