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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쓰 프루프>(Death Proof). 감독이 누군지 모르고 봐도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를 떠올릴 수 있는 '타란티노 영화'다. 그가 악동적 기질과 재능이 넘치는 영화꾼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한다. 그의 표정과 눈빛에서 느껴지듯 이번에도 '이봐, 내가 재미있는 거 하나 보여줄께'하는 것 같다.
영화 시작부터 장난끼가 넘쳐난다. "지금 볼 영화는 R등급이다"라고 선언하며 시작한다. 한국에서는 '청소년 관람불가'라는데, 미국에서는 열일곱살이 안 되도 부모 손잡고 오면 보여줬을까. 등급판정을 받기도 전에 타란티노가 먼저 '이 정도는 걔들도 볼 수 있어'라고 선수치는 것 아닌가 싶다.
영화가 시작된 처음에는 화면이 잘못된 줄 알았다. 화면에 비가 내리고 필름이 끊겨 몇 장면을 빼먹고 이어지는 듯한 편집이라니. 옛날 삼류극장에 앉아 영화를 보는 느낌을 관객에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7,80년대를 풍미했음직한(90년대 나온 곡도 있다) 음악이 영화 전체를 채움으로써 그런 의도는 완성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또 다른 주인공인 자동차들은 70년대 중반까지 미국에서 '힘센 괴력을 가진 차'로 미국에서 잘 팔리던 차란다. 'Muscle Car'라 불리는 고출력 성능의 이 차들이 스크린 속을 마구잡이로 질주하고 서로 치고 받는다. 마치 배우들을 대신해 이들이 연기하는 느낌이 든다.
영화의 줄거리 역시 단순하다. 살인마가 등장하고 그에 희생되는 미녀가 등장한다, 좀 많이. 자동차가 중심적인 소재가 된다는 게 특이하다 할까, 살인이 일어나고 살인자가 미소짓고 다시.... 이 영화에서 압권은 자동차 충돌 장면이다. 상당히 공을 들여 찍었는데, 참혹한 순간을 일일이 묘사하는 그 진지함에 '그래, 너 타란티노다'하게 된다.
뭔가 숨겨진 사실이 있는 복잡한 이야기 구조 같은 거 없이 영화는 볼거리에 충실하다. 경쾌한 음악, 쭉 빠진 미녀, 질주하는 자동차. 전작 <킬빌>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낭만주의적 비장함 같은 걸 기대한다면 영화를 안 보는 게 좋다. 감독이 이번 영화에서 추구한 건 통쾌함 같은 거 아닐까 한다. 오락적 쾌감.
그럼에도 후반부에 미녀들의 수다가 장황해 지루한 느낌을 준다. '뭐 이런 걸 길게 늘어놨어. 빨리 뭔가를 보여봐.'하는 불평이 나올 즈음에 폭발적인 자동차 질주씬이 시작된다. 이것 역시 감독의 수법이 아닐까 한다. 살인자를 욕하면서도 마지막 희생자의 죽음을 기다리는 관객의 이중심리를 부추기는 심술 말이다. 관객을 공범으로 끌어 들이는 거다.
<데쓰 프루프>는 로베르토 로드리게즈라는 감독의 <플래닛 테러>(Planet Terror)를 연결해 만든 옴니버스 영화 <그라인드 하우스>Grind House) 일부란다. '그라인드 하우스'는 7,80년대 두 편의 영화를 동시 상영해주던 극장을 말한다고 한다. 아마 상영시간 때문에 한국에서는 <데쓰 프루프>를 떼어내 상영하는 모양이다.
(2007. 9.18) |
첫댓글 엑박인데요
그라인드하우스를 다 아시고 깜놀입니다. 이런쪽은 취향이 아니신걸로 아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