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6한국수필/수필DJ/한수산의 ‘무엇을 사랑하랴 그대여’
[수필DJ] ①
DJ(디스크자키Disk Jockey)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곡명을 소개하고 곡이나 아티스트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진행자로 음악을 즉흥적으로 선곡하고 믹스하여 자신만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호흡하고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인 것처럼 [수필 DJ]란은 내가 읽었던 수필이나 독자가 읽고 싶어 할 수필을 나름의 적당한 해설을 덧붙여 소개하는 난입니다. 따라서 작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올 수도 있고 원작과 다른 느낌이 말해질 수도 있지만 그 또한 다양한 독자의 시각에서 작품을 바라보자는 의도입니다. 새로운 시도인 만큼 많은 성원과 좋은 의견도 부탁합니다.
오늘 그대는 무엇을 사랑하시나요?
최원현
nulsaem@hanmail.net
딸에게서 편지를 받은 것은, 그 애가 다섯 살 때였다. 집으로 올라오는 우편물이 많은 편이어서일까. 그 편지들마다에 적혀있는 아버지의 주소와 이름을 보며, 딸아이는 자기도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나 보았다.
일 층, 이 층, 그런 층의 구분이 분명치 않게 우리 집은 계단이 많다. 그땐 밑이 딸아이의 방이고, 내 서재는 맨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딸아이는 맨 끝 자기 방에서 맨 위의 내 방으로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자신이 만든 봉투에 집으로 온 편지 중에서 우표를 하나 뜯어서 붙이고, 봉투의 앞뒤에는 보낸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주소가 똑같은 편지였다.
<작가 한수산 아빠에게. 아빠 안녕. 나도 안녕. 끝.>
그것이 편지의 전부였다. 딸이 보낸 첫 편지였다.
어느 날 외출을 했다가 돌아와 내 책상 위에 슬며시 놓여있는 이 편지를 보면서... 처음에는 후후하며 웃다가, 문득 생각했었다. 한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역시 혼자 선다는 것이로구나. 그리고 그것은 이미 있어온 공간을 떠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로구나. 편지를 쓴 딸의 세계와 그것을 받은 나의 세계는, 딸과 아버지의 관계가 아닌 대등한 만남이 아닌가.
이렇게 시작된 딸의 편지를 나는 이따금 받는다.
『낙엽 한잎도 당신 뜻으로』(중앙일보사.1986) 중 한수산의 수필 <무엇을 사랑하랴, 그대여> 에서
나는 오래 된 책을 좋아한다. 그 책에서 나는 오래된 종이 냄새도 좋아한다. 그리고 누렇게 변한 책장 하나하나에서 내게로 향해지는 활자들의 눈빛을 좋아한다. 특히 책을 펼쳐서 빛이 들어가 바래진 부분이 색깔을 입힌 것처럼 더 누래져 있는 그 색감마저도 좋아한다.
이사한지 2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도 익숙지 못한 책들의 자리를 오늘도 서성이다가 한 책의 제목에 눈이 멈춰졌다. 『낙엽 한 잎도 당신 뜻으로』, 무언가 내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은 제목 앞에서 책을 꺼내 펼쳤다. 아, 이 책?
당시 한참 잘 나가던 작가들의 에세이를 모아 잡지의 별책부록으로 내던 때였다. 이 책 또한 그런 종류의 책이었다. ‘젊은 여성에게 주는 지성 12인의 대표에세이집’이란 부제가 붙어있는 책이다. 당시 잘 나가는 작가가 누구였을까. 바로 여기 작품을 수록한 12명이었다. 강은교·김남조·김동길·김형석·김후란·박범신·안병욱·유안진·이시형·조병화·한수산·허영자다. 그러고 보니 강은교 김남조 김후란 유안진 조병화 허영자가 다 시인이다. 박범신 한수산은 소설가. 김동길 김형석 안병욱도 베스트셀러 에세이집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시형은 정신과 의사로서 역시 베스트셀러 에세이스트였다. 시인 소설가 철학자 의사가 쓴 수필들이 한 시대의 독자를 사로잡았다. 당시 중앙일보사가 펴내던 여성잡지인《영레이디》1986년 11월호 특별별책부록인데 세모를 겨냥한 잡지의 판매 전략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 때의 제목들은 하나같이 시적 운율을 지닌 긴 것들이었다. 이 책에서만도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강은교), 영혼의 추위를 앓는 이들에게(김남조), 아름다운 성숙을 기대하며(김후란),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박범신), 이별, 그리고 아베마리아를 생각하며(유안진), 비밀, 아름다운 인생의 보석(조병화), 무엇을 사랑하랴, 그대여(한수산), 저 시간에 영원의 은총을(허영자) 등 지극히 감성을 자극하는 것들이었다. 물론‘젊은 여성에게’라는 대상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시절 모두가 그런 분위기에 한껏 젖어있었고 그런 분위기를 좋아했던 때문이기도 했다.
목차를 펼쳐 제목들을 훑어가다 한수산의 한 제목이 나를 붙잡았다.‘무엇을 사랑하랴, 그대여’, 그가 내게 묻는 게 아니라 내가 내게 묻는 것 같았다. 페이지를 찾아 책장을 열었다. 첫 문장에서 그는 오래 전 딸아이의 편지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내가 발췌해 낸 그 부분이다. 한수산은 1946년생이다. 그리고 이 책이 출간 된 게 1986년 11월이다. 그러면 마흔 살에 다섯 살 짜리 딸아이에 대해 쓴 글이다.
한수산은 26살 때인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4월의 끝>이 당선되어 소설가가 되었다. 그리고 77년 <부초>로 제1회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며 유명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작가로 한수산만큼 곤욕을 많이 치른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일명 한수산 필화사건이라 불렸던 1980년대 초의 그를 많은 사람들이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가 근무지를 옮길 때마다 이사를 다녀 어린 시절에 2년 이상 한곳에 머물러 살지 못했다. 때문에 자신의 아이들에겐 결코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겠다 했지만 시대가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는 필화사건으로 국내에서의 창작 작업에 회의를 느껴 1988년 일본으로 갔다. 고국을 떠나는 아픔까지 겪으며 오랜 기간 일본에서 생활을 해야만 했던 그가 고국에 돌아와서도 제주 등 여러 곳에서 살았다.
나는 한수산의 꾸밈없는 듯한 문장과 자연스런 스토리들이 좋다. 특유의 감각적이고 유려한 문체로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그의 문장들에선 삶의 냄새가 그대로 묻어난다. 그러나 문장 속에서 느껴지는 그는 한없이 여리다.
그런 그에게 사랑은 무얼까.
<한수산의 자작나무 아래서>라는 연제 글 속에 ‘아이스크림을 어떻게 드시나요’란 게 있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이 정확히 둘로 나뉜다고 했다.
‘한 집안에서도 이 모습은 정확히 둘로 갈린다. 한 가족이면서도 누군가는 푹푹 퍼먹는데 누군가는 한 번 떠먹고 그 자리를 가지런하게 메워가면서 먹는다. 연로한 부모를 모시고 있는 분이라면 한 번쯤 집에서 이 실험 아닌 실험을 해봐도 좋다. 젊은 사람일수록 푹푹 퍼먹는 족이고 나이든 사람일수록 퍼먹은 자리를 고르게 메워가면서 퍼먹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한수산이 사랑하는 방법이 아닐까싶기도 하다. 파내진 자리를 원상대로 메꾸지 않고는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는 사람, 그건 겪어 본 자만이 느끼는 아픔이다.
1981년 국가보안사령부에 의해 온갖 고문의 처절한 가혹행위를 겪고 풀려났던 그, 몸도 마음도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졌다던 그, 그는 그런 그에게 딸이 있었음이 희망이었을 수 있다. 그 달이 절망적 그의 삶에 한가닥 희망의 끈이 되었을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딸아 고마웠다. 네가 있어주어 고마웠다.”(30년만의 이호바닷가 중)고 고백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그 딸에게‘감동이 있는 나날을 살아라’고 했다.
사랑이 있어야 감동도 있다. 다섯 살짜리 딸아이로부터 첫 편지를 받았던 한수산의 가슴이 얼마나 콩콩 뛰었을 지가 눈에 선하다. “아빠 안녕. 나도 안녕. 끝” 그리고 딸아이가 불러준 작가, 한수산, 아빠, 이 세 단어가 주는 공명은 그의 전신을 울리고 또 흔들었으리라.
오랜만에 펼쳐 본 이 책에서 만나는 이름마다 하나같이 나를 감격케 한다. 1986년에 이 책이 나왔는데 그 1986년은 어떤 해였을까.
1986년 1월에 미국에서 챌린저 우주왕복선이 폭발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런가 하면 4월에는 소련에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4호기가 사고로 폭발하여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다. 우리나라에선 5.3 인천사태가 일어났고, 7월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발생했고, 9월엔 아시안게임 개막을 앞두고 김포공항에서 폭발물 테러가 발생하는가 하면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첫 희생자가 나오기도 했다. 11월엔 북한 금강산댐 건설에 대응할 평화의 댐 건설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때 나온 에세이집이기에 더더욱 사람들의 마음은 제목 하나, 단어 하나에도 민감할 수 있었다. 다행히 아시안게임이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내 아이들의 벙어리저금통까지 통째로 평화의 댐 건설에 보내졌다. 전 세계적 이런 불안기였으니 우리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그래서 무언가 희망의 끈이 필요했고 우린 연약한 인간의 힘이 아닌 절대적인 힘이 필요했을 수 있다. 그러자니 우선 현실인식부터 내 의지보단 다른 큰 어떤 힘의 작용으로 거역 못할 새로운 변화의 기대가 필요했을 것이다.
<낙엽 한 잎도 당신 뜻으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냥 되는 게 아니라 예정과 섭리 속에 진행된다는 절대의존의 생각으로 위로 받고 싶었을까. 그러나 나는 어떤 크고 거창한 것보다도 아주 작고 하찮아 보일 만큼 흔한 것들을 통해 진실을 보고 또 품고 싶다. 그렇다면 아빠와 어린 딸, 그 딸과 아빠,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교감만큼 진실 할 수 있을까. 그보다 더 살가운 사랑이 있을 수 있을까. 다섯 살 딸아이에게 보여진 작가라는 우주, 한수산이라는 우주, 아빠라는 우주는 심층적으로 다가온 세 개의 우주이면서 그 세 개의 우주를 하나로 통괄하며 품고 있는 대우주로서의 ‘아빠인 작가 한수산’은 수많은 고통과 절망의 협곡과 산을 넘어온 지성인이지만 딸에게는 더더욱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무한한 책임감의 무게로 다가왔을 것이다.
문학은 특히 수필은 이처럼 광활한 대우주를 지극히 작은 풀꽃으로 미시적으로 보게 하는 힘이 있고, 아이의 눈으로 본 작은 우주가 거대하게 거시적으로 전 세계인의 눈빛을 모은 열망이 될 수도 있게 한다.
‘12인 지성인 대표에세이집’『낙엽 한 잎도 당신 뜻으로』 그리고 한수산의 <무엇을 사랑하랴, 그대여>는 30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이 시대 우리 삶에도 크게 그리고 아름답게 마음 속 불을 켜주고 있다.
최원현
수필가·문학평론가.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강남문인협회 회장. 사)한국수필가협회 사무처장. 사)한국문인협회·사)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현석김병규수필문학상·월간문학상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등 13권. 중학교 교과서《국어1》《도덕2》및 여러 교재에 수필 작품이 실려 있다.