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신웅순의 유묵이야기
창암 이삼만 글씨 2
석야 신 웅 순
창암 이삼만은 추사 김정희, 눌인 조광진과 함께 19세기 조선의 대표적 명필가이다. 최고의 명필가 원교 이광사를 사숙, 동국진체를 이은 창암은 어려서부터 오로지 글씨에 뜻을 두고 혹독한 수련 끝에 마침내 서예가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동국진체를 완성하고 창암체를 개발, 자신만의 필법, 유수체를 구축했다.
그는 벼루 세 개가 닳아 없어질 정도로 먹을 갈아 하루에 1천자씩 쓰고, 베를 빨아 글씨 쓰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추사는 1848년 12월 6일 제주 유배에서 풀려났다. 8년 3개월만이다. 추사는 서울 가는 길에 전주의 창암 이삼만을 찾았다. 창암은 이미 3년 전 고인이 되어있었다.
창암 제자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추사는 주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그때 대감께서 평하고 돌아간 뒤 우리 선생은 대감을 좀 서운해하면서 조선 붓의 거친 듯 천연스런 맛은 모른다고 하셨어요. 그런데도 대감의 말씀 중 이 말은 서가라면 반드시 새겨야할 필결이 라며 제게 써주신 것이 있답니다.”
“글씨는 한나라·위나라를 모범으로 삼아야지 진나라를 따르면 예뻐지기만 할까 두렵다.’
1840년 가을, 55세인 추사는 제주 귀양길에 전주 객사에서 창암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때 추사가 창암의 글씨를 혹평한 적이 있었다.
“노인장께서는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추사의 객기였는지 모르나 내심은 글씨를 보고 감탄한 것이리라.
그런 연유로 추사는 미안하기도 하고 사과 겸 전주를 들렀으나 그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명필창암완산이공삼만지묘(名筆蒼巖完山李公三晩之墓)’라는 묘비 글씨를 써주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묘문을 썼다고 한다.
(이 비석은 지금도 완주군 구이면 창암 묘소 앞에 있다.)
“여기 한 생을 글씨를 위해 살다간 어질고 위대한 서가가 누워 있으니, 후생들아, 감히 이 무덤을 훼손하지 말지어다.”
이런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1840년 가을, 55세인 추사가 제주도 귀양길에 전주를 지나게 되면서 한벽루에서 창암과 만나게 된다. 창암에 대한 소문을 들은 추사가 정중히 예를 갖춰 하필을 청하니 “붓을 잡은 지 30년이 되었으나 자획을 알지 못한다(操筆三十年 不知字劃)”며 겸손하게 사양했다. 추사가 다시 간곡히 청하자 ‘강물이 푸르니 새 더욱 희고/ 산이 푸르니 꽃은 더욱 붉어라/ 이 봄 또 객지에서 보내니/ 어느 날에나 고향에 돌아가리(江碧鳥遊白/山靑花欲然/今春看又過/何日是歸年)’라는 시 구절을 일필휘지했다. 추사는 이를 보자 ‘과연 소문대로이십니다(名不虛傳)”이라며 감탄했다.
추사가 청나라 선진 문물을 수용했다면 창암은 혹독한 자기 수련으로 공부했다. 추사가 개혁적 유학파였다면, 창암은 조선 고유한 국내파였다.
50세에 ‘규환’이라는 이름을 ‘삼만’으로 바꾸었다. ‘삼만(三晩)’은 집이 가난해 글공부를 늦게 하고, 벗을 사귀는 것이 늦어 사회 진출이 늦었고, 장가를 늦게 들어 자손이 늦었다는, 인생에서 중요한 세가지가 늦었다는 의미다.
- 출처 : 한국문학신문,2014.6.4.
창암 이삼만의 편액들(3)
석야 신웅순
창암이 쓴 ‘삼가헌’ 편액
추사 김정희, 눌인 조광진과 함께 19세기를 대표하는 명필 창암 이삼만(1770-1845)의 삼가헌 휘호 편액이 대구 달성의 순천박씨 집성촌인 박팽년 후손 고택 ‘삼가헌(三可軒)’에 걸려 있다.
박팽년은 단종의 복위 사건으로 아버지, 동생, 세살 짜리 아들까지 사형당했다. 이 때 부인은 임신 중이었다. 조정에서는 아들을 낳거든 즉시 사형시키라고 명령했다. 때마침 종도 임신 중이었다.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해산을 했다. 약속한 듯이 주인은 사내 아이를 낳고 종은 딸 아이를 낳았다. 종은 자기 아이와 부인의 아이를 바꿔치기 했다. 박팽년의 사내 아이를 자기 아이로 키운 것이다. 성종 대에 이르러 이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성종은 이를 사면해주고 ‘일산’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해 주었다. 이 때문에 사육신 중 박팽년만이 대를 이을 수 있었다. 부인 이씨는 관비가 되어 평생을 수절하여 일생을 마쳤다.
경북 달성군 하빈면 묘골 마을에는 지금도 박팽년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신웅순,시조는 역사를 말한다,푸른사상)
이 묘골에 살던, 박팽년의 11대손으로 이조참판을 지낸 삼가헌 박성수(1735~1810)가 1769년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초가를 짓고, 당호를 호인 ‘삼가헌’으로 삼았다. 당시에는 초가였던 것을 현재와 같은 모습의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하게 된 것은 그의 아들인 광석이 1826년 아버지가 지은 초가를 허물고 새로 지으면서부터이다.
그 편액을 창암 이삼만이 썼다. 대구 경북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창암의 편액이 이곳에 걸려있어 추측만 할 뿐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삼가헌 박성수가 서울에서 벼슬을 할 때 당시 명필로 알려진 창암의 글씨를 좋아해 지인을 통 해 글씨를 청탁해 받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박성수가 삼가헌에 머물 때 많은 선비와 서예가 들이 오갔을 것이고, 창암도 삼가헌에 한 번 들렀다가 휘호했을지도 모른다. 삼가헌에 살고 있는, 박팽년 후손 박도덕씨와 나눈 이야기다. 창암의 생몰 연대로 보아 박광석이 사랑채를 새로 지은 후 창암 글씨를 받아 편액을 달았을 지도 모르겠다.(영남일보 2013.9.4. 김봉규,이야기가 있는 옛 현판을 찾아서 ·22)
‘삼가헌’이란 당호는 ‘중용’의 글귀에서 따왔다. ‘공자가 이르기를 천하의 국가도 고루 다스릴 수 있고, 관직과 녹봉도 사양할 수 있으며, 날카로운 칼날을 밟을 수도 있지만 중용은 불가능하다(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 여기서 유래한 ‘삼가(三可)’는 선비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덕목(知, 仁, 勇)을 뜻한다.
창암 이삼만의 ‘가허루’ 편액
대흥사의 가허루는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에 있는 대흥사 남원의 출입문이다. 단층 5칸의 맞배집으로 천불전에 들어가는 대문채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창암 이삼만의 ‘보제루’ 편액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70번지 천은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지리산 천은사에 있는 일종의 강당 건물이다.
천은사의 요사체 건물 ‘회승당’ 편액
외에 전주 송광사의 ‘명부전’,
곡성 태안사의 ‘배알문’,
하동이 칠불암 편액,
강화 전등사 대조루 안의 ’원통각‘,
공주 동학사의 ’동학사‘,
금산 보석사의 ’대웅전‘,
밀양 표충사의 ’원통당‘,
송광사의 ’육감정‘ 등 도처에 많은 그의 편액들이 남아 있다.
또한 정읍 부무실의 유필 각자 ‘石潭’을 비롯
전주 옥류동, 현 교동의 월당지반 바위의 `취리건곤 한중일월(醉裡乾坤 閑中日月)'과
옥류동 고개 바위에 새긴 `연비어약(鳶飛魚躍)',
남원의 구룡계곡 2곡 ‘용호석문’ 등의 각자가 남아있다.
‘故名唱沈女之墓’의 묘비석이 남아있었으나 유실되었다. 명창 심녀는 창암이 정읍 부무실 시절의 30세에 만나 60여세까지 운우지정을 나눈 여인이다. 그 묘비문에는 일찍 죽은 명창 심녀와의 애틋한 기록이 있어 창암의 인간적인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그의 묘비문이다.
‘이 여인의 성은 정씨이고 첫지아비는 심씨이다. 음율을 잘 하였으므로 그로 인하여 사람들이 그 녀를 심씨라고 불렀다. 나를 쫒아 30년 동안 함께 문필로 교유하였으며 더욱이 나로 하여금 능히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을축년 4월 10일 병으로 돌아가매 나의 선산 아래 길가에 장사지내어 주 고 몇 자 돌에 새기어 잊지 않고자 한다. 훼상이 없을진저.’
숭전기원후 4번째 기축년 월일 이삼만 짓고 쓰다.(http://blog.daum.net/gijuzzang/8515770)
그의 묘는 2000년대 ‘창암후실정씨지묘’ 묘비와 함께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아랫잣골 창암 부부 함봉 옆으로 이장했다.
정씨 죽음을 전후해 창암은 완주군 상관면 공기골에 거주하며 죽을 때까지 자연에 귀의 탈속하여 그의 글씨가 ‘逸雲無跡得筆天然’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 주간 한국신문. 2015.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