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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시민과 함께 떠난
익산 고대문화유산 2차 답사기
좋은정치시민넷에서 지난 10월 22일 익산 고대문화유산 2차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이번 답사는 단체에서 추진하고 있는 "익산 고대문화유산 답사 및 자원 활용방안"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입니다.
1차 답사는 지난 9월 24일에 다녀왔습니다.
이번 답사는 익산시청에서 출발하여 익산쌍릉, 익산토성, 고도리석불, 왕궁리유적, 쌍정리 선돌, 탑리 입석, 마당바위, 오래된 은행나무, 망모당, 함벽정, 진천송씨 우산정사를 답사하는 일정으로 진행되었으며, 답사지에 대한 해설은 지난 1차 답사 때와 같이 전창기위원(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이 해 주셨습니다.
답사 일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시민들이 평소에 가본 곳도 있고, 그렇지 않는 곳도 있을 것입니다. 이번 답사는 주변 가까이에 있지만 알 지 못했거나 가보지 않았던 곳을 찾아 가는 일정으로 계획하였습니다. 오래 전 부터 그 곳에 있어 지역 주민의 삶과 함께했던 역사 유적을 찾아 시민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오전 부터 날씨가 흐려 걱정을 하였지만,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하루내내 다녀야 하는 일정으로 힘들 수 있었을텐데 햇빛이 없어 피곤함을 덜어주었습니다.
다니는 길에 하얗게 피어있는 억새 꽃, 추수가 끝나지 않은 황금 들녘, 감나무에 노랗게 익어 주렁주렁 메달려 있는 감은 답사에 운치를 더해주었습니다.
쌍 릉
산업도로를 타고 익산 시내에서 금마 방향으로 가다가 팔봉 석왕동에서 왼쪽 방향으로 들어가면 쌍릉이 있다. 쌍릉은 사적 제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쌍릉에는 두개 큰 봉분이 있는데 북쪽에 있는 큰 무덤은 '대왕릉', 남쪽에 있는 작은 무덤은 소왕릉으로 부른다.
쌍릉은 2005년 열린 익산 쌍릉 관련 학술발표회 때 백제무왕과 왕비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발표되어 무왕릉과 무왕왕비의 릉이라고 부르고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익산군 '고적'조에는 "쌍릉은 오금사 봉우리 서쪽 수백보 되는 곳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곧 조선시대에 들어서 두 기의 왕릉이라는 의미에서 쌍릉이란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오늘날 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이 무덤은 고려 충숙왕 13년 왜구의 노략질로 인하여 여러 차례 도굴되었는데 1917년 일인학자에 의하여 발굴이 실시 되었다.
전창기 위원은 "쌍릉의 무덤 양식은 부여 능산리 무덤과 같이 굴식 돌방무덤이다. 돌로 집같이 쌓아 무덤을 만들고 그 속에 관을 안치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입구가 굴로되어 있어 도굴당하기 쉽게 되어 있다. 대왕릉 발굴조사 때 나무널이 발견되었는데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얼마전에 전주박물관 수장고에서 대왕릉에서 발굴된 이(치아)가 나왔다. 발굴된 유물을 정리하지 않고 보관해오다가 이제 찾은 것 같다. 이 이가 여자 것이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소왕릉에서 발견된 부장물은 없다. 백제 왕릉이 도굴된 것은 무덤양식이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나중에 합장을 위해 굴을 만들어 놓기 때문에 굴만 찾으면 쉽게 도굴을 할 수 있다.
쌍릉이 있는 지역을 '왕뫼'라고 부르는데 왕릉이 있는 곳을 뜻하는 것 같다. 신라는 도시에 왕족의 공동묘지를 만들었는데 백제는 외곽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쌍릉주변은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대왕릉에서 소왕릉으로 가는 소나무 숲도 걸을 만 하다. 주변도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어 산책을 하거나 야외 활동을 하기에 좋다.
익산은 무왕의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다 볼 수 있는 곳인데, 쌍릉은 무왕의 마지막인 무덤이라 할 수 있다.
익산토성
익산토성은 금마면의 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에 있는 오금산의 구릉상에 있다. 정상에 오르면 앞은 금마소재지와 그 앞에 있는 평야가 내다보이고 뒤에는 미륵산이 보인다. 익산토성은 산성인데 돌과 흙은 쌓아 만든 테메식 산성이다. 사적 제92호로 되어 있다.
다른 이름으로는 '오금산성', '보덕성'이라 부르는데, 오금산성은 백제 무왕이 어려서 이곳에서 마를 캐면서 오금을 얻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보덕성은 보덕국왕인 안승이 670년 6월 금마저에 자리 잡은 후 684년 11월까지 있었던 보덕국이 자리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고 한다.
익산토성은 전쟁이 발생했을 때 마을을 버리고 성으로 들어와 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성이라고 한다. 산성의 길이가 714m이고 성안의 면적도 얼마되지 않아 많은 사람이 생활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이 성의 축조시기는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로서 백제 무왕과 관련하여 쌓아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남문지, 수구지, 건물지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현재도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문화재 발굴조사를 하고 있다.
산성을 올라 정상으로 가다보면 표지석을 만날수 있는데 앞 쪽에는 '조선통독부', 뒤 쪽에는 '익산토성'이라고 쓰여 있다. 이 표지석을 보면 일제시대 때도 발굴조사를 한 것 같다.
익산토성 입구
익산토성 남문지
익산 토성 정상에 세워져 있는 표지석, 뒤 쪽에는 익산토성, 앞 쪽에는 조선총독부라고 새겨져 있다.
금마 토박이 식당
답사를 하다 점심 때가 되어 금마 향교 입구 옆에 있는 토박이 식당을 들렸다. 손님들이 많은 것을 보면 유명한 맛집인 것 같다. 고등어 조림을 시켰는데 다들 맛이 있다고 한다.
고도리 석불입상
금마면 소재지에서 남쪽(춘포 방향)으로 가다보면 들판에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두개의 석인상이 서 있다. 서쪽에 있는 석상은 남자이고, 동쪽에 있는 석상은 여자라고 한다. 남자 석상은 얼굴에 수염이 있다. 고려시대 것으로 보물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창기 위원은 " 고도리 석불입상을 여래입상이라고 부르는데 석상이라고 불러야 맞다고 본다. 석상의 어리에 관을 얹었으며, 밋밋한 모습에 다소곳 손을 모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머리에 관이 있는 석상은 부여 대조사 석불, 은진미륵 등이 있다. 두 석상 사이로 옥룡천이 흐르고 있어 평상시에는 만나지 못하고 섣달 그믐날 밤 자정에 옥룡천이 얼면 남녀석상이 만나서 1년 동안의 회포를 풀고 새벽닭이 울면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전설이 있다. 이 석상은 금마 초입에 세워진 수호신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두 석상 사이로 흐르고 있는 옥룡천에는 다리가 놓여 있다. 별 멋도 없는 다리지만 익산군 때 두 석상이 만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왕궁리 유적
왕궁리 유적은 1998년 사적 제408호로 지정된 유적이다. 2015년 7월 미륵사지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기도 하다.
백제시대에 궁궐로 사용되었으나, 후대에 사찰로 변했다가 폐허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사지와 제석사지, 익산토성 등이 있는 것으로 봐서 무왕의 왕궁이었다는 견해가 크다.
유적 안에는 국보 제289호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인 왕궁리 5층 석탑이 있고, 근처에는 유적지에서 발굴한 유
물들을 전시한 전시관이 있다. 왕궁리 5층 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는 국보123호로 지정되어 있다.
1989년 부터 현재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왕궁 담장과 건물지, 정원유적, 공방지, 화장실 유적 등이 발견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다양한 종류의 토기, 변기형토기, 기와류, 금제품, 동제품, 유리제품 등 다양하다.
왕궁리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이라 그런지 관광객들이 많이들 찾은 것 같다. 방문했을 때 주차장에는 관광버스가 여러대 있었고, 학생부터 성인들까지 팀별로 군데군데 모여 해설사 설명도 듣고, 사진도 찍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날 해설을 맡은 전창기위원의 근무지가 왕궁리 유적이라 특별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유물이 임시 보관되어 있는 전시실을 열어주어 관람도 하고, 설명까지 들을 수 있었다
왕궁리 유적은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석탑과 어우러지는 주변 경관을 찍기 위해 많은 사진작가가 찾는다.
왕궁리 유적에서 발견된 조경석, 석회암 재질로 거북바위 등 생긴 모양이 여러가지다. 석회암 층으로 되어 있는 천호산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춘포 쌍정리 선돌
쌍정리선돌은 춘포 쌍정리 입석마을 버스정류장 옆에 서 있다. 본래는 입석마을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1972년 새마을 운동으로 현 위치로 이전했다고 한다.
옆에 설명하는 간판이 새워져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이 선돌은 흑석부곡의 경계, 또는 우주현의 경계표라는 설과 민속신앙의 하나로 농사의 풍요를 상징하는 남근을 본 딴 것이라는 설 등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이 지역의 옛 지명이 입석리이고, 1872년 익산군 지도에도 현 지역이 입석으로 표기되어 전해진다."로 쓰여있다.
전창기위원은 "선돌이 아니라 당간지주라고 해야 한다. 홈이 두곳이 파여 있기 때문에 그렇게 봐야 한다. 지명이 입석리라 선돌이라 부르는 것 같다."고 설명한다.
춘
탑리 입석
왕궁탑리 돈 둑에 세워져 있는 선돌, 옆으로 50m 떨어진 하천 제방에도 또 한개의 선돌이 세워져 있다. 원래 이곳에는 자연석으로 된 선돌이 3개가 있었는데, 그 중하나를 주민이 집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전창기위원은 "선돌은 보통 물길이 지나는 곳에 세워두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그렇지 않다. 선돌은 마을을 수호하기 위해 세운다."라고 설명한다.
왕궁 마당바위
마당바위는 왕궁 장암마을에 있다. 장암이라는 이름도 이 바위 때문에 생긴 것이다. 장암마을은 선조 때의 문인 진천송씨 포옹 송영구가 은거한 곳이다. 지금은 송영구가 지은 누당인 망모당이 남아있다.
이 바위는 하천 옆에 있으며, 위로 대나무 뻗어 규모를 알 수 없지만, 규모가 매우 커서 예전에는 주민들이 이곳에서 고추 등을 말렸다고 한다.
왕궁 장암마을 오래된 은행나무
왕궁 장암마을에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 은행나무 안에서 대나무 자라고, 가지에는 꾸지뽕나무가 함께 자라고 있어 유명한데, 지금은 잡목과 풀이 우거져 들어가 볼 수 없다.
망 모 당
망모당은 왕궁 광암리 장암마을에 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조 때의 문인 송영구 선생이 은거하던 집의 후원에 있는 누당으로 1607년(선조40) 부친상을 당한 뒤 집의 후원 구릉에 이 누당을 지어 동쪽 우산에 모셔져 있는 조상들을 늘 망모하였다고 전한다.
포옹 송영구 선생은 성주목사, 청풍군수, 경상도 관찰사, 병조참판을 지낸바 있으며, 중국4대 문장가인 명나라 때의 주지번과의 일화가 유명하다. 전주객사 현판인 '풍패지관'과 이곳 망모당 현판도 주지번이 선조 때 명나라 황태손 탄생을 알리러 사신으로 왔다가 낙향해 장암마을에 은거해 있는 송영구 선생을 만나러 왔다가 쓴 것이다. 현재 망모당 현판은 모조품으로 진품은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송영구와 주지번의 관계는 주지번이 송영구의 사후 묘자리를 잡아 줄 정도다.
진천송씨 우산정사 및 선영안내도
진천송씨 우산정사
제사도 지내고, 종중회의 및 교육장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진천송씨 우산정사 내에 있는 소나무 '용솔'
소나무 아래에 있는 푯말에 "용이 여의주를 입에 넣고 삼킨 모양을 하고 있어 용솔이라고 함. 나이는 240~300년으로 추정. 일명 효자솔 - 소나무가 재실의 용마루를 넘지 않고 옆으로만 뻗은 모습이 마치 머리 숙여 절하고 있는 모습과 같다하여 효자솔이라고 함"이라고 쓰여있다.
우산정사 밖에 조성된 연꽃 밭
포옹 송영구 선생이 당시 명나라에서 백련을 최초로 가져오고 좋아했기에 유지를 계승코자 후손들이 연꽃 밭을 조성했다고 한다. 지금은 계절이 지나 다 시들어서 백련꽃을 볼 수 없지만 여름철에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
삼정승 소나무
포옹 송영구 선생의 며느리가 심은 소나무, 송영구 선생 며느리가 부안 변산에서 시집을 왔는데, 솔씨 3말을 가져와서 뿌렸다고 한다. 이 소나무는 유일하게 살아 남아 있는 소나무로 한나무에서 세개의 가지가 자라나서 삼정승 소나무라고 전해 내려온다. 소나무 아래 부분에 일제의 수난시 송진을 채취당한 흔적이 뚜렷하게
나마 있다.
완주 송영구 신도비(우산정사 밖에 있는 송영구 묘소 아래에 쪽에 있음)
송영구 신도비는 비석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로 지정되어 있다.
함벽정
답사 마지막 일정으로 함벽정을 들렸다. 함벽정은 왕궁보석박물관 왼쪽편 있는 산위에 있다. 산으로 나있는 길을 오르다 보면 함벽정을 볼 수 있다.
함벽정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건물은 1920년 왕궁저수지의 제방이 완성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 곳 출신인 송병우가 사재를 들여 건립을 하였다고 한다. 팔작 형태의 정자로 규모가 크다.
함벽정으로 오르는 산속 나무 사이사이에 구절초가 피어 있어 경치도 좋고 향기도 그윽하다. 길 아래에 있는 두채의 기와 지붕 건물은 옛스러움의 정취까지 더해준다.
사진 촬영, 글 정리 : 손문선
해설사 : 전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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